어떤 생활이든 일정한 규칙을 만들어야지 지속할 수 있다. 문제는 내가 어떤 규칙이든 아주 작고 사소한 것조차 스트레스로 여기고 거기에 사로잡혀 버린다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나는 색연필은 물론 식탁 의자조차 정해진 물건이 정해진 자리에 그대로 놓여있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고 고쳐놔야 했다. 내가 색연필이나 색깔 펜 세트의 케이스를 버릴 수 있는 물건이라고 인식하게 된 건 성인이 된 이후의 일이다. 나는 그걸 버리고 새로운 용기에 담아 재배열한다는 것 자체를 상상할 수 없었다.

당연하지만 누가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준 건 아니다. 뭔가 내가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인식하게 될만한 계기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아마 그보다는 천성일 것이다.

당시의 내 생각을 지금의 내가 설명해봐야 어떻게 표현해도 정확하지 않겠지만, 당시에는 어떤 것이 이렇게 생긴 것(생겨난 모습)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이므로 그 용도 그대로 간직해주어야 본래 주어진 바 역할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듯 하다. 흔하게 접하는 가치관이긴 하나 정도가 심했다. 어기면 안 돼가 아니라 그렇지 않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고 여겼으니까. 어린 시절 내가 종교에 빠졌던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범생이 흔히 빠지는 함정에 빠졌던 셈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세상도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언제나 정도다. 가치관이 바뀌어 융통성이 생겼지만, 그건 지켜야할 규칙을 줄여 상황에 맞게 운용할 수 있는 여유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정해진 규칙에 타협이 없다.

현재의 나는 내 안의 규칙과 세상의 규칙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았지만 동시에 양립할 수 없는 함정에 빠져있다.

나는 규칙을 지키는 행위가 너무 힘겹다. 일정한 생활 리듬을 지키는 것만으로 지칠 정도다. 어째서, 어쩌다가,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다. 단순히 일반 사회를 벗어나 사회성이 퇴화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 오래된 피로다. 자각한 건 고등학생 때지만 이미 열다섯살 무렵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인과를 따지자면 피로가 과해 일정한 리듬으로 돌아가는 일반 사회에 끼는 게 힘들어진 게 맞다.

그러면서 웃기게도 반드시 이것만큼은 어겨선 안 된다고 정해놓은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지켜지지 않으면 자신을 책망한 나머지 정신 에너지가 고갈된다. 곧잘 의욕을 잃어버리는 건 내 정신력이 약해서가 아니고 자책이 심해서다. 이렇게 할 바에는 하지 않는 게 낫다는 생각에 이르기 때문이다.

잘 지켜져도 힘들고 지켜지지 않아도 힘든 상황에서 나는 대체 뭘 어떻게 해야할까. 뭔가 하나는 놔야하는데 어떻게 해야 놓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놓지 않는다면 타협점을 찾아야한다. 그것도 모르겠다. 아무리 고리를 늘려서 대처할 수 있도록 여유를 만들어도 이 연쇄가 끊어지지 않는다. 다소 한계가 느리게 찾아오게 되었을 뿐이다. 턴이 느려졌어도 한계는 있고 그 순간이 오면 간신히 잡았다고 생각한 평범한 하루가 손쉽게 망가진다.

피곤하다. 내가 기억하는 한 언제나 그래왔듯이 죽으면 편하겠다는 결론만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돈다. 불행하게도 사람은 죽고 싶다는 생각만으로는 절대 죽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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