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교사 히트맨 리본/로쿠도 무쿠로 드림
드림주 이름, 설정 없습니다. 배경은 10년 후 입니다.

15.02.23 티스토리에 발행되었습니다.





제 첫사랑은 중학교 때였습니다. 첫사랑이라고는 하지만 얼굴과 이름을 알고, 지나가다 몇 번 스쳐지나갔을 뿐 단 한 번도 말을 섞어본 적도, 시선조차 엮여본 적이 없습니다. 이름을 알게 된 것도 우연에 가까웠습니다. 그 당시부터 줄곧 생각했던 것이지만, 저는 대체 어떤 이유로 그 사람에게 반한 것일까요.



여행은 즐겁다. 비록 해외여행은 돈이 엄청 깨지는데다 이곳에 와서 소매치기까지 당할 뻔 했지만, 그것들을 제외하면 당연하리만치 즐겁다. 방금 전에 끝내주는 젤라또를 먹었더니 즐거움은 한껏 더 커진 상태였다. 여행 일정으로는 내일 두오모에 오르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탈리아와는 작별하게 된다. 즐거웠는데 떠날 생각을 하니 금세 아쉬워져서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눈동자를 굴려댔다.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떨쳐내기 위해 관광객답게 이리저리 시선을 주며 구경하는데 시야의 끄트머리에 기묘한 익숙함을 느꼈다. 소름이 돋는 이상한 감각이 느껴져 재빨리 그 방향으로 고개를 틀자, 기억 너머에 잊혀졌던 사람이 보였다.

예전과 달리 머리가 더 길어졌지만, 독특한 가르마와 삐죽 솟은 머리는 여전했다. 양쪽 색이 다른 것은 물론이요, 글자가 새겨진 다른 눈동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억 속 교복과 달리 가죽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고 있었지만, 완벽한 그 사람이었다. 기억 속에서 바래져가던 첫사랑.

그 첫사랑을 이탈리아에서 다시 만난 것이었다.

우연? 당연히 우연이겠지.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하기엔 첫사랑의 감정이 너무 희박했다. 가장 무난하고 당연한 것이 우연이다. 우연따윈 없다는 말은, 적어도 내게 있어선 가까운 말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는 한번도 생각나본 적이 없었는데, 눈 앞에서 그를 보고 나니 그 시절의 기분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당시 용기를 내어 그에게 묻지 못한 것마저 떠올라서, 나는 나도 모르게 그가 있는 곳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우앗!"


아무 것도 없는 길거리에서 내 다리에 걸려 넘어진 것이 얼마만인지, 유치원 이후 처음 겪는 일이다. 창피함보다는 고통이 먼저 찾아와 바닥과 급한 만남을 가진 무릎이 욱신거리며 아파왔다. 이래서 사람은 조급해하면 안된다는 건가보다.


"쿠후후, 웃긴 꼴이군요."


그건 인정하지만 처음 보는 사람에게, 웃는 낯으로 저런 소리를 하다니, 기본적인 예의란 것을 모르는 사람인가. 당혹감에 시선을 올리자, 줄곧 구경하고 있었는지 거리낌없이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순간적인 당황스러움으로 얼굴이 붉게 물들어갔다. 이젠 고통보다 창피함이 먼저다. 이런 꼴을 보이고 멀쩡하게 질문을 던지기엔 마음이 바스라질 것 같았기에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한숨을 내쉬고 무릎을 매만지고 있자니 누군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놀랍게도 그 사람이었다.


"창피해서 못 일어나는 겁니까?"


정답이긴 한데 그런걸 면전에 대고 얘기하면 더 창피해서 일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것보다 이 남자, 정말로 무례하기 짝이 없다. 뭐 이런 남자가 다 있담?!하고 외치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그의 무례함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한번도 그런 모습을 본 적도, 그런 언행을 들은 적도 없는데도 그랬다. 그러다가 문득, 어렴풋이 중학교 시절 그런것을 예감했던 것이 생각났다. 이유따위 지금에 와서는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그에 대한 이런저런 추측을 하다가 나왔겠거니 생각했다. 그는 왠지 이런 무례함이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오야, 이건 필요없습니까?"


넋이 나간 채로 있었기 때문에 그의 목소리를 듣고 번뜩 정신을 차렸다. 넘어지면서 떨어뜨린 것으로 보이는 지갑이 그에게 들려 있었다. 그는 얌전하게 내 손에 지갑을 쥐어주고는 등을 돌려 제 갈길을 가기 시작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도와준 사람이다. 인사 정도는 해야지, 하고 그를 불러 세우며 팔을 잡았다. 그런데 정작 그의 얼굴을 보니 고맙다는 말 대신에 뜬금없기 짝이 없는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저기, 죄송한데 이름... 이름을 가르쳐줄래요?"


거리낌없이 상대를 비웃을 수 있는 사람이라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어떤 반응이 올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쿨하게 무시하고 떠날 것인지, 비참함이 느껴질 정도로 굵고 짧은 비웃음을 선사하고 떠날 것인지, 혹은 독설을 한다던가. 더 무서운 예상을 하고 있자니 어느새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 그의 목소리가 나의 손끝을 진정시켜주었다.


"로쿠도 무쿠로."


가르쳐줄 것이라고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내뱉어주었다. 아까 자신에게 창피함을 안겨주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웃는 얼굴로 말해주었다. 그 모습은 비웃음이라기엔 어딘가 마음을 감싸는 그런 웃음이었다. 나는 다시 넋을 놓았다.

이후 그의 이름을 듣고 내가 어떤 행동을 취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작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으리라 추측만 할 뿐.

이미 사라진 그의 뒷모습을 계속 곱씹으며, 동시에 그의 이름도 중얼거렸다. 중학교 시절, 내가 알고 있던 그의 이름은 '무쿠로'뿐이었다. 로쿠도 무쿠로. 그의 완전한 이름을 곱씹었다.


"로쿠도 무쿠로."


그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고 나자, 한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참으로 어이없게 지금에 와서 깨달아버린 것이다. 단순한 첫사랑으로 끝난 것이 아닌 것을.

로쿠도 무쿠로. 중학교 시절의 스쳐가고, 사그라들었던 첫사랑. 그리고 지금 다시 불이 붙은 사랑.

나는 첫사랑에게 다시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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