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순간을 스치고 3

W. 스킨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아니야... 그거 아니야. 박지훈은 아침마다 부정했다. 세상 모든 게 다 적응돼도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만은 예외일 것이다. 알람이 울릴 때마다 이놈의 핸드폰을 박살내버릴까 심각한 내적갈등에 빠졌다. 실행엔 옮기지 못하고 있는 걸 보면 일찍 가고 싶긴 한가 보다...싶은 게 요즘 박지훈의 마음.


아침마다 심한 내적갈등을 겪긴 해도 이른 등교는 매번 성공했다. 일찍 가야겠다 맘먹은 후로 쭉. 그러면서 새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강다니엘은 젤리를 좋아했다. 박지훈이 좀 느슨해진 후론 강다니엘이 먼저 와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때 자기 자리에 앉아 젤리 옴뇸뇸 먹고 있는 걸 여러 번 봤다. 그 큰 손으로 작은 젤리나 집어먹고 있는 게 상당히 귀여웠다. 처음 목격했을 땐 민망해할까 봐 못 본 체했다. 일부러 인기척을 내며 젤리 정리할 시간도 제공해줬다. 당연히 민망해 할 줄 알고 그랬다. 이거 존맛이야, 라며 말랑곰을 건네줄 줄은 몰랐지. 고맙다고 공손히 받으면서 박지훈은 씰룩이는 입꼬리를 감추느라 애썼다. 얘 존나... 존나 귀엽네 씨발. 강다니엘이 나눠준 젤리는 진짜로 존맛이었다. 사람 심리가 미각에도 영향을 주나? 그렇다면 그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맞다 나 향수 이거.”


친절하고 다정한 강다니엘은 직접 향수 사진을 찍어와 보여줬다. 박지훈은 어쩔 수 없이 감동을 먹었는데 티는 안 냈다. 꾸역꾸역 눌렀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 향수 이름은 열심히 외워뒀다. 교실 가서 몰래 쳐보려고. 나중에 혼자 검색해보자마자 창을 닫았다. 뭔 놈의 향수 가격이... 나참. 더럽게 비싸네. 강다니엘의 매력이 한 가지 더 추가됐다.


공통 관심사가 있다는 건 참 좋았다. 그 덕에 종종 쉬는시간에 마주 앉아 모바일 게임도 했다. 그때마다 주변에 서너 명씩 더 있긴 했다. 뭐 어쨌든 상관없었다. 같이 뭔가를 한다는 게 포인트였다. 수업시간에도 같이 하고 싶어서 슬쩍 떠봤는데 그건 칼 같이 거절당했다. 아 맞다 공부 잘한댔지. 더는 묻지 않고 수긍했다. 박지훈에게는 언제든 강다니엘이 가능할 때 시간 맞춰 접속할 의향이 있었다. 결국 게임을 빌미로 번호까지 따냈다. 남몰래 생각만 하다가 드디어 이뤄진 일이었다.


박지훈 딴에는 되게 많이 긴장하고 두근거리면서 건넨 말이었는데 그 애는 아무렇지 않게 번호를 찍어줬다. 그대로 통화버튼을 누르려는 걸 막고 강다니엘 핸드폰에 직접 번호를 눌렀다. 다른 건 아니고 강다니엘 핸드폰 배경화면이 궁금해서 그랬다. ...좀 스토커 같나. 어쩔 수 없다. 궁금한 건 알고 살아야 해. 아 배경화면은 아무것도 없는 까만 바탕이었다. 딱 지 같구 멋있었다.


강다니엘. 아니... 다니엘?


풀네임으로 저장하려다 뭔가 정없어 보여 성을 뗐다. 카톡엔 강다니엘 네 자가 새로 떴다. 아직은 낯설다. 그러면서도 들뜨는 기분. 프사는 고양이였다. 종이 치는 바람에 물어볼 타이밍을 놓쳤다. 다음 쉬는시간에 물어봐야지, 싶었는데 이미 들떠버린 마음에 박지훈의 손이 멋대로 움직였다.


                                                 [고양이 키워?]


[강다니엘: 내 고양이는 아니고]
[강다니엘: 아는 사람 야옹이ㅋㅋ]
[강다니엘: 귀엽지]


예상 외로 답장이 금방 왔다. 읽자마자 니가더귀여워시발, 까지 쳤다가 바로 지웠다. 언젠가 이성을 잃어 이런 속마음을 들킬 날이 올까 봐 무섭다. 박지훈은 침착하게 한 자 한 자 정성들여 눌렀다.


응 귀엽다.
...너무 딱딱한가?
지워.


응응 귀엽다.
...응 두 개는 좀 과하지?
지워.


웅 너무 귀엽다ㅠㅠ
이런 반응 보이기엔 나 고양이 별로 안 좋아하는데...
지워.


고민의 시간이 너무 길었던 모양이다. 결국 보낸 건 ‘응 진짜 귀엽다ㅋㅋㅋ’ 였고 수업 집중에 들어갔는지 한참이나 오지 않던 답장은 다음 쉬는시간 읽씹으로 마무리됐다. 복도만 나가면 볼 수 있는데 카톡 이어가는 것도 웃기지. 박지훈은 기분이 좋았다. 어찌됐든 강다니엘과의 첫 카톡이었다. 카톡 말투는 어떨지 프사는 무엇일지 궁금했는데 소원 성취했다. 점점 별게 다 궁금해지는 박지훈이다.


강다니엘과 친해지며 또 하나 알게 된 새로운 사실. 강다니엘은 스킨십이 많고, 능했고, 자연스러웠다. 한마디로 그냥 스킨십을 잘했다. 혼자 입 닫고 가만 있을 때면 말 한마디 못 걸게 생긴 놈이 친한 사람만 오면 금세 순딩이 강아지가 돼서는 몸을 치댔다. 그렇다고 모두에게 그런 것 같진 않았다. 꽤 친해 보이는 반 친구들 중에서도 스킨십을 하는 애가 있고 하지 않는 애가 있었다. 아마 본인이 편하다고 느끼는 사람에 한해서 그런 것 같다, 고 박지훈은 혼자 정의하며 나도 저 애의 편한 사람 리스트에 올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무의식중에 그런 생각하다가 혼자 화들짝. 나 지금 쟤 스킨십을 바란 거야? 하 참. 내가 왜? 아무도 뭐라 안 했는데 혼자 발끈하고 부인하다 종국엔 합리화로 마무리지었다.


그런데 막상 강다니엘이 본인에게도 스킨십을 하기 시작하니 마음이 이상해지는 거다. 스킨십이라 해봤자 웃을 때 어깨 터치하면서 고개 내리기, 애들이랑 다 같이 모여 있을 때 어깨에 팔 걸치고 있기, 혹은 목에 팔 두르고 있기. 이게 전부였다. 그게 뭔 스킨십이냐 할지 몰라도 박지훈 체감 상 엄청난 고수위에 해당됐다. 특히 목에 팔을 두르듯 걸치고 있을 땐 거리가 너무 가까워져서 힘들었다. 강다니엘이 쓰는 비싼 향수 냄새가 코 언저리에 내내 맴돌았고, 어깨부터 팔꿈치까지 강다니엘의 탄탄한 상박이 닿아서 불편했다. 그때마다 몸이 눈에 띄게 굳었다. 오죽하면 박우진이 자연스레 박지훈을 빼내주려 했다. 강다니엘은... 아마 알았을 텐데. 자기가 손만 대면 바짝 굳는 거 분명 알았을 텐데 박우진이 데려가려 하면 팔에 힘을 줬다. 시선은 다른 친구에게, 얼굴은 웃으면서. 모른 척하지만 다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땐 박지훈도 부끄러워져서 먼저 그 애 옆에서 벗어났다. 박지훈 스스로 떨어지려는 건 막지 않더라.


“박지훈.”
“왜.”
“니 강다니엘 불편하냐?”


어느날 피시방에서 박우진이 물었다. 뜬금없었다. 컵라면을 먹던 박지훈은 국물을 잘못 삼키는 바람에 켁켁거렸다. 투박하게 등을 쳐주는 박우진 눈빛이 진지했다. 드립을 친다거나 그냥 해본 소리가 아니라는 거다. 그 애가 불편하냐고 물어보면, 그 질문만 놓고 봤을 때 박지훈의 대답은 노였다. 불편하다는 건 굳이 따져보면 부정적인 느낌이 들어서. 강다니엘을 떠올렸을 때 드는 감정이 부정적인 쪽은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너무 긍정적이라 스스로 의문을 품을 정도이니 말 다했다. 박우진은 자기가 물어놓고 태평하게 게임에 몰두했다. 뭐지 싶은 박지훈이 코를 쿨쩍이며 라면 국물을 마시려 할 때 다시,


“근데 왜 걔가 손만 대면 굳어서 우째 할 줄 모르는데.”
“컥!”


하고 물었다. 라면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리거늘. 이번엔 매운 국물이 제대로 잘못 들어가 한참을 컥컥거렸다. 박우진도 그제야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물 한 통을 대령했다. ‘당황하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네가 너무 당황하니깐 내가 더 당황스럽네.’ 낮게 조잘거리는 그 입을 노려봐주고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뭔 소리야. 내가 언제 그랬어.”
“강다랑 붙어 있을 때 니 얼굴 어떤지 아나.”
“나야 모르지...”
“사진이라도 찍어주까.”
“됐거든.”


분명 긴장을 해도 속으로만 한다고 생각했다. 아주 혼자만의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박우진이 원체 눈치가 빠른 애라 다행이었다. 둔한 걸론 기네스에 오를 정식이나 재우가 이런 말을 했다면... 어휴. 그땐 이미 세상 사람 모두가 눈치 깐 후겠지. 박우진에게 들은 걸 감사하자. 그래도 조심은 좀 해야겠다.


조심은 해야겠다... 근데 뭘? 박지훈은 그날 집에 돌아와 끝날 줄 모르는 생각에 빠졌다. 나는 대체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가. 강다니엘이랑 붙어 있을 때 내 얼굴? 내가 그때 어떤 얼굴인데... 뭘 알아야 조심하든 말든 하지. 사진이라도 찍어줄까라는 박우진에게 됐다고는 했지만 정말 그거라도 부탁했어야 하나 싶었다. 앞에 거울을 두지 않는 이상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방법이 없다. 박지훈은 핸드폰 카메라를 켰다. 셀카로 전환하자 누워 있어 빵실한 얼굴이 들어찼다. 무표정으로 눈만 깜빡이다가, 강다니엘을 떠올려봤다. 체육이 끝난 뒤 까만 반팔티만 입고 걸어오던 강다니엘. 친구랑 장난치다가 박지훈을 발견하고 웃어주던 강다니엘. 지나치면서 장난스레 박지훈 배를 터치하던 강다니엘...


그리고 다시 핸드폰을 봤을 때, 박지훈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액정을 껐다. 방금 표정 뭐야. 존나... 뭐야. 생각만 했는데 이런다고? 박우진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너무나 이해가 갔다. 정말로 조심해야하나 봐 나 어떡해.


아직 본인도 잘 모르는 마음을 다른 사람이 먼저 알아챌까 봐, 박지훈은 표정 숨기는 연습을 했다. 허나 연습은 연습이고 실전은 실전이라는 냉정한 교훈을 얻은 건 바로 다음날. 모닝 강다니엘을 보자마자 헤벌레 입 벌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 깨달았다.


“이제 하복 입어도 아침에 별로 안 춥다.”
“그치...”
“왜 이렇게 멍해. 잠 덜 깼냐.”


강다니엘이 하복을 입고 왔다. 몸에 열이 많아 진작에 하복으로 갈아탔던 박지훈은 뭔 고딩놈이 교복을 입고도 몸매가 저러나 싶어 멍해지고 말았다. 잠 덜 깼냐면서 눈두덩이는 왜 쓸어주는지. 눈 앞에 어제 봤던 핸드폰 액정 속 제 얼굴이 펼쳐졌다. 안 돼. 안 돼 박지훈 표정 숨겨. 좀 자연스럽게 피할 것을 아무 말도 없이 대뜸 몸부터 돌리는 바람에 어리둥절한 강다니엘이 박지훈의 팔을 잡아왔다. 왜 그래? 라길래 대답을 말았다. 그러자 어디 아파? 란다. 박지훈은 심장이 아팠다. 말도 못할 이유로. 대충 아니, 아니... 대답하며 정처없이 걸음을 옮겼다. 한산한 복도를 쭉 걸었다. 강다니엘은 그때까지 박지훈의 팔을 잡은 상태였는데 나란히 걸으며 좀 진정되는 듯하던 심장이 팔에 붙은 커다란 손을 인식하자마자 다시 날뛰기 시작했다.


“근데 지훈아, 너는 진짜 말랑거린다.”
“뭐라...무, 뭐?”
“너 우리 반에서 체육복 갈아입고 있었을 때. 그때도 말랑해 보인다 생각은 했는데 진짜 그러네.”


팔꿈치보다 조금 더 위. 팔꿈치에 애매하게 걸친 채 박지훈의 팔을 잡은 강다니엘은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팔을 몇 번 조물거렸다. 정확히 발가락에서부터 정수리까지 닭살이 쫙 올라왔다. 아 침착하자. 마인드 컨트롤은 실제 상황에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단 것 또한 오늘 깨달았다. 박지훈은 꾹 다문 입만 씰룩이다 간지러워...라며 피했다.


“간지러워?”


장난치듯 입꼬리를 씩 올려 웃은 강다니엘의 손이 이번엔 조금 더 위로 올라왔다. 겨드랑이쪽에 가까워진 위치. 전까진 손바닥 전체를 이용해 주물렀다면 이번엔 손가락을 이용했다. 길다란 손가락이 팔뚝 안쪽을 이상하게 쓸었다. 진짜 이상하게 쓸었다. 당사자가 이상하다 느꼈으니 이상하다 생각해도 되겠지. 얼굴로 모든 열이 올랐다. 그 순간 강다니엘의 손을 쳐내며 도망치듯 멀어졌다. 이거 지금 장난...이지? 박지훈은 벌게진 얼굴에 애매한 웃음을 걸쳤다. 강다니엘은 생각지 못한 반응에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그렇게 간지러워?”
“...얘기했잖아. 간지럽다구.”
“미안. 이리 와, 안 할게.”


그러면서 미안한 얼굴로 손을 뻗었다. 홀린 듯 다가가자 익숙하게 박지훈 어깨 위에 팔을 두른다. 이것 또한 마음을 이상하게 만든다는 건 알 리 없으니. 강다니엘의 손이 스치고 간 오른팔이 계속해서 찌릿거렸다. 몰랐는데 나 좀 변태였나.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



여자친구를 만나본 건 여섯 번. 아무것도 모르고 ‘커서 너랑 결혼할 거야!’ 외치던 코찔찔이 시절 제외하면 다섯 번. 현재 19살인 걸 감안했을 때 그래도 적은 횟수는 아니라고 본다. 박지훈은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여자친구가 있을 때 나는 어땠더라. 자신이 좋다 말해주는 사람들은 많았다. 그 중 마음이 가는 사람과 연애라는 걸 했다. 마음이 없다면 애초에 시작하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그때만큼은 정말로 진심이었다는 말. 안 좋아하는데 어떻게 만나?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생각이다.


좋아해서 만났으니 확실히 설레는 감정도 느꼈다. 남들처럼 대놓고 닭살 돋는 짓은 못해도 여자친구가 귀여워 보일 때도 많았고 어색하게나마 뽀뽀도 먼저 했다. 단언컨대 거부감을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 당장 여자친구를 사귀라 해도 마음만 간다면 충분히 오케이다. 근데 여기서 한 가지 걸리는 건, 여자친구를 사귀며 느꼈던 그 비스무리한 기분이 왜... 대체 왜 강다니엘한테서 느껴지는 것 같냐는 거지. 박지훈은 두 팔로 얼굴을 가린 채 이불을 잔뜩 헤집었다. 정확히 열한 번째 발버둥이었다.


황금 같은 토요일을 이렇게 발버둥만 치면서 보낼 줄 몰랐다. 고민이랍시고 붙잡고 있는 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얼토당토 않은 것인지라 더 어이가 없다. 강다니엘을 보면서 뭐? 뭔 기분을 느껴? 부정하고 싶었다. 그런데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 자괴감이 몰려왔다.


[박우진: 뭐함?]


이쯤 날라온 친구의 연락이 아니었다면 침대 파고 바닥 파고 땅굴로 들어가버렸을지 모른다. 박지훈은 곧장 전화를 걸었다. 평소 전화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전화보단 문자가 편했다. 하지만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지금은 예외다.


-엉. 웬일로 연락을 바로 받냐?
“야 어디야...”
-니야말로 어디야. 집이지? 나와.


정말 밑도 끝도 없고 뜬금도 없는 좋은 친구. 그리고 방금 말했듯 현재의 박지훈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상황에 놓여 있다. 얼른 져지를 걸쳐 입었다. 어디 가냐 묻는 엄마에게는 박우진의 이름을 외치고 나왔다. 1층에 멈춰 있는 엘리베이터. 올라올 생각이 없어보였다. 귀찮은 건 싫지만 가만 기다리는 것도 싫은 박지훈은 직접 움직이는 것을 택했다. 선선한 밤에 나오는 게 꽤 오랜만이라 기분이 나아졌다. 요즘 이 시간대는 날씨가 딱이다. 박지훈이 좋아하는 날씨. 날씨가 좋아서 기분도 딱 그만큼 좋았다. 근데 가다가 껌을 밟았다. 인도에 멈춰서서 운동화 밑창을 사정없이 문댔다. 조금 더 가서는 갑자기 튀어나온 자전거와 제대로 부딪힐 뻔했다. 사과도 없이 홀랑 달아나는 자전거 주인을 쫓아갈까 하다가... 박우진에게 설명해야 할 그 후가 더 귀찮아서 말았다.


박우진이 있다는 초등학교는 걸어가니 꽤 멀었다. 져지를 괜히 입었나 싶다. 괜히 나왔다 싶기도 하다. 그냥 얌전히 집에 있을 걸, 생각하는 순간 목적지에 도착했다. 목끝까지 채웠던 져지를 헐겁게 내리며 운동장을 훑었다. 저쪽 스탠드에 박우진 같은 인영이 보였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서 있는 박우진과, 앉아 있는...


“박지훈? 박지훈이야?”
“......”
“형광 입은 거 보니까 맞네. 야 일로 와. 내 맞다.”


박지훈을 부르는 박우진과, 그 옆에 앉아 머리를 만지고 있는 강다니엘. 솔직히 어두워서 얼굴이 잘 보이진 않았다. 감으로 알았다. 그리고 저런 어깨 실루엣은 흔치 않잖아? 박지훈은 밍기적대며 다가갔다. 그러면서 한 생각이 못해도 열 개는 됐다. 나 머리 안 감았는데. 세수...도 안 했는데. 다행히 양치는 했다. 시발. 머리 빗기라도 할 걸. 누가 봐도 침대에서 뒹굴거리다 온 꼴일까? 아 나 진짜 괜히 나온 것 같지. 등등. 가장 아끼는 형광색 져지를 입은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나의 유일한 자신감이 되어 줄 형광 져지... 가까이서 보니 강다니엘은 같은 브랜드 검정색 져지를 입고 있었다. 밖에서 만나는 느낌은 또 묘하게 달랐다. 늘 하던 것처럼 안녕하고 인사하기가 왠지 좀 어색했다.


“어떻게 둘이 같이 있어?”
“울 반 애들이랑 피시방 갔다가 어쩌다보니까 둘만 남아서.”
“그렇구나...”
“집에서 뭐하고 있었냐.”


고맙게도 말을 걸어주는 박우진에게 대충 나오는 대로 대답하면서도 신경은 온통 한곳에 쏠려 있었다. 강다니엘이 앉은 채 저를 올려다보고 있다. 이런 구도는 처음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강다니엘은, 아니 강다니엘이 아래에서 저를 올려다보는 이 구도는 생각보다 좀 위험했다. 큰 강아지처럼 귀엽기도 한데 저런 눈으로 쳐다보면 뭘 부탁하든 다 들어 줄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물론 별 생각 없이 쳐다보는 거겠지만 박지훈은 예민했다. 내가 지금까지 무슨 고민을 하다 왔는지 알면 너 나 그렇게 귀엽게 못 쳐다볼걸. 절대 밖으론 못할 말 속으로라도 해봤다.


“잠만 지금 시간이... 야 난 이제 가보께.”
“뭐?”
“10시 반에 공주랑 놀아주기로 약속했다. 잠도 없어가 지금 내 기다리고 있을걸. 둘이 얘기 쫌 하다 가든가 뭐, 암튼 빠이. 학교에서 봐.”


박우진은 여동생이 있다. 아직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늦둥이. 몇 번 본 적이 있는데 엄청 귀여웠다. 저 딱딱해 보이는 놈이 공주 공주거리는 것도 이해가 갔다. 저렇게 끔찍이 생각하고 아끼는 것도 충분히 이해 가능. 그래서 잡을 수가 없었고 잡으려는 시도도 하기 전에 박우진은 가버렸다. 박지훈과 강다니엘 둘만 남았다는 소리다.


밤중의 초등학교는 심하게 조용했다. 저쪽 구석에 줄넘기 중인 아주머니가 계셨지만 줄이 탁탁 부딪히는 소리만 희미하게 날 뿐 거리가 멀었다. 결국엔 둘만 있는 거다. 강다니엘이 제 옆을 툭툭 치며 앉아, 라고 했다. 명령조 아니고 친절하게. 아니 다정하게? 모르겠다. 아무튼 친절하고 다정했다. 박지훈은 느릿하게 몸을 앉혔다. 앉고 보니 너무 가깝나 싶어 슬쩍 엉덩이를 옆으로 뺐다. 강다니엘은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반응이 없었다. 무난한 어투로 무난한 질문 하나만 툭.


“집에 있다 나온 거야?”
“응.”


그렇구나, 라는 듯 강다니엘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간 또 정적. 박지훈은 미칠 노릇이다. 태생부터가 말을 먼저 막 꺼내는 타입이 아니었다. 듣는 게 더 편했고 이처럼 마가 뜨는 상황이 온대도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면 제가 됐든 상대방이 됐든 누군가는 말을 하니까. 근데 강다니엘과는 그렇지 않을 것 같다는 게 문제다. 그때부터 혼자만의 눈치게임을 했다. 지금 말 걸어도 될까. 막 말 겹치고 너 먼저 말해 아냐 너 먼저 해, 이런 뻘쭘한 상황되는 거 아니겠지.


이것저것 생각하고 재는 거 딱 질색인 박지훈이 지금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고.


“나랑 커플 옷 입었네.”


같은 브랜드 같은 디자인의 져지. 강다니엘은 검은색 박지훈은 형광색. 말을 꺼낸 강다니엘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여기서 박지훈은 한 가지 키워드에 꽂히고야 마는데, 그건 당연히 커플이다. 남자끼리 커플 어쩌구하며 장난치는 게 아주 없던 일이 아닌데도 기분이 이상했다. 무슨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그런 기분. 옆 반 양아치 김원성이 ‘박지훈 정도면 커플도 씹가능.’ 이라며 지극히 혼자만의 생각을 내비칠 땐 좆 같음이 100퍼센트였고 박지훈을 우리 왕자님이라며 귀여워하는 5반 놈들이 장난칠 땐 환멸 40에 무시 60 정도? 그러니까 이런 기분을 느낀 적은 없었다. 박지훈은 결국 강다니엘의 장난을 어떤 식으로도 받아치지 못했다.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강다니엘이 자연스럽게 다른 이야기를 꺼내주지 않았다면 서로 어색해질 뻔했다.


날씨가 좋았다. 나름 열심히 걸어오느라 조금 더워지는 듯했던 져지 안의 몸뚱이도 선선한 바람에 차분히 식어가고, 이젠 덥기 때문이 아니라 기분 좋은 바람이 살에 완전히 맞닿길 바라는 마음에 져지를 벗고 싶어지는 그런 날씨. 여기서 딱 멈췄으면 좋겠다. 날씨도 기분도. 박지훈은 그런 생각을 하며 강다니엘의 얼굴을 봤다. 어쩌다 나온 영화 이야기에 조금은 들떠 보이는 얼굴이다. 영화 좋아해? 묻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는 게 귀여웠다.


“무슨 영화 제일 좋아하는데?”
“아... 하나만 못 골라. 진짜 웬만한 건 다 좋아해서.”
“집에서 많이 봐?”
“집에서도 많이 보고 영화관도 많이 가고.”
“으음... 영화관은 누구랑?”


오케이 자연스러웠어. 박지훈은 속으로 자화자찬하며 대답을 기다렸다. 내가 물었지만 딱히 대답에 관심은 없는 듯한 무심함이 포인트다. 멀쩡한 져지 지퍼를 매만졌다. 강다니엘은 짧은 생각 후 입을 뗐다. 기억을 되짚는 것처럼 입꼬리를 꾹꾹 늘이면서. 나 뭐, 애들이랑도 가고.


“응, 그리고?”
“그리고... 아, 나 잠깐만 전화 좀 하고 올게.”


내내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이 밝아지는가 싶더니 강다니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화가 오진 않았다. 누군가에게 카톡이 온 것 같았는데 아마 전화를 해달라는 내용인 듯했다. 박지훈은 멀어지는 너른 등을 보며 져지를 턱끝까지 올렸다. 뭔진 모르겠는데 살짝 기분이 다운됐다. 방금 전까지 되게 좋았는데 갑자기. 많이는 아니고 정말 조금, 한 5프로 정도. 앉아 있던 스탠드 뒤편에서 목소리가 작게 새어나왔다. 이 와중에 목소리 되게 좋다는 생각을 했다.


“응. 어딘데. 많이 마셨어? 아니 일단 끊지 말아봐.”


...일단 알았어. 기다려요. 나직하게 이어가던 대화는 기다리란 말로 끝이 났다. 박지훈은 아무것도 못 들은 척 발끝으로 스탠드 바닥만 툭툭 쳤다. 몇 걸음 만에 다가온 강다니엘이 옆에 쭈그려 앉았다. 어쩌지, 라는 말에 고개를 돌렸다. 너무 가까이에 그 애 얼굴이 있다.


“나 지금 가야 될 것 같은데... 넌 집 어디야?”


잔뜩 미안한 얼굴을 하고서 그랬다. 애초에 둘이 잡았던 약속도 아니고 어쩌다 만난 마당에 미안해 할 일이 아닌데도. 박지훈은 가깝다고, 괜찮다고 했다. 가까이 쭈그려 앉은 그 애의 모습이 어딘가 급해 보였다. 강다니엘은 당장 가야 할 것처럼 하고서도 박지훈의 집을 끈질기게 물었다. 아파트 이름을 대자 벌떡 일어나며 팔을 뻗는다. 가자, 난 거기서 택시 타게.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번엔 생각만 했다. 솔직히 같이 있으면 기분 좋은 게 사실이니까. 강다니엘은 뻗은 팔을 그대로 박지훈의 목에 둘렀다. 가장 긴장되는 스킨십이다.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진 몸뚱이가 또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근데... 얘 걸음 너무 빨라. 가뜩이나 긴 다리가 작정하고 보폭까지 늘이니 같이 가는 사람 입장에서 죽을 맛이다. 군말없이 따르다 어느 순간 힘에 부치는 때가 왔다. 잠깐, 잠깐만 잠깐. 헥헥거리며 강다니엘의 배 부근을 톡톡 쳤다. 왜 그러냐는 듯 내려다보는 강다니엘은 힘들긴커녕 더 빨리 못 가는 게 안타까워 죽겠다는 얼굴.


“걸음 너무 빨라 너.”
“아 그랬어? 미안, 마음이 급해가지고.”
“아니 미안할 건 아니구... 근데 마음이 왜 급해? 어디 가는데?”


강다니엘은 목에 두른 팔을 고쳐안으며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아까보단 조금 느려진 속도였다. 손에서 놓지 못하는 핸드폰을 수시로 확인하며 강다니엘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누구 데리러 가야 돼서.”
“누구?”


때마침 전화가 걸려왔다. 액정에 떠오른 고양이 사진이 익숙했다. 저 고양이 어디서... 강다니엘 프사? 저장된 이름까진 보지 못한 박지훈은 급작 불안한 마음에 휩싸이고 만다. 직감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닐 텐데. 절대 좋지 못한 직감이 걸음을 서서히 늦췄다. 강다니엘은 목에 둘렀던 팔을 풀며 전화를 받았다. 응, 가고 있어. 조금만 더 기다려요. 아 언제 와아. 다정하고 낮은 목소리와 애교 섞인 높은 목소리. 너무나 여자 목소리. 박지훈의 느려진 걸음이 결국엔 멈췄다. 달래듯이 통화를 마친 강다니엘이 뒤를 돌아보며 손을 뻗었다. 민망한 듯 살짝 웃으면서 뭐라 그랬냐면.


“짝사랑 중인 사람.”
“......누가. 네가? 그 사람이?”
“당연히 내가지.”


박지훈은 헛웃음이 나왔다. 당연히 내가? 그게 어째서 당연히야. 강다니엘이 어디가 어때서 짝사랑을 당연히 하냐고. 박지훈은 할 말이 없었다. 하고 싶은 말도 없었다. 알았으니 얼른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아파트까지 같이 가주겠다는 걸 극구 반대했다. 너 걸음 너무 빨라서 힘들어. 변명 같지도 않은 변명에 강다니엘은 진심으로 미안한 얼굴을 했다. 진짜 괜찮으니까 빨리 가. 많이 기다리는 것 같던데. 그 애를 먼저 보내면서 박지훈은 또 한 번 헛웃음을 터트렸다. 우리가 많이 친해지긴 했나 보다. 강다니엘이 저런 이야기를 다 하고.


아무리 그래도 본인 마음은 본인이 제일 잘 알지. 단순히 친구 사이에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애초에 지난 것 같다고, 어쩌면 처음 강다니엘을 알게 된 그날 시작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나 아주 좆된 것 같다. 박지훈은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한순간을 스치고는 ‘짝사랑 중인 강다니엘을 짝사랑하는 박지훈’이 보고 싶단 생각이 불시에, 정말 갑자기 번쩍 들면서 그대로 핸드폰 들고 무작정 써버리게 된 것이랍니다 흑흑 매 편이 무계획이라는 말...

늘 읽어주시고 힘주셔서 감사해요. 항상 행보칸 일만 있으시길!

녤윙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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