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 잔혹사

전정국 X 김태형




 태형이 저에게 안겨 엉엉 우는데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저 미안하다는 소리밖에 못 했다. 원망의 말도 없이 울기만 하는 태형에게 백 번쯤 미안하다고 말하며 겨우 달래 집에 들어오긴 왔는데 한번 터진 눈물샘은 멈출 기미가 안 보였다. 



“나, 죽어도, 말 안 할 거야.”

“응.”

“진짜로.”

“알겠어.”



 태형은 우느라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꾸역꾸역 말했다. 그 젖은 얼굴을 보는 게 속이 쓰렸다. 간신히 눈물을 참은 정국이 태형의 등 뒤를 토닥거리자 뜨끈한 얼굴이 가슴팍에 파묻힌다.



“너 때문이야.”

“...응.”

“너 존나 싫어.”

“알아. 미안해.”



 아직도 나 좋아해 줘서 고마워. 정국이 속으로 생각했다. 태형이 웃으면서 저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걸 보고 싶었는데. 좋아한다고 하는 걸 딱 한 번 들었다. 그것도 애달픈 얼굴로 울면서 하는 고백이었다. 뒤늦은 후회라는 건 진작 알았지만 할 수 있다면 시간이라도 되돌리고 싶었다. 

 네가 병원에서 꽃다발 줄 때 말할걸. 사실 나도 너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아직 잘 모르겠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용기 냈더라면 지금 네가 이렇게 아프게 울지는 않았겠지. 저린 심장을 붙들었다. 울컥 올라오는 울음을 감추려 애써 웃었다.



“나 여기서 자고 갈래.”

“...싫어.”



 싫다면서 꼭 엉겨 붙는 몸이 뜨겁다. 사랑스러워서 죽을 것 같았다. 네가 싫다고 말하지 않아도 될 때까지 내가 열심히 너를 더 좋아할게. 태형을 안은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울고 싶었지만 참았다. 태형이 웃을 수있을 때까지 참아야 했다. 




 그 뒤로도 태형은 바뀐 것 없이 여전히 정국에게 쌀쌀맞았다. 꼭 자기방어를 하는 것처럼. 그러나 태형이 어떻게 반응하든 정국은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다. 얼마나 막무가내였냐면 며칠 동안 태형의 집에서 살다시피 한 것도 모자라 태형의 집 바로 위층으로 이사까지 할 정도였다. 마침 훈련할 도장이 그 주변에 있어서 방이 나오는 대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계약해 버렸단다. 태형이 어이없어서 말을 잃고 보기만 하자 정국이 도장이랑 가까워야 훈련하기 편하다고 띄엄띄엄 변명하듯 말했다. 그 모습을 보는데 어쩐지 부끄러워져서 눈을 피했다.



“진짜 미쳤다...”

“너네 집 바로 위야.”



 그러면서 웃는 정국의 얼굴에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저렇게 무턱대고 표현하는 정국이 아직 어색한 까닭이다.



“어차피 맨날 너네 집에서 잘 것 같긴 한데.”

“누가 재워 준대?”

“재워 줘.” 

"싫어."



 태형은 싫다고 했지만 정국은 요 며칠 계속 태형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했던 터라 그 말이 별로 믿음이 가지는 않았다. 어차피 재워 줄 거면서 일부러 싫다고 말하는 태형의 진짜 속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직접 입으로 듣고 싶었다. 조금 더 기다려야겠지. 정국은 대충 짐을 정리하고 태형의 집으로 내려갔다. 아직도 태형의 집 비밀번호를 누를 때마다 심장이 아렸다.



“뭐 해?”



 문을 열자마자 짜장면 냄새가 확 퍼졌다. 정국이 반사적으로 식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씻었는지 젖은 머리를 한 태형이 짜장면을 비비고 있었다.



“짜장면 시켰어?”

“빨리 먹어. 다 불었어.”



 이사했다고 짜장면을 시켰나 보다. 정국은 퉁명스러운 얼굴로 저를 부르는 태형이 좋아서 쪼르르 식탁 앞으로 달려갔다. 꼭 태형이 이사온 저를 반기는 것 같아서 들떴다.



“훈련은 언제부터 하는데?”

“음, 내일부터.”

“...그럼 언제 집에 와?”



 태형을 따라 짜장면을 비비다 흠칫한 정국이 고개를 들어 태형을 봤다. 말투가 꼭 정국이 일찍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 같아서. 그러나 태형은 여전히 정국을 보지 않고 짜장면만 비비고 있었다. 



“빨리 왔으면 좋겠어?”

“응.”

“어?”

“일 시키게.”



 태형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목이 새빨갰다. 정국이 작게 웃었다.



“여섯 시에는 올게.”



 태형이 말없이 짜장면을 집어먹었다. 정국도 태형을 따라 긴 면발을 입에 넣었다. 오랜만에 먹는 짜장면이라 그런지 존나게 맛있어서 눈물이 다 났다. 진짜 너무 행복했다. 이사 오길 잘했다. 서울에 멀쩡한 집 두고 웬 자취냐며 황당해 하시는 부모님을 설득하느라 고생을 하기는 했지만 고생의 대가가 이것이라면 더한 것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부모님께 죄송하지만... 위아래로 벽 하나만을 사이에 두고 살 수 있다니. 꼭 예전처럼 서로의 집을 마음대로 왔다갔다 했을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때 생각을 하느라 실실 웃는 정국을 태형이 미친 사람 취급하듯 봤지만 상관 없다. 존나 좋으니까.

 내일부터 다시 한 주가 시작된다. 이제 태형은 학교에 가고 정국은 훈련을 해도 매일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선수촌에서 쫓겨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뜨끔할 정도로 좋았다. 하루 종일 태형의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도 좋았다. 이사해 놓고 자기 집에는 가지도 않고 태형의 집에 있던 정국이 기어코 여기서 자겠다며 불을 끄고 태형의 옆에 누웠다. 그러면 태형은 정해진 수순마냥 벽을 보고 돌아 눕는다. 돌아선 등이 철벽처럼 단단해 보여서 숨통이 조여들었다. 같이 지내는 며칠 동안 태형은 정국을 내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주 안아 준 것도 아니었다. 그게 씁쓸하면서도 당연해서 정국은 그저 그 등을 꽉 껴안을 뿐이었다.




 태형은 하루 종일 여섯 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학교에 가서 강의를 들을 때도, 점심을 먹고 과제를 하면서도, 심지어 집에 오는 길이 갑자기 길어진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건 집에 와서야 알았다. 아직 정국이 오지 않은 여섯 시, 아무도 없는 집에 실망하는 스스로가 당황스러웠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뭘 하고 싶은 거지? 정국과 멀어지고 싶은 건지 아니면 그 반대인 건지 혼란스러웠다. 밀어내기엔 정국을 너무 좋아하고 좋아한다 말하기엔 받은 상처가 너무 컸다. 그럼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태형이 멍한 얼굴로 정국이 올 때까지 한참을 현관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깜짝이야. 여기 서서 뭐 해?"

“...나도 방금 왔어."



 왠지 조금 민망해서 정국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그런 태형이 이상한지 정국이 태형의 주변을 한참 맴돌았다. 기분이 안 좋은 건가,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나. 설마 나 때문인가. 



"어디 아파?"

"...아니. 그런 거 아니야."



 그래도 눈 한번 마주쳐주지 않는다. 태형이 지금처럼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때마다 심장이 덜컹덜컹 내려 앉았다. 혹시 다시 날 좋아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을까 봐, 이제 진짜로 그만 두고 싶어졌을까 봐. 



"나는 아파."

"어?"

"나 오늘 오랜만에 훈련했더니 허벅지 아파 죽겠다."



 그래서 정국은 비겁한 방법을 쓴다. 아프다는 소리에 여태껏 보여주지 않던 얼굴을 마주해 오는 태형에 그제서야 마음이 놓였다. 아직 나를 걱정할 만큼은 좋아하구나 싶어서.



"테이핑 해 줘."



 사실 다리는 멀쩡했다. 정국이 안도감으로 다리 아픈 척 연기를 할 생각도 못하고 멀쩡한 걸음걸이로 방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오랜만에 운동해서 아프다며 얼굴을 찌푸리는 정국 때문에 심장이 철렁했던 태형은 곧 정국의 걸어다니는 폼이 전혀 아픈 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미심쩍은 표정으로 정말 아픈 거 맞냐고 묻는데 맞댄다. 누가 봐도 안 아픈 것 같은데. 



"해 줘."

"..."

"아프다니까?"



 이게 진짜. 태형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랑 왼 발로 오래 버티기 해서 이기면 해 줄게."



 그러자 정국이 신난 얼굴로 오른 발을 들고 섰다. 아픈 다리로 서 있는 것치고 너무 중심을 잘 잡았다.



"안 아프구만."



 아. 정국이 멍청한 얼굴로 박터지는 소리를 냈다. 아 나 바본가. 정국은 머쓱한 표정으로 허허 웃기만 했다. 태형은 웃기지도 않는다며 정국을 흘겼다. 내가 널 몇 년을 봤는데 그런 걸로 속을 줄 아냐.



"빨리 와서 밥이나 먹어."

"...응."



 정국이 시무룩한 얼굴로 터덜터덜 식탁 쪽으로 걸어왔다. 생긴 건 대형견처럼 커다래선 하는 짓이 꼭 애 같다. 태형은 방금까지 했던 우울한 생각들을 금세 잊어버렸다. 



"전정국 왜 이렇게 뻔뻔해졌지."

"너 좋아서."



 태형의 얼굴에 물음표가 가득했다. 내가 잘못 들은 거 맞지? 하는 표정이었다. 정국이 아무렇지도 않게 확인사살했다. 탕탕탕.



"김태형 존나 좋아."

"..."



 계속해서 김태형 좋아를 염불처럼 외는 정국에게 얼굴이 시뻘게진 태형이 그만하라고 소리쳤다. 얼핏 화를 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화 내는 게 아니라는 건 다 안다. 태형이 좋아한다는 고백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 이유도 다 알고 있다. 태형은 정국에게 툴툴대다가도 흘끔 정국의 눈치를 봤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이래도 나 좋아해 줄 수 있어? 하고 확인을 하는 것 같아서 심장이 저 아래 깊은 곳으로 곤두박칠쳤다. 씨발 진짜 죽고 싶을 정도로 미안해서 짓씹은 입술이 터질 때도 많았다. 

 정국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이렇게 좋아한다고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주문을 외우듯 말하는 것뿐이다. 언젠가 태형이 아무렇지 않게 나도, 하고 대답할 수 있을 때까지.

 밥을 먹고 설거지를 마친 정국이 앉아 있는 태형을 힘으로 잡아 끌어 제 앞에다 앉혔다. 정국은 집에 갈 생각이 없는지 태형을 앞에 앉힌 자세로 태평하게 티브이만 보고 있다. 졸지에 안긴 자세로 강제 텔레비전 시청을 하게 된 태형이 덜컹거리는 심장을 붙잡고 한숨을 쉬었다. 익숙해지질 않는다. 정국과 이렇게 대놓고 살을 맞댈 수 있을 거라곤 꿈에서도 생각 못 해 봐서 더 적응하기 힘든가 보다. 정국은 도통 집에 가지를 않았다. 태형은 저녁도 먹었으면 이제 갈 때도 됐는데 이럴 거면 그냥 살림 합쳐서 더 넓은 집으로... 까지 생각하다가 화들짝 놀랐다. 아니 진짜 미쳤나 봐. 정국의 품에 안겨서 얌전히 잘만 있다가 갑자기 생선처럼 팔딱 뛰는 태형 때문에 정국도 덩달아 놀랐다.



“깜짝이야. 왜?”

“아니. 아무것도 아닌데. 그리고 이것 좀 놔 봐.”

“싫어.”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혼란스러웠다. 좋아한다고 입 밖으로 꺼내는 건 무서운 주제에 생각하는 건 아주 제멋대로다. 아까 했던 생각의 연장선이다. 그래도 어떡해, 아직도 전정국이 좋은 만큼 미운데. 태형이 그런 생각을 하는 걸 알아챘는지 정국이 도망가려는 태형을 붙잡아 어깨에 턱을 대고 말했다.



“야.”

“...어?”

“너 또 까먹을까 봐 말하는 건데. 나 너 좋아해.”



 아 알아 안다고 몇 번을 말해? 그러나 들을 때마다 심장이 쿵쿵 뛴다. 등 뒤로 정국이 저를 끌어안고 있는 자세라 그 소리가 다 들릴 것 같아서 슬금슬금 몸을 앞으로 뺐다. 그러나 그대로 정국이 태형을 끌어서 당기는 바람에 말짱 도루묵이 됐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마. 너는 그냥 받기만 해.” 

“...”

“말 안 해도 돼. 내가 너 좋아하니까 괜찮아.”



 내가 널 좋아하니까 너는 말 안 해도 된다는 말을 정국에게 들을 수 있을 줄 몰랐다. 사실은 불안했으니까. 아이러니다. 좋아한다는 말은 무서워서 하지도 못 하면서 또 말 안 하면 정국이 저를 포기해 버릴까 봐 불안했다. 그런데 고작 저 말 하나로 그런 마음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차피 전정국은 뒤에 있어서 우는 것도 모를 테니까 그냥 울어버릴까.  



“내가 잘못한 거야. 너는 잘못 없어.”

“...알아.”



 아 망했다. 안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꽉 막혀 있었다. 정국이 그런 태형의 고개를 돌려서 눈을 맞췄다. 아니나 다를까 눈물이 잔뜩 고여 있다.



“키스할래.”



 정국이 충동적으로 말을 꺼냈다. 태형이 눈물을 가득 머금은 눈을 찌푸렸다.



“나 안 좋아하는 사람이랑 안 해.”

“...나도.”



 정국이 그대로 입을 맞췄다. 가만히 눈을 감는 태형을 보고 정국도 눈을 감았다. 태형이 잔뜩 화가 나서 했던 입맞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달았다. 정국이 태형의 몸을 완전히 돌려 얼굴을 붙잡고 입술을 머금었다. 축축한 소리가 귓가를 잔뜩 메워서 발가락이 오그라들었다. 태형은 안 좋아한다는 사람이랑 키스 안 한다면서 정국을 밀어내지 않았다. 좋아한다는 말을 그렇게라도 돌려 준 게 고마워서 꽉 껴안았다. 같은 속도로 뛰는 심장이 사랑스러웠다. 



"울지 마."

"안 울어."

"네가 그만 좋아하라고 할 때까지 좋아할게."

"..."

"그만 좋아하라고 해도 좋아할게."



 그러니까 이제 불안해 하지 마. 정국이 태형의 머리를 감싸 안아 품에 넣었다.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기다리는 것쯤은 할 수 있었다. 김태형은 몇 년을 기다렸는데 고작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국이 웃으면서 태형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누가 봐도 남자다운 인상인데 볼수록 예뻤다. 네가 너무 예뻐서 안 좋아할 수가 없었나 봐. 태형이 눈을 못 맞추고 빨개진 얼굴로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것도 귀여웠다. 존나 중증이다.



"좋아해."



 태형이 이번에도 역시나 입을 꾹 다물었다. 언젠가 네 입에서 나도 좋아해, 그 말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 말은 굳이 하지 않는다. 그저 다시 태형을 꼭 끌어 안을 뿐이었다.





 토요일 저녁 씻는다며 들어갔던 화장실에서 물소리도 없이 한참을 안 나오던 태형이 빼꼼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샤워기 고장났어."

"샤워기?"



 샤워기가 고장났대놓고 태형이 태연한 얼굴로 웅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도 그럴 게 물이 안 나와도 정국의 집에서 씻으면 되니까. 그래도 은근히 이것저것 잘 고칠 줄 아는 태형이 어디 있었는지도 모를 공구함을 꺼내 와서 다 벌여 놨다. 스스로 고쳐 보고 싶나 보다.



"고치게?"

"웅."



 그 와중에 웅 하고 대답하는 게 귀여워서 볼에 뽀뽀를 하고 튈까,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고치다 잘 안 됐는지 오 분 만에 포기하고는 너네 집에서 씻을래 하고 더 귀엽게 말하길래 진짜로 실행에 옮길 뻔했다. 어디가 고장이 났는지 대강 알 것 같았지만 벌러덩 포기해 버린 태형이 귀여우니까 그냥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까 너네 집 한 번도 안 가봤다."

"헐 진짜?"

"엉. 현실이냐."

"김태형 존나 너무하네."



 생각해 보니까 정국이 맨날 태형의 집에 내려와 사는 바람에 굳이 태형이 정국의 집에 올라갈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이사한 지 거의 한 달이 돼 가는데 그건 쫌 너무한 거 아니냐. 궁금하지도 않았어? 조금 섭섭해서 입꼬리가 축 처졌다. 태형도 미안했는지 아 아니 긍까 인제 가는 거 아니야. 하고 헐레벌떡 일어나서 현관문을 박차고 나갔다. 정국이 피식피식 웃으며 태형을 뒤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비밀번호 뭐야?"



 아. 정국이 잠시 흠칫했다. 데자뷰다. 그날 태형에게 왜 나한테만 비밀번호 안 알려 주냐고 했던 게 생각났다. 



"0901230."

"...어?"

"나도 그거야."



 정국이 씩 웃으니까 태형의 얼굴이 발그레 물든다. 요새 너무 행복해서 불안할 정도로 좋았다. 집어 넣는 대로 아웃풋을 내 놓는 태형 때문에 심장이 간질간질했다. 정국이 현관문을 열고 태형을 안으로 들였다. 처음 보여주는 집이라 은근히 긴장됐다. 어차피 태형의 집에서 사느라 거의 빈 집이나 마찬가지면서.



"..."

"안 들어오고 뭐 해?"



 정국이 무언가에 시선이 꽂혀 현관에서 움직일 줄 모르는 태형을 불렀다. 



"저거."



 태형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돌아보니 화병이 놓여 있었다. 



"아."

"저 꽃 일부러 가져다 놓은 거야?"



 태형이 의아한 얼굴로 정국을 돌아봤다. 수능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국의 집에 들렀던 게 생각났다. 그때 방문을 열자마자 봤던 건 정국의 책상 위 화병에 꽂힌 바싹 마른 파란 장미꽃이었다. 정국이 일 년이 넘도록 그걸 간직하고 있었을 거라곤 상상도 안 했고, 보나 마나 버리기 귀찮았거나 잊어버려서 꽂아 둔 그대로 뒀을 거라고 생각하고 꽃에서 시선을 돌렸었다. 더 보면 상처받기만 할 뿐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꽃이 왜 네 자취방에도 있어? 



"설마 내가 준 꽃 맞아?"

"...너 기억해?"



 되려 정국이 눈이 동그래져서는 기억하냐고 묻는다. 내가 어떻게 저걸 잊어. 내가 무슨 마음으로 저 꽃을 샀는데. 태형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걸 왜 아직도 안 버렸어?”

"네가 준 거라 못 버렸어."

"...왜?"

"...너 좋아했으니까."

"뭐?"



 이렇게 아무 준비도 없이 갑자기 말하게 될 줄 몰랐는데. 조금 초조해졌다. 태형이 저 꽃을 준 걸 기억 못 하는 줄 알았다. 무슨 꽃을 줬는지 일 년이 넘도록 기억하는 사람이 드물뿐더러 심지어 태형은 작년 겨울 정국의 방에서 화병을 보고도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었다.



"계속 좋아했어. 나도 몰랐지만."

"너, 너 연분홍 좋아했잖아."



 아. 태형의 말에 정국은 뒤통수를 후려 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했다. 내가 그런 거짓말도 했었구나. 아예 잊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하기가 두려웠다. 사실 그 말도 너를 밀어내기 위한 거짓말이었어. 그렇게 말하면 여태껏 공들여 쌓은 탑이 한번에 무너질까 봐 무서워서, 태형이 한 번 더 상처받을까 봐 무서워서 망설였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하기도 전에 이미 태형의 얼굴은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아아. 나는 또 너를 아프게만 하나 보다.



"나 연분홍 좋아한 적 없어, 태형아."

"..."

"미안해."

"...너 진짜 너무한다."



 태형이 또 운다. 맨날맨날 울리고도 또 울릴 게 남아 있어서 태형은 또 울었다. 심장이 고장이 난 듯 덜거덕거렸다. 



"나는 그럼 왜 연분홍 볼 때마다 질투하고 질투한 게 미안하고 또 다시 밉고 그래야 했어?"

"...미안해."

"씨발 나는 왜 맨날 그렇게 죽을 동 살 동..."



 정국이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다 잘 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돌아올 태형의 말이 두려웠다. 이제 나를 안 좋아할 거라고 그렇게 말하지 마 태형아.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태형은 아팠던 열여덟을 떠올렸다. 매일 참고 참고 또 참아야만 했었던 날들이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는지 모른다. 근데 제가 그렇게 아팠던 건 사실 아프지 않았어도 되는 거였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아픔이었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 없게 화가 치밀었다.

 그런데. 그런데 왜 자꾸.



"진짜 존나... 존나 싫어 전정국."



 그런데 왜 자꾸 네가 용서가 되는 걸까. 태형이 눈물을 뚝뚝 떨궜다. 



"아. 그렇게 말하지 마. 제발 싫다고 하지 마 태형아..."



 안절부절못하는 정국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이 정도로 아팠으면 이제 괜찮아져도 되지 않을까. 웃기게도 나는 네가 사실 나를 좋아했었다는 말에 화가 나면서도 안도해. 어쩌면 나도 편하게 너를 좋아해도 되지 않을까, 이제 안 무서워해도 되지 않을까. 너도 나를 좋아했었다면 너를 의심하지 않고 좋아할 수 있지 않을까. 미칠 듯이 화가 치밀어 오르다가도 너무 다행이어서 눈물이 자꾸 나와.



"내가 그만 좋아하라고 해도 너는 나 좋아하기로 했잖아."



 태형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정국에게 툭 쏘아붙였다.



"계속 좋아해."



 정국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지금 들은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잘 안 갔다.



"평생 나만 좋아하라고."



 계속되는 태형의 말에 정국의 눈가가 발갛게 물들었다. 



"...아."



 막을 새도 없이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쏟아진다. 울면 안 되는데. 태형이가 괜찮다고 할 때까지 안 울려고 했는데. 



"좋아해."



 그러나 이어지는 태형의 말에는 손 쓸 새도 없이 그저 눈물을 흘려보내고 만다. 정국이 소리내어 울었다. 태형을 할퀴고 쥐어 뜯어 상처내기 바빴던 열여덟의 전정국을 용서받았다. 생각보다 많이 아팠다. 너에게서 좋아한다는 말을 들으면 기쁠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태형을 오랫동안 괴롭힌 잔혹했던 짝사랑이 정국을 용서함으로써 드디어 막을 내렸다. 꼬박 삼 년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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