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약 세 달간의 공백기를 끝내고 오랜만에 찾아온 촬영장은 항상 그래왔듯이 분주했고, 나는 약간의 따분함과 빡침을 느끼려던 참이었다.

"얘가 신인인데 차가 막혀서 좀 늦는다네, 아마 조금만 더 기다리면....."

"감독님 저 지금 걔 때문에 이번 촬영 벌써 두 시간이나 딜레이 됐어요. 오늘 안으로 오긴 온대요?"


이 상황에서 더 기다리기에는 내 인내심이 충분하지 못했다.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는 감독님의 얘기가 좋게 들릴 리 만무했다. 예... 뭐, 감독님은 얼마든지 기다리실 마음이 있으시겠죠. 그 신인이 누구 딸인데. 이 말까지 입 밖으로 내뱉었다간 무슨 사단이 일어날지 뻔했기 때문에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을 도로 삼켰다. 나에게 미안한 척 절절매면서도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감독님에게서 눈을 떼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 감독님,"

"응?"

"쟤는 누구예요?"

"누구..."

"저기, 세상 다 산 것처럼 앉아있는 애요."

"아... 쟤? 그냥 별 보잘것없는 단역이지 뭐. "


감독님의 말을 채 다 듣기도 전에 어째선지 나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그 아이에게로 가고 있었다. 아직도 내가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그냥. 몸이 저절로 움직였어, 마음이 움직이기도 전에.



2.
"안녕?"

"......"

"촬영 기다리기 지루하지?"

"......... 니까."

"응?"

"돈 벌어야 되니까. 지루해도 기다려야지 푼돈이라도 주거든요."



3.
"... 뭐라고?"

"그 신인이라는 지각생 오기 전에 쟤랑 한번 맞춰보자고요."

"아니, 윤기야...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니? 쟤 단역이라니까?"

"그게 왜요? 단역은 배우 아닙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윤기 너 같은 애가 왜 저런 애랑 합을 맞춰봐..."

"누가 들으면 제가 저 애를 주연으로 추천한 줄 알겠네요. 신인은 차 막혀서 늦는다면서요. 기다리기 지루하기도 하니까 잠깐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요새는 단역도 연기 잘해야 하는 거 알죠? 해보고 아니면 잘라버리든지 해요.


갑작스러운 내 제안에 당황한 감독님을 뒤로하고 나는 다시 너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줄곧 바닥만 쳐다보고 있던 네가 고개를 들어 올려 나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 초점 없는 눈으로.



4.
조금 놀랐다. 초점 없던 그 눈이, 카메라 앞에 서는 순간에는 묘하게 사람을 끌리게 하는 눈으로 바뀌었다. 방금 막 외웠을 대본을 막힘없이 읊으며, 네가 나와 눈을 맞춘다. 



5.
그 일이 있고 난 후 나는 캐스팅 제의가 들어올 때마다 상대역으로 너를 추천하기에 바빴다. 네가 상대역이 아니면 나도 그 역을 맡지 않겠다는 고집 아닌 고집에 회사가 꽤나 고생을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예전에 했었던 작품의 감독님을 만나게 됐는데, 이번에 준비하시는 작품에서 나를 주연으로 쓰고 싶다고 하셨다. 나는 어김없이 네 얘기를 꺼냈고, 감독님은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윤기 네가 그렇게 추천을 하니까 이거 안 만나 볼 수가 없네, 이번 주 주말에 한번 데려와봐."



6.
"아니, 윤기야. 얘 정말 진국인데? 이 실력으로 이때까지 단역만 맡아왔다는 게 말이 되니?"

"그래서 이제 날개 펼칠 수 있게 제가 도움 좀 줘보려고요."



7.
네가 생에 처음으로 주연으로서 맡게 된 배역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니. 기분이 묘했다. 나를 사랑하는 연기를 하는 너는, 대체 어떤 모습일지 잘 그려지지가 않았다.



8.
처음에는 내가, 저 아이에게 느끼는 이 감정은 그저 촬영이 끝나고 나면 홀연히 사라져버릴, 딱 그만큼의 얕은 감정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어리석게도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감정이 연기인 건지, 아닌 척 자꾸만 너를 밀어내려는 내 행동이 연기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9.
더 이상은 연기가 연기가 아니게 되어버렸다. 나는 결국 너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 그 자체가 되었다.



10.
오늘은 나답지 않게 촬영 도중에 감독님에게 좋지 않은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연기라 하더라도, 내가 어떻게 너를 모질게 대할 수 있을까.



11.
너는 요새 내 걱정이 많다. 항상 기세등등하던 내가 이리도 골골 앓는 이유가 너 때문이라는 것을 알면 아마 너는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며 난리가 나겠지. 그래도 네가 내 걱정을 해주니 나는 요새 그 낙으로 아침에 웃으며 눈을 뜬다.



12.
예전에 의사선생님이 건강 좀 챙기라고 하실 때 챙길걸. 언제 떠나도 아쉬울 게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런 미련 없이 이 생을 떠나보내기엔, 내 옆에서 곤히 잠든 네가 너무나도 예뻐서, 그래서 다시는 이럴 일 없을 거라고 확신했었지만 결국 나는 다시 한 번 더 너를 상대로 연기를 해보려 한다. 

끝이 정해진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한다.



13.
요새 너는 꽤나 즐거워 보인다. 사람 많은 곳은 질색하던 내가, 그래서 네가 나와 함께 가보고 싶다는 곳들 중에서도 비교적 사람이 적은 곳들만 골라서 가던 내가, 오늘은 내비게이션에 남산타워를 찍고 있으니. 하지만 나에게는 이제 그런 것들을 가릴 여유가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네가 좋다는 곳은 가리지 않고 전부 가볼걸, 후회만이 가득했다.



14.
솔직히 오늘은 조금 무서웠다. 촬영을 하던 도중 평소엔 아무렇지도 않았던 조명에 나는 순간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리고 네가 날 떠나는 악몽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떠나가는 너를 지켜만 볼 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너무 무서운 꿈이었는데, 힘겹게 눈을 뜨고 보니 네가 꿈속 모습 그대로,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선 내 옆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혹여라도 사라져버릴까 두려워 조심스럽게 너를 감싸 안으며 생각했다.

내가 너를 두고 떠나면, 너도 이렇게 무서워하겠지.





창백한 피부 위로 뜨거운 눈물이 선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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