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허구적 상상에서 비롯된 이야기입니다.

*서양 동양, 뭐할 것 없이 제가 아는 모든 지식을 때려 넣은 이야기입니다.

*억지스러운 요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왕은 어릴지라도 어리석지 않았다. 백성을 진심으로 두려워할 줄 알았다. 자비를 베풀고, 무너진 지방행정을 다잡기 위해 4품의 정원을 늘린다. 과거제에 신분 제한을 두지 않았고, 백성들이 글을 쉽게 읽고 쓸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책을 편찬했다. 백성의 세금은 줄이고, 양반의 책임은 더 높였다. 수로를 확충하고 농업에 관한 연구를 통해 직접 모내기법을 퍼트린다. 곡식 생산율이 2배로 뛰었고, 그를 향한 찬미가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았다. 민심을 등에 업고 자만하지 않았던 그는, 당근과 채찍을 교묘하게 겸비하여 관료들을 휘어잡았다. 일정한 토지와 노비를 주어 수원궁에서 직책을 맡지 못한 사람을 지방으로 내려보냈다. 군현제의 완성이었다.

 

 

- 민상욱의 「수지설화기(水地說話記)」 中






 



 

 

애수(哀愁) 가슴에 스며드는 슬픈 근심


 






“이제 조절이 가능하다고?”

 

 

정국이 뜨거운 국밥을 입에 넣었다가, 입천장이 데일 것 같은 쓰라림에 몸부림쳤다. 지민이 물이 가득 담긴 잔을 건네며 혀를 끌끌 찼다. 지금쯤 동인이 녀석은 사색이 되어 사라진 왕을 찾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하늘 같은 왕은, 궁에서 벗어나 저잣거리에서 백성과 하나 되어 노는 것을 몹시도 즐기는 장난꾸러기였다.

 

 

“응. 그냥 어느 날 국이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눈을 감았는데 보였어. 그 뒤로 내가 간 곳은 그냥 볼 수 있어, 가끔 처음 보는 곳도 보이긴 하는데”

 

 

저 형은 무슨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얼굴이 확 달아올랐지만, 자신도 평소에 별반 다를 게 없기에 정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까 자신이 낯부끄러운 말은 더 배로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미래도 보여?”

“미래를 봐도 미래인지 알 수가 없으니까……. 가깝거나 사소한 건 보여.”

“어떤 거?”

“내일 밥상에 뭐가 올라올지…?”

 

 

지민이 베시시 웃었다. 저 망개떡 같은 얼굴은 웃을 때 유독 도드라졌다. 율은 가끔 지민이 무표정일 때 무섭다고 하지만, 정국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아니 이렇게 봐도 예쁘고, 저렇게 봐도 예뻐 죽겠는데 뭐가 무섭다는 거야? 율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정국은 지민의 볼을 주물렀다. 저잣거리에선 쓸데없는 체통을 지키지 않아도 되었다. 지민과 마음껏 입을 맞춰도 예의를 갖추는 듯하다가도 눈치 없게 박수를 치는 동인이 녀석도 없었고, 경망스러운 행동을 삼가라는 율의 잔소리도 없었다.

 

 

“우리 국이 진짜 다 컸네.”

 

 

정국이 왕위에 오른 지 어연 4년이 지났다. 입에 담기 민망한 말이어서 그렇지 지금 수국은 누가 보아도 최고의 전성기였다. 처음 왕의 자리에 오른 정국은, 서툴고 강단이 세지 못할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자신의 안위를 강화하기 위해 불법으로 세를 신고하던 관료들을 싸그리 잡아 들였다. 정국을 구워삶아 어떻게든 권력을 쥐려던 관료들은 예상치 못한 정국의 선전에 도리어 범법을 저지를 자들을 고발하기 시작했다. 서로가 죽고 죽이는 당파싸움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던 늙은 관료들이 물러나고 새로운 젊은이들을 등용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율은 자연스럽게 두연정의 자리에 올라섰다. 이제 왕의 머리가 되어 국사를 돌보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정국이 훌륭한 왕이 될 수 있었던 건 그 누구보다도 지민의 공이 컸다. 정국의 곁에서 비가 내리면 우산이 되어 주고, 햇살이 너무 강하면 그늘이 돼 주었다. 미처 닿지 못한 백성들의 곡소리는 지민에게 들렸고, 그 소리를 매번 들으며 괴로워하는 지민을 위해서라도 정국은 백성을 위한 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정국이 애초에 백성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왕은 아니다.-

 

 

“주상전하께서 이번 가뭄을 고려하여, 마을 관아로 가면 무료로 곡식을 푼다고 하더군!”

“정말 이런 분을 언제 다시 만날까 싶어.”

 

 

지민이 쿡쿡 웃었다. 정국은 낯부끄러운 칭찬에 내색하며 제 얼굴에 있는 솜털을 하나둘씩 뽑았다. 도대체 언제부터 생긴 습관인지는 몰라도, 귀여우니까 지민은 딱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정국은 지금 제가 솜털을 뽑고 있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거 홍대관님 건데 그치?”

“그러게, 거짓말도 작작 쳐야지. 너무 꼬리가 길었어. 뭐, 어차피 재산도 많은데 저 정도 곡식이야 기부하는 걸로 때우면 되겠지.”

“오시(午時)다. 빨리 들어가자.”

 

 

정국이 국물을 후루룩 들이켰다. 저 멀리서 현숙이 그런 정국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종종 이곳을 방문하는 저 남정네 둘 중, 유독 정국은 도드라졌다. 순수하고 소년 같은 얼굴에 비해 몸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눌렀다가 그대로 튕겨 나올 도톰한 근육들과 드넓은 등은, 제 딸아이에게 장가를 보낸다면 매우 적격이었다.

 

 

“아이고 오늘도 싹싹 비웠네.”

 

 

현숙이 옆을 흘끔 쳐다봤다. 말끔하게 먹긴 했지만, 밑바닥을 보이는 정국과 달리 지민의 것엔 국물이 동동 떠다니고 있었다. 역시 화끈한 쪽이 좋지. 현숙이 정국에게 서비스라며 다과를 내어왔다. 제 딸아이는 이런 사내를 두고, 도대체 옆에 있는 하늘하늘한 사내가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종종 선물을 두고 가곤 했다.

 

 

“워낙 맛이 뛰어나야 말이죠.”

 

 

정국이 과자 하나를 쏙 집어넣었다. 바삭한 과자가 정국의 입에서 잘게 부서졌다. 그 모습까지도 마음에 쏙 들어 현숙은 아들을 보듯 흐뭇하게 바라봤다. 금세 바구니를 비운 정국이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숙은 아쉬웠지만, 정국을 더 이상 잡을 구실이 없어 서성거릴 뿐이었다.

 

주막의 문을 열고 나가는 정국과 지민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

 


정국이 뒤를 돌더니 현숙과 눈을 마주쳤다. 씨익 웃는 그의 모습에 왠지 모르게 현숙은 불안감을 느꼈다. 여자의 촉은 무시할 게 못 된다. 현숙의 직감적인 촉에 맞게, 정국은 지민의 턱을 잡아들고 순식간에 입을 맞추었다. 지민의 당황한 모습 위로 해사하게 웃는 정국의 눈은 말 그대로 연인의 눈이었다. 제 정인을 사랑하다 못해 곁에 있어도 보고 싶어 한다는 전형적인 꾼의 모습이었다. 현숙이 아쉬움을 삼켰다.

 

 

“여어! 막걸리 한 잔만 줘!”

“좀 기다려!”

 

 

제게 술을 내오라는 다른 이들의 부름에 앙칼지게 대답했다.

 

 

“국아 갑자기 뽀뽀는 왜 한 거야?”

“나는 박지민 거라는 표식 정도로 해두자.”

 

 

3년 사이에 능글맞음이 배로 늘어났다. 어린 시절 형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궁을 떠나지 말라는 우리 코찔찔이는 어디로 갔을까…. 지민이 아쉬움을 삼키며 제 어깨에 올려져 있는 정국의 손을 내렸다. 둘은 삼엄한 경비를 피해 개구멍으로 향했다. 아마 궁에 들어가면 동인이 화가나 붉으락푸르락 변해 있는 얼굴로 잔소리를 쏘아붙일 것이었다.

 

 

“어?”

“왜?”

 

 

휘청거리는 지민을 다잡아주며 정국이 조심스레 물었다. 지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 그래?”

“……어, 어 아니야. 머리가 좀 아파서….”

 

 

아무렇지 않게 다시 허리를 곧게 세운 지민을 보면서도 정국은 계속 걱정스러웠는지 ‘업어줄까?’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자꾸만 했다. 지민이 옆구리를 찌르고 나서야 팔불출이 진정된 정국을 보며 지민이 이리저리 생각을 굴렸다.

 

수원궁에…. 왜 불길이 일었지. 스치듯이 지나간 광경은 그 누가 봐도 뜨거운 불이 타오는 수원궁의 모습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순적인 장면에 지민이 주먹을 세게 쥐었다. 아니야, 아니야. 확실치 않잖아. 괜한 걱정은 접어두자.

 

 

 

 

 

 

 

 

*

 

 

 

 

 

 

 

 

 

 

“주상전하를 뵈옵니다-”

 

 

 

 

관료들이 고개를 숙이며 *중원관(中元關)에 들어온 하나뿐인 태양을 맞이했다. 언제 밖으로 나갔냐는 듯 곤룡포를 입은 정국은 위풍당당한 걸음이었다. 이제는 익숙하게 어좌(御座)에 앉는 모습을 보아하니 영락없는 한 나라의 왕이었다.

 

정국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상소문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민은 남몰래 소리죽여 웃었다. 벌써 일을 하기 싫은 마음이 이마에 크게 쓰여 있었다. 정국은 대신들과 갑론을박을 펼치기도 하고, 예상외의 일들에 서로 머리를 맞대기도 하면서 상소문을 하나씩 해치워 나갔다. 4품에 해당하는 지민은 중원관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4품의 자리가 그랬다. 지루함에 몰래 나갈까 고민했던 지민은, 급하게 뛰어들어온 병사를 보고 두서없이 뻗어 나가는 의식의 흐름을 멈췄다. 사색이 된 얼굴로 땀범벅의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기에 중원궁에 함부로 들어온 겐가?”

 

 

조관이 숨을 헐떡이는 병사를 나무랐다. 정국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말해 보거라. 무슨 일이냐?”

“며칠 전에 *한연(翰蓮)으로 들어온 무리가 있습니다……”

“헌데?”

“오늘은 *화현문(化現門) 앞까지 오더니…. 자신들이 염국의 사신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기에 경고를 날렸더니.”

“……….”
“활로 병사들을 쏴서 죽였습니다.”

 

중원관 내부가 싸하게 내려앉았다. 이건 명백한 도발이었다.

 

 

“그들의 행색이 어땠는가?”

“사신은 맞는 것 같습니다. 고급진 비단에, 수국에서 나올만한 외모도 아니었거니와 머리를 길게 길러 하나로 묶거나 아예 풀어헤친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야만인입니다! 먼젓번에 화국을 무너트린 일만 해도 어떻습니까! 야만인은 본보기를 보여줘야지요!”

 

 

황관과 건관, 홍연관 모두 발끈하여 왕에게 크게 소리쳤다. 정국도 많은 고민이 되는지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병사를 유심히 응시했다.

 

 

“한번 들이는 것이 어떠신지요.”

“두연정님! 농언이 과하십니다!”

“이번 건은 문화가 다른 것으로 칩시다. 이 화친을 거절하면 아마 배로 돌아올 게 뻔합니다. 병사들도 말없이 쏴 죽이는데, 더한 것도 못 하겠습니까? 필시 이건 수국과의 관계를 유하게 이어가기 위함이니 한 번쯤은 받아줘도 될 것입니다. 아니 받아야 할 겁니다.”

“……지금 사신들은 어떤 상태지?”

“일단은 포박해 논 상태입니다.”

“들라하라.”

 

 

전하!! 항상 염국을 못 마땅해하던 대신들의 우렁찬 비난 소리가 중원관에 크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율과 정국은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시선을 아예 돌렸다. 어찌 옛날의 관념에 사로잡혀 산단 말이냐. 염국은 이제 옛날과 같지 않다. 강대국이다. 최대한 좋게 끝내야 한다. 정국이 어좌를 세게 쥐었다. 정국은 본능적으로 지민을 찾았다. 저 구석에서 제 상태를 유심히 살피는 지민을 보며 심호흡을 내뱉었다. 왜 불안하까, 형.

 

 

“권능하신 주상전하를 뵙사옵니다. 저희가 혹시 예를 갖추지 못한 것이라면,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주시옵소서.”

 

 

푸른빛이 도는 수원궁에 온통 적색의 복장을 한 염국의 사람들이라니. 옛날이라면 절대 꿈도 꾸지 못할 광경이었다. 다른 대신들은 불쾌감이 서린 얼굴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염국의 사신들은 고개를 숙이며 정국에게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었다.

 

 

“그래, 이곳을 찾은 이유가 무언가?”

“저희의 왕께서 수국의 왕을 무척 뵙고 싶어 하십니다.”

“………….”

“이 서신을 읽어보옵소서.”

 

 

‘예로부터 물과 불은 서로 상성이 맞지 않는, 극과 극의 성질이라 알려졌지요. 다만 역으로 생각해보자는 어사(語辭)를 전하께 여쭙고자 합니다. 물과 불은 서로 닿으면 안 될 것처럼 여겨지지만, 물과 불은 서로가 없으면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말 겁니다. 우리가 힘을 합친다면 거대한 수풀도 단번에 제압할 수 있음을 전하께 말씀드리고 싶군요. 빠른 시일 내의 만남을 저는 소망합니다.’

 

 

 

정국이 서신을 한동안 읽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조용히 무릎 맡에 올려놓았다. 동인에게 손짓을 보냈다. 동인이 먹과 붓, 조그만 상을 대령했다. 정국은 그 즉시 서필을 써 내려갔다. 여기저기서 탄식이 나왔다. 하지만 정국은 아무렴 상관이 없었다. 이 난폭하고, 오만한 자를 하루라도 빨리 만나고 싶었다. 어찌됐든 언젠가 한번은 이행해야 할 관례와도 같았다.

 

 

‘그대 덕분에 물의 새로운 면모를 알게 되었습니다. 물은 한없이 차갑지만 따뜻한 면모를 가지기도 하겠지요. 허나 모든 생명의 잉태는 물에서 시작됨을 그대는 알고 있을까 싶습니다. 나는 모든 생명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그 생명이 본질을 잃는다면 그 모든 것을 도로 가져가는 것 또한 물의 몫이겠지요. 나 또한 하루빨리 그대의 불같은 모습을 보고픕니다. 언제 오시든 수국은 그대를 환영할 겁니다.’

 

 

정국의 손에서 떠나간 서신은 사신의 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소란스러운 반응을 보이긴 해도 수원궁에서는 점잖은 모습을 남기며 수국에서 빠져나갔다. 염국의 말은 수국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융성한 털과, 윤기가 흐르는 고운 털결, 그리고 거대한 말들의 크기에 다른 병사들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마음이 몹시 요동쳤다. 염국은 강력한 무기를 쥐고 있기에 지금 이리도 경박스럽게 행동하는 것이었다. 

 

 

 

 

*

 

 

 

 

정국이 화현문 앞에서 호령왕(號令王)-염국의 왕-을 기다렸다. 염국의 방문은 여지껏 있던 역사의 기록 어디에도 없었다. 즉, 염국과 수국 간의 최초 회담인 것이다. 정국이 긴장되는 것은 당연했다. 지민이 멀리서 정국을 애처롭게 바라봤다. 어젯밤, 몰래 바라본 정국은 잔뜩 뒤척이면서 잠에 쉽게 들지 못했다. 평소답지 않게 눈 밑에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호령왕이 수문왕(水紋王)을 뵈옵니다---!”

 

 

한 신하가 급하게 달려 나와 먼저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이내 말발굽 소리가 크게 들리더니, 염국의 사신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복식은 수국과 매우 달랐다. 수국은 옷을 여러 겹 껴입고 속곳과 본옷, 겉옷의 구분이 명확하다. 하지만 기다랗고 부드러운 천을 둘러서 옷을 입는 듯한 염국의 모습은 꽤나 새로운 것이었다. 대신들도 불쾌감을 감추고 새로운 문화에 대한 호기심을 품고 그들을 응시했다.

 

풍채가 좋고 거대한 말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심지어 몇 마리의 말이 사례품이라며 옆 길가에 세워두고 있었다. 이윽고, 기다란 행렬 끝에 새하얗고 이태껏 본 말 중에서 가장 큰 위엄을 자랑하는 백마가 들어왔다. 

 

 

‘황제의 관상이다.’

 

지민이 몸을 움찔 떨었다. 그리 가까이서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눈과 코, 입의 조화가 눈부시도록 뛰어났다. 마치 세상의 규칙을 담고 태어난 듯한 미에 경외심이 들 정도였다. 그는 오만하고 방자한 표정으로 말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오만함은, 오만이라는 오명을 벗고 거룩함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호령왕이 눈을 휙 돌렸다. 지민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이렇게 먼 거리라면 착각할 법도 하지만 이건 필시 지민을 향한 시선이었다. 목을 옥죄어 오는 시선에 지민이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돌릴 수 없었다. 그래, 그는 그런 힘이 있었다.


 

“………….”



찰나의 시간이 영겁의 순간처럼 느껴지는 처음이었다. 무심하게 시선을 도린 호령왕에 지민이 안심하며 정국을 바라봤다.

 

 

“오시는 길은 어땠습니까?”

“수국은 매우 아름다운 곳이군요.”

“하하, 그렇습니까.”
“단홍궁(丹泓宮)에 전시해 두고 오래오래 보고픈 욕망을 부추깁니다.”

“……….”

“하하, 농입니다. 그만큼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예, 융숭한 대접을 하고자 하니 안으로 드시지요.”

 

 

커다란 양기가 부딪혔다. 지민이 힘을 잃고 풀썩 쓰러졌다. 맥없이 힘을 놓은 지민을 당혹스럽게 받은 옆 내관은 행여나 큰 자리에 해를 끼칠까 싶어 그를 업고 내의원으로 향했다.

 

 

“………!”

“왜 그러십니까?”

 

 

정국이 깜짝 놀라 업힌 채로 사라지는 지민의 쪽으로 몸을 돌렸다. 호령왕이 쪽문으로 사라지는 파리한 등을 바라봤다. 정국의 시선을 쫓은 것이었다. 왜 저러지. 후궁이라도 되나. 후궁이라기엔 옷차림이 매우 남루하거늘.

 

 

“다른 이들의 눈이 많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아, 미안하게 됐습니다. 가지요.”

 


호령왕이 정국의 팔을 이끌었다. 두툼하게 잡히는 팔의 두께에 불쾌감이 쌓였다.

 

 

“연마를 많이 하시나 봅니다.”

“몸을 쓰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즐겨 하는 편입니다.”

 

 

둘은 미소를 지었으나, 그 뒤에 적대감을 품은 잇자국까지 감추진 못했다. 말이 화친이지, 서로의 탐색전을 위한 자리에서 둘은 끊임없이 서로를 관찰했다.

 

 

“수국의 밤은 무척이나 온화하군요.”

 

 

술이 들어가고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대신들과 염국의 사람들은 언제 으르렁거렸냐는 듯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무용수들이 추는 춤과 음악에 맞춰 한껏 분위기에 취하고 있었다.

 

 

“온도 차이가 그리 심한 편이 아니니까요.”

“염국은 낮에는 더위에 떨고, 밤에는 추위에 떠는데 많이 부러운 사항 같습니다.”

“하지만 염국도 나름의 장점이 존재하지 않습니까.”

“음……. 그렇습니까? 저는 잘 모르겠군요.”

 

 

호령왕이 술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금방이라도 넘칠 듯이 구는 액체 탓에 알싸한 술냄새가 정국의 코를 찔렀다.

 

 

“달이 차오릅니다.”

“예, 오늘은 보름달이 뜨는 날이지요.”

“수국에서 보는 달은 유독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달은 세상을 공평하게 비추지 않습니까?”

“인간은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 동물이지요. 수국에서 보는 달이 더 아름답군요.”

“그렇게 칭찬을 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개뿔. 정국이 억지로 입꼬리를 세게 잡아당겼다. 저 순수한 척하는 가면 뒤에 수국을 호시탐탐 노리는 의지가 엿비쳤다. 저 작자는 숨길 생각이 아예 없는 것이다. 둘이 함께 담소를 나누기도 잠시, 각 나라를 대표하는 대신들이 인사를 건네왔다. 정국과 호령왕은 다년간 궁에서 갈고 닦아 예쁘게 만들어진 그들의 만의 가면을 쓰고 서로를 맞이했다.

 

밤이 무르익고, 연회가 어느덧 끝날 시간이 다가왔다. 서서히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겠다는 대신들을 염국의 사신들이 배웅해주고 있었다. 술을 평소보다 배로 마신 정국은 알싸한 정신을 붙들고 호령왕을 찾아 시선을 돌렸지만, 그는 어디에도 없었다. 정국이 얕게 욕을 읊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온몸을 급습하는 불안감이 두려워서였다. 

 

 

“………….”

 

 

호령왕이 길을 잃었다. 생각보다 복잡한 궁의 내부 때문이었다. 머리라도 식히자고 무작정 발걸음을 옮겼건만 더 복잡해져서 한껏 짜증이 올라왔다. 안 그래도 취기에 들었는데 이러다간 실수라도 할까 싶었다.단홍궁의 배가 되는 크기였다. 넓기도 넓었지만, 곳곳에 세월을 같이 보낸 거목들이나, 궁에 새겨진 화려한 그림들이나 염국에 비해 문화적으로 훨씬 앞서는 사항들이었다. 호령왕은 궁의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담아가려 노력했다. 이렇게 된 김에 궁을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 같았다. 호령왕은 뒷짐을 지고 노래를 흥얼거렸다.

 

 

“길이라도 잃으신 겁니까?”

 

 

걷다 보니 조그만 궁이 나왔다. 앞에 연못을 끼고 있고, 그 옆은 커다란 평상이 있었다. 평상을 가려주는 거대한 나무는 벚나무 같았다.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에 태형이 궁을 멀거니 바라봤다. 달빛을 받아 연못이 반짝거렸다. 궁에 불빛이 살짝씩 나오는 걸 보아하니 필시 사람이 사는 궁이었다. -수원궁은 워낙에 넓어 사람이 살지 않는 빈 궁도 많다.-

 

길이라도 물어볼까 싶어 다가갔을 때 말을 걸어온 이는 궁의 주인 같았다.

 

 

“이 궁의 주인 되십니까?”

“……그렇습니다.”

 

 

생긋 웃는 미소가 처연했다. 남자인가 여자인가. 구분이 가지않는 외관이었다. 그가 입은 의복의 탓도 있겠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랬다.

 

 

“혹 호령왕 되십니까?”

 

 

호령왕이 유심히 그를 살폈다.

 

 

“맞소만.”

“소문대로 화려한 용모를 지니셨습니다.”

 

 

누가 감히 왕의 얼굴을 논한단 말인가. 호령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이곳은 염국이 아니다. 자신이 어찌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여엇한 궁을 하나 가진 사람이라면 직급이 어느 정도 되거나 혹은, 왕의 반려이거나…. 태형이 그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어내렸다. 미묘한 외모를 가진 사람임은 분명했다.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소.”

“황제의 관상입니다.”

“………?”

“외모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당신이 지닌 양기는 이미 이 세상의 것을 넘어섰습니다.”

 

 

마치 나의 태양처럼 말입니다. 그가 입을 가리고 수줍게 웃었다. 어느 맥락에서 수줍어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호령왕이 눈을 가늘게 떴다. 비꼬는 의중을 가지고 한 말 같지는 않았다. 불쾌감이 쌓이기도 전에 의문점이 먼저 차올랐다.

 

 

“세상을 넓게 보시는 분인가 봅니다.”

“인간의 시야는 너무도 좁지요.”

“혹 미래라도 보시는 분입니까?”

“아하하, 미래는 보려 하지 않아도 보이는 법이지요. 혜안만 지니고 있다면”

“………….”

 

 

이야기를 할수록 말려드는 느낌이었다. 그가 조금씩 호령왕에게 다가왔다. 어두운 저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이 자꾸만 밝아지는 착각을 느꼈다.

 

 

“태형아.”

“……!”

“김태형, 나 기억 안 나?”

“……….”

“우리 태형이 약속도 까먹고….”

 

 

그가 태형의 볼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무엄하게 어찌 왕의 얼굴에 손을 올리는 것일까. 태형이 흥미롭다는 듯 지민의 허리를 받아들었다. 그는 자신을 안다고 했지만, 기억에 잡히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존재 자체만으로 흥미로운 사람인 점은 틀림없었다. 제 이름을 함부로 올린 사람이 있었던가. 아주 까마득한 기억에 한 명쯤은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불쌍한 우리 태형이…….”

 

 

같은 말만 읊조리던 지민은 얼마 가지 않아 태형의 품에서 쓰러졌다. 생각만큼 가벼운 무게에 태형이 부담 없이 그를 받아 들었다. 불쌍해? 내가? 그에게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의식이 없는 자에게 물어서 무엇할까. 어차피 나중에 보게 될 테니 태형은 많은 미련을 잡아두지 않았다.

 


“뭐하시는 겝니까.”

 

 

잔뜩 성이 난 목소리였다. 정국이 잔뜩 이골이 난 얼굴로 태형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지민을 품에서 낚아채듯 안는 정국의 모습에 태형이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송구합니다. 높으신 분인 것을 제가 몰라뵈고…….”

 

 

그의 말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정국이 지민을 품에 안아 조심스럽게 평상에 눕혔다. 그의 행동에 태형은 인상을 찌푸렸다. 귀한 도자기나 공예품을 다루는 듯한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다.

 

 

“여봐라!”

 

 

정국의 외침에 월령궁에서 나인 몇 명이 뛰쳐나왔다.

 

 

“제 주인 하나 간수 못하는 시종이 어디있단 말이냐!”

 

 

왕의 행차가 낯선 것은 아니었으나, 평소의 유순한 모습과 다르게 호통을 치는 것이 두려워 나인들이 벌벌 떨었다. 태형도 있고 염국의 사신들의 거처를 마련해야 하기 때문에 정국은 더 말을 잇지 않고 태형과 함께 월령궁에서 빠져나왔다. 정국은 매우 분개한 것인지 가는 내내 한마디의 말도 꺼내지 않았다. 태형은 이 상황이 적잖이 즐거웠다.

 

 

“수국의 달은 역시 아름답군요.”

“………….”

“달을 가리려는 연기를 조심하셔야겠습니다.”

 

 

태형이 방실방실 웃었다. 매서운 표정을 짓던 정국이 조소를 흘렸다.

 

 

“연기 같은 것이야 물을 뿌리면 그만 아닙니까? 어찌 형태도 없는 것을 논하려 하는지….”
“………….”

 

 

커다란 보름달이 구름에 의해 드리워졌다. 세상을 비추던 미미한 빛이 사라지자 온통 어둠에 휩싸였다. 그 안에서 유일하게 형형한 색깔을 발휘하는 건, 서로의 동공뿐이었다. 한참을 노려보던 동공들은 구름이 걷히고 다시 빛이 드러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적의를 감췄다.

 

 

“그거 아십니까?”

“……무엇을 말입니까.”

“우린 같은 해에 즉위했더군요.”

“……알고 있습니다.”

“좋은 벗이 될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태형이 손을 내밀었다. 정국이 손을 맞잡았다.

 

 

“벗의 의미를 잘 못 이해하신 것 같습니다.”

 

태형의 얼굴에서 미소가 순식간에 거둬졌다. 어떻게든 미소를 머금으려는 의지가 사라지자 온통 냉기만 가득한 얼굴이 드러났다.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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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午時) : 11시~13시

*중원관(中元關) : 국정을 돌보는 곳, 강명전 바로 밑에 위치한다.

*한연(翰蓮) : 수국의 도읍.

*화현문(化現門) : 수원궁의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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