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녕을 지나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길이 험했다. 초원과 메마른 땅이 번갈아 나타나며 며칠씩 비가 오기도 했다. 마차를 탈 때도 있었지만 재민은 대개 말을 고집했다. 몇 달에 걸친 원행길이 끝나가는 참이었다. 그들이 마중나오는 곳은 정해져 있었지만 힘들더라도 말 위에서 버티려 노력한다. 소양으로 익힌 기마술과 실제 말 위에서 생활하다시피 한다는 것은 크나큰 차이가 있음을 깨닫는 중이었다. 차츰 익숙해진 덕에 더이상 허벅지가 쓸리거나 피멍이 들지는 않는다. 나약해 보이지 않도록 무리를 한 것이 그나마 앞으로 펼쳐질 생활에의 적응을 돕고 있었다.

재민은 선황의 열 네번째 아들이다. 모친은 대대로 서북의 국경지대를 지키는 무장 가문의 여식이었다. 명문가이긴 했으나 황성에서 멀리 떨어진 친정은 그다지 위세가 높지 못했다. 재민과 재민 밑으로 여동생을 낳았지만 공주는 돌이 지나자마자 요절했고 낙담한 모친은 산후병이 심해져 그 뒤를 따랐다. 황궁에서 지켜줄 어머니나 든든한 외가 없이 살아남은 것은 양모의 덕이 컸다. 어린 재민을 거둔 것은 10황자였던 재현의 어머니였다. 지금은 태후가 되어 자녕궁의 주인이 된 이다. 재민을 친아들처럼 아꼈던 그녀는 하직인사를 올리러 입궁한 재민을 보고 눈물을 참지 못했다. 자녕궁에서 세 모자가 전처럼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 건강에 유의해야 한다며 신신당부를 했다. 당금의 황제인 재현 또한 전송을 하러 나와 재민의 손을 잡고 약속했다. 조금만 참고 견디면 다시 볼 날이 있을 거라고.

 그렇지만 그 날이 오기 전까지는 이제 이 황량한 고원과 그 너머 초원이 재민이 있을 곳이다. 재민은 훈서족과의 화친혼을 위해 이 곳까지 왔다. 말이 화친혼이지 실상 볼모나 다름 없을 처지다.

 황자가 화친혼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다른 왕조에서는 왕래혼이라는 그럴싸한 명목으로나마 있었지만 이번 왕조에서는 재민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재현이나 태후나 재민에게 지극히 미안해했고 재민 자신도 참담했다. 재현이 등극을 했으니 당연히 자신이 곁에서 보좌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친왕 책봉도 머지않은 일이었다. 변경의 이민족이 화친의 대가로 황가의 일원인 양인을 요구하기 전까지는. 황제인 재현과 피로 이어져 있는 이여야만 한다고 했다. 재현의 소생은 이제 겨우 세 살, 두 살 먹은 남매가 전부였고 형제자매 중에는 양인인 공주가 셋이었으나 전부 하가한 뒤였다. 상대가 될 자는 재민과 나이가 같다고 했으니 미망인이 되어 궁에 돌아와 있는 고모들을 보내기에도 적절하지 못했다. 재민은 재현의 고민을 덜어주기 위해 지의가 내려오기도 전에 자청하고 나섰다. 그게 지켜주고 길러준 태후에 대한 도리였다. 국경을 어지럽히는 이민족의 정벌이야 어느 황제에게나 숙원이지만 재현에게는 구체적인 계획이 있었기에 그걸 믿는 바도 컸다. 치세가 안정된 이후여야 하니 장차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고 했으나 재현은 약속을 어긴 적이 없었다. 재민은 그 기간만을 버티고 황성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여기서 그저 볼모로 살다 생을 마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왕야.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자 지성이 말머리를 가까이 하며 따라와 있었다. 


이제 곧 경계를 넘는답니다. 

그래.

마중나와 있는 곳에서 환복하셔야 되는 것 아시지요?

응, 알지.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린다. 재민은 편히 말하라는 듯 지성을 돌아봤다. 


제가 그쪽 사람들하고 친해져서 들었는데요.

응.

왕야하고 혼인하실 분요, 엄청 좋으신 분이래요. 심성도 고우시고, 우리 말도 유창하시고.

지성아.

예?

나중에 듣자, 나중에. 피곤하구나.

예, 예. 


 제 딴에는 재민을 위해 미리 알아온 것이 분명했지만 재민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양인을 고집했으니 상대야 음인일테고, 이민족인 이상 심성이 곱던 좋은 사람이건 상관 없었다. 이미 정해진 짝이니 호오를 가려 무엇할까. 돌아가는 날까지 되도록 아무 감정 없이, 서로 화친의 증표로 의무를 다할 뿐인 게 좋을 터였다. 
















 훈서족과 황실의 예법이 서로 달라, 혼례는 두 가지 방식으로 치러졌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이어진 예식이 끝나고는 떠들석하게 잔치가 벌어졌다. 낯선 이들이 주는 술을 마다하지 못했더니 어느새 늦은 밤이었다. 초야를 위해 준비된 파오는 다소 멀리 떨어져 재민은 가는 내내 지성의 부축을 받았다.

 지성이 자신을 낮은 침상에 뉘이고 물러나 밖으로 나가기까지, 재민은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술기운이 오르기는 했으나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피하고 싶었을 뿐이다. 원하지도 않았던 혼례였다. 몇년 뒤에는 황도로 돌아갈 것이다. 입 밖에 내서는 안되는 말들이 속에서 넘실거린다. 

 상대는 훈서 일족의 둘째 왕자였다. 이 곳에 다다르기까지 저들이 불문에 부친 이유가 있었다. 이전에 남색을 가까이 한 바 없어 더 난감했다. 어차피 양인이고 음인일 바에야 상관 없으나 그래도 모양새가. 황성에서라면 정실이 굳이 음인일 필요도 없고 음인이라 해도 명문귀족의 영애들 중에서 짝을 찾았을 것이다. 문득 제가 놓치고 잃은 것들이 깨달아져 더 역정이 났다. 재현이 황위다툼에서 승리해 등극하기까지, 애매한 처지의 황자로 몸을 낮추고 살아남느라 고생했는데. 이제는 이역만리 야만의 땅까지 와 다시 또 살아남기 위해 애써야 한다. 괜찮다고 웃으며 떠나왔지만 당연히 괜찮지 않았다. 취기에 비애감이 짙어진다. 재민은 손등으로 눈을 짓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쉬어도 갑갑함이 풀리지 않는다. 


..


 재민은 누운 자리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앉은 인영을 향해 돌아누웠다. 종일 얼굴도 보지 못했다. 혼인할 때에 쓴 커다란 봉관에 얇은 금실주렴이 빼곡하게 달려 턱 끝이 간신히 드러났을 뿐이다. 선이 날카로운 것이 틀림없는 사내애였다. 너도 참. 사내가 음인으로 태어나 고생이 많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비의 친소생이라는데, 음인이라 서자인 첫째 왕자에게도 밀리는 처지다. 그저 음인만 아니었어도 순탄히 왕위를 차지할 수 있었을 텐데. 아닌가. 음인이 그나마 왕자로 태어나 상대를 골라 혼인할 수 있으니 다행이려나. 훈서왕은 이 아들을 꽤나 아끼는 모양이었다. 굳이 대국의 황자를 배필로 청할 정도였으니.

 재민이 자리에서 일어나 앉자 기척을 느꼈는지 움찔한다. 예법대로라면 봉관을 내리고 의복을 벗겨야 하겠지만 내키지 않았다. 재민은 목을 가다듬고 신중히 말을 골랐다.


오늘 고생이 많았습니다.

..

우리 말이 유창하다 하니 내 편히 말하리다.

..

나는 장차 그대에게 예를 다하고 근신하여 훈서왕과 왕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오. 그렇지만,

..

그대 또한 일족의 왕자이니 짐작하겠지요. 이 혼인이 가지고 있는 의미도 그렇고, 특히 앞으로의 정세에 따라 많은 것들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해서 아무래도 우리 사이에 불미스러운 여지를 두어서는 안될 듯 합니다.

.. 불미스러운 여지라 함은?

후사 문제 말입니다.


 아. 간결한 답에 낮게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재민 또한 처음 마주한 상대에게 이런 말을 꺼내기는 쉽지 않았다. 자칫하면 혼례를 올린 첫날부터 사이가 틀어질 수도 있다. 그래도 처음부터 분명히 해야 후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돌아갈 것인데 아이가 생기기라도 하면 큰일이 된다. 두고 갈 수도 없고, 데려갈 수도 없는 것이다. 이후 후계 문제로 불거질 수도 있는 바, 최대한 말끔하게 정리하고 싶었다.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그런 말이군요.

예.


 재민의 대답에 상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예상 밖의 이야기였으려나. 재민은 가만히 기다렸다. 의사가 일치되지 않는다 해도 어차피 수태가 되고 안되고는 재민에게 달렸으니 상관 없었다. 그저 잘 따라준다면 좀더 고마울 것 같긴 했다. 


보통 대국에서는.. 초야에 이런 대화를 합니까?

예?

예를 다하고 근신한다는 말은 진심으로 공경하고 화목하리라는 것과는 거리가 있지요. 대국에서는 초야에 부부가 이런 대화를 하느냐 물었습니다. 

.. 아니,

아니라면 봉관부터 거둬 주시겠습니까? 예가 아닌 줄은 아나 예를 따지지 않기로 하신 것은 왕야께서 먼저이신 것 같습니다.


 차분한 말씨에 재민은 허둥지둥 봉관을 내렸다. 땀이 맺힌 이마에 틀어올리고 남은 잔머리가 눌러붙어있다. 무게가 상당했던 모양이다. 불빛에 드러나는 얼굴이, 재민이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훈서족의 둘째 왕자는 훈서왕도 그 형인 첫째 왕자와도 닮지 않았다. 초원의 사람 같지 않게 피부가 희고 이목구비가 뚜렷했다. 파사나 희랍인들처럼 눈썹뼈가 도드라지고 콧대가 산처럼 높다. 그에 반해 눈과 입은 재민보다 작았다. 분명 구석구석 강한 생김새였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이마가 둥글고 눈두덩이 도톰하여 그런 듯 했다. 눈꼬리가 아래로 처지고 얇은 듯한 입술이 가운데만 도톰하여 그런 듯 했다. 그림으로 옮겨 그릴 수도 있을만치 자세히 뜯어보는데, 그런 재민에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후사는 나중의 문제로, 후사가 생기고 안 생기고는 전부 왕야께서 알아서 하실 일로 압니다. 또한 여염의 평범한 부부들도 정이 깊고 얕음에 관계 없이 아이가 생길 수도, 생기지 않을 수도 있는 것으로 압니다.


 따지고 보면 옳은 말이라 반박할 수 없었다. 지성이 전해준 바로는 대국의 말이 유창하다더니, 유창한 정도가 아니었다. 그저 변방의 오랑캐로 일자무식이나 면하면 다행이리라 생각했던 것이 오산이었다. 한숨을 쉬고 살짝 웃어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 새로웠다.


그러니 이는 왕야께서 걱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뜻대로 하십시오.


 입고 있던 의관을 정제하고 다시 재민 쪽을 향해 바로 앉았다. 재민은 아까부터 상대가 하는 말에 변변히 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그 또한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신기해서. 음인이라면 으레 제 한몸 건사하기 어렵게 병약할 줄 알았으나 지금 눈 앞에서 조용히 저를 응시하고 있는 이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종일 지치고 방금 전까지 바깥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을 눈에는 생기마저 돌았다. 초원에는 별이 무수하다더니 왕자의 까만 눈동자 안에 다 들어앉은 듯 했다. 비로소 술이 깨는 듯 했다.
















 다음날 아침 재민이 눈을 떴을 때, 왕자는 곁에 없었다. 이부자리에 희미하게 남은 단내가 밤새 머무르다 간 것을 알리는 유일한 증표였다. 야자나무 열매 같기도, 익숙한 꽃내음 같기도 했다. 베개 맡에 코를 대고 잠시 킁킁거렸으나 분명하지 않았다. 

 어젯밤에는 각자 옷을 풀고 한 데 누워 잠들었을 뿐 초야랄 것이 없었다. 왕자는 재민이 후사를 원하지 않는다고 한 말을 그리 이해한 듯 했다. 예를 다하고 근신하겠다는 말은 달리 고려하지 않은 듯 했다. 아쉬울 것도 없지만 조반도 같이 들지 않고 어디론가 쌩하니 가버린 것이 탐탁치 않았다. 분방한 것이 이민족의 습성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은. 하여 재민은 일찌감치 식사를 마치고 지성에게 저번에 하려다 만 이야기를 고하도록 했다. 제가 결혼한 상대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었다.


둘째 왕자 전하시고요. 왕비마마 소생이시고요.

그건 알지.

동복 소생으로 손 위에 공주 전하가 계시는데 천산 너머 단월로 시집가셨답니다. 어려서 거길 따라가 계셨었대요. 거기서 배우셔서 우리 말도 단월 말도 능통하시구요. 단월의 태자전하와 글동무로 동문수학 하셨는데 뛰어나셨대요.

그렇군.

음인이시기는 한데 기운이 강하시진 않은 모양이예요. 처음 발현하셨을 때도 작게 앓다 지나가셨대요. 여기 사람들이 그 걱정을 하더라구요. 나중에 수태하시기 힘들까봐. 그런데 뭐, 왕야께는 잘된 일인 듯도 하구.

응.

여기 시종들이 다 아까워 죽으려고 해요. 혈통도 으뜸이시고 성품도 훌륭하시고 인물까지 훤하신데 음인인 게 그저 원통하다구요. 

첫째 왕자가 장차 왕위를 물려받는 거지?

예, 그렇다네요.

형제 사이에 반목이 있으려나?

아뇨. 왕자님이 워낙에 깍듯하셔서 두 분 우애도 좋으시고 첫째 왕자님이 끔찍하게 아끼신대요. 

흠.

저기, 왕야.

왜?

잘 좀 대해주시면 안될까요.

누구.

왕자 전하요.

갑자기 왜?

여기 사람들 다 눈에 불을 켜고 있어요. 책잡히기 쉬우실 걸요. 어젯밤에도 침구가 깨끗하게 나왔다고 벌써들 말이 많아요.

그건,


재민도 할 말이 없지는 않았으나 아직 가례도 치르지 않은 시종아이를 데리고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는 없었다. 하기는 재민이야 안에 들어앉아 다른 이를 보지 않으면 그만이나 지성이나 저를 수행하기 위해 온 이들은 재민의 행실에 따라 지내기가 천양지차일 터였다. 대국에서 왔다고는 하나 볼모나 마찬가지다. 주인이 그러할진대 부리는 사람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다들 황궁에서, 왕부에서 대우 받으며 지내는 것에 익숙했을 텐데, 안쓰런 마음도 들었다. 토를 달지 않고 알았다고 하자 좋아라 한다.


그런데, 그게 다야?

뭐가요?

알아온 거 그게 전부냔 말이다.

어.. 뭐 더 알아올까요?

그냥 뭐, 뭐 좋아하는지, 이런 얘기는 없었어?

예?


작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기에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고 말았다. 잘해주라며, 뭘 알아야 잘해주든 말든 하지. 마땅치 않아 혀를 차게 된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지성에게 왕자가 아침부터 어딜 그렇게 나다니는 건지 알아올 수 있으면 알아오라 했다. 나간지가 한참인데 해가 저물도록 한 번을 들여다 보지 않는다.
















 왕자는 땅거미가 내려앉아 어두워질 무렵 돌아왔다. 종일 파오에서 책을 보던 재민은 한참만의 인기척에 벌떡 일어났다. 왕자는 따르는 시종 하나 없이, 혼자 들어와 혼자 환복을 했다. 뒤에 재민이 서있는 걸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해 헛기침을 하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황성에서라면 부부가 아니라 부모 자식이나 형제 간에도 내외를 할 상황이다. 이제껏 어디서 뭘 하다 왔는지 의대 앞에 선 옷차림이 단촐하고 날렵했다. 꽤나 말랐다. 재민 또한 살집이 있는 편은 아니나 음인이라 그런가 키는 비슷해도 골격이 더 좁은 듯 했다. 


저녁 드셨습니까.


 평복으로 거의 다 갈아입었을 무렵 재민에게 말을 걸어왔다. 할 일이 달리 없어 먹기야 이르게 먹었다. 아랫사람에게 물어보면 알 것을 직접 묻는 것이 의아했다. 동시에 먹었다고 하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먹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좋을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재민이 아무 말이 없자 뒤를 돌아본다. 그저 솔직한 것이 최선이라 여겨져 고개를 끄덕였다. 재민을 따라 고개를 끄덕이더니 돌아오기 전 요기를 했으니 자신도 괜찮다고 설명을 했다. 왕자는 보이는 것과 달리 세심한 성격인 듯 했다.


일찍 돌아오려고 했는데 늦었습니다. 다음부터는 별다른 일이 없으면 조반도 석반도 함께 들도록 하겠습니다.

.. 오늘은.

예?

오늘은 별다른 일이 있었습니까?


재민이 질문을 해올 줄은 몰랐는지, 잠시 멍한 표정이 되었다가 풀었다. 다가와 재민이 앉아있는 탁상 앞에 마주앉는다. 아침녘에 이부자리에서 맡았던 약한 단내가 풍겼다. 어디서 씻고 왔는지 방금 돌아온 얼굴이 말갛다. 뜬금없이 살짝 더워지는 느낌에 재민은 가까이 있던 등잔대를 들어 옮겼다.


우기가 닥치기 전에 소와 양떼들을 옮겨야 해서요. 백성들이 알아서 하기에는 힘들어, 가서 돕고 살펴야 합니다.

종일 일했습니까?

예. 며칠을 그 일에만 매달려도 어렵습니다. 정말 많거든요. 상상이 잘 안 되시지요?


하고는 싱긋 웃는다. 또렷했던 인상이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웃음이었다. 소와 양떼들을 이야기하는 중이라 그런지 몰라도, 강아지 같았다. 털이 희고 복슬한 강아지. 넋을 놓고 보다 미소가 옅어지면서 정신이 돌아왔다. 사람을 앞에 두고 엉뚱한 생각을 한 것이 겸언쩍어 재민은 슬쩍 시선을 틀었다. 


왕야께서는 무얼 하셨습니까?

저야 뭐. 가져온 서책을 보았습니다.

무료하지 않으셨어요?

그다지. 

책 읽기를 좋아하십니까?

좋아하는 편은 아니나 달리 할 일도 없으니.


 재민이 별다르게 재미난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또 웃었다. 습관인 듯 했으나 한결 마음이 편안해진다. 지성을 제외하고는 종일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았는데, 왕자가 생각보다 살갑게 제 이야기를 하고 이것저것 물어와 반가웠다. 


허면 내일은 저와 같이 나가시겠습니까?

어디를요?

저는 일을 도우러 가야합니다. 목축장까지 가는 길이 상당하니 왕야께서는 거기까지 말을 달리셨다 혼자 돌아오셔도 되고, 아니면 풍광을 즐기다 오후에 저와 함께 돌아오셔도 됩니다.

방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전혀요. 왕야께서 말타기가 진력나신 게 아니라면요. 강산이 대국의 그것과는 다르니 보실만 할 겁니다.

말타기에 진력이 나다니요?

대국에서 여기까지 오시는 내내 말 위에 계셨다 들었습니다. 저도 단월에서 이곳으로 돌아올 적에는 마차가 더 편했는데 장하십니다.


 재민의 예상대로 신행길에 말을 탔는지 마차를 탔는지를 두고도 이미 왕자의 귀에까지 이야기가 들어간 모양이었다. 장하다며 웃는 얼굴이 정말 순수하게 대견하다는 듯해 재민 또한 웃었다. 굳이 추켜올리는 게 꼭 어릴 적 유모들이나 할 법한 칭찬이었다. 왕자나 재민이나 같은 나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 웃겼다.


왕야.

예.

이것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무엇이요.

원하시지는 않았으나 오시게 되었으니 이대로 저와 좋은 말동무도 되어주시고 친우도 되어 주십시오. 저도 왕야께 사려깊은 친우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아버님이 제게 미련이 많으십니다. 격에 맞지 않는 혼사를 청한 것을 노여워 마세요. 부모가 자식을 애틋히 여기다보면 어리석어집니다.

제가 노여워 할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요.

저는 어머님을 일찍 여의어 부모가 자식을 위해 어리석어진다는 것은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오늘 왕자 전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니 저를 성심으로 길러주신 태후마마께 이렇게나마 효를 다할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듭니다.

예. 그 분들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평안히 지내는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으면 됩니다.


 눈이 다 접히도록 웃는다. 살아온 날이 전혀 다르니 할 이야기가 많겠다고 기뻐했다. 천산 너머 단월국에 다녀온 이야기도, 재민을 길러준 모후와 친형처럼 가까운 황형의 이야기도 차근차근 다 나누기로 했다. 부쩍 가까워진 느낌이 좋기도, 불편하기도 했다. 지나치게 가까워지면 안되는데, 재민이 망설이기도 전에 웃으며 이리저리 이끄는 게 싫지 않았다. 오히려 기꺼워 탈이었다. 나고자란 곳에서 멀리 떠나와 외로이 있는 것이 문제인 듯 했다. 마음을 많이 주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말끔하게 따로 누운 것이 흡족하지만은 않았다.
















 왕자에게서 나는 달짝지근한 향이 무엇인지는 따라나선 초원에서 깨달았다. 정향화였다. 서북의 정향화는 홍류나무만큼이나 크게 자랐다. 연한 보랏빛을 띄는 꽃들이 줄지어 달리고 꽃줄기가 늘어져 바람에 나부끼는 모양새가 아름다웠다. 왕자는 할 일을 하러 가고, 그를 도와줄 수 없는 재민은 정향화와 홍류나무가 군락을 이루는 호수 부근을 말을 타고 돌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었으나 나무 그늘이 많아 무덥지는 않았다. 종일 파오 안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보다야 나았다. 꽃가지 사이를 천천히 거닐며 햇빛을 받으니 제법 운치가 있었다. 따르는 이 없이 홀로 다니는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익숙하지는 않으나 홀가분했다. 탁 트인 초원에 나와 있어 그간 갑갑했던 심정이 다소 풀리는 듯 했다.


벌써 끝났습니까.

아니오, 제가 일찍 나왔습니다.

그러셔도 됩니까?

왕야께서 오셨으니 좋은 핑계가 됩니다.

저 때문이면 그러시지 않아도 됩니다. 

왕야 때문이 아니라 제가 꾀가 나서 그렇습니다.

남들이 욕하지 않겠습니까.

뭐라구요.

일을 돕지는 못할 망정 성실하신 왕자 전하까지 꾀어낸다고요.

부왕이나 형님 전하 모두 제가 일없이 노는 것을 더 좋아하십니다. 왕야를 칭찬하실 걸요.

그렇습니까.

예. 왕야께서는 잘하고 계십니다.


 무얼 잘한다는 건지. 칭찬도 웃음만큼이나 습관인 듯 했다. 재민에게로 가까이 오던 왕자가 훌쩍 말에서 뛰어내렸다. 고삐를 잡아주는 이 없이도 말이 알아서 호숫가의 가장 큰 홍류나무 아래로 간다. 주인을 닮아 순했다. 잠시 고민을 하다 재민도 말에서 내렸다. 혹시 몰라 고삐를 잡고 있었더니 놓아달라고 머리를 흔든다. 반신반의 하며 풀어주자 얌전히 제 동무 곁으로 갔다. 서로 머리를 비비고 반가워 하는 것을 지켜보다 걸음을 옮겼다. 재민 또한 왕자의 곁으로 가 비스듬히 섰다. 환한 하늘 아래서 보니 얼굴이 더 희다. 양 볼이 발그레 한 것이 좀 더운 듯 했다. 


덥습니까.

예, 조금.

그늘에 가서 쉴까요.


 재민의 말에 머뭇거린다. 재민은 뭐든 왕자가 하자는 대로 맞춰줄 생각이었다. 그러고 싶은 기분이기도 했고, 어차피 이 초원은 왕자의 땅이다. 뭐가 좋은지는 자기가 제일 잘 알 터였다.


실은.

예.

일과가 끝나면 돌아가기 전에 여기서 멱을 감고 씻는데..


 왕자는 말끝을 흐렸다. 아. 재민은 뒤늦게 왕자의 뜻을 깨닫고 민망해졌다. 재민이 있어 여의치 않다는 소리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오기가 생겼다. 어제고 그제고 한 방 안에 있는데도 척척 옷을 갈아입던 건 뭐고? 맨살을 본 적은 없지만 분명 환복은 거침 없었다. 덩달아 태연하게 옷을 갈아입느라 고역이었건만 이제 와 내외를 하겠다는 건가 싶었다.


들어갔다 나오십시오.

예?

어차피 부부지간이 아닙니까.

어..

같이 들어갈까요?

아니오, 아닙니다. 설산의 눈녹은 물이라 찹니다. 익숙하지 않으면 놀라실 거라..

그럼 전하만 다녀오십시오. 저는 어차피 땀도 나지 않았으니 돌아가 씻어도 됩니다.

..

어서요.

.. 그럼 저만치 가 계세요.

왜요.


 불만이 있다는 양 볼이 부풀었다. 백주대낮부터 벗은 꼴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으나 어쩐지 뜻대로 순순히 움직여 주고 싶지 않았다. 지키고 있겠다 하니 난감하게 웃었다. 어차피 이 호숫가와 숲은 왕자의 생일 선물 중 하나라 아무도 근접하지 못한다 했다. 


아무도요?

예.

그럼 저는.

왕야는 예외지요. 부부지간이 아닙니까.


 재민이 놀리느라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준다. 그래서 재민은 계속 고집대로 비키지 않았다. 초야를 치르지 않았어도 부부지간이니까. 한숨인지 뭔지 모를 것을 폭폭 쉬더니 왕자는 결국 겉옷을 벗었다. 다 벗지는 못하고 얇은 내의만 입고 물에 들었다. 다 벗어도 되는데. 내가 뭘 어쩐다고. 재민은 호숫가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조용히 기다렸다.

 설산의 눈녹은 물이 흘러내린 것이라더니, 영롱하게 맑은 물이 이따금 잔물결을 치며 움직였다. 가벼운 바람 한자락에 주위의 나무들에서 꽃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땅 위는 이미 향기나는 꽃이파리들로 가득했고, 물 위에서도 떠다니며 일렁였다. 저래서 정향화 향기가 몸에 배었나. 그렇지만 그건 물든 게 아니라 타고난 살내음이었다. 재민은 문득 발 끝까지 밀려온 물에 손을 넣어보았다. 왕자의 말대로 차가웠으나 이보다 더 더운 계절에는 괜찮을 듯도 싶었다. 초원에 뜨는 해는 머리 꼭대기에서 내리쬐어 황성에서보다 뜨겁다. 황성에서는 한여름에도 김이 오를 정도의 더운 물이 아니면 들어가지 않았는데, 여기서는 괜찮을지도.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왕자는 물에서 나오는 중이었다. 몸을 감싼 얇은 천은 이미 젖어 옷에 가려져야할 곳의 태를 나타냈다. 옷깃 사이로 판판한 가슴이 드러나고 아래로 내려온 옷자락은 허벅지를 간신히 가리고 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확실히 같은 성별임을 알려주고 있으나 이상하게 부끄러운 느낌이 든다. 검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붙어 있고 눈가에는 물방울이 맺혀, 전설 속 인어의 눈물 같았다. 왕자는 내내 재민을 외면하며 올라와 벗어두었던 옷을 서둘러 입었다. 웃음기라고는 하나도 없어, 도리어 처연한 얼굴이었다. 곁눈질로 그 움직임을 빠짐없이 쫓으며 재민은 제가 환약을 챙겨야 하는 시기인지 잠시 헤아렸다. 황성에서 이리로 오면서, 혹시 몰라 기운을 억제하는 약을 잔뜩 처방받아 온 터였다. 필요할 시엔 복용하면 그만이다. 입술을 씹으며 생각했다.



Angma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