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HO 님과 함께 쓰는 연작입니다.

*KAHO 님의 <토니 스타크가 서른 살 연하의 어린 연인과 연애하는 방법, http://posty.pe/3y94e1>, <첫 번째, http://posty.pe/38a2vq>과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그날 이후로 조금 성가신 버릇이 생겼다.

"피터, 배고파. 밥 먹으러 가자."
"파인애플 피자 먹자."

"너희 집에서 숙제하고 저녁 먹고 가도 되지? 숙모 계셔?"
"네가 언제부터 허락을 맡았다고. 숙모 늦으실걸. 가서 파인애플 피자 먹자."

"이제 왔니? 피터, 저녁 뭐 먹을까? 먹고 싶은 거 있니?"
"피자요. 파인애플 피자요."

"오늘 조금 늦을 것 같은데, 이따 저녁 혼자 먹을 수 있지?"
"다녀오세요, 피자 시켜 먹을게요."

"피터, 이따 끝나고 저녁 먹ㅇ,"
"파인애플 피자!"

파인애플 피자를 일주일째 찾던 날, 네드도 숙모도 더는 내게 메뉴를 묻지 않았다. 처음 이틀은 왜 갑자기 피자에 꽂혔냐고 물었고, 그 이튿날엔 찜찜한 얼굴로 피자를 사 줬고, 그 다음부턴 짜증을 숨기지 않았다. 생전 찾지도 않던 파인애플 피자를 왜 그렇게 찾냐고 타박했다. 반면 나는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 방식으로 꽂히긴 했다. 그리고 그 방식은 주변 사람들을 괴롭게 만들었다. 계기를 생각하면 그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토니 스타크와 사귀게 된 첫날, 가까스로 뱉은 고백이 정말 가까스로 통한 그 기쁜 날, 나는 토니 스타크의 파인애플 피자가 됐다. 비유를 한 건 토니였고 자처를 한 건 나였다. 별로 좋은 의미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꽂힌 이유는 하나다. 토니의 기호식품에 파인애플 피자가 들어가게끔 만드는 건 온통 내 몫이라는 것. 부담이라고 하기엔 너무 기쁘고, 걱정이 앞선다기엔 토니를 좋아하는 마음 하나만으로도 모든 게 상쇄될 것 같다. 자신 있다.

그런 이유로 파인애플 피자가 머리에 깊게 남아 일주일을 주구장창 피자만 찾았다. 덕분에 학교에선 같이 밥 먹는 친구를 잃게 생겼고, 집에선 한동안 메뉴 결정권을 박탈당했다.



* *



손잡고 싶다. 그런데 못 잡게 한다. 슬쩍 손등이라도 스치면 눈치 빠르게 손을 슥 빼고 애꿎은 선글라스를 고쳐 쓴다. 작게 '치'라고 볼멘 소리를 내면 귀신같이 듣고 나를 바라본다. 그러면 아무것도 아닌 척, 그런 적 없다는 듯 딴청을 피운다. 데이트라더니, 팔짱도 안 돼, 손도 안 돼, 소매도 안 돼, 옷자락도 안 돼. 데이트라며! 새삼 비싸도 너무 비싼 남자랑 만나고 있다는 걸 이렇게 실감한다. 갖고 싶은 건 다 갖게 해 주고, 먹고 싶은 것도 다 먹게 해 주면서 정작 토니 자신한테는 손도 못 대게 한다. 서운함에 신발 끝을 툭툭 차고 있으니 토니는 슥 쳐다보곤 먼저 저만치 가 버린다. 별 수 있나, 쫓아가야지. 물론, 손은 못 잡는다.

그러다 문득 눈이라도 맞춰 오면 정말이지, 심장이 멎을 것 같다. 나도 모르게 같이 멈춰서 눈을 들여다보게 된다. 주변이 암전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화려한 광고와 회전목마에서 흐르는 노래 소리가 무색하게 오로지 그 눈만 보게 된다. 그러면 잠시 멈췄던 심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천천히 뛰기 시작하고, 곧이어 나조차도 어쩔 수 없는 속도로 아주 빠르게 박자를 탄다. 쿵, 쿵. 꼭 판막 너머로 소리가 들릴 것 같다. 자칫 손을 뻗을 뻔했다. 토니가 내 머리에 가볍게 손을 얹고 마구 부비지 않았더라면, 당장에라도 토니를 끌어안을 뻔했다.

토니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다 알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특유의 거만한 얼굴이 놀랄 것도 없다는 말투로 말했다. "내가 그렇게 멋있어? 넋 놓고 볼 정도로?"하고는 또 먼저 저만치 가 버렸다. 날 두고 가 버리는 매정한 뒷모습에 대고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토니가 보지 못해서 다행이다.

비록 손도 못 잡고 눈도 오래 못 마주치는 데이트지만, 종일 웃고 있다. 파인애플 피자를 먹을 때보다 몇 배는 더 웃고 있다. 그런 나를 보더니 토니가 따라 웃는다. 그렇게 열 번 정도 쳐다보면 한 번 웃어 주는데, 그게 또 너무 좋아서 계속 웃게 된다. 연애가 이런 건가? 네드가 스타워즈 피규어랑은 비교도 안 되게 좋은 거라고 했는데, 정말 그렇다. 언제 아이언 맨이랑 쇼핑몰에 오고, 언제 아이스크림을 마음껏 담고, 언제 '내 애인은 토니 스타크예요!'라고 말할 수 있을까. 토니가 좋은 만큼 초코 아이스크림을 꾹꾹 담는다. 이미 정량은 훨씬 넘었다. 토니는 손님용 테이블에 앉아 턱을 괴고 다른 손으로 장난감을 만지작거린다. 대뜸 눈이 마주치자 이번엔 절로 헉 소리가 나왔다. 반했다는 말이 입밖으로 튀어나갈까 봐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이거 계산은 어떻게 해요?"
"프라이데이가 알아서 하고 있어. 신경 쓰지 마."
"그럼 아이스크림 한 스쿱 더 얹어도 돼요?"
"통째로 들고 가도 돼."

안 먹는다더니, 입가에 묻은 초코를 닦기도 전에 또 한 입 베어문다. 조금 쌉싸름하고 많이 달다. 혀끝에 오래도록 남는 단맛이 한없이 달콤하다. 입 안에서 아이스크림이 채 없어지기도 전에 달콤한 맛이 아쉬워 또 베어물게 된다. 그러다 몇 번 먹다 말고 아예 토니에게 건넸다.


"내가 너 그거 다 남길 줄 알았다."


어쩔 수 없어요. 좋아하는 만큼 많이 담았단 말이에요. 차마 꺼내지 못하는 속마음은 아이스크림과 함께 토니의 손에 얹어진다. 토니는 핀잔을 주며 아이스크림을 받았고, 몇 걸음 채 옮기기도 전에 전부 다 먹었다. 입에 안 맞으면 얼마든지 버릴 수도 있으면서 내가 담아 준 아이스크림을 콘 부분까지 전부 먹었다. 다 먹고 나서는 달다, 맛없다, 배부르다 등의 불평을 숨기지 않았다.

반칙이다. 말도 안 되지만, 나한테만 조금 가혹한 반칙이다. 저런 모습까지 좋으면 나중엔 정말 숨이 멎어 버릴지도 모른다. 물리적으로 숨이 멎어 호흡 곤란이 올지도 모른다.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좋다는 건 국어책에나 존재하는 문장이 아니다. 실제로 경험하고 있으니 불안과 행복을 오가게 된다. 토니가 옆에 있다는 사실조차 의심이 들어 자꾸만 확인하게 된다. 특히나,


“낯간지러운 소리를 잘도 하네.”

“그야, 사귀는 중이잖아요. 이런 건 사귀는 사이에 존재하는 특권 아니에요?”


나를 위한 분수 앞에서는 더 그렇다. 분홍 조명이 섞인 사인이 분수대에 비쳐 옅은 벚꽃 색을 만들었다. 연분홍의 예쁜 물이 되어 간헐적으로 튀어올랐다. 한꺼번에 튀어올랐다가 점차 사그라들었고, 가운데에 꽃 모양을 그렸다가 다시 처음부터 반복했다. 아름다움에 시선을 뺏기고 차차 익숙해져 물줄기의 패턴을 읽을 때 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근사한 분수 앞에서 연인과 키스도 안 하면 분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 *



나는 예의없는 인간이다. 내가 얼마나 '친절한 이웃, 스파이디'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데! 그래도 변명의 여지는 있다. 예의를 차리려고 했으나 나의 연인이 거절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괜찮다. 분수에 대한 예의는 못 지켜도 된다. 데이트의 기본, 손잡기도 못 했지만 그것도 괜찮다. 어설픈 손바닥 키스를 받아 주던 토니의 모습은 그야말로 사랑스러웠기 때문에 아예 그 장면이 머리 속에 박혀 버렸다. 파인애플 피자처럼.


이튿날, 잠에서 깼을 때 간밤의 기억이 진짠가 싶어 기념품으로 챙겨 온 티셔츠를 찾았다. 진짜네. 그 완벽한 하루가 꿈이 아니었네. 걱정스러울 정도로 완벽했다. 뭐랄까, 하루아침에 파인애플 피자에서 치즈 스테이크 피자로 업그레이드된 기분이다. 휴대폰 알람이 울린다. 일요일치고는 빠른 기상 시간, 눈을 뜨기 전부터 토니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졌다.


고양이 세수만 겨우 마치고 거의 날다시피 마구 내달려 타워 창문을 두드렸다. 친절한 프라이데이가 아침 인사를 하며 문을 열어 줬다. '보스는 주무시는 중입니다'라고 덧붙이고는 조용히 기다리길 당부했다. 사실 토니가 자고 있을 시간이라고 짐작은 했다. 어제 퀸즈까지 데려다줄 때, 토니는 몹시 피곤해 보였다. 나는 할 수만 있으면 시간을 붙잡고 싶었는데, 토니로써는 여간 어색하고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괜시리 미안해져 작별 인사도 빠르게 나누고 헤어졌다. 그리고 오늘은 절대 귀찮게 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며 잠들었다. 나도 몰랐다. 이렇게 눈 뜨자마자 타워에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보고 싶은 걸 어떡해.


곤히 잠든 토니를 가만히 본다. 긴 속눈썹이 고르게 내려가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숨소리에 맞춰 살짝 흔들린다. 아침 여덟 시가 다 되어 가는데도 빛 한 점 없는 침실은 아주 어둡다. 넓은 침대에서 토니는 잠들어 있었고, 깨우지 않기 위해 살금살금 옆으로 가 수천 번의 -사실 딱 한 번의- 고민 끝에 침대 위로 올라갔다. 잠든 연인의 위에 올라타 좀처럼 눈 뜰 생각을 안 하는 토니를 살폈다. 가끔 엄할 땐 되게 무서운 얼굴이면서 잘 땐 또 천사같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여유로운 주말, 영화 속 서로를 깨우는 아름다운 연인을 재현할 생각은 없다. 꿈도 크지, 차라리 이 순간만큼은 리트리버 강아지가 되고 싶다. 그러면 저 입술에 무작정 키스를 퍼부을 수 있을 텐데.


"피터?"


깨우려던 게 아닌데. 토니가 직접적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통 잠을 못 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가끔 UN이나 비전과 연락이 닿을 때면 상대 측에서 꼭 이렇게 물었기 때문이다. '요즘 잠은 좀 자나?'라고.


"뭐야, 왜 여기 있어? 어떻게 들어왔어?"

"프라이데이가 열어 줬어요."

"보안이 왜 이래? 너, 내가 오늘은 푹 쉬랬잖아."

"애인이라고 하니까 침실 문까지 열어 주던데요. 토니 보고 싶어서요. 어제가 전부 꿈 같고 안 믿겨지고 그래서,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어요."

"하……. 확인 다 했으면 좀 내려가지?"


토니는 짧은 핀잔과 동시에 두 눈을 부볐다. 프라이데이로 하여금 시간을 확인하고, 이마에 손등을 짚고 한참을 있었는데도 자세에 변함이 없자 다시 눈을 맞췄다. 입이 떨어지려고 하길래 먼저 선수쳤다.


"키스해도 돼요?."

"뭐라고? 당연히 안 돼."

"그럼 뽀뽀해도 돼요?"

"뭐가 다른데?"

"그것도 몰라요?"


아침부터 뭘 믿고 까부는지, 토니는 시종일관 어이 없다는 얼굴이다. 그러면서도 밀쳐내거나 화내지 않는 걸 보면 아직은 괜찮은 것 같아서 조금 더 다가가기로 했다. 초조하게 손끝까지 힘이 들어간다. 못내 귀찮다는 표정을 지우지 못하는 토니를 오래도록 바라보다 아주 빠르게 입을 맞췄다. 하도 짧아서 입술끼리 부딪히긴 한 건지 도통 느낌이 없다.


"......."

"이게 뽀뽀예요. 그리고 키스는,"


토니는 말이 없다. 할 말을 잃은 건지, 화가 난 건지 얼굴을 볼 수 없어 모르겠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벌어지는 입술을 겹쳐물었기 때문이다. 바짝 마른 입술을 포개어 살짝 힘 주어 빨아당겼다.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건가. 어정쩡한 자세가 힘들어 상체를 더욱 바짝 숙였다. 요령 없는 키스는 내가 느끼기에도 너무 서툴러 도통 오래 끌 수가 없었다. 어색하게 몸을 일으켜 토니와 눈을 맞췄다.


"이게 키스죠. 이제 알겠어요?"

"......."


일 초, 이 초, 삼 초. 참을 수 없는 정적 끝에 토니는 혀를 찼고,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니까, 이게 키스라고 가르쳐 준 입장인 것도 웃기고, 키스가 맞긴 한 건가 의구심이 들고, 결정적으로 연인의 키스치고는 아름답다기보단 사고 친 느낌만 한가득이다.



* *



"토니, 저 그거 첫키스였어요."

"키스 아니라니까."

"저 좀 봐요, 왜 눈도 안 마주쳐요. 그렇게 실수한 거예요?"


미안해요. 키스 같지도 않은 키스 이후, 토니는 나를 번쩍 들어 옆으로 치우고는 씻으러 들어가 버렸다. 나도 입술을 물어뜯다가 거실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스킨십 직후 각자 자리를 뜨는 연인이라니, 로맨틱과는 거리가 멀지만 차라리 다행이다. 토니도 나도 어쩔 수 없는 분위기였다. 살벌하게 어색해서 어떤 말을 해도 어울리지 않는 그런 분위기. 나는 그렇다 쳐도 토니는 노련하게 넘어갈 법도 한데, 씻고 나와서도 똑같다. 심지어는 날 똑바로 보지 않고 불러도 대답조차 하지 않는다.


"죄송해요, 이제 안 그럴게요."


여전히 대답이 없다. 차라리 혼내기라도 하지. 나를 피하는 토니 스타크는 겪어 본 적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만 좋았어? 나만 너무 짧았어? 나만 아쉬운 거야? 키스가 아니면 뭐야? 불안하다. 하지 말라고 할 때 하지 말걸 그랬나, 키스를 너무 못했나, 파인애플 피자를 너무 한꺼번에 들이부었나.


"토니."

"왜."

"우리 한 번 더 할까요?"









twitter.com/unseendeer

unseendeer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