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SE!

01


W. 롤라





BGM: Parov Stelar, Booty Swing










   좆같다는 건 왜 욕이 된 걸까. 분명 좆은 소중한 건데 말이야. 왜 그 소중한 게 욕이 됐을까? 좆같다는 말을 좋은 의미에서 쓸 수는 없는 걸까? 자리에 앉아 생각하는 게 고작 이런 것뿐이라는 게 퍽 아쉬웠다. 그래도 궁금했다. 왜냐하면 지금 내 기분이 좆같기 때문이었다. 내가 왜 이 늦은 시각에, 왜 이 곳에서, 왜 이딴 맛없는 술이나 마시며, 왜 이런 재미없는 사람들과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 손에는 내가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화이트 와인을 들고, 듣는 것만으로도 짜증나는 클래식을 들으면서 말이야. 나는 선율에 묻혀 버리는 얕은 한숨을 내쉬고 가볍게 턱을 괴었다. 그리고 파티장 안의 사람들을 물끄러미 보았다. 모두 다 행복해보였다. 비싼 옷, 비싼 구두, 비싼 관리를 받은 몸, 비싼 교육으로 다져진 교양. 모든 게 다 비싸고 좋았지만 글쎄, 좋은 것과 좋아하는 건 엄연히 다른 부분이었다. 나는 이런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곳에 있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왜냐하면 나는.





  "수호씨."





  홀 중앙 계단에 턱을 괴고 앉아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는 역시나 예쁜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자가 서있었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지난주에 나랑 밥 한 번 먹자고 했던 재벌가의 손녀였나. 아니면 하도 달라고 지랄해서 콘서트 티켓을 보내줬더니 그걸 인스타그램에 올려서 날 피곤하게 한 여자였나.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내 머릿속 카테고리에 '재미없는 사람'이라는 게 분명해졌고 그래서 나는 생긋 웃었다. 왜냐하면 난, 연예인이니까. 이 새끼들은 적재적소에 방실방실 웃어줄 수 있는 예쁜 인형이 필요한 거니까.





  "오랜만이에요."

  "네. 지난번에 보내주신 선물 감사합니다."





  선물? 내가 그런 걸 보낸 적이 있었나.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아, 하고 깨달았다. 식품 쪽이었나. 아닌가. 의류 쪽인가. 아무튼 그런 기업의 막내딸인 여자였다. 얼마 전에 개인전을 열었었고, 그래서 종대한테 화환 하나 보내라고 일러두었던 게 기억났다. 화환만 보내라고 한 건데 이 새끼가 다른 것까지 사서 보낸 거 아니야? 지 카드도 아니면서 긁기는 또 존나게 긁어요. 나는 대체 내가 준 선물이 뭘까 궁금했지만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 같아 그냥 웃고 말았다. 문제는 하나였다. 이 여자가 누구고 또 어떤 관계로 묶인 것까지도 기억이 났는데, 이름이 생각 안 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연예인 생활 10년 차면 이 정도 고비쯤은 유연하게 넘길 수 있어야 했다. 내가 바로 이 거지같은 판에서 10년간 굴러먹은 놈이고, 그래서 지금도 뻔뻔하게 웃을 수 있다는 거니까.





  "보러 가진 못 해서 미안해요. 그 때 투어중이어서 한국에 들어오지도 못 했거든요."

  "아휴, 신경 써주신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하죠. 그럼 언제 식사 한 번 할까요?"

  "우리 둘만?"





  16살에 데뷔해 10주년을 맞이한 지금까지 숱한 고비가 있었다. 19살부터는 지긋지긋한 스토커들에게 시달렸고 그건 아직까지도 이어지는 악몽이었다. 21살에는 만나본 적도 없는 여자 연예인과 엮여 스캔들이 터졌지만 당시 찍고 있던 드라마 홍보에 좋을 것 같다며 회사에서 입을 다물게 했다. 하여튼 진짜 좆같은 회사다. 아, 또? 좆같다는 건 대체 왜 욕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네. 아무튼. 24살에는 드라마 촬영 중에 부상을 당했었고 26살인 올해에는 투어 중에 도저히 무대에 오를 수 없을 만큼 아파서 전액 환불 사태까지 가기도 했었다. 그건 어느 정도 내 책임이긴 했지만 솔직히 빌미는 소속사가 제공한 거라고 생각했다. 스케쥴을 씨발 그렇게 돌려대는데 내가 아무리 강철 체력이라고 해도 어떻게 그걸 버티냐고. 투어 일정 짤 때부터 내가 홍콩은 못 갈 것 같다고 했는데도 굳이 날 보내서 어? 일일이 다 환불하게 만들고 어? 죄송하다고 허리 숙여 사과하게 만들고 어? 잘못은 지들이 했는데 왜 내가 죄송해야 돼? 나도 밤새면 졸리고 굶으면 배고픈 사람인데 말이야. 이 새끼들은 가끔 내가 회사에 돈 벌어다주는 로봇인 줄 아는 거 아니야? 진짜 나쁜 새끼들.


  아무튼 나는 온갖 풍파를 다 겪으면서 한 가지를 체득했다. 그건 바로 사람을 구워삶을 수 있는 기술이었다. 공략할 수 있는 대상 중 가장 쉬운 것이 바로 내 앞의 이런 여자였다. 첫째, 나에게 호감이 있다. 둘째, 나와 친해지고 싶어 한다. 셋째, 나에게 원하는 건 돈이나 인기가 아닌 호의뿐이다. 이 세 가지를 모두 충족시키는 이런 사람에게는 이런 방법이 아주 잘 통했다. 존댓말을 하며 적당히 거리감을 두다가 살짝 말을 놓아 친밀감을 표현해주면 정말 물개 박수라도 칠 기세로 좋아했다. 이번에도 역시 그것은 적중했고, 나는 이미 나에게 홀딱 반한 것 같은 여자를 보며 조용히 웃었다. 이따가 종대한테 이름 물어봐야지. 우리 종대는 똑똑하니까 알 거야.


  그렇게 구석에서 혼자 와인이나 마시면서 시간만 보내는데, 회사의 이사진 중 한 명인 형이 자꾸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돌아다니면서 재벌가 자제들이랑 좀 친해지라는 의미였다. 나는 그딴 거에는 존나 관심 없었다. 물론 나랑 지금 친한 사람들을 보면 다 부잣집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긴 했다. 예전에 아이돌로만 활동할 때에는 솔직히 그럴 일이 별로 없었는데, 본격적으로 배우의 길을 걷게 되면서는 이런 파티에도 자주 초대 받았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게 됐다. 필요할 것 같아 내 리스트에 넣어두긴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사람들을 좋아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사서 고생하는 편이 아니었다. 웬만하면 좋게 좋게 넘어가자는 신조로 사는 사람이고 그래서 일부러 사서 스트레스를 받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내가 지금 이 파티에 와있는 것은 바로 존나게 비싼 돈을 주고 옷을 사고 구두를 사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스트레스였다. 이사 형한테 억지로 끌려나와 한 무리에 서게 됐지만,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 새끼들이 씨발 왜 한국에서 영어로 얘기를 하고 지랄인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영어를 못 하는 편이 아니었다. 하도 투어를 돌다 보니까 회사에서 선생님까지 붙여서 회화 공부를 시켰고, 그래서 지금 당장 미국에 떨어트려도 집까지 구해 살 수 있을 정도로는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이 대화에 끼고 싶지 않았다. 이 새끼들도 나와 똑같은 놈들이었다. 필요에 의해 자기들의 리스트에 나를 넣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딴따라라는 생각을 지우지 않았다. 어쨌든 이 자식들의 눈에 나는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 재능 하나로 개천에서 난 용이 된 놈이니까. 저희들처럼 태어나자마자 가랑이 사이에 몇 백 억의 주식을 끼고 태어난 놈들이 아니니 신기하기도 하겠지.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사람을 왕따 시키기 있냐. 그리고 뭐 프랑스어나 이탈리아어 같은 것도 아니고 영어? 나 지금 존나게 무시하는 거지? 씨발, 하여튼 좆같은 재벌 새끼들. 그래! 알아냈다! 좆같다는 건 정말 욕에 최적화된 말이야! 저 앞에 붙으니까 얼마나 착착 달라붙고 좋아! 에라이! 좆같다!


  한참동안 그 틈에 붙잡혀 눈치를 보다가, 날 그 무리에 끼워넣은 형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도망쳤다. 나는 들고 있던 와인잔을 아무 곳에나 두고 무작정 홀 중앙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2층으로 마구 뛰어올라 긴 복도를 뛰어다녔다. 그걸 봤는지 뒤에서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수많은 방들 중 그냥 아무 문이나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잽싸게 문을 닫고 칠흑같이 어두운 방에서 숨을 곳을 찾았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서 핸드폰의 플래시를 켜려다가,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놀라 그냥 아무 곳이나 파고들었다. 뭔가 책상 아래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그 아래에 몸을 구기고 앉아 입을 틀어막았다. 저 형 새끼는 왜 맨날 나 가지고 재벌들한테 딜을 못 해서 난리야. 회사에 연예인 나밖에 없대? 아, 그렇지. 내가 우리 회사 소년 가장이었지. 그래. 그랬군.


  한참동안 숨죽이고 있다가 이내 다시 조용한 복도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나는 숨 막히는 고요함 속에 여전히 미동조차 않고 있다가 후, 하고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다시 꺼내 불을 좀 켜려는데, 갑자기 내 등 뒤에서 저기,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흠칫 놀라서 뒤를 돌아보자마자 나는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너무 아파서 소리도 못 냈지만 그런 건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이 사람 때문에 너무 놀랐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있는지도 몰랐다.





  "도망쳤어요?"





  낮고 굵은 목소리였다. 도망쳤냐는 다섯 음절에 나는 이 사람 역시 이 파티를 무지 재미없어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일단 너무 놀랐기 때문에 난 대답도 못 하고 가슴에 손을 얹었다. 심장 소리가 이 사람한테까지도 들릴 것 같았다. 잠시 아무 말이 없던 그 사람이 다시 말을 건넸다. 그 목소리는 정말이지 너무도 다정했다.





  "호스트가 누군지 몰라도 진짜 재미없네요, 그쵸?"





  호스트도 모르고 온 놈인가. 난 그래도 그 정도는 알고 왔는데 말이야. 뭔가 말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그랬다간 목소리로 내가 누군지 알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조용히 다시 방에서 나가려고 책상 밖으로 나왔다. 그런 내 움직임을 느꼈는지 그 사람이 손을 뻗어 날 잡았다. 우연찮게도 그 사람의 손과 내 손이 살짝 닿았다. 얼떨결에 내 손을 잡은 그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갑자기 날 끌어당겨 손을 매만졌다.





  "뭐야, 남자였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남자긴 한데 그 앞에 뭐야, 라는 건 왜 붙어? 내가 남자여서 실망했다 이거야? 그럼 내가 여자인 줄 알고 그렇게 다정하고 다정하고 또 한없이 다정하게 말을 건넨 거야? 지금은 또 완전 겨울 바람 같은 목소리네? 나는 그 말에 짜증나서 손을 뿌리쳤다.





  "네."

  "얼른 나가, 그럼."

  "안 그래도 나갈 거거든?"

  "왜 반말이야?"

  "네가 방금 반말 했잖아."

  "너 내가 누군지 몰라?"

  "넌 내가 누군지 아냐?"





  이 파티에 초청받은 사람이라면 하나같이 재벌가의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백조들의 파티에 초대 받은 오리는 나 하나뿐이니까, 오리 말고는 다 백조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새끼가 진짜 짜증났다. 여자한테만 사근사근하고 남자한테는 이게 뭐야. 불 켜져 있으면 아주 뺨이라도 칠 기센데? 나는 이제 어둠에 익숙해져 가는 눈을 살짝 비비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뜻, 수트를 입은 그 사람의 다리가 책상 아래로 길게 나와 있었다. 이 새끼가 내 얼굴을 보기 전에 여기에서 튀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걸음을 뗐는데, 책상 아래쪽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나가서 왼쪽 복도 끝으로 가면 밖으로 난 문 있어. 거기로 나가면 바로 주차장이야."

  "그걸 나한테 왜 알려주는데?"

  "도망친 거 아니야? 알려줘도 지랄이야."





  솔직히 방금은 좀 놀랐다. 부잣집 도련님 새끼들도 지랄이라는 말을 쓸 줄 알았던가. 나는 잠깐 동안 그 사람을 바라보다가 헛기침을 했다. 그래도 신경 써줘서 고맙다는 말이라고 하려고 했는데 이 새끼가 덧붙이듯 하는 말에 욕이나 안 한 게 다행이었다.





  "빨리 꺼져. 남자 새낀 관심 없으니까."





  미친 새끼.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문 쪽으로 향했다. 워낙 미친놈들이 많은 곳인 건 알지만 아직도 적응할 수 없었다. 미친놈이 나타나면 더 미친놈이 나타나고 그럼 그 다음에는 더더 미친놈이 나타나니까 말이야.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었는데 다시 그 새끼의 목소리가 들렸다. 복도에서 새어 들어오는 불빛에 저 사람의 다리가 이제 아주 눈에 선하게 보였다. 역시 벽 끝까지 닿을 듯 긴 다리를 보고 나는 저 사람이 꽤 키가 크다는 걸 가늠할 수 있었다.





  "근데 너 향수는 왜 그딴 걸 쓰냐? 달달해서 여잔 줄 알았잖아."

  "내 몸에서 꽃향기가 나든 똥냄새가 나든 너랑은 상관없는데?"

  "너 내가 지금 피곤한 걸 다행으로 여겨라."

  "평생 피곤해라, 이 찐따 또라이 새끼야."





  그리고 그 새끼가 몸을 돌려 날 정말 잡으려고 하는 것 같아서 바로 문을 닫고 복도 끝까지 줄행랑을 쳤다. 녀석이 알려준 대로 문을 열자 정말 그 곳 아래에는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이 있었다. 나는 얼른 사람에게 키를 받아들고 황급히 파티에서 빠져나왔다. 내일 형한테 또 혼나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진짜 존나게 재미없는 파티였거든. 내 방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아홉 시 뉴스를 봐도 이거보단 재밌겠어.


  하지만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돌아가야 하나 고민했다. 왜냐하면 말끔하게 샤워를 하고 기분 좋게 침대에 누워 알람을 맞추려고 했을 때, 내 아침을 깨워줄 핸드폰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들고 있었다. 파티에 들어갈 때도 있었고 중간에 와인 한 잔을 더 마실 때도 있었다. 그리고 그 미친 새끼를 만났을 때도 분명 손에 쥐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 아. 나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빡쳐서 이불을 걷어차고 앉았다. 아까 그 새끼가 갑자기 어깨 너머로 고개를 내미는 바람에 놀라서 핸드폰을 떨어트렸다. 그 후로 그 새끼의 또라이력에 질려서 혀를 차다가 그냥 나온 게 실수였다. 나는 욕을 하면서 다시 불을 켜고 서재로 향했다. 그리고 책상 서랍에서 다른 핸드폰을 꺼내고 충전기를 꽂았다. 벽에 붙어서 핸드폰을 켜는 내내 짜증이 났다. 주운 사람이 있다면 그 미친 새끼가 주웠을 것 같은데 말이야. 지문 잠금을 해놔서 열진 못 하겠지만 그래도 오는 연락은 다 받을 수 있을 거고? 사생들이 맨날 준면 오빠 거리면서 메시지를 보내니까 내가 나라는 것도 금방 알 수 있을 거고? 씨발,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그렇게 욕하고 나오질 않았지! 나는 인상을 쓰면서 핸드폰이 켜지는 것을 기다렸다. 그리고 켜지자마자 바로 내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신호음이 가기도 전에 전원이 꺼져 있다는 음성만 들렸다. 방전된 건 아닐 텐데 그럼 그 새끼가 일부러 끈 건가. 뭐하려고! 뭘 하려고! 내 입꼬리가 절로 아래로 축 쳐졌고 나는 울상을 지은 채 종대한테 전화를 걸었다. 서재에서 나와 침실로 향하면서도 표정을 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침대 위로 엉금엉금 기어오르던 찰나, 종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다가 깬 건지 목소리가 한껏 가라앉아 있었다.





  [왜...]

  "으아아아앙! 종대야! 종! 대! 야!"





  김종대가 작게 씨발, 하고 읊조리는 걸 들었다. 하지만 나는 킹사이즈의 넓은 침대 위를 굴러다니면서 김종대를 불렀다. 나와 5년 넘게 같이 일한 이 매니저는 이제 나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주기적으로 지랄을 할 때면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지랄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또 이렇게 다시 침착하고 잠잠해지면 그제야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핸드폰을 파티에 두고 왔는데 그걸 누가 가져갔다, 근데 그게 누군지는 모르겠다 이거네.]

  "응응! 나 진짜 어떡해? 나 걔한테 욕 존나 하고 왔단 말이야."

  [내가 그랬지? 형은 입으로 망할 거야.]

  "망하기 전에 김종대 호피 무늬 팬티만 입고 잔다는 거 불고 망할 거니까 알아서 해."

  [호피 아니거드으은!]





  한참동안 서로에게 징징거리다가 결국 녀석이 그냥 일단 자라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고 일어나면 우리 종대가 해결해주겠지. 우리 김 실장님은 못 하는 게 없잖아. 나는 김종대와의 통화를 끊고 다시 행복하게 이불을 덮고 누웠다. 다 괜찮아질 거야. 그럼. 다 괜찮아질 거고 말고.


  라고 씨발 새벽의 내가 그랬던가? 존나 예지력 하락이야. 하락이고 뭐고 그냥 맨틀까지 파고들 정도로 예지력이 떨어졌다고. 핸드폰 위치 추적도 되지 않았고 그 인간에게서 연락도 오지 않았다. 어차피 그 핸드폰은 평소에 잘 들고 다니는 폰이 아니어서 안에 사진도, 연락처도, 별 건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핸드폰을 켜자마자 그것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연락이 쏟아질 것이라는 거였고, 그러자면 그 새끼가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는 얘기였다. 나는 그 새끼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는데 정말 억울했다. 아니, 아는 거라고는 키가 크고 목소리가 낮고, 싸가지가 없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 키가 크고 목소리가 낮고 싸가지가 없는 새끼가 어디 저 새끼뿐이겠냐고. 파티 호스트한테 연락해서 어제 온 사람들 중 저런 사람 좀 찾아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야. 나는 마땅한 해결책을 찾지 못 한 김종대를 노려보다가 쿠션을 집어던졌다. 바나나를 까먹다가 아무렇지 않게 그걸 받아든 녀석은 아무 생각이 없어보였다. 네 일 아니라 이거지. 어차피 재벌 놈들한테 탈탈 털리고 욕 듣고 무시당하는 건 네가 아니라 나다 이거지. 나는 그 무심한 표정이 짜증나서 으아악! 하고 소리를 지르며 소파에 고개를 묻었다. 


  점심은 대충 샐러드로 해결했다. 그리고 나는 내 주특기인 좋게 좋게 생각하기를 시전 했다. 그래. 그 새끼가 내가 누군지 안다고 해서 딱히 뭘 하겠어? 거기에 있는 내 사진을 뿌리겠어, 뭘 하겠어? 핸드폰은 열 수가 없는데? 나중에 뭐 나 모델로 쓸 때 단가를 좀 낮추려나? 뭐, 그래도 상관없어. 어차피 회사가 다 먹을 거 낮추든 말든 존나 상관이 없다 이거야. 그래! 난 무서울 게 없는 사람이었네!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까 점차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무서워할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누워서 TV를 보다가 헤헤, 하고 웃었다. 마찬가지로 TV를 보다가 그런 나를 힐끗 본 김종대가 혀를 찼다. 





  "어디 밖에 나가서 그렇게 웃지 마. 바보인 줄 알고 누가 잡아간다."

  "너 집 안 가냐?"

  "심심하다고 집까지 부른 사람이 누군데. 오늘 운동은 했어?"

  "오늘은 좀 쉬자. 나 오늘 그럴 기분 아니야."

  "기분 존나 좋아보이시는데요."

  "그래서 아니라니까. 운동은 원래 인생이 좆같을 때 하는 거야. 야, 근데 너 좆같다는 게 왜 욕인지 아냐?"

  "좆같으니까 좆같다고 하지."

  "네 거 보면 기분이 나빠?"

  "형은 나쁜가봐. 왜. 너무 작아서?"

  "뒤지고 싶나봐. 까봐? 어?"

  "까지마! 바지에서 손 떼! 떼라고 했어, 진짜! 아침부터 기분 좆같아지게 왜 좆같은 얘기는 하고 난ㄹ... 어, 형. 그거 지금 전화 걸린 거 아니야?"





  소파에 누워 바지춤을 내리려다가, 김종대의 말에 핸드폰을 들고 있던 손을 보았다. 습관적으로 내 폰으로 전화를 걸고 있었는데,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통화 연결 중이던 화면에서 시간이 째깍째깍 흐르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걸 보다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손까지 떨며 전화를 받았다.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김종대 역시 스피커폰으로 바꾸라고 징징거리며 귀를 가져다댔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여보세요, 하고 말했다. 한참동안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고 김종대와 나는 잔뜩 긴장한 채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느릿하게 들린 목소리에 나는 놀라기도 잠시, 다시 미간이 찌푸려졌다.





  [핸드폰 주인이신가 봐요.]

  "네. 돌려주시겠어요?"

  [김준면씨라고 불러야 하나, 수호씨라고 불러야 하나.]





  김종대가 헉, 하고 놀라며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고 나는 인상을 쓰며 이마를 살짝 매만졌다. 말하는 거 봐. 또 존나 얄밉게 말하네. 눈앞에만 있다면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고 싶은 그런 느낌이었다. 





  "어디 계신지 말씀해주시면 사람 보내겠습니다. 인편으로 돌려주시면 감사하겠네요."

  [그래? 그럼 K엔터 본사로 와.]

  "....."

  [놀랐지? 더 놀라게 해줄까?]

  "....."

  [네가 직접 와서 사과해야 줄 거야.]





  K엔터라는 말에 한 번 놀라고 직접 오라는 말에 두 번 놀랐으며 사과하라는 말에 마지막으로 놀라 자빠져 뒤질 지경이었다. K엔터면 우리나라 문화 산업에 안 끼는 곳이 없는 욕심 많은 새끼들이잖아. 뒤질 때도 아마 거기 임원진 새끼들은 주식을 끌어안고 뒤지겠지. 내가 장담한다. 아니, 그건 그렇고. 이 새끼가 그냥 평사원이라면 내가 이렇게 긴장하지도 않았을 텐데, 어제 그 파티에 게스트로 초대 받은 사람이라면 절대 평사원이 아니라는 얘기일 거고? 그럼 최소 간부 이상이라는 거고? 난 이제 씨발 유서를 쓰면 되는 건가? 내 26년 짧은 인생이 이렇게 끝나나?





  [그리고 패스워드를 0000으로 해놓을 거면 지문 잠금이 필요 없지 않나? 아무튼 뭐 덕분에 사진 구경 잘했습니다. 근데 좀 아쉽다. 난 누드 사진 정도는 있을 줄 알았지.]

  "....."

  [올라올 때 데스크에서 컨택하는 거 잊지 말고. 내가 좀 바빠서.]





  그리고 전화가 뚝 끊겼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미 김종대는 울먹거리면서 형 이제 북한산에서 주검으로 발견되는 거 아니냐고 징징거렸다. 나는 김종대를 한껏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옷을 재빠르게 갈아입고 집에서 나오면서도 나는 씨발이라는 소리를 522번도 넘게 중얼거린 것 같았다. K엔터 간부 중 누구지? 대체 누구지? 목소리는 되게 젊었는데 저렇게 젊은 인간이 있었나? 내 리스트에는 분명 그런 사람이 없는데. 대체 누구지. 나는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녀석이 말한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쭈뼛쭈볏 로비에 들어섰다가 멈칫했다. 데뷔 후 단 한 번도 이렇게 환한 대낮에 종대 없이 혼자 돌아다녀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혼자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 부탁을 해야 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나는 벽 뒤에 서서 우물쭈물 거리다가 주위를 살피고 데스크 쪽으로 향했다. 생글생글 웃던 직원들이 나를 보고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다. 나는 선글라스를 살짝 아래로 내리고 무슨 비밀 얘기라도 하는 것처럼 속삭였다.





  "저기 여기에... 혹시 한 20대? 정도인 임원 분 있어요?"

  "20대 정도요?"





  내가 김준면이라는 걸 알아본 직원들이 조금 흥분하는 게 느껴졌지만 이내 내가 물어본 질문에 서로 얘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자기들끼리만 한참동안 얘기를 나누다가 다시 나를 보는 느낌에, 나는 데스크를 짚고 살짝 몸을 숙였다.





  "20대 정도의 임원이시면, 아마 오세훈 이사님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선약이신가요?"

  "예? 아, 뭐... 네. 그렇긴 해요."

  "그럼 연결해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 하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데스크에 바짝 붙어 고개를 숙였다. 어느 순간부터 몸에 밴 버릇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고 그 새끼의 비서와 통화를 하는 것 같던 직원이 멋쩍게 웃으며 날 보았다.





  "조금 기다리셔야 할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어요? 이사님이 방금 회의에 들어가셨다고 해요."

  "얼마나 걸려요?"

  "보통 한두 시간 정도는 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도 모르게 욕을 할 뻔 했다. 이 새끼 일부러 회의하러 들어간 거 아니야? 나 엿 먹으라고? 나는 인상을 쓰다가 이사실로 안내해드려도 되겠냐는 직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임직원 전용 엘리베이터를 함께 타고 이사실로 향하면서도 기분이 더러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하여튼 이 윗물에서 노는 새끼들은 이래서 안 된다. 사람 괴롭히는 게 취미인 것 같다니까? 내가 연예인이라고 존나게 무시하는 새끼들도 예전에 나를 무슨 똥개 훈련이라도 시키는 것처럼 오라 가라 난리였지. 우리 회사 사람들 생각해서 내가 꾹 참고 있긴 한데, 내가 언젠가 연예계 은퇴하기 전에 아주 크게 깽판 치고 갈 거야. 짜증나는 새끼들.


  나는 안내 받은 이사실에 앉아 멍하니 안을 둘러보았다. 먼지 한 톨 없을 것 같은 깔끔한 곳이었다. 이 깨끗한 방의 반만 좀 성격으로 닮아보지. 나는 아직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은 이 싸가지 없는 새끼를 생각하며 욕을 했다. 비서가 가져다준 커피를 마시며 시계를 보다가, 핸드폰을 꺼내 여전히 찡찡거리는 김종대와 카톡도 주고받았다.





  - 형 어떻게 됐어???? 혀 깨물고 뒤지래?????

  - 아직 안 뒤졌다 새끼야 날 그렇게 뒤지게 하고 싶냐

  - ㄴㄴ 형이 걱정돼서 그러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웃지 마

  - 왜? 정 들어?

  - 사직서 내라 그냥

  - 싫은데~~~ 김준면 연금 받을 건데~~~~ 천년만년 붙어 있을 건데~~~~ 쁌쀼쀼뷰쀼쁍쀼쀼쀼♡ 아무튼 형

  - ㅇ

  - 올 때 메로나

  - ㅗ

  - 딸기맛 ㄴ 오리지날 ㅇ





  오세훈을 죽일 게 아니라 이 새끼를 죽여야 하는 거 아니야? 난 카톡을 보다가 진심으로 짜증나서 핸드폰을 대충 소파 위에 던졌다. 그리고 오세훈 이 새끼는 대체 언제 오나 싶어서 시계를 확인했다. 정확히 49분 째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진짜 재벌 새끼들 또라이인 건 알았지만 이 새끼는 한층 차원 높은 또라이 같은 느낌이었다. 적어도 다른 놈들은 약속은 잘 지켰거든. 한참동안 팔짱을 끼고 궁시렁 거리는데 문이 열렸다. 아까부터 계속 간식을 가져다주는 비서님인가 싶었다가, 나는 들어서는 사람을 보고 몸이 딱딱하게 굳는 느낌이었다. 짙은 남색 수트에 깔끔하게 올린 검은 머리가, 유독 날카로운 그의 인상을 더욱 더 세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한 쪽 주머니에 가볍게 손을 넣고 안으로 들어서던 그 역시 나를 보고 멈칫했다. 하지만 그러기도 잠시, 다시 자연스럽게 방으로 들어온 오세훈이 데스크 앞에 앉았다. 그리고 마치 나는 없는 사람인 것 마냥 서류를 펴놓고 일을 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있다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데스크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지만 그 때까지도 오세훈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저기요. 이사님?"

  "예."

  "핸드폰 주셔야죠."





  내 말에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곧은 자세로 서있는 날 위아래로 슥 훑어보더니 조용히 웃었다. 이렇게 생긴 사람이었구나. 어제 어둠 속에서 날 그렇게 떨게 만들었던 사람이 이렇게 생긴 사람이었구나. 얼굴 이곳저곳을 관찰하며 한참을 뜯어보고 있는데 갑자기 그가 손을 들었다. 그리고 가볍게 손짓을 했다. 나는 까딱거리는 그 건방진 손끝을 보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으레 그랬듯이 난, 재벌들 앞에서는 말 잘 듣는 김준면 이었으므로 고분고분 허리를 숙였다. 나와 눈높이가 같아진 그가 역시나 날 관찰하듯이 빤히 보았다. 꽤 오랫동안 내 얼굴을 살펴보던 그가 피식 웃었다.





  "사진보다 실물이 더 낫네. 아까 검색해봤거든요. 김준면이 누군가, 수호가 누군가. 근데 꽤 유명한 사람이더라고?"





  미친놈. 대한민국에서 살면서 어떻게 날 모를 수가 있어? 무슨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지하 벙커에서 외부와 단절된 채 살았대? 나는 돌려달라는 핸드폰은 안 주고 자꾸 날 보기만 하는 그가 짜증나서 다시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리고 손을 척 내밀었다. 그 손바닥을 물끄러미 본 그가 그래, 하고 중얼거리며 서랍을 열었다. 그 곳에는 내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내 소중한 핸드폰이 있었다. 그걸 보자마자 다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나는 손을 뻗어 그걸 잡으려다가 녀석이 다시 제 쪽으로 그걸 꽉 쥐는 바람에 정말 면전에다 대고 욕을 할 뻔 했다. 삿대질도 안 한 게 천만다행이었다. 





  "참, 사과 안 했잖아요."

  ".... 무슨 사과요."

  "그 쪽이 제일 잘 알 텐데."

  "몰라서 물어보는 건데요."

  "핸드폰 받기 싫은가봐."

  "입에 발린 말하면서 받을 만큼은 아니긴 합니다. 그래도 그냥 돌려주시죠."

  "싫은데?"





  내 미간이 좁게 찌푸려졌고 오세훈은 눈가까지 살살 휘어 트려가며 웃었다. 진짜 이 새끼는 남이 빡친 표정을 보며 오르가즘을 느끼는 새끼인 게 분명했다. 오세훈은 내 핸드폰을 꾹 쥐고 있다가 생긋 웃었다.





  "그럼 우리 이렇게 합시다."

  "뭐요."

  "나랑 세 번 더 만나면 이거 줄게."

  "... 예?"

  "물론 만난다는 게 길 지나가다 우연히 만나는 게 아니라는 건 알죠?"





  내 황당한 표정을 읽지 못 한 건지 아니면 일부러 무시한 건지, 그는 너무나도 평온한 표정으로 다시 서랍에 핸드폰을 넣었다. 그리고 손목의 시계로 시각을 한 번 확인하고는, 기다란 손가락을 모아 잡고 날 보며 웃었다. 맘 같아서는 굵은 알이 박힌 반지 열 개를 끼고 그 웃는 면상을 치고 싶었다.





  "용건 끝났는데, 안 나가볼 건가? 나 일해야 하는데."

  "....."

  "안 나갈 거면 노래라도 부를래요? 수호씨 노래 잘 한다던데."

  "이사님. 저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거든요."

  "난 장난처럼 보이나?"

  "....."

  "딱 세 번이라고."





  입가에 미소를 지운 그가 재킷의 단추 하나를 풀었다. 그 안에 베스트까지 받쳐 입은 걸 보니 내가 다 답답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옷을 입고도 그는 너무도 편해 보였다. 태어날 때부터 저렇게 몸에 딱 맞는 불편한 갑옷을 입었기 때문인 걸까. 그는 딱딱한 수트에 공기의 흐름마저 바뀌지 않는 조용함, 그리고 쌓여 있는 업무까지도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애초에 장난 같은 걸 치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인상이 찌푸려졌다. 나한테 대체 왜 이러지? 왜 이러는 거야? 남자 관심 없다며! 나도 씨발 관심 없는데!





  "세 번이나 더 만나서 뭐 하시게요."

  "글쎄. 노래나 들을까."

  "멜론에서 다운 받아 들으세요."

  "우리 경쟁사니까 가급적 다른 곳을 이용해줬으면 좋겠네요, 수호씨."

  "..... 저한테 왜 이러세요?"

  "내가 뭘 했다고?"

  "남자 관심 없다면서요."

  "관심이 있어야 만날 수 있나?"

  "적어도 이사님과 제 관계라면 충분히 그렇죠."

  "그래요? 그럼 이제 관심 가져볼게요."





  헛웃음이 다 나왔다. 아무리 윽박을 질러도 오세훈은 이미 그런 대답은 다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능숙하게 받아쳤다. 이래서 돈 많고 배운 거 많은 놈들이 싫었다.





  "다음에는 식사 한 번 같이 하는 걸로 하죠."

  "이사님. 진짜..."

  "내가 용건 끝났다고 두 번째로 말하는 것 같은데."





  냉담한 목소리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씨발... 씨발. 씨발! 좆같다는 건 완벽히 오세훈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 어제의 첫 만남부터 재수 없더니 내 핸드폰을 인질 삼아 협박하는 것도 진짜 재수 없었다. 재벌가 놈들이 원래 이렇게 재수가 없다는 건 알았지만 이 새끼는 차원이 다른 놈 같았다. 진짜 사이코패스 같다니까? 나는 후, 하고 한숨을 내쉬고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돌려 문 쪽으로 향했다. 제발 내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무런 일도 없길 바랐다. 뭔 일이라도 났다간 진짜 다 때려 부술 것 같으니까 말이야. 나는 씩씩거리면서 문고리를 잡으려다가, 다시 날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내 눈은 가자미눈이 되어있을 게 뻔했다. 하지만 나는 전혀 그 눈빛을 고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진짜 존나 빡쳤으니까!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오세훈을 보았다가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오세훈은 한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웃고 있었다.





  "전화할게."

  "....."

  "안 받으면 죽어."

  확신했다. 





  '오세훈 같다'는 말도 충분히 욕이 될 수 있음을.





롤라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