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다. 이런 아침엔 몸을 일으키기가 힘들다. 게으름도 게으름이지만, 괜히 기립성 저혈압 탓을 해본다. 허리가 조금씩 쑤시는 것은 비밀이다. 기다릴 사람도, 기다릴 소식도 없지만 무언가 기다리고 싶어지는 날씨다. 자동차 앞 유리창에 떨어져 도로록 굴러가는 빗방울들을 멍하니 바라보다 신호가 바뀌는 것도 모르고 멈춰있었다.

그냥 월요일이라 그런가, 아니면 주말 내내 너무 즐겁게 보냈던 탓인가. 왜인지 마음이 헛헛하다. 점심을 맛있게 먹고도 허한 기분에 조금 사치스러운 커피를 마시기로 한다. 비가 오지만 어깨와 신발을 적시긴 싫은 욕심. 차에서 내리지 않아도 괜찮은 곳으로 간다.

어디선가 헬스인이 지켜야 할 카페에서의 덕목을 보았다. 메뉴가 아메리카노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오로지 결정할 것은 찬 것인지 따뜻한 것인지밖에 없다고. 그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달고 살면서 나름 성실히 지켜왔는데, 이왕 사치하는 김에 오늘은 다른 걸 먹어야지. 스피커를 통해 상냥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주문 어떤 것으로 하시겠어요? 라떼로 해주세요. 따뜻하게요.

커피가 든 텀블러를 받아들고 서둘러 회사로 돌아갔다. 그 와중에 혹시 내가 찬 커피를 시키진 않았는지 헷갈리기도 했지. 잠깐 사이에 기억의 공백이 생기는 일이 잦아졌다. 돌아와서 실장님과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하다가 다시 업무에 들어가기 전에 텀블러 뚜껑을 열었다. 따끈한 김과 오밀조밀한 거품이 반겼다. 입을 델까 조금씩 마셨다. 몸은 일터에 있지만, 마음이 채워지는 느낌이다.

라떼를 마실 땐 어김없이 엄마 생각이 난다. 엄마는 늘 라떼를 드신다. 집에서도. 당신만의 '우유 커피' 레시피가 있다. 우유를 전자레인지에 데우고, 모카포트로 뽑은 커피를 살짝 섞는다. 가끔 나더러 커피를 타달라고 하시는데, 매번 영 맘에 안 들어 하시는 게 본인만의 법칙이 있으신 것 같다. 카페에서도 그냥 드시는 법이 없다. 엄마의 주문은 늘 우유 많이, 샷은 연하게, 그리고 설탕 두 봉지다. 매번 스틱 설탕 두 개를 챙겨가면서 얘기한다. 굳이 이렇게 설탕을 넣어야 해요? 그냥 바닐라라떼나, 시럽을 넣어달라고 해서 드세요. 하지만 완고하다. 시럽은 맛이 없다나. 카페라떼에 설탕 두 개! 꼭 설탕이라니, 이상한 고집이라니까.

엄마와 닮았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오랜만에 뵙는 친척 어른들은 젊었을 적 엄마와 똑같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빼먹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큰 딸이다. 얼굴도, 피도 이어받으며 이상한 고집까지 이어받았으니. 커피 취향을 가지고 엄마를 놀려댔지만, 사소한 고집으로는 나도 뒤지지 않는다. 책을 사고 띠지를 버리지 않는 것. 공장 식빵을 먹지 않는 것. 쓰던 펜이 좋아서 열댓 개를 사두는 것. 그렇게 삼색 펜을 사두고 검정색만 많이 써서 빨리 닳아버리지만, 그래도 굳이 계속 삼색 펜을 사는 것. 적어놓으니 설탕 두 개가 차라리 더 나아 보이네.

반팔이 어색해지는 서늘한 바람이 분다. 가을이 훌쩍 다가왔다. 누구는 가을이 독서의 계절이라는데, 나에겐 그저 여느 때와 똑같은 공상의 계절로 하루를 보냈다. 무심코 따뜻한 커피를 시켰다. 고집, 물려받은 고집스러움에 대해 생각했다. 나도 누군가에게 고집을 물려주는 사람이 될까. 홀짝홀짝 마시다 보니 어느새 텀블러엔 밑바닥에 깔린 원두 찌꺼기뿐이다. 왠지 내일도 라떼를 먹고 싶을 것 같다.


꾸준히 읽고 열심히 살고 싶은 게으름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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