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땅에 닿을듯이 늘어뜨린 호영의 어깨가 지면에 긴 그림자를 만들었다. 터덜터덜, 철제 계단을 올라 옥상정원의 벤치에 걸터앉았다. 니코틴 청정구역인 병원에, 그나마 흡연자들의 숨통을 틔여주는 곳이지만 신경외과, 정형외과를 메인으로 주로 자가보행이 어려운 외과환자들이 밀집한 본관 옥상은, 엘리베이터로도 연결이 되지 않아 환자나 보호자들은 여간해서 올라오지 않는다. 병원은 건강을 수호하는 장소이지만 이곳에도 역설로 존재하는 흡연자 직원들이 이따금 올라와서 머리를 식히곤 했다.


그중에서도 호영은 이 벤치의 단골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벤치를 병신벤치라고 명명했다. 진심으로 “나는 병신인가?”라는 저속한 자괴감에 빠질때 찾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 또한 역설로, 호영은 하루에 평균 3-4회정도 벤치에 올라온다. 오늘도 부원장은 수술방에서 아무말도 하지 않고 스콥에서 눈을 떼고 호영을 지긋이… 10초 정도 쳐다보았다.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심한욕, 욕,욕,욕’ 같은것들이 안광으로 번쩍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표정은, 사실 표정이라는 것이 없는 얼굴로 쳐다본 것 뿐이었다. 그것은 부원장이 호영을 멕이는 방법중에 하나다. 


호영과 등을 맞댄 반대편 벤치에서, 마취과장이 딸기맛 쮸쮸바를 쭉쭉 빨아먹고있었다. 마치 고무까지 흡입할거같은 기세로. 


“신원이형 저 진짜 관둘까요?..”

“뻥치네.”


신원은 이제 호영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호영의 탈주각은, 매일이 반복이니까. 시금털털한 반응에 그쵸… 라고 바람빠지는 듯이 중얼거린 호영이 신경질적으로 우유곽에 빨대를 꽂았다. 호영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거라곤 이런것이 전부이다.


“너는 이미 라인을 타서 안돼”

“라인같은거 아니에요.”

“선배믿고 전공의까지 따서 선배따라 선배병원들어와서 선배밑에서 펠로우하면 그냥 선배를 인생의 스승님이다 생각하고 모셔야지 까라면 까라지 별 수 있냐? 그리고 오늘은 윤부원장한테 혼나지도 않았잖아.”


그건 그렇다. 그냥 쳐다보임으로 욕보임을 당했을 뿐이다. 애초에 탈주를 위해서는 이런 안일한 생각으로는 안된다. 마이클 스코필드 급의 준비가 선행되어야만 가능할지 말지 싶은 희박한 확률이다. 의대, 인턴, 레지, 그리고 펠로우 1년차. 호영은 한심하게도 그의 설계에 갇혔다. 



처음부터 윤계상 부원장이 재수가 없었던건 아니다. S대 학부 시절, 이미 신경외과 레지던트중이었던 계상은 호영의 다정한 멘토형이었다. 홈커밍으로 알게된 선배는 그 당시에도 유약하고 갈팡질팡하던 호영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물론 에고로 똘똘 뭉칠 수 밖에 없는 집안환경도 그렇지만 좋은 환경에서 모자람없이 자란 사람의 특유의 귀티와 여유, 그리고 별 고민같지도 않은 한심한 제 말을 들어주고 이해해주는 듯 했던 그 따뜻함은 - 그냥 설계의 일부였던 걸까. 최근의 계상은 거의 호영에게 이거해, 저거해, 미쳤냐, 똑바로안해 같은 짧은 대화(이것도 대화라면!)외에는 거의 폭언이나 인신공격정도를 상호간의 커뮤니케이션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권력관계에서 오는 강압과 인간적 모욕! 물론 의사로서 본인의 부족함은 매우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 한심함과 윤계상이라는 의사의 간극은 바다로 치면 태평양이라면 호영의 자존심이 너무 상하고, 대서양정도의 간극이니까.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자조하며 호영은 단숨에 손에 든 딸기 우유를 마셔버리고 우유곽을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팅.. 하고 철제 쓰레기통이 호영의 투척물을 뱉어내듯이 튕겼다. 에잇, 모양빠지게 쭈구려 앉아 쓰레기를 줍는 호영의 동그란 등을 신원은 혀를 차며 바라보았다. 병~신.



#2



신원은 평소에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는다. 엘리베이터는 사람이 많이타니까. 그리고 입원한 환자들의 냄새를, 신원은 싫어한다. 누군들 싫어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씻을 수 없어 떡진 머리의 정수리냄새, 약간 흘릴수 밖에 없는 소변이 환자복에 조금씩 누적된 냄새 같은 것들. 그것을 지우는 쨍한 소독약냄새도 싫다. 아니, 그냥 그 좁은 공간에 마주치는 것이 싫었다. 애초에 환자 대면이 싫어서 마취과를 선택한 신원이였다. 외래보는것이 너무너무 싫었다. 지나치게 마른몸을 휘청거리며 아무도 없는 계단을 뛰듯이 내려가던 신원의 앞에 보기만 해도 속이 답답한 덩치가 나타났다. 190센티가 넘는 키에 아무리 적게잡아도 90키로는 거뜬히 넘을것 같은 그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그나마 작은 얼굴이지만 연이은 술과 유흥으로 붓듯이 살이 찐 턱에 일회용 마스크를 걸친 김부장은 신원을 보자 기계처럼 활짝 웃었다. 곰같은 작은 눈이 볼살을 파고들듯이 휘었다. 기분나빠.. 신원은 성의없는 목례로 답했다.


“안과장님도 살뺄려고 계단으로 다니세요?”


그럴리가 있겠냐. 너같은 뚱돼지놈과 나의 라이프 스타일이 다른거지. 옆으로 훅 끼치는 그 놈의 냄새에 알콜이 섞여있었다. 베타딘같은 소독제 냄새가 아니라, 정말 알콜의 냄새였다. 어제의 유흥의 냄새. 신원이 경멸하는 냄새다. 김부장은 오늘 종일 외래인데, 이런 냄새를 풍기면서 환자를 만났다는 게 기가 찰 뿐이다.


“저 오늘 수술 많이 잡았는데 내일도 잘해주실거죠?”


애교 부리듯이 말하는 김부장이 신원은 약간 역겨웠다. 정형외과의 세컨인 김부장은, 지잡대(지방 국립의대 출신이지만 신원은 늘 이렇게 표현해왔다)출신으로 실적에 대한 컴플렉스가 심하다. 무리하게 수술 스케쥴을 올려서 수술방 직원들은 물론 신원을 오버타임하게 만드는 역적같은 놈이다. 환자한테는 외래에서 뭘 어떻게 말로 후드려 찹찹을 잘하는 지 모르겠지만(알고싶지도 않다.) 수술방의 블랙리스트, JS A.K.A 진상이다. 차라리 윤부원장 수술은 쌍욕과 폭언으로 수술방 분위기가 험악하긴 해도 재수없게 수술을 잘하니까, 윤부원장이 말한 시간에 거의 딱 맞춰 끝난다. 그리고 쌍욕과 폭언은 펠로우인 호영이 주로 듣는거지, 신원은 알 바 아니다. 그러나 저놈은.. 신원은 태우를 등지며 조용히 이를 갈았다. 최근 스케쥴이 거지같이 꼬여서, 윤부원장 수술은 대부분 박부장이 들어가고, 저 양아치 수술을 신원이 대부분 커버하고 있다. 


“부장님 하는거 봐서요.”

“에이~ 잘해줄거면서~~ 오늘 저녁에 뭐하세요?”


당직합니다~! 보기 드물게 큰소리로 답하며 신원은 총총 계단참 밑으로 사라져 갔다. 그런 신원의 머리꼭지를 태우는 한참동안 싱글싱글 웃으며 내려다보았다. 염색이 잘됐단 말이야…그런데 오늘 당직은 손호영아닌가.  

lemonsherbet_wd@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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