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칫솔, 커피, 이불, 식탁, 발장난


오늘의 아침은 토마토 달걀 볶음과 갓 구운 식빵 두 조각이었다. 미리 정해둔 메뉴는 아니었다. 새벽 러닝을 마치고 돌아온 보쿠토 코타로의 품에 식빵이 없었다면 아마 어제 먹다 남은 곱창볶음을 데워먹었을 테니까. 야식을 아침으로 먹는 건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프로 운동선수와 직장인 배구 동호회 팀의 선수는 늘 배가 고팠고, 아침잠이 부족했으며, 음식이라면 가리지 않고 먹었다. 코타로는 그걸 두고 한창때라 그렇다며 웃었다.

보쿠토 케이지는 둘이서 자고 일어났더니 하나만 있는 상황이라면 아주 익숙해서, 졸린 눈을 비비고 거실에 나가 텔레비전을 켰다. 화면에서는 공중파 아침 뉴스가 나왔다. 멍하니 서서 보고 있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렸다.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명랑한 목소리가 정신을 깨웠다.


“나 왔어! 자, 선물!”


선물이란 말에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성큼성큼 들어온 코타로가 커다란 봉지를 내밀었다. 무심코 받아든 봉지는 따뜻했다. 열어보자 갓 구운 식빵이 들어있었다. 표면이 갈색으로 잘 익은 빵 냄새가 고소했다. 침을 꿀꺽 삼키자 코타로는 다시금 쾌활하게 웃었다. 이제는 저 웃는 소리를 들어야만 아침이 왔다고 실감하게 된다. 케이지는 연하게 웃으며 빵 봉지를 가슴팍에 꼭 껴안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냄새만 맡아도 맛있을 게 뻔한 식빵을 두고 다 식은 곱창볶음을 먹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케이지는 식탁 위에 빵을 올려두고 냉장고를 뒤적거렸다. 며칠 전에 사두고 처박아둔 토마토와 거의 다 떨어진 굴 소스가 보였다. 오늘 아침은 이거다. 케이지는 토마토와 달걀을 손에 쥐고 옆구리에 굴 소스 통을 끼웠다. 냉장고 문은 금세 따라온 코타로가 닫아주었다.

토마토는 끓는 물에 가볍게 데치고 달걀 물을 풀고 있자 코타로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뒤에서 와락 껴안는 팔은 단단했다. 옅은 땀 냄새가 났다. 코타로는 휴일에도 러닝을 거른 적이 없었다. 열심히 뛰고 온 사람 특유의 따뜻한 체온이 기분 좋다. 케이지는 등 뒤를 받쳐주는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고 말했다.


“저 오늘은 일찍 퇴근할 거니까 저녁 같이 먹어요.”

“신난다! 그럼 데리러 갈까?”

“그래 주시면 더 좋고요.”


엷게 웃자 코타로는 금방이라도 제자리에서 뛸 것처럼 움찔거리다 이내 케이지의 머리칼에 코를 처박았다. 막 일어나서 엉망진창으로 삐죽거리는 머리가 뭐가 그리 좋다고 코타로는 얼굴을 문댄 채로 웃었다. 맞닿은 피부를 따라 웃는 소리가 울렸다. 케이지는 슬쩍 빨라지는 심장 소리까지 다 전해졌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버터를 두른 팬에 데쳐서 껍질을 벗긴 토마토와 달걀을 볶자 좋은 냄새가 났다. 코타로는 벌써 일찌감치 식탁에 테이블 매트를 깔았다. 그릇과 식기를 준비하고 연한 분홍색 유리잔에는 얼음을 넣었다. 컵에 물을 따르자 넓은 창에서 들어온 햇살이 유리잔을 통과해 색색으로 부서졌다.

메뉴가 간편한 만큼 완성도 빠르다. 케이지는 가장자리가 넓적하고 둥근 파란색 파스타 그릇에 토마토 달걀 볶음을 부었다. 노랗고 붉은 음식 위에 파슬리까지 뿌리자 꽤 그럴듯해 보였다.

둘 다 자리에 앉자 코타로는 싱글벙글 웃으며 식빵을 두 쪽으로 찢었다. 껍질을 잡고 양쪽으로 잡아당기자 하얀 속살이 드러나며 곡물 냄새가 더 강해졌다. 결결이 부드럽게 찢어지는 식빵은 그것만 먹어도 훌륭할 정도였다. 코타로는 크기가 미묘하게 다른 식빵을 두고 잠시 고민하다 조금 더 커 보이는 식빵을 케이지에게 건넸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슴다.”


식빵과 토마토 달걀 볶음의 궁합은 괜찮았다. 마지막 남은 굴 소스를 털어 넣길 잘했다. 덕분에 맛이 깊어졌다. 급작스러운 메뉴 변경이었지만 만족스러웠다. 케이지는 속으로 자화자찬하며 식빵에 토마토를 올려 한입 베어 물었다. 코타로는 몽글몽글하게 덩어리진 달걀 위에 토마토를 올리는 일에 열중했다.

맛있는 음식 앞에서 대화는 줄어들기 마련이라, 커다란 식빵 하나가 가루만 남기고 사라질 때까지 식탁은 조용했다. 간간이 식기가 부딪치거나 유리잔 안의 얼음이 달그락 떨어지는 소리만이 났다. 이제와서 새삼 고요를 낯설어하기엔 꽤 오래 지내온지라 어색하진 않았다. 코타로는 깨끗하게 비운 두 접시를 들고 일어나며 말했다.


“씻고 와. 설거지는 내가 할게.”

“그럼 부탁드리겠슴다.”


여전히 학창시절의 운동부 습관을 버리지 못한 케이지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욕실로 떠났다. 코타로는 총총 걸어가는 케이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콧노래를 부르며 싱크대 앞에 섰다.

코타로나 케이지나 둘 다 평균적인 일반인에 비해 키가 큰 편이라 신혼집을 마련할 때도 싱크대만큼은 해외에서 공수해왔다. 덕분에 허리를 굽히거나 다리를 넓게 벌려 고생하며 설거지할 필요가 없었다. 코타로는 부엉이 모양 수세미에 주방세제를 뿌렸다. 청량한 레몬 향기가 퍼졌다.

그와 동시에 타박타박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욕실로 갔던 케이지가 입에 칫솔을 물고 있었다. 케이지는 볼을 부풀려 칫솔질을 하며 식탁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코타로는 그릇을 가볍게 씻고 식기세척기에 넣으며 물었다.


“커피 마시고 갈 거야?”


케이지는 고개를 양쪽으로 번갈아 기울이며 잠깐 고민했다. 양치하고 마시는 커피는 싫지만 코타로가 끓인 커피는 좋았다. 기계적으로 칫솔을 움직이면서도 머리는 열심히 굴러갔다. 결국 케이지는 고뇌 끝에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코타로는 그럴 줄 알았다며 피식 웃곤 주전자에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케이지는 꽤 오래 고민했다지만 사실 코타로가 끓이는 커피는 그렇게 맛있는 편이 아니다. 오히려 케이지가 훨씬 더 잘 끓였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케이지의 입맛에는 맞는지 케이지는 종종 코타로를 졸라 커피를 끓여달라고 했다. 덕분에 부엌 한켠에는 핸드드립 용품들이 하나씩 쌓이기 시작했다. 코타로는 종이 필터에 원두 가루를 붓고 물이 다 끓기를 기다렸다.

주전자에서 삐익, 하고 높은 소리가 났다. 물이 다 끓었다. 케이지는 종종 다가와 이제 싱크대에 걸터앉았다. 귀엽게 발을 달랑거리는 아내를 옆에 두고 침착하게 핸드드립 커피를 만드는 데에는 이제 이골이 났다. 코타로는 드리퍼에 물을 부으며 생각했다. 아니, 나이가 이제 서른을 넘겼으면 좀 덜 귀여워질 때도 되지 않았나? 하지만 이미 콩깍지가 제대로 낀 바람에 평생이 가도 귀여워 보일 예정이었다. 물론 코타로는 대환영이었다.

드립 서버에 검은 커피 방울이 떨어지자 케이지는 훌쩍 싱크대에서 뛰어내렸다. 커피보다 더 검은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꽤 높이가 있는데도 발소리 하나 나지 않는 모습에서 올빼미를 연상하는 것도 당연한 순서였다. 케이지는 자주, 코타로를 두고 부엉이라며 놀렸지만 자기도 올빼미 같기로는 매한가지였다.

사실 후쿠로다니 출신이라면 대부분 한 번씩 자기가 인간인지 올빼미인지 인지 부조화가 오곤 했다. 코타로는 빙긋 웃으며 턱 끝으로 욕실을 가리켰다.


“입 헹구고 와.”

“다여오헸음다.”

“다녀오겠단 말은 안 해도 되는데.”


하지만 이미 케이지는 걸음을 서둘러 욕실로 가는 중이었다. 코타로는 킥킥 잔웃음을 흘리곤 찬장을 열었다. 후쿠로다니가 생각난 만큼 오늘의 찻잔은 테두리에 금박이 입혀진 우아한 하얀색 커피잔이다. 흰 바탕에 덧입힌 금색이 화려하지만 검은 굽이 천박하지 않게 무게를 잡아준 디자인이다. 코타로와 케이지가 가장 좋아하는 커피잔이기도 했다.

잔에 커피를 따르자 주방은 맛있는 향기로 몽긋몽긋 차올랐다. 아직 가시지 않은 식빵 냄새와 버터 냄새가 기분 좋게 섞인다. 코타로는 식탁에 몸을 기대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하늘은 아주 맑고 깨끗했다. 음, 오늘은 이불을 빨아볼까. 유리창 너머로 반짝이는 햇살이 가득 넘치고 저편에서는 다가오는 케이지의 발소리가 들린다. 오랜만의 휴일 아침은 부드러운 향이 났다.



02.

조수석, 드라이브, 안전벨트


도쿄 내 모 회원제 파티장 앞 주차장에 차들이 줄지어 섰다. 나란히 주차된 차종들은 누가 들어도 비싸기로 유명한 차거나, 너무 비싸서 도리어 무명인 차만이 있었다. 모두 오늘 열리는 다과회 참가자들이 타고 온 차였다.

어린이를 동반한 소소한 다과회였지만 보쿠토 그룹을 위시한 재벌들이 모인 만큼 참석자들도 다양했다. 제일 압권은 오늘 첫 참가인 아카시 가문의 분가인 아카아시 집안이다. 아카시 가문의 첫 번째 분가로 치는 아카아시는 자잘한 사교활동을 하지 않는 본가의 의사를 전달하는 집안이기도 했다. 보쿠토 그룹이 주최한 다과회에 아카아시가 왔다는 건 즉 아카시 가문이 보쿠토 그룹을 눈여겨본다는 뜻이 되었다.

참석자들은 가벼운 담소를 나누며 상황을 살폈다. 모두 어느 정도 인맥이 있다지만 사적 연락처에 아카아시 집안의 번호를 한 줄 넣을 수만 있다면 뭐든 다 할 수 있었다. 다만 대놓고 접근하기엔 자기도 보쿠토 그룹 다과회에 이름을 올릴 정도란 자존심과, 아카아시 집안 특유의 고고함이 욕망을 가로막았다.

자연스럽게 모두 어린이를 중심으로 대화의 말문을 텄다. 어린이 동반 다과회의 장점이기도 했다. 어른들끼리 서로 탐색하며 대화의 물꼬를 트는 것보다 차라리 자녀 이야기가 훨씬 공감대를 형성하기 좋았다. 참석자들은 파티장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며 담소를 나눴다.

연회장을 돌아다니는 아이 중 눈에 띄는 건 역시 두 명이었다. 주최자인 보쿠토 기업의 보쿠토 코타로와 아카아시 집안의 아카아시 케이지는 모든 참석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제 막 다섯 살이 된 보쿠토 코타로는 자기 눈동자처럼 샛노란 유아용 자동차를 몰며 어른들 사이를 가로질러 돌아다녔다. 제멋대로 나다니는 아이는 눈살을 찌푸리기 좋았지만 보쿠토에겐 통용되지 않았다. 그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보쿠토는 힘차게 유아용 자동차를 운전했다. 이제 혼자 타는 차는 재미없다며 새로 2인용 전동자동차를 마련했다더니 오늘이 첫 시승일인 모양이네요. 소곤거리는 목소리를 뚫고 보쿠토는 즐겁게 차를 몰았다. 그러던 차에, 키 높은 테이블 옆의 의자에 오도카니 앉아있는 예쁜 애를 발견했다. 보쿠토는 몰랐지만 그건 오늘 다과회의 최대 화제인 아카아시 케이지였다.

그 애는 찻잔을 쥐고 얌전히 홀짝거리며 무던한 얼굴로 간간이 주변을 돌아볼 뿐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뿐인데도 어쩐지 눈을 뗄 수 없었다. 어른용 의자에 앉아 더 조그매 보이는 아이 위로 투명한 햇살이 드리웠다. 이상한 일이었다. 온 세상에서 딱 저곳만 빛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보쿠토는 홀린 듯 그 애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예쁜 애는 고개를 들고 눈을 깜박였다. 목덜미 위로 짧게 친 검은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보쿠토는 다섯 살 인생에서 이렇게 긴장해본 적이 없겠다 싶을 정도로 긴장해선 예쁜 애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시선이 겹치고,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 애 눈동자는 청록색이었다.


“너, 내 옆에 탈래?”


생각보다도 더 먼저 말이 튀어나왔다. 그냥 본능이었다. 이 애와 같이 있고 싶었다.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함께 하고 싶단 본능이 그만 말로 나와버렸다. 보쿠토는 무심코 내뱉은 문장에 마른 침만 삼켰다. 배가 아플 정도로 긴장감이 몸을 타고 흘렀다. 보쿠토가 부엉이처럼 쭈뼛 솟은 머리를 파들파들 떨며 기다리는 동안 아카아시는 드물게 생각을 잃어버렸다.

이런 다과회나 파티는 자주 오는 편이 아니지만, 오늘은 어린이 동반이 가능한 만큼 아카아시도 작은 몸을 이끌고 참석했다. 그래도 귀찮은 것은 싫어서 얌전히 앉아 어른들을 방해하지 않는 위치를 고수했다. 어려도 아카아시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영향력과 의미를 모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사실 나머지 아이들도 다 엇비슷했다. 마냥 신난 척 장난을 치고 웃지만 모두 부모님이 시킨 아이들과 놀았다. 아카아시의 눈에 안 보일 리가 없었다.

그런데 딱 한사람. 딱 한 사람만이 이 다과회의 암묵적 규칙을 부쉈다. 그는 조그마한 어린이용 전동자동차를 타고 종횡무진 파티장을 누볐다. 넓은 잔디밭을 가로지르거나 때때로 어른들 무리 사이를 뚫고 운전하는 그 얼굴은 찬란하게 반짝였다. 속이 전부 들여다보일 것처럼 맑은 얼굴을 보고 있으면 왜인지 속이 간지러웠다. 어른들도 담소가 깨졌는데도 그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고만 말았다. 보쿠토 기업의 아들이라서 그렇다기엔, 조금 다른 부드러움이었다.

별세계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아카아시도 바깥에 나가면 다른 세상의 사람이라며 대접을 받겠지만 그것과는 뭔가 다른, 정말로 저 우주에 사는 듯한 사람이었다. 너무 높은 곳에 있어서 움직이지도 않는 아카아시가 있는 곳으론 도저히 내려와 줄 것 같지 않은. 그래서 그가 아카아시의 앞에서 차를 멈췄을 땐 심장도 멎는 줄 알았다.

옆에 탈래, 라니. 내가 당신 곁에 있어도 되는 걸까. 하지만 보쿠토는 이미 아카아시에게 권유했고 아카아시는 지금껏 재보던 모든 것들을 다 내다 버리고 싶어졌다. 집안 간의 관계니 알력이니 하는 건 모조리 잊어버렸다. 이 사람도 그런 것을 잊고 권했으니, 아카아시도 마찬가지로 다 잊은 채로 그저 사람과 사람인 상태로 답변해야 했다. 아카아시는 마주한 금색 눈동자를 응시했다. 아마 이 눈은 평생 잊지 못하겠지. 그런 예감이 들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노골적으로 긴장한 모습이 도리어 아카아시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이제 대답해야 할 시간이었다. 아카아시는 폴짝 의자에서 내려왔다. 움직이는 몸을 따라 시선이 진득하니 따라붙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조수석 차 문을 열고 새침하게 대답했다.


“안전운전 부탁드려요.”


짐짓 쌀쌀맞은 척을 해봤지만 이미 차에 올라탄 후였다. 아카아시는 자기가 얼굴을 따지는 타입이었는지 고심했다. 아무리 잘생겼대도 이렇게 함부로 타면 안 되는 건데. 하지만 보쿠토가 몸을 굽혀 안전띠를 매주는 순간 후회는 전부 날아갔다. 그저 가까이 다가온 하얀 얼굴이나 색소가 엷은 속눈썹 따위에 급격히 뛰는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기만을 바랐다. 냉정 따위는 어디로 갔는지 영문을 모를 노릇이었다.

어디서 본 건 있다고 조수석의 안전띠를 매준 보쿠토는 벌게진 얼굴로 다시 몸을 일으켰다. 2인용 차로 바꾸길 잘했다. 이 애를 만나 함께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쿵쿵 뛰었다. 보쿠토는 속으로 안전운전, 안전운전하고 생각하며 운전을 시작했다. 어느새 입 밖으로 줄줄 새어 나오는 마음의 소리에 아카아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줄도 모르고.

그렇게 야외 파티장 부지를 한 바퀴 드라이브하는 두 어린이를 보며 어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참 보기 드문 순진함이었다. 사랑이 뭔지도 모를 다섯 살과 네 살배기의 첫사랑은 배를 붙잡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가장 영향력 있는 가문들의 결합이네요. 누군가가 덧붙인 농담은 다과회를 더 큰 웃음으로 물들였다. 이날 찍은 둘의 드라이브 사진은 앨범에 들어가 고이 기록되었다.

다만 보쿠토 코타로와 보쿠토 케이지는 그것을 결혼한 뒤에야 알아챘다.

친정에서 가져온 앨범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본 사진은 줄곧 잊고 살았던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코타로는 젖살이 붙어 토실토실한 네 살 케이지를 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귀엽다. 진짜 귀엽다. 근데 문제는 그게 아니라 어린 케이지가 타고 있는 차였다. 까먹고 살기야 했지만 이제는 기억할 수 있었다. 코타로는 그날 드라이브를 권하며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선명하게 떠올렸다. 너, 내 옆에 탈래? 코타로는 배신감에 몸을 치 떨며 외쳤다.


“케이지 너, 너 차 플러팅에 넘어가 준건 내가 처음이라며!”


하지만 할 말이 많은 건 케이지도 마찬가지였다. 케이지는 아직 덜 자라 날렵함의 ㄴ자도 찾아볼 수 없는 어린 코타로의 동그란 얼굴과 날렵하고 야성적인 지금 코타로의 얼굴을 번갈아 노려보며 한 글자 한 글자 씹어먹듯 대꾸했다.


“그러는 코타로 씨야말로 조수석에 태운 건 제가 처음이라면서요. 이거 말이 다른데요.”


그리고 다툼이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마치 전 남자친구의 흔적을 찾아낸 사람들처럼 맹렬하게 싸웠지만, 실상은 그저 과거의 서로일 뿐이니 하등 쓸모없고 가치 없는 싸움이었다. 애초에 첫사랑과 열렬한 열애 끝에 단숨에 결혼까지 골인한 커플이라 전 애인이 없었던 만큼 질투할 대상이라곤 과거밖에 없었다.

의미도 없는 싸움은 길게 가지 못했다. 이게 다 무슨 소리인가 싶은 자괴감이 들어 힘이 빠진 탓이었다. 어차피 같이 탈래? 같은 플러팅에 넘어가 준 건 정말 다섯 살 코타로에게 처음 넘어가 주었고, 조수석에 처음으로 태운 건 네 살 케이지였다. 거짓말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쩐지 토라질 것만 같은 기분은 지워지지 않았다. 코타로는 입을 삐죽거리며 애꿎은 앨범만 만지작거렸다. 성질 같아선 마음껏 앨범을 움켜쥐다 망가트렸겠지만 소중한 기억이라 부수지도 못한다. 코타로는 힘이 쭉 빠진 얼굴로 비실비실 물었다.


“어떻게 하나도 기억을 못해?”


뾰로통한 얼굴로 팔짱을 끼자 케이지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기가 막힌 표정으로 코타로를 쳐다보았다. 어차피 전부 잊어버린 건 둘 다 마찬가지인데 무슨 불평을 하는 건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화가 나지 않는 건 어째서인지. 케이지는 팔짱을 끼느라 더 불거진 코타로의 팔뚝 근육을 아프지 않게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만.”

“케이지 너, 내가 너 꼬셨던 거 기억하고 후쿠로다니로 왔어?”

“다시 말하지만 그건 저야말로 해야 할 소리 아닙니까. 그때 걔라서 기억하고 좋아한 거예요?”

“아니거든! 완전 새로운 너에게 반했거든!”


이러니 화를 내고 싶어도 낼 수가 없다.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금 사랑을 고백하는데 진심으로 짜증을 내기도 뭣했다. 케이지는 빨갛게 달아오른 귀를 감추지도 못하고 어찌할 줄 모르다 그저 한숨만 내뱉었다.

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코타로는 한참을 팔짱을 낀 채로 혼자 구시렁거리더니 이내 두 팔을 번쩍 들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깜짝 놀라 쳐다보자 코타로는 케이지를 와락 껴안았다. 단숨에 번지는 체온이 뜨겁다. 촘촘히 맞붙은 피부 너머로 심장이 뛰는 감각까지 옮았다. 코타로는 케이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로 웅얼거렸다.


“아, 됐어! 이제 끝!”

“과거의 자신에게 질투하는 건 끝났습니까?”

“아, 아니 그건 쪼끔 더…….”


된소리를 내뱉으며 무자각으로 애교를 내뱉는 남편이 너무 귀엽다. 케이지는 여러모로 어이가 없어졌다. 진짜 과거의 자신에게 질투한다고 인정하는 것마저 귀여우니 답이 없었다. 더 하셔야 한다고요? 되묻자 코타로는 몸을 일으켜 케이지와 눈을 맞추었다. 꽉 껴안은 몸이 떨어지자 속이 텅 비었다. 코타로는 진심이 그득해서 도리어 일그러진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다.


“그게 아니라! 어차피 모르고 만났어도 널 사랑하게 된 걸 보니까, 난 어떤 너라도 만나면 사랑하게 되었겠다 싶었어. 그게 중요하니까 그냥 넘어갈래.”


정말이지 열렬한 고백이다. 결혼까지 했으면서 왜 사람을 또 꼬시는지 도통 모를 노릇이었다. 케이지는 시큰해진 눈가를 비비며 애써 덤덤한 척 대꾸했다. 뭐, 그건 저도 마찬가지네요. 코타로는 자연스럽게 맞받아치는 대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케이지는 청록색 눈을 내리깔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떤 당신이라도 사랑했을 거란 거, 저도 똑같아요.”


열정적인 고백은 둘 다 마찬가지라, 코타로는 띠에 묶여 벗어날 수 없는 기분을 음미하며 다시 케이지를 품에 끌어안았다. 케이지는 편안하게 안겨 사진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케이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문대고 있자 돌연 앙큼한 질문 하나가 튀어나왔다.


“그래서? 이때 제가 예뻐요, 아니면 지금 제가 예쁩니까?”

“……우와 환장하겠네! 너 그거 반대로 내가 물어보면 어쩌려고!”

“저야 당연히 지금 당신이죠.”


새침한 대답을 내뱉는 눈동자는 장난기로 물들었다. 코타로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으로 외쳤다. 와, 진짜 돌겠다! 야 너 오늘 진짜 잠 못 자볼래! 그리고 대답조차 듣지 않고 케이지를 번쩍 안아 들고 침대로 달려갔다. 어차피 답변은 코타로의 목을 끌어안고 킥킥 웃는 보쿠토 케이지 씨의 미소로 결정 났으니까. 침실로 달려가는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둥글고 따뜻한 빛이 내렸다.



03.

여름밤, 산책, 밤공기


5월 말이 되면 날씨는 봄보다 여름에 더 가까워진다. 보쿠토 코타로는 교복 셔츠 앞섶을 잡고 대충 흔들었다. 얇은 반소매 셔츠 안으로 조금은 후덥지근한 밤바람이 들어왔다.

달력으로만 보면 아직은 춘추복을 입어야 하지만, 워낙 계절이 이르게 오다 보니 학생들은 서둘러 옷장에서 하복을 꺼냈다. 매일 땡볕 아래를 뛰어다니는 운동부는 더해서 보쿠토는 날씨가 더워지자마자 여름 교복으로 갈아입었다. 소재가 얇고 바람이 잘 통하는 하복은 벌써부터 기온과 잘 맞아서, 정말 여름이 되면 어쩌나 걱정이 들 정도였다. 보쿠토는 혀를 살짝 내밀며 투덜거렸다.


“이건 너무 더운 거 아냐?”

“그러게요.”


곧장 옆에서 대답이 되돌아왔다. 보쿠토는 눈만 돌려 힐끔 곁눈질했다. 옆에서 묵묵히 걷고 있는 아카아시 케이지는 단정했다. 목 끝까지 제대로 잠근 셔츠는 보쿠토와 마찬가지로 반팔이었다. 아카아시는 늘상 서늘하게 굴면서도 정작 여름을 타서, 기온이 조금만 올라가도 금세 더워했다. 아마 후쿠로다니 안에서 가장 먼저 하복을 챙겨입은 건 아카아시일 게 분명할 것이다.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목선을 따라 옷깃 사이로 사라지는 땀방울을 훔쳐보다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바람이 불었는데 이상하게 아까보다 더 더웠다.

가장 말이 많은 보쿠토가 입을 다물자 하굣길은 금세 조용해졌다. 아카아시도 고요를 깨기 위해 굳이 수다를 떠는 성향도 아니라서 둘 사이에는 발소리와 저 멀리서 들려오는 이른 여름벌레 소리만 들렸다. 낮이 짧아졌대도 두 사람이 돌아가는 길은 어두웠다. 보쿠토는 아직도 집까지 한참 남은 길을 가늠했다.

두 사람의 등굣길과 하굣길은 달랐다. 아침에는 가장 빨리 올 수 있는 길로 왔고 밤에는 가장 늦게 들어가는 길로 에워갔다. 일부러 길을 둘러 가는 이유는 노골적이고 조금 풋내났는데, 그저 아카아시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있고 싶어서라는 소박한 소망 때문이었다. 밤 산책이라고 해도 좋을 법한 하굣길은 오늘도 긴 길을 돌아갔다.

새까만 천을 두른 밤은 가로등 아래를 지날 때마다 밝아졌다가 어두워진다. 학원을 둘러싼 돌담에는 장미가 가득 피었다. 이제 곧 정말 여름이 되고 그럼 이 수많은 장미 사이에 딱 하나만 금색 리본이 묶인다. 보쿠토는 유래를 알 수 없는 후쿠로다니의 전통을 떠올리다 문득 곁을 보았다. 다시 훔쳐본 아카아시의 옆얼굴은 담백했다.

이제 막 꽃봉오리가 맺혀 흐무러진 장미조차 연하게 보인다. 아카아시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주변에 뭐가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건 우아하게 생긴 아카아시의 얼굴 탓이기도 했고 실은 아직 말하지 못한 보쿠토의 마음 때문이었다. 아무리 사위가 어두워졌대도 화려한 장미조차 배경으로 만드는 아카아시는 그저 덤덤한 표정이었다. 이렇게 떨리는 건 오직 보쿠토 하나만인 것 같았다.

하긴, 매번 가던 길이었고 늘 같이 있는 사람이다. 새삼 떨리기엔 너무 익숙했다. 하지만 그 익숙함마저 서툴러지는 마음이 있었다. 보쿠토는 오늘도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술만 뗐다 붙였다. 그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높고 가는 소리가 하늘에 치솟았다. 보쿠토는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


“불꽃놀이 소리다!”


축제가 있다는 말은 못 들었지만 폭죽이 터지는 소리는 확실했다.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손을 낚아챘다. 금방 맞잡아오는 손바닥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 채로 보쿠토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뛰었다.

하늘만 올려다보며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달리자 이내 곧 시야에 커다란 꽃이 피었다. 새까만 밤하늘에 빛줄기가 내린다. 하양, 노랑, 빨강, 초록. 동그란 모양으로 터진 불꽃들이 산산이 퍼져 밤에 물들어 번졌다. 머리를 뒤흔드는 색의 향연에 눈 안쪽까지 반짝반짝한 빛이 튀었다. 옆을 돌아보자 아카아시도 멍하니 불꽃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보쿠토는 맞잡은 손을 조금 더 세게 쥐고 하늘을 올려보았다. 형형색색의 불꽃들이 펑펑 소리를 내며 터져나간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한참을 보고 있자 어느새 처음 들었던 소리는 사라졌다. 불꽃놀이가 끝났다. 이제 새까만 하늘에 빛으로 피어난 꽃은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불꽃이 핀 곳은 찾지 못해서 어디서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너무 먼 곳이기라도 한지 화약 냄새조차 나지 않았다. 대신 밤공기에 스민 짙은 장미 향이 코끝 언저리에 맴돌았다.

반쯤 다가온 여름 탓에 밤공기는 약간 습했다. 축축하고 조금 무거운 공기는 어느샌가 살며시 뜨거워져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묵직하다. 잔 냄새가 나지 않는 밤은 장미 향이 진하게 났다. 보쿠토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하늘만 올려다보며 뛰어서 그런가, 여기가 어디인지조차 헷갈렸다.

물론 잘 보면 아직도 학원 근처였다. 그렇게 오래 뛰지 않았고 이렇게나 장미 향이 짙게 날 정도라면 근방에 후쿠로다니가 있다. 하지만 가슴을 가득 메우는 밤공기 탓인지 그저 밤이 되었을 뿐인데 무언가 다른 세상에 있는 것만 같았다. 아카아시와 단둘이서.

단, 둘이.

정말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 깨닫고 나자 그제야 여전히 맞잡은 손이 떠올랐다. 손바닥 사이로 땀이 맺힌다. 덥다. 하복을 입고도 춥지 않은 밤은 피부가 맞닿으면 끈적끈적하게 뜨거웠다. 그렇지만 아카아시는 그렇게 더위를 타면서도 손을 빼내지 않았다.

보쿠토는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아카아시를 향해 반대쪽 손을 뻗었다. 아카아시는 움츠리지 않았고 그저 눈을 감았다. 너무 담백한 얼굴로 감아서 이유를 물을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청록색이 보이지 않는 게 조금 서운했다. 보쿠토는 밤보다 더 검은 머리카락을 만졌다. 그리고 내민 손 그대로 뺨을 감싸 쥐고, 아카아시에게 키스했다.

짧은 입맞춤은 마치 밤공기처럼 속이 꽉 차는 기분이었다. 처음이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눈을 뜨자 장미보다 더 빨개진 얼굴이 보였다. 보이진 않아도 아마 보쿠토도 마찬가지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모든 의문에 이유를 묻지 않아도 좋은 건, 역시 여름밤의 마법 탓이다.

그래서 보쿠토는 다시 한번 더 아카아시에게 키스했다.




💐스톡크

미뤄둔 업데이트 한꺼번에 하려니까 죽을 맛이네요…. 뭘 올렸고 뭘 안 올렸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다가 옛날 글 보려니까 수치심이 장난 아녜요 스티 시들어버려쪄XㅅX

예쁘고 쓸모없으며 달콤한 것

stock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