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아침밥을 먹고는 달려가던 동무가 없자 채연은 심심해 미칠지경이었다.

공주라는 이유로 매일 지루한 것을 억지로 배워야했던 채연에게 유일한 즐거움은 혜원과 함께 있는 것이었다.

책을 읽어도 보고 혼자 검을 들고 휘둘러도 보고 이것 저것을 해보던 채연은 결심한 듯 그토록 싫어하던 단장을 하고 평소 자주 가지 않았던 정궁으로 향하였다.


지금의 채연이 거처하는 수정궁은 왕이 귀족들에게 은근히 시달리는 왕비를 위해 특별히 지어진 별궁인데 반해 정궁은 원래 왕과 왕비가 거처하는 본궁이기에 규모 부터가 달랐다.

그래도 이나라의 공주인데 정궁엘 온 채연을 누가 막겠냐만은 이곳 시녀들은 채연을 그리 반기지는 않음이 틀림이 없어보였다.

끝이 없어보이던 복도를 지나 응접실에 들아간 채연은 온통 금실로 짜여진 천을 입힌 쇼파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사쿠라에게 다가갔다.


사쿠라는 상앗빛처럼 뽀얀 피부에 금빛 머리의 단발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정통 왕가의 상징이라나 뭐라나... ...


채연이 자신의 흑단 같아 까맣고 긴 머리칼을 슬쩍 쓸어내리고는 사쿠라 곁으로(사실 사쿠라 옆에 서 있는 혜원의 곁으로) 다가가자 채연을 발견한 사쿠라가 오만한 눈 짓을 하며 말했다.




"웬일이야? 드디어 이 언니에게 아침 문안인사를 하는 예의를 갖추기로 한 거야?"


이것 때문이었다.

채연이 정궁을 오기 싫어하는 이유가.


채연은 어린 시절 수정궁에서 같이 자랄 때 분명 저에게 다정했던 사쿠라 언니를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왕세녀로 책봉이 되어 이곳 정궁으로 옮기고 부터인가 사쿠라는 점점 채연을 멀리하고 쌀쌀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렸던 채연은 이곳 정궁에는 마음을 사악하게 만드는 악마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었던 적도 있었다.



"사쿠라 언니 동생 채연이 아침 문안 인사드려요.."



"너도 철이 드는구나?"



"언니만 좋으시다면 매일 오전에 언니와 함께 있으면서 예의도 배우고 싶어요


허락해 주실 건가요?"




"뭐 나쁠 것 없지 하지만 동생아 언니는 항상 공부를 해야 돼!


아마도 네가 많이 힘들걸? 네가 할 수 있겠어?"




채연은 제 언니가 은근히 천방지축인 저을 비꼬아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애써 입가에 미소를 잃지 않으며 대답했다.




"제가 물론 언니와는 너무도 달라 힘들겠지만 고작 몇 시간을 못 견디겠습니까?


이참에 저도 언니를 보고 많이 배워두겠습니다."




"좋아 매일 오전 2시간 정도만 시간을 줄게


... .... 이리 와!!"




채연은 제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치며 오라고 웃음 짓는 사쿠라를 보며 순간 어린 시절의 사쿠라가 돌아온 것 같아 얼떨떨한 표정으로 옆자리로 가 앉아 사쿠라의 얼굴을 계속 살폈다.

그도 그럴것이 채연은 예전의 언니가 늘 그리웠다.

비록 사쿠라는 왕비가 친모가 아니었지만 늘 채연과 동일하게 사랑을 해주려는 왕비의 노력에 사쿠라 또한 왕비를 잘 따랐고, 둘은 친 자매와 같이 지내 왔었기 때문이었다.


사쿠라는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쿠라가 왜 기분이 좋아 보였는지를 알게 되었다.


아침 공부가 끝나 사쿠라는 수행원을 거느리고(수행원이 어찌나 많은지 일단 경호원들부터 시작해 사쿠라의 잡다한 물건을 지고 다니는 수행원 옷매무새를 매번 다듬어 주는 수행원하며 양산을 들어주는 수행원까지 있었다) 정원에 나갔다.


사쿠라는 항상 팔꿈치까지 오는 레이스가 달린 고급 비단 장갑을 끼고 외출할 땐 화려한 양산을 쓰고 다녔다.


게다가 옆엔 언제나 누군가가 팔짱을 끼고 부축을 해주었다.


그 부축을 해주는 사람이 바로 혜원이었다.


채연은 속으로'아니 왕세녀면 혼자서 걸음도 못 걷나? 왜 경호원이 부축까지 해줘야 하는 거야? 아휴 저 화려한 양산까지 암튼 사쿠라의 취향하고는'하며 입술을 삐죽였다.


그런데 사쿠라는 저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오로지 한 사람만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바로 혜원이었다.


채연은 그날 언니가 기분이 좋은 이유를, 아직 어린 혜원이 경호원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단짝이었던 동무를 완전히 언니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것을 예감했다.


채연은 다시는 언니에게 가고 싶지 않았지만 꼬박꼬박 사쿠라의 그 꼴사나운 모양을 다 봐주며 그래도 혜원은 내 친구라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언젠가는 보여 주고 싶은 오기가 생겨 정궁을 하루도 빼지 않고 찾아갔다.




한 달여가 지난 어느 날 어김없이 정궁의 응접실에 들어가 수행원들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있는 사쿠라에게로 다가갔다.


하지만 어쩐지 오늘 따라 사쿠라의 낯빛이 더욱더 창백해 보였다.


더구나 채연이 곁에 다가왔음에도 눈길 하나 주지도 않고 평소처럼 '왔어?'라는 예의사의 인사도 건내지 않았다.


채연은 '그럼 그렇지 '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몹시 않좋아 보이는 사쿠라의 얼굴을 살피며 걱정하고 있었다.




응접실 문이 열리고 제1경호원과 혜원이 들어왔다.




"사쿠라님 자! 이제 가셔야 합니다."




제1경호원의 말이 끝나자 사쿠라는 자신이 좋아하는 혜원의 부축을 받으면서도 무척이나 싫은 표정을 하며 경호원을 따라나서며 채연에게 말했다.



"채연 오늘 넌 집에 그만 가봐!"



"왜? 나도 갈래 언니? 어디 가는 건데?"



사쿠라는 채연의 말을 들은 채도 하지 않고 응접실을 나가면서 채연의 경호원인 조쉬에게 눈 짖을 하고 나가 버렸다.


조쉬가 언니를 따라가려고 발버둥을 치는 채연을 막아서려고 다가 서려 하자 채연은 조쉬를 냅다 밀어버렸다.


'빌어먹을 조쉬 할아범 언니도 조쉬도 다 싫어'


궁의 원로들이 채연을 무시하고 있다는 건 조쉬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조쉬는 나이가 오십이 훌쩍 넘는 은퇴 직전의 노장이었다. 그가 한창 호기심 많고 활발한 채연을 제대로 경호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때론 채연은 그게 오히려 혜원과 숨바꼭질할 땐 너무도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이럴 땐 또 자기 업무에 충실해서 탈이었다.


채연은 순순히 조쉬를 따라 차에 오르는 척을 하다 조쉬가 차에오르는 순간 몰래 빠져나오며 속으로 조쉬가 이럴 땐 좋다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 영감탱이는 수정궁에 도착해서야 채연이 없어진 줄 알 것이다.


조쉬가 출발을 하고 채연은 사쿠라의 전용 차가 있는 주차장으로 달렸다.


사쿠라와 경호원 둘을 태운 차는 이미 출발하고 있었다.


이곳 천공의 섬에는 일반인은 차를 타고 다니지 않는다.

왕족이나 병자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기에 차의 속력을 내지 못하기 때문에 채연이 열심히 달린다면 거뜬히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10분가량을 달리자 사쿠라의 차가 어느 지나치게 회색빛의 위용을 자랑하는 채연이 태어나 처음 보는 건물에 서는 것을 보았다.


사쿠라와 경호원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채연은 얼른 현관문이 닫히기 전에 숨어들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것을 본 채연은 계단을 향해 재빨리 뛰어 올라가 사쿠라가 내린 층에 도착해 온통 흰색으로 페인트칠해져 있는 문으로 들어가는 사쿠라를 불러 세웠다.




"언니!!"




"채연? 네가 왜 여기에??"




채연을 발견한 사쿠라가 아주 당황하는 낮빛이 역역해 하며 옆에 있던 경호원에게 눈짓을 하자 경호원이 채연에게 말을 건넸다.




"공주님, 공주님께서는 이곳에 오시면 안 됩니다. 자 그만 저와 함께 가시지요 제가 궁까지 모시겠습니다."




정중히 대하려고 노력하는 경호원의 말을 무시하고 채연은 사쿠라에게 무작정 달려갔다.




하지만 '슈~욱!'하는 소리와 함께 칼을 빼어들고 자신을 가로막는 혜원에 의해서 사쿠라의 근처도 못 가고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혜. 혜원... ...?"




채연은 저에게 칼을 켜누고 있는 자신의 다정했던 동무의 얼굴을 보며 마치 그녀가 아니었길 바랐지만 자신의 앞에 있는 이는 틀림없이 혜원이었다.




"채연 네가 또 도는 넘는구나? 얼른 돌아가!


그리고 이제부터 넌 아침마다 나에게 올 필요 없어“




채연은 지금 사쿠라의 꾸지람 소리 따위는 들리지도 않았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항상 다정하던 동무의 위협적인 얼굴에 세상을 잃어버린 기분이 들어 갑자기 왈칵 쏟아져 내리는 눈물 때문에 채연은 그저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어 뒤돌아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채연은 늘 숨바꼭질을 잘했다.


혜원에 비해 몸집이 작은 채연은 언제나 이겼다.


채연은 마구 달리던 걸음을 멈추고는 실험실로 보이는 곳으로 숨어들어가 구석 벽에 자리 잡고 주저앉아 울다가 점점 가까워지는 발자국 소리에 눈앞에 보이는 통풍구 하나를 열어 속으로 들어갔다.


자신이 우는 것을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던 채연는 경호원 몇몇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숨죽이고 한참을 있다가 그만 잠이 들고 말았는지 한동안의 시간이 지나 채연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깨어났다.



'아! 맞다 나 지금 숨어있었지?'



채연은 혜원과 숨바꼭질하다가 잠이 든 적이 두어 번 있었기에 익숙하게 환풍구의 문을 열고서 밖으로 나왔지만 그곳 역시 불이 꺼져 있어 의약품용 냉장고에서 내뿜는 푸른색의 조명에 의지해 간신히 앞을 식별할 수 있었다.


오랜 시간 웅크리고 있었던 몸을 가볍게 스트레칭하고서 이곳을 어떻게 나갈까 궁리를 할 때쯤 어디선가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흑흑 흑, 흑흑'




"?"




채연은 어두운 내부 벽을 더듬거리며 소리 나는 곳을 찾던 중 자신이 잠들었던 환풍구로 아주 미세하게 들려오는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채연은 그 좁은 곳을 다시 들어가 소리 나는 쪽을 향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또래 보다 작은 편이었다 하더라도 좁은 환풍구를 지나는 것은 쉽지가 않았지만 어차피 출구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낮은 자세로 엉금엉금 기어 엷지만 빛이 보이는 곳으로 향했다.

점점 소리가 선명하게 들리는 곳으로 가 안을 살피자 병실같이 보이는 방에 한 소녀가 침대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채연은 환풍구 입구를 손으로 조심스럽게 밀고 소녀가 놀라지 않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왜 우는 거야?"




소녀는 자신 말고 사람이 있었다는 것에 놀랐는지 어린아이 목소리에 놀랐는지 울음을 뚝 그치고 놀라서 커다래진 눈으로 채연을 돌아보았다.


채연은 그녀 돌아보는 모습이 마치 잘 익은 복숭아 같다고 생각할만큼 예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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