째깍, 째깍, 째깍.

6월 13일이 되기 한 시간 전. 장 우혁은 아직도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평소에는 해만 지면 재깍재깍 집에 들어오던 양반이 오늘은 코빼기도 안 보인다. 12시가 땡 치면 무슨 날인지 모를 리가 없는 사람인데 연락 한 통 없이 늦게 들어오는 우혁이 퍽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승호가 늦게 들어오면 그렇게 난리를 치면서 정작 본인은 이런 날 늦는다. 아무리 쿨하게 신경 쓰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어도 자꾸 속부터 성질이 올라오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네가 이런다 이거지. 손톱을 까득까득 물어뜯으며 시계만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울컥 올라오는 그 무엇에 바로 옆에 잡히는 물병을 현관문쪽으로 집어던졌다. 퍽- 소리와 함께 문에 부딪힌 물병의 뚜껑이 터져서 주변으로 물이 잔뜩 쏟아져 나왔다.


“ 나쁜 놈. “


흥건하게 모여있는 물 웅덩이를 보고 있자니 우혁의 잔소리가 벌써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지만, 치울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흥, 불만 있으면 일찍 들어오던가. 그대로 소파에 엎드려 벽에 걸려있는 자신과 우혁의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분명 좋았는데. 뭘 해도 웃음만 나고, 둘이 평생 안 싸우진 않아도 평생 사랑은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랑이 식었지. 그런 거지 장 우혁. 곱씹다 보니 또 화가 치밀어 올라 소파를 -물론 푹신한 부분- 주먹으로 내리쳤다.
처음에는 뭐 저런 놈이 다 있나 싶었다. 저런 애랑 계속 같은 팀으로 같이 살라고? 적당히 달라야지 너무 극과 극으로 다른 우혁이 싫은 건 당연했다. 물론 우혁도 본인을 퍽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진 않았고. 날카롭게 생긴 놈이 하는 짓도 날이 서있어서 분명 나쁜 놈일 거라 단정을 지어버렸었다. 일부러 몰래 들으려고 작정한 건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듣게 된 우혁의 전화 통화 하나에 무너진 편견이었지만.


“ 나쁜 놈 맞네. “


소파 쿠션을 꼭 껴안고 째깍째깍 소리 내며 지나가는 시계만 다시 멍하게 보고 있자니 분노에서 서운함으로 감정이 한순간에 바뀌었다.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이 또 있었던 거 같은데. 끔벅, 끔벅 눈을 깜박이다 생각난 그 날. 우혁이 같이 살자며 멋없는 프러포즈를 했던 그 날.
우혁에게 받은 반지를 팬들에게 거하게 자랑하며 결혼하겠다며 큰소리치고 내려와 놓고 민망함에 우혁을 제대로 못 쳐다보는 나를 네가 잡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다니며 어수선하던 그 공간에서 오롯이 나를 마주 보며 또렷한 목소리로 말하던 우혁.


안 승호, 결혼할래?


씩 웃으며 던진 그 말이 나를 놀리려고 하는 말이 분명해 보였는데 나는 그 말 하나에 홀려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만 끄덕였으면 다행이게. 몇 주 뒤에 여자 연예인에게 고백받았다는 우혁의 말에 울고 불고 성질내며 ‘나랑 결혼한다며! 결혼하자며!’ 난리를 친 것으로도 모자라 그날 밤에 우혁의 방으로 쳐들어가 ‘장 우혁! 나랑 결혼해. 그러니까 한눈팔면 눈 찔러버릴 거야.’ 따위의 소리까지 했더랬다. 그런 내 모습에 크게 웃으며 알았다고 나를 달래는 우혁이 또 너무 좋아서 내가 뭐 때문에 화를 냈는지도 잊었었다. 결혼하자며 질투를 쏟아낸 내 모습을 그저 가볍게 넘겼는지 우혁은 다를 것 없이 나를 대했고 나는 그게 그렇게 서운하고 슬플 수가 없었다. 나는 우혁의 말 하나에 인생을 가져와 내걸었는데, 우혁은 그 모든 것을 장난처럼 대충 넘기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우혁이 말 하나하나를 그냥 하는 법 없이 무언가 의미가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당장 눈 앞에 보이는 행동이 그렇지 않아 보여서 내 속만 까맣게 타들어 갔던 것이다. 분노에서 서운함으로 가득 몸이 잠겨버렸던 그때. 지금도 비슷한 그 기분이다.
알고 있다. 기념일 따위에 나 혼자 발 동동거리며 신경 쓰는 거. 장 우혁이 세심하게 날짜나 숫자, 색깔에 의미를 많이 부여하고 사는 걸 알지만... 이런 기념일은 관심 없어할 거다. 장 우혁 좋아하는 안 승호나 이런 거에 목매달고 시간 따지면서 안절부절못하는 거지. 나만 좋아하는 거지. 나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끔벅이던 눈에서 눈물이 뚝, 뚝 떨어졌다. 정막이 흐르는 거실에서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 때문에 짙은 색으로 퍼지는 소파의 천을 가만히 내려다보니까 비참함마저 몰려왔다. 대체 한 시간도 안 된 이 시간 동안 나는 몇 가지 감정이 오가는 건지, 이 정도면 병 아닐까 싶었다. 웃었다가, 화냈다가, 울었다가.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장 우혁. 네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중얼중얼 네 욕을 하며 바라본 시간은 11시 30분. 그리고 여전히 조용한 핸드폰. 자존심도 뭣도 없이 폰만 쳐다보면서 우혁의 연락을 기다리는 게 또다시 열이 받아 고장이라도 난 듯 조용한 핸드폰을 잡아 현관문 쪽으로 던져 버렸다.
콰장창. 떨어져 나간 액정 유리며 부속품들이 물 웅덩이 주변으로 떨어졌고 제 성질에 못 이겨 숨을 거칠게 내쉬던 몸은 그다음으로 던질 물건으로 자연스럽게 손을 뻗었다. 쿠션, 인형, 잡히는 족족 던지다 손에 잡힌 액자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너와 나를 보니 그마저도 힘이 빠져 주저앉아버렸다. 신은 왜 나에게 장 우혁을 이길 힘을 주지 않으셨을까. 이길 힘을 안 주셨으면 장 우혁이 좀 덜 잘생기기라도 했어야 했다. 그래야 이 좆같은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나도 평소 같은 하루를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엉망이 된 거실과 현관을 잠시 바라보다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갔다. 아직 시간은 11시 45분이지만 더 이상 기대를 가지고 기다리는 건 그만 두기로 했다. 기대하지 말자고 해서 정말 조금도 기대를 안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우혁이 12시 안에 나타나지 않는 것에 대한 상처를 조금 덜 받고자 내 나름의 합리화였다. 침대에 털썩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데 어느새 따라온 월드가 끙끙 거리며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 월드야. 형 자는 사이에 혹시라도 장 우혁 오면 물어버려. 알았지? “



날이 선 내 심술에 월드는 그저 고개만 갸우뚱갸우뚱거리다 마치 내 말에 알았다는 듯 두어 번 캉캉 거렸다. 그래, 너는 내 편이지? 여전히 자꾸만 가라앉는 기분에 인스타라도 해야겠다 싶어 폰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내가 던졌던 것이 떠올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되는 일이 없다. 술이라도 사올 걸 그랬네. 짜증스러운 손으로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누워서 눈을 꽉 감았다. 감은 눈 위로 자꾸만 네 얼굴이 떠오르는 건 도대체 어떻게 지울 수 있는지 누가 좀 자세히 알려줬으면 좋겠다.
이렇게 누워서 반강제로 네 얼굴과 함께 네가 했던 말 하나하나가 같이 떠올랐다. ‘ 토니가 선물 줬거든요. 생일 축하한다고. 반지를 줬는데, 영원히 끼고 다닐 거예요.’ , ‘토니 온대?’ , ‘승호한테 그러지 좀 마세요’ ...  언제나 앞에서 자신을 지켜주고 뒤에서 든든하게 버텨주었던 우혁의 행동과 목소리에 미웠던 마음이 또 녹아내리는 걸 보니 지조도 없는 새끼가 분명했다, 나는.
짹깍, 짹깍. 실눈으로 확인한 시간은 11시 50분. 이불을 머리 끝까지 올려 쓰고 눈을 꽉 감았다. 양이라도 세다 보면 잠이 올까. 얼른 장 우혁이 없는 이 현실에서 나를 도망가게 해줘. 원래 어떤 생각을 피해 다른 생각을 하려고 하면 할수록 머릿속은 텅 비어서 하기 싫은 생각만 가득 차게 되는 법인지라 장 우혁이 아닌 다른 생각을 하고 싶었던 내 머릿속은 장 우혁, 세 글자만 콕 박혀 괴로웠다. 필사적으로 꺼낸 생각이라곤 내일 무슨 라면을 먹을까, 하나뿐이었고. 그러는 사이에 내 옆에서 웅크리고 있던 월드가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방 밖으로 착, 착 소리를 내며 걸어 나갔다.


“ 어디가 월드으... “

“ 또 성깔 부렸네, 안 승호? “



방 밖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장 우혁이란 걸 알자마자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기다렸다는 티 내는 게 쪽팔렸기 때문에 다시 누웠는데 이미 방 밖이 엉망이라는 사실은 잊고 있었다. 심장이 거세게 쿵쿵 뛰고 숨이 차오르는데 아닌 척 잠든 척 눈을 꾹 감고 손에 이불을 꾹 쥐었다. 월드 발소리와 함께 우혁의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방문이 열렸다.

“ 안 승호. 자? “

“ … … “

“ 승호야, “



처음엔 짜증 나는 마음에 대답을 안 했는데 그것이 두 번, 세 번이 되니까 이제는 대답할 타이밍을 못 잡아서 우혁의 부름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다시 들리는 우혁의 발소리에 그냥 나가버린 걸까, 일어나야 하나, 갈팡질팡하는 머릿속을 들키지 않으려 입술의 안쪽을 꾹 깨물었다. 자다 깬 것처럼 눈을 떠야겠다 마음을 먹고 눈을 뜨려던 그때, 익숙한 향기가 나는 손이 내 이마에 닿더니 느리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 승호야, 나 좀 봐봐. “



낮고 나긋한 우혁의 목소리에 이길 힘이 없는 안 승호는 그 말에 천천히 눈을 떴고, 시야에는 침대에 걸터앉아서 안 승호를 내려다보는 세상에서 제일 잘 생긴 장 우혁이 있었다. 미울 거면 잘생기지나 말던가.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우혁을 한참 말없이 쳐다보고 있으니 얇은 입꼬리를 씩 올리며 우혁의 입술이 먼저 열렸다.



“ 나 없다고 또 그 사이에 꼬라지 부려놨더라? “

“ … 내가 뭘. “

“ 거실이랑 현관 상태가 말이 아닌던데. “

“ 월드가 한 거야. “

“ 우리 집에 월드가 둘인가 봐? “

“ … “

“ 큰 월드 씨, 뭐가 또 그렇게 성질이 났는데. “

“ 안 났거든. “

“ 아닌데, 지금 눈에 완전 꼬라지가 가득한데, 너. “

“ 아니거든. “

“ 안 승호. “

“ … “

“ 너 울었네? “

“ … 울긴 누가 울어. “


우혁의 말에 부정하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뻗어진 그의 손에 턱을 잡혔고, 놀라서 커진 눈은 정신 사나울 정도로 빠르게 깜박였다.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다 손에서 빠져나오려고 손목을 잡아내자 사납게 변한 그의 눈에 얌전히 손을 내렸다. 이상하게 우혁은 내 모든 걸 다 알고 있었다. 진짜 잠을 자는지, 자는 척을 하는지. 정말 울었는지, 울지 않았는지. 안 승호가 우울한지, 기쁜지. 내가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하지 않아도 우혁은 늘 한 발 먼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게 아마도 내가 우혁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 왜 울었는데. “

“ 안 울었다니까. 신경 꺼. “

“ 네가 울었는데 내가 어떻게 신경을 꺼. “

“ 그렇게 내 생각하는 사람이 이제 들어와? “

“ 뭐? “

“ 나 두고 나가서 노니까 좋았냐? 어? “

“ 너 무슨…? “

“ 연락도 한 통 없고. 전화기는 왜 들고 나니냐, 장 우혁! “

“ … “

“ 너 내일이 무슨 날인지 알긴 아냐? 어? 아냐고! “

“ 야. “

“ 그래 모를 수도 있지. 뭐 그리 중요하겠냐? 나 혼자 신경 쓰는 날이지. 장 우혁 혼자 좋아하는 안 승호만 손가락 접어가면서 기다리던 날이지. 어? “

“ 안 승호. “

“ 그으래, 내 이름 안 승호다. 뭐. 왜. “

“ 너 내가 늦게 들어왔다고 밖에 저 난리를 쳐 논거야? “

“ 내가 안 했다고! 월드가 했다고! “

“ 그래, 에드월드가 했는지, 안 월드가 했는지 가서 좀 보자. “

“ 나한테 손대지 마. “




내 손목을 잡아 데리고 나가려던 그의 손을 쳐내고 시익 시익 거리는 표정으로 노려보자 우혁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혼자 방을 나가버렸다. 나 때문에 화가 난 걸까. 혹시라도 나를 두고 다시 나가버릴까 뒤따라 나가고 싶었지만 자존심이 있지, 가만히 방에 앉아 우혁의 움직임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소리와 쓰레기통 닫는 소리. 성질부려놓은 거실을 정리하는 것 같아 안심한 나는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몇시지. 12시 지났겠지. 최악으로 시작하는 하루구나. 손대지 말라는 말은 하지 말 걸 그랬나. 또 성질대로 심하게 말했나. 저지르고 후회하는 게 안 승호 특기지. 불안함에 손톱을 다시 까득까득 깨물다 우혁이 방으로 들어오는 소리에 다시 죽은 듯이 멈췄다.



“ 안 승호. 다친 곳은 없어? “

“ … “

“ 늦게 와서 미안해. 더 빨리 오려고 했는데, 길이 막혔어. 변명 같은데 진짜야. “

“ … “

“ 연락 일부러 안 한 거 아니야. 바빠서 폰을 잡고 뭘 할 시간이 없었어. ... 아니다, 늦을 거 같으면 미리 연락 했어야했는데, 거기까지 생각 못해서 미안해. “

“ … “

“ 승호야, 나 좀 봐봐. “

“ … 싫어. “

“ 나 보기 싫으면 이거라도 보자. 어? “

“ … “






침대 옆에 앉아서 다정한 목소리로 어르고 달래는 장 우혁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장 우혁이었다. 다른 누군가는 모르는 안 승호만 아는 모습의 장 우혁. 그래서 이길 방법이 없는 그런 장 우혁. 아무리 화가 머리끝까지 났어도 그런 우혁을 보면 내가 화가 났었는지도 잊어버릴 정도였다. 사랑이 죄라면 죄일 것이다. 장 우혁도, 안 승호도 어디 가서 하지 않을 행동, 생각, 말들을 오롯이 둘이 있는 순간에는 쏟아져 나온다. 어디 가서 잔뜩 자랑하고 싶지만 나만 보고 싶은 우혁의 모습들. 나를 향하는 우혁의 시선을 매순간 차곡차곡 가슴에 새겨둔다.

우혁의 목소리에 몸을 일으켜 고개를 돌리자 눈 앞에 불쑥 보이는 건 우혁의 모습 대신 새빨간 장미 꽃다발이었다. 준비하면서 색깔까지 신경 쓴 듯 꽃다발을 묶은 리본도 붉은색이었고 포장지는 옅은 핑크빛이었다. 꽃다발 전체가 마치 안 승호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티를 내는 것 같이 말이다.




“ … 어… “

“ 12시다, 안 승호. 올해도 나랑 결혼하자. “





우혁의 말에 고개를 돌리니 시계는 정확히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6월 13일. 잊지 않고 있었구나. 네가 잊어서 늦게 오는 거라고 나는 그 난리를 쳐놨는데, 너는 기억하고 선물까지 준비를 해놨다. 아무 말도 못 하고 꽃다발과 우혁을 번갈아 바라보는 내 모습에 그도 덩달아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 우혁이 너... “

“ 기억하고 있었냐고? 당연한 거 아니야? 너는 나를 얼마나 나쁜 놈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데.”

“ 아니… 나는… “

“ 또 나는 너를 안 좋아하고, 안 승호 혼자 장 우혁 좋아한다고 땅 파는 생각이나 했지? “

“ … “

“ 나는 언제나 진심이라고 얼마나 더 말해야 믿어줄래, 승호야. “







빨간 장미 꽃다발을 품에 안겨주며 말하는 우혁이 퍽 슬퍼 보여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너를 의심하는 게 아니야.라고 외쳐야 했는데 거짓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늘 우혁의 마음을 의심했고, 가볍게 여겼다. 우혁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합리화시키며 늘 나 혼자만 하는 사랑이라고 여겼다. 옛날부터 우혁이 더 많이 표현해주고 감싸고 사랑을 해준 걸 알고 있으면서 조금이라도 내게 멀어지만 그걸 그렇게나 못 견뎌했다, 나는.







“ 맨날 말해주는데 또 까먹었겠지. 너보다 내가 먼저 너를 좋아했다고. 그래서 먼저 결혼하자고 한 거라고. “

“ … 아냐, 기억해. “

“ 그래, 잊지 마. 장 우혁이 안 승호 사랑하는 거. “

“ … “

“ 그 꽃다발, 그렇게 보여도 내가 키운 장미야. 얼마 전에 꽃 펴서 그거 잘라다가 꽃집 가서 꽃다발 만드는 거 알려달라 했다. “

“ 네가 키운 꽃이라고..? “

“ 어. 옥상에서. “

“ … 그래서 더 예뻤구나 꽃들이. “

“ 처음 해보는 거라서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 그래서 늦었어. 더 빨리 오려고 했었는데. “

“ … 고마워 우혁아. 진짜, 너무 예뻐. “

“ 그래서, 너는? “

“ 응? “

“ 너는 나한테 뭐 해줄 건데? “






성질내느라 잊고 있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거실에 숨겨두었던 꽃다발과 선물 상자를 찾아 품에 껴안고 방으로 가려는데 우혁이 방에서 나왔다. 화들짝 놀라 등 뒤로 선물들을 숨기고 우혁에게 빨리 눈 감으라고 소리쳤다.





“ 아 뭐야, 서프라이즈 하고 싶었는데. “

“ 어, 나 아직 못 봤어. 눈 감고 있었다. “





내 투정에 눈을 감고 미소를 짓는 그 얼굴이 너무 좋아서 살금살금 다가가 우혁의 입술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떼었다. 눈을 천천히 뜨는 그의 얼굴에 놀람이 가득 담겨 있는 게 또 좋아서 키득키득 웃었다. 분명 아까까지 장 우혁을 죽이겠다며 성질을 내던 안 승호는 어느 중동으로 가버렸는지 그저 허허실실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질 않았다.





“ 방금 뭐야. 선물이야, 서비스야? “

“ 서비스. “

“ 서비스가 더 좋은데, 오늘? “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아저씨 같은 소리를 던지는 우혁의 팔을 툭 치고는 품에 안고 있던 꽃다발과 선물 상자를 건네주었다. 어떻게 생각이 통했는지 내가 준비한 선물도 꽃다발이었다. 내가 산 꽃은 우혁의 색깔인 파란색으로 물이 든 장미였다. 하늘을 한 움큼 뭉쳐서 가지에 걸어놓으면 이런 모습일까 싶은 예쁨이어서 언젠가 우혁에게 꼭 사주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새삼스럽지만 파란색 장미 꽃다발을 가득 안고 있는 우혁은 정말 맑은 하늘같이 예뻤다. 나의 하늘. 나의 세상. 내 사랑, 장 우혁.







“ 사랑하면 닮는다더니, 너랑 나랑 생각하는 게 통했나 보다 이번에. “

“ 볼 때마다 너 같아서 한 번은 사주고 싶었어. 파란색 장미. “

“ 고마워. 예쁘다, 승호야. “

“ 꽃이? “

“ 안 승호가. “



















파란 꽃다발과 함께 건네준 선물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우혁은 그 안에 들어있던 상자를 두어 번 흔들더니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 이건 뭐야. “

“ 선물이지. 신발이야. “

“ 신발? “

“ 응, 너 신발 좋아하잖아. 그래서. “

“ 안 승호. “

“ 감동이라고? 별말씀을. “

“ 아니. 신발 선물하면 그거 신고 떠난다던데, 떠나라고 준 거 아니지? “

“ 분위기 못 읽네, 장 우혁. 그거 신고 떠나기만 해. 발목 자르러 쫓아갈 거야. “

“ 와, 무섭다. “

“ 무서우면 그거 곱게 신구 나한테 장가 오시던가. “

“ 프러포즈가 격하십니다, 안 승호 씨. “

“ 싫다구? “

“ 엄청 좋다고. “





애정이 가득 담긴 말장난의 끝은 언제나 달다. 그래서 우리의 싸움이 금방 풀어지는 이유일 수도 있다. 엉망이 된 거실을 정리하는 우혁의 잔소리의 맛 또한 달아서 자꾸만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우혁의 뒤로 살금살금 다가가 우혁의 뒷목을 와락 껴안고 등에 뺨을 대고 있으니 너와 내 심장의 속도가 맞춰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너와 내 인생에 무언가가 하나씩 맞춰지는 것만큼 좋은 게 또 있을까. 우리의 시선, 우리의 발걸음, 지금처럼 서로를 향해 뛰는 심장의 속도. 불안에 떠는 안 승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나 혼자 장 우혁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고, 누구 하나만 온통 마음을 쏟는 게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있는 거라고, 서로 같은 마음을 주고 있는 거라고 느껴져서 나에게 행복감과 안정감을 주었다.




“ 승호야. “

“ 응? “

“ 화난다고 물건 던지지 말자. “

“ … 응. “

“ 이거 봐. 이게 다 돈이야. 멀쩡한 걸 던지면 망가지고. 어? “

“ …. 야. “

“ 그럼 또 새로 사야 하잖아. 이런 게 낭비야, 승호야. “

“ … “

“ 불필요한 물건을 비우고 사는 마인드는 아주 좋은데, 이건 비우는 게 아니야. 너도 알잖아. “





장 우혁은 안 승호 놀리는 걸 좋아한다. 놀리는 걸 알면서도 나는 또 울컥 성질이 나서 매달려있던 우혁의 등에서 내려와 눈이 빠져라 장 우혁을 노려봤다. 잘 나가다가 일부러 이러지 또.




“ 너 지금 월드랑 완전 똑같이 생겼어, 안 승호. “

“ 야. 너 때문에 화나서 물건 던진 건데, 다친 곳은 없냐는 말이 먼저 나와야 하는 거 아냐? “

“ 딱 봐도 다친 곳 없는 모습이길래. “

“ 그렇긴 한데..! 그…건 그런데…! “

“ 그리고 아까 다친 곳 없냐고 물어봤다, 나는. 내 말 안 듣는 안 승호만 기억 못 하지. “

“ 언제? 나는 기억 안 나는데? “

“ 이거 봐. 내 말 안 듣지. 나한테 집중도 안 하는 안 승호 데리고 서러워서 살겠냐. “

“ 진, 진짜 기억이 안 나...! “

“ 잘 생각해봐. 숙제야. “

“ 어후… “

“ 승호야. 물건 던져서 박살 내는 건 상관없는데, 너 다칠까 봐 그만 하라는 거야. 매번 성질난다고 엉망으로 만들면 내가 얼마나 속이 타는지 아냐. “

“ … “

“ 안 승호 불안해하지 않도록 내가 조금 더 신경 쓸게. 너도 장 우혁 안 불안하게 같이 노력하자. “

“ … 응. 그럴게. “







너와 나는 만나던 그 순간부터 평행선이었다. 세상에 달라도 이렇게 다른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다른 존재였던 너와 나. 그랬던 우리가 손을 잡고 같은 앞을 바라보며 같은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걸어온 길이 달라도 우리는 결국 하나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늘 달콤하고 행복한 생활만 가득할 수는 없다. 울고, 화내고, 싸우고 이렇게 살아갈 거다. 나이가 60이 되고 70이 되어도 우리는 맞춰가느라 여전히 싸울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소원하건데, 부디 그 싸움을 이 사람은 나랑 맞지 않구나,라고 정의 내리지 않길 원한다. 우리에겐 찰나의 살벌함보다 더 많은 달콤함들이 함께 해왔고, 앞으로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달콤 쌉싸름이라기보다 달콤 살벌한 우리의 연애지만 나의 목표는 단 하나다. 우혁과 내가 나이가 들어 어느 누구도 없이 단 둘만 남게 되는 날, 우리 정말 사랑하면서 잘 살았다고 말하는 것. 나 혼자 잘 사는 거 말고, 우혁과 같이 둘이 잘 살아왔다고 말하게 되는 것. 우혁의 손을 잡고 덕분에 내 인생은 찬란하고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나는 만족할 것이다.


너와 내가 결혼을 약속한 지 19년째. 네가 없었던 시간보다 옆에 있었던 시간이 더 많아져 이제는 네가 없는 날들은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우혁아, 너는 내 하늘이고, 내 세상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북극성이다.
우리의 사랑에 지치지 말아줘. 늘 그래 왔듯 내게 손을 내밀어 줘. 빛을 내어줘. 나는 헨젤과 그레텔처럼, 네가 나에게 보내주는 빛을 따라 그 어디에서든 너에게 갈 거야.





감히 영원을 약속하지 말고 한 해를 또 약속하자.
우리, 올해도 결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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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톤혁 ( http://monthlytonhyuk.creatorlink.net ) 창간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공개가 가능해져서 업로드합니다.

하나하나 답변을 해드리지 못해 늘 죄송합니다. 노잼맨의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사랑합니다^ㅅ^❤️  




톤혁(톤수혁공)합니다. 리버스절대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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