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레





오이카와 토오루 x 히나타 쇼요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활기찬 대화 소리. 쪼르륵 유리잔에 담기는 알싸한 향의 술. 경쾌하게 부딪히는 잔과 잔의 울림. 바사삭 바사삭 잇새로 부스러지는 치킨 부스러기들. 미약한 열대야의 기운이 남았지만 그 나름의 선선함을 한껏 품은 보통의 여름밤.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을 가르는 건 잔잔한 멜로디의 전화 벨소리였다. 

"네, 여보세요?"

그리고 지긋이 올라가는 붉은 입꼬리.





'쇼요, 너 지금 어디야.'

"... 아, 오이카와 상."

'왜 이 시간까지 안 들어와! 너 또 여자 만나러 나간 거야?!'

"... 그냥 같이 수업 듣는 동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화내지 마세요."

스피커폰으로 전환한 것도 아니건만, 수화기 너머의 인물은 왁자지껄한 식당 내 소음에 뒤지지 않을 만큼 커다란 고성을 질러댔다. 덕분에 앞에 앉아 있던 K씨가 놀람을 여지없이 드러내며 히나타의 눈치를 살폈다. 대체 무슨 일이야. 

그 무언의 물음에 정작 윽박 당한 당사자는 괜찮다는 듯 고요히 고개만 젓고 만다. 그리곤 곧바로 수화기 너머의 그, 오이카와에게로 관심을 옮긴다. 


'지금 당장 들어와. 빨리 안 오면 거기 가서 그 년 머리채 잡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당장, 당장 와.'

뚝.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끊긴 전화 뒤 나타난 까만 액정을 히나타가 잠시간 들여다보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을 정리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손에 베인 약간의 땀을 테이블 위 냅킨으로 닦아낸 그는 이내 검은색 얇은 운동복 저지를 챙겨 들었다. 

"갈 거야?"

"응, 가야겠어. 미안."

"아니, 난 괜찮은데..."

슬쩍 잘린 말 끝만큼이나 은근한 시선이 닿았다. 어느새 길어 목 언저리를 긁고 있는 주황빛 곱슬머리 부근에. 정확히 말하면 일부러 이발을 하지 않은 채 덮어둔 어깨 위쪽에 자리한 멍자국을. 그를 알아챈 탓인지 히나타는 말간 웃음을 지으며 간질거리는 머리카락을 두어 번 쓸어내린다. 마치, 퍼런 잉크가 덧입혀진 제 살결을 가리기라도 하듯 말이다. 

그 모습이 되레 더 탐탁지 않았다. 안쓰럽기도, 화가 나기도 했다. 결국 K씨는 이런 적이 여러 번이라는 걸 반증하듯 돌아가려는 히나타를 익숙하게 잡아챘다. 헐렁한 옷소매에 아주 약간의 주름만 남기는, 아주 미약한 힘이었다. 

붙들려는 이의 의도와는 맞지 않게. 

히나타는 더위를 많이 탔다. 그리고 그는 아직 여름이 물러나지 않은 오늘도 하얀 긴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와는 상반되게 사람이 바글바글한 실내는 에어컨이 틀려 있는데도 불구하고 꽤나 후텁지근해서 K씨를 포함한 대부분의 손님들은 시원한 나시나 반팔 차림이었다. 여름을 썩 좋아하지 않는 히나타가 빨간 열기를 몸 안에 가두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그의 가늘고 하얀 손목에, 어깨의 흉터보다 더한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기 때문에. 

그를 알고 있기에, K씨는 도저히 그를 보내줄 수가 없었다. 

"괜찮아. 그러니까 놔줘."

K씨의 걱정에도 히나타는 여전히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 저를 잡은 손이 거둬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건 고요하게 진행되는 설득에 지나지 않는다. K씨는 항상 그에 설득되어 놓아버리는 자신을 탓하고 만다. 

고마워. 염려해줘서 고맙다는 건지, 아니면 놔줘서 그렇다는 건지. 덤덤히 돌아서는 히나타는 마치 학습된 노예 같다고, K씨는 생각했다. 밤새 묶여있던 사막의 낙타가 아침나절 내내 풀려있는 고삐에도 도망치지 못하는 것처럼. 

그 밤을 기억하고 있기에. 



딸랑, 투박한 풍경의 외양과는 달리 꽤나 예쁜 음이 울렸다. 주변 소음에 금방 묻혀 버렸지만 말이다. 

역시 실내와는 달리 덥네. 그래도 선선한 미풍이 반겨줘 한결 나았다. 히나타는 팔에 걸쳐진 저리를 다시 고쳐 잡으며 바람을 붙잡듯 공기를 깊숙이 폐 속으로 밀어 넣었다. 

축축하다.

엊그제 한바탕 쏟아진 소나기 탓인지 부유하는 습기들이 눅눅하게 달라붙었다. 그래도 불쾌한 정도는 아니었다. 


사실 그는 이 음습함을 좋아한다.

다시 한번 크게 숨을 들이켜던 히나타가 이내 익숙한 방향으로 걸음을 뗀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쇼요."

오이카와의 낮은 음성에 잇따라 철썩, 내리치는 살과 살의 마찰음이 좁은 현관을 채웠다. 운동화를 벗겨내던 중이라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광대뼈에 직격으로 날아온 손찌검 탓에 오른쪽 볼이 너무 시렸다. 그러나 그 고통은 느낄 새도 없이 사라졌다. 

바로 다음이 다가왔으니까. 


철썩, 퍽, 쿠당탕, 지익. 

충격에 주저앉은 히나타의 위에 자리 잡던 오이카와는 찝찌름한 음식 냄새와 톡 쏘는 맥주 향을 묻혀 들어온 히나타의 저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한동안 맡지 않은 눅눅한 기름 냄새에는 속이 뒤틀려버렸다. 감히, 그토록 주의를 주었음에도 다른 사람과의 것을 데리고 들어오다니. 

거칠게 잡아 빼는 통에 어깻죽지에서부터 기이한 소리가 들렸다. 그러게 힘을 뺐어야지. 속으로 분을 삭이며 쓰레기통에 갈가리 찢어 버렸다. 나쁜 악몽을 떨쳐버리듯, 산산조각 내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다시 돌아왔을 때, 그에게서는 비릿한 쇠 비린내 밖에는 나지 않았다. 축축이 젖어들어가는 하얀 웃옷이 꽃이 핀 듯 화려했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아하는 쪽이다.

우리가 함께 있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함께 하는 피 냄새니까. 저가 사랑하는, 저의 연인의 몸 가장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있다 뿜어져 나온 피의 향기니까. 살갗이 터진 입술 언저리까지 얼굴을 내린 오이카와가 그 내음을 만끽하고자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 일련의 행위가 약간의 안정과 안식을 주었다. 

"쇼요."

"... 네, 오이카와 상."

"괜찮아?"

"네, 괜찮아요. 걱정, 많이 했어요?"

방금 전까지 저를 무참히 짓밟았던 오이카와를, 히나타가 다정스레 보듬어 안았다. 깊게 기대는 통에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그의 턱선이, 쇄골이 평소보다 날카롭다. 


반반하게 생긴 외모를 십분 이용해 일찍이 연예계 쪽에 발을 담근, 현재는 아마 가장 유명세를 타고 있는 남자 배우 중 하나일 그는 항상 일에 치인 채 살아야 했다. 이번에는 빡빡한 영화 촬영 탓에 벌써 며칠째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던 터라 참 오랜만에 보는 사람이었다. 

다시 몸을 일으키는 오이카와를 따라 함께 올라갔던 팔이 툭 떨어진다.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까 꽤 끔찍한 소리가 나더니, 부러지기라도 한 걸까. 저릿저릿 올라오는 통증은 그렇게 아프지 않았지만, 무섭게 부풀어 오르는 팔을 보면 그저 감각이 마비되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거라는 걸 깨달았다. 두 번째 시도 때는 그를 잡으려다 또다시 매가리 없이 추락한 팔을 오이카와가 잡아챔으로써 성공할 수 있었다. 다만 들어 올리는 손길은 다정한 눈매와는 달리 부드럽지 않았다. 얼마나 억세게 쥐고 있는 건지, 손등 위로 가시덤불에 파묻힌 장미 덩굴 같은 핏줄들이 솟아올랐다. 

"쇼요, 사랑해. 나만큼 널 사랑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

"네, 저도 사랑해요."

"근데, 날 사랑하면서, 어째서 넌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아? 나 어려운 부탁 한 거 아니잖아. 학교 갔다가 바로 돌아오고, 부득이하게 외출할 때는 나한테 보고 하고. 아무리 촬영이라도 답장하니까 꼭 허락 맡고 가라고,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 응? 그것만 지켜주면 이렇게 널 상처 입히지 않아도 됐을 텐데."

아기 다루듯 다정하게 어르는 오이카와에게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사과의 말을 속삭이던 히나타가 다시금 날아오는 손에 질끈 눈을 감았다. 아까보다 더한 파열음에 가슴이 선뜩해졌다. 

"미안하면 그렇게 안 하면 되잖아, 쇼요. 네가 자꾸 이러면 나 말라죽어. 촬영장에서 너 신경 쓰느라 촬영도 제대로 못하고, 밥도 못 먹고, 응? 그러니까 제발, 제발 이러지 마."

그는 마치 카멜레온 같았다. 지독한 무표정으로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더니 제 분에 못 이겨 화를 토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이내 다정한 미소를 보였고, 이번에는 애절하게 애원한다. 한풀 한풀, 다른 거죽을 씌우는 오이카와를 두 눈앞에서 꼼짝없이 지켜보던 히나타가 울음을 꾹 참으며 다시는 안 그럴게요, 다집과 함께 그를 다시 품어 안았다. 뒤틀리는 팔에서 전에 없는 고통이 울려 퍼졌지만 그저 아랫입술을 쥐어뜯으며 참아냈다. 

"울지 마, 쇼요. 미안해. 너무 사랑해서 그랬어. 미안해, 내가."

"아니에요, 내가. 내가 미안해요. 그러니까 슬퍼하지 말아요, 오이카와 상."


유리알 같은 눈물을 닦아낸 오이카와가 제 작은 연인을 들어 올렸다. 고통에 절어 축 늘어진 몸뚱이가 지나치게 가벼웠다. 금방이라도 훨훨 날아갈 듯 말이다. 그나마 작은 위안이라면, 공중에 붕 뜨자마자 목 뒤로 감아오는 얇은 팔목의 정체였다.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다. 일을 줄이라는 데도 말을 듣지 않는 회사가 문제다. 함께 하지 못하니 자꾸만 거리가 벌어진다. 보통이라면 풀릴 일 없을 고삐가 제 주인의 무관심에 헐거워져 도망가는 것일 테니, 다시금 단단히 매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기억할 것이다. 

묶여 있는 이 밤을.





"너, 이게 뭐냐?"

"괜찮아. 걱정하지 마."

"넌 지금 이게 걱정이 안 되게 생겼어!"

미리 나온 안주를 집어 먹던 K씨, 카게야마는 조금 늦게 나타난 제 친구의 몰골에 기가 찬다는 말이 뭔지 단단히 깨달아야만 했다. 

얼굴만은 안 건드리던 오이카와라는 인간 말종이 결국 그곳까지 범위를 넓힌 건지, 조금 솟아있는 광대뼈를 따라 시꺼먼 멍자국이 만연해 있었다. 거기다 깁스를 두른 손은 하필이면 불편하게 오른손이다. 어린애보다 더 어려보이는 외견 탓에 설핏 나이 어린 소년이 치기를 못 이기고 또래와 주먹다짐 했다 생각해도 되겠지만, 히나타를 아주 잘 알고 있는 카게야마에게는 턱도 없는 소리다. 

아니, 아니. 이런 걸 다 차치하더라도 카게야마는 도무지 제 친구도, 그의 연인도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착한 녀석인 건 맞지만, 불의를 참을 만큼 무르지는 않다. 혈기왕성한 데다 장난기마저 다분해서 철부지 시절 오해 살 일 왕왕 있었던 건 맞다. 그렇다고 온몸에 폭력의 흔적을 덕지덕지 묻히고 다니는 게 일상이 될 정도로 잘못할 성격은 아니다. 

무엇보다 이렇게 입 꾹 다물고 모든 걸 숨기는 건 히나타답지 않았다. 적어도 학창 시절의 그는 쉬는 시간마다 귀찮다는 저의 곁에서 매번 미주알 고주알 재잘대며 털어놓던 녀석이었으니까. 

그러니 속 답답한 건 온전히 카게야마의 몫이다. 


"나 정말 괜찮다니까."

"하... 다음에도 이러면 진짜 신고할 거야."

"알았어, 그러니까 그만해."

친구의 연인을, 그것도 남자 친구를 경찰서에다 고발하겠다는 발언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그때마다 히나타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 구렁이 담 넘는 것보다 스리슬쩍 넘어가곤 했고, 두 사람 사이를 알지 못하는 카게야마 역시 모른 척 곁에서 챙기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하, 근데 진짜 그 새끼 또라이네. 미친놈이, 얘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그 일 있고 오랜만에 나왔다며 아주 신나선, 불편한 모양새로 어설프게 안주를 집어먹는 히나타를 보며 중얼중얼 저주 읊듯 욕을 했다. 정말 미친 사람한테 아주 단단히 잘못 걸렸다고, 어떻게 해야 제 친구를 그 똥차에게서 빼낼 수 있을지 고민하는 카게야마를 가볍게 무시하며 익숙한 벨소리가 두 사람의 귓가에 꽂혔다. 



"네, 여보세요?"

'... 쇼요.'

지긋이 올라가는 검붉게 물든 입꼬리. 



문득, 그 웃음이 지독히도 음침하고 축축해 카게야마는 깔깔해진 목을 축이며 소름 돋은 팔뚝 언저리를 쓸어내렸다. 





서로를 향한, 

벗어나지 못하는 속박의 반복. 


굴레. The End. 


하이큐 히나른 연성러입니다. 항상 찾아주시고 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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