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도] 보타이 & 넥타이 01









“매니저님 들으셨어요? 오늘 변백현 체크인한대요. 한 번은 오겠지 했는데 진짜 올 줄이야. 이따 저 몰래 보러 와도 돼요?”


경수가 오피스에 들어서자마자 퇴근을 준비하던 수진이 호들갑을 떨며 거울 앞에 섰다. 그러든지 말든지 경수는 데스크에 앉자마자 오늘 체크인 할 루밍 리스트(Rooming List, 투숙객 명단)를 보며 수배서와 다른 게 없는지 대조하는 작업부터 준비했다.


“변백현? 그게 누군데요?”

“대박.... 변백현을 몰라요? 매니저님 정말 일 외엔 아무것도 관심이 없으시구나.”


일 외에 관심이 없다기보다 관심이 없는 것을 굳이 찾아보지 않을 뿐이었다. 일 끝나고 집에 가면 맥주 한 캔 마시면서 야구 하이라이트를 보거나 책을 읽는 정도가 다인 일상이었다. 평소에도 TV를 잘 보지 않지만, 요즘 나이트 근무가 잦은 데다 밤낮이 바뀌면서 그 피로함이 더해 그마저도 거의 연을 끊은 상태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사내 메일로 받았던 VIP 리스트에 변백현이란 이름이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흔한 이름은 아니니까.... 경수는 익숙하게 오페라(Opera, 예약 업무 시스템)를 열어 이름을 쳤다.


“뭐야, 변백현 방 수진씨가 어사인(Assign) 했어요?”

“네? 네... 왜요? 무슨 문제 있어요?”


하...... 경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일할 땐 제발 공과 사 좀 구분하라고 그렇게 주의를 줬건만. 이렇게 한 번씩 사심 가득 담아서 멋대로 일 처리할 때마다 10년씩 늙는 기분이다.


“이거, 어제 내가 기껏 다 짜 맞춰서 어사인 해둔 건데, 얘를 멋대로 이그제큐티브(Executive)에 갖다 붙이면 어떡합니까? 업그레이드도 비수기 때나 가능하지, 지금 가뜩이나 스위트 쪽 만실인데... 이거 보세요. 수진씨가 엉망으로 휘저어놓은 탓에 오늘 내일 체크인할 방들 다 꼬이게 생겼잖아요, 예?”


화가 난 경수가 룸 플랜 화면을 볼펜으로 탁탁 치며 언성을 높이자 수진의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후우...... 수진씨. 한 번만 더 이런 식으로 제멋대로 하면, 지엠(General Manager, 총지배인)에게 보고해서 수진씨 오버 북(Over Book, 시스템상 이미 0인 방을 마이너스로 만드는 것) 권한 없애버리게 할 거니까 그런 줄 아세요. 알겠습니까?”

“네... 죄송합니다.”

“...퇴근하세요. 이건 내가 알아서 다시 짜 맞춰놓을 테니까.”


워낙 싹싹한 성격의 수진이라 평소 경수와 대화도 곧잘 나누며 친하게 지내지만, 어디까지나 여긴 직장이었다. 그런 면에서 경수는 정말 칼 같은 사람이었다. 직업정신이 투철하다기보다 그저 남의 돈을 받고 일하는 이상, 실수 없이 받는 만큼의 일은 해내고 싶을 뿐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잔뜩 풀이 죽어 나가는 수진의 뒷모습을 보니, 제가 너무 심했나- 싶어 마음이 불편해지는 경수다. 악의가 있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무슨 생신입도 아니고. 철딱서니 없게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지. 정 그렇게 좋은 방 주고 싶었음 미리 나한테 언질이라도 해주던가. 그럼 처음부터 어떻게 잘 짜 맞춰 봤을 텐데.... 결국 오늘도 꼬인 방을 다시 푸는 건 경수의 몫이 되어버렸다.





한창 테트리스 작업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곁눈질로 액정화면에 뜬 이름을 한 번 보곤 경수는 무시했다. 전화는 곧 끊겼지만 곧바로 다시 울렸다. 서너 번쯤 그게 반복되자 결국 짜증이 난 경수는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들어 통화버튼을 눌렀다


“야. 왜 자꾸 전화질이야?”

-미안. 지금 근무 중이야?

“그래 이 새끼야. 누가 사고 친 거 수습하느라 바쁘니까 용건만 간단히 말해.”

-누가 무슨 사고를 쳤길래, 이렇게나 저기압이실까-?

“있어. 우리 호텔 사고뭉치. 무슨 일인데?”

-방금 정현이 다녀갔어.

“.....”


경수는 쥐고 있던 펜을 서류 위에 떨어트렸다.


-형 바뀐 연락처 묻더라. 이전에 일했던 호텔도 들렀다 온 것 같던데...

“야 너 설마...!”

-말 안 했어. 미쳤냐? 내가 걔한테 알려주게? 나도 연락 끊고 산 지 오래라고 했어. 형 요새 바 놀러 올 상황도 아니지만, 혹시나 해서 미리 말해주려고. 아마 또 올 것 같으니까 당분간 여기 안 오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래. 고맙다.”

-일은. 많이 힘들어? 옮긴 지 이제 1년 됐나?

“응. 요즘 거의 나이트 근무라 밤낮 바뀐 것 빼곤 그래도 할 만해. 낮보단 손님도 덜하고.”

-다행이네. 형 시간 날 때 한 번 보자. 얼굴 까먹겠다.

“그래. 이번 달 안으로 날 잡자. 너나 나나 이제 퇴근 시간도 비슷한데, 모닝 술이나 한 잔 하자.”

-큭큭... 알았어, 난 언제든 괜찮으니까 정해서 연락 줘.

“그래. 수고-”


경수는 끊긴 핸드폰을 손에 쥔 채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지훈은 꽤 오래 알고 지내온 동생이다. 경수가 자주 가던 이태원 바의 바텐더로 있던 지훈은 몇 달 전, 자신의 가게를 차렸다. 오픈 파티 때 마지막으로 보고는 계속 못 만났었는데. 설마 지훈의 입에서 정현의 이름이 나올 줄이야.... 경수는 오랜만에 들은 전 애인의 이름에도 애틋함이라든지 그리움이라든지 따위의 감정은 전혀 일지 않았다. 한때는 전부인 줄 알았고, 마지막 사랑이라 믿었다. 그러나 이제 증오만 남은 옛 추억일 뿐이다. 3년을 만났고 그 깽판을 치고 헤어졌다. 결국 그렇게 될 것을 모르고, 모든 걸 다 내어줄 것처럼 굴었다. 나는 병신이었고, 그는 개자식이었다. 그것뿐이다. 그게 그와 나의 결말이다. 1년이나 지나서 갑자기 나를 찾는 이유 따위 궁금하지도, 알고 싶지도 않다. 경수는 번호를 또 한 번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정을 넘기고 다음 예상 체크인 손님들이 들이닥치기까지 두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대부분 프런트 직원들이 일반 손님들 체크인을 돕고 자신은 매니저급이기에 VIP만 따로 상대하면 되었다. 한창 정적이 맴도는 백오피스(Back Office) 안에서 직원들 스케줄 표를 열심히 짜고 있던 경수를 밑의 직원이 문을 벌컥 열더니 다급하게 불러댔다.


“도매니저님! 좀 나와 주셔야 할 것 같아요.”


내선으로 걸려온 연락에 경수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고는 급히 프런트로 나갔다. 나가자마자 눈에 들어온 사람은 금발에 가까운 밝은 색의 머리에 선글라스를 낀 젊은 남자였다. 까만 가죽 재킷을 입고 삐딱하게 서 있는 자태가 누가 봐도 나 지금 심기가 매우 불편하다는 걸 대놓고 내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직업병이랄까.... 오랫동안 여러 부류의 사람을 상대해오다 보니, 한눈에 봐도 딱 오는 느낌이라는 게 있었다. 이 사람, 조심해야 한다. 보통내기가 아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손님.”


경수는 친절함을 가득 담은 영업용 미소를 띠우며 앞으로 나섰다. 시꺼먼 선글라스 뒤에 감추어진 눈이 보일 리가 없지만, 어쩐지 자신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총지배인?”


그가 턱으로 경수를 가리키며 대뜸 총지배인이냐 물었다. 거만한 행동에 기분이 딱히 좋진 않았지만, 총지배인을 찾는 걸 보니 뭔가 큰일이 일어났나 싶어 불안해지는 경수였다.


“아닙니다. 저는 매니저입니다.”

“나는 분명 총지배인을 불렀을 텐데.”

“총지배인은 오전이 되어야 출근하고, 이 시간의 호텔 책임자는 접니다. 제게 말씀해주세요.”



흐음....
그는 마치, 그래? 네가 책임자라 이거지? 라는 뉘앙스를 가득 담은 소리를 내며 선글라스를 벗었다. 이윽고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남자의 눈에 경수는 흠칫했다. 무례하고 거만한 자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매우 순한 인상의 눈이었다. 하지만 얼핏 강아지 같아 보이는 저 눈 속엔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모를, 날카로운 무언가가 숨겨져 있는 듯했다. 그리고 경수 자신의 타입이고 아니고를 떠나 객관적으로 호감형의 예쁘장한 얼굴이었다. 정체가 뭘까, 이 사람. 연예인인가?


“도...경수.....”


마치 들으라는 듯 제 이름을 소리 내어 읊는 목소리는 높지도 낮지도 않았다. 역시나 제 명찰을 확인했나 보다. 경수는 긴장감에 마른 입술을 혀를 내어 축였다.


“도경수 매니저님?”

“네, 손님.”

“내가 방금 여기서 체크인을 하고 안내받은 방으로 들어갔는데, 안에 이미 누군가가 있는 것 같더라구요. 상대방이 알아차리기 전에 곧바로 나왔으니 망정이지 큰일 날 뻔 했잖아요. 이 호텔은 혼자 묵는 사람 외로울까 봐 멋대로 숙박 조인도 시켜주고 그러나 봐요? 서비스의 일환, 뭐 그런 건가?”


아.... 경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무래도 아까 급하게 룸 어사인 수정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나 보다.



“죄송합니다, 손님. 제가 지금 바로 다른 룸으로 옮겨 드리겠습니다. 손님 성함이...”

“나, 몰라요?”

“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잘...”

“변백현.”


말을 자르듯 툭 하고 내뱉어진 이름은, 이제 더는 경수에게도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아아- 이 사람이 그 변백현...! 오늘 내 골머리를 썩이게 만든 원흉. 그 대단하시다는 변백현이 바로 너란 말이지? 경수는 백현의 눈치를 살피며 숨을 한 번 가다듬었다. 하아, 하필 잘못 줘도 얘한테 방을 잘못 주다니. 큰일 났네. 내가 못 알아봤다고 기분 더 언짢아진 건 아니겠지? 클레임만은 참아줘라 제발.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지금 바로 새로운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경수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곤, 프런트에 설치된 컴퓨터로 시스템에 접속했다. 예상 체크인 시간보다 이른 등장이긴 했지만, 룸 플랜은 볼 필요도 없었다. 오늘은 더 이상 같은 급의 다른 방 배정은 어려웠다. 원래는 지엠의 컨펌 없이 마음대로 내주어선 안 되는 룸이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가 없었다. 경수는 프레지덴셜의 룸 클린 상태를 확인하고는 스태프에게 시킬 것도 없이 직접 옆 기계로 넘어가 골드 색 카드키에 센서를 입혔다. 카드에 입력된 것을 리체크(Recheck) 하자마자 경수는 바로 백오피스를 통해 로비로 나갔다.

새벽 1시가 다 된 시간이라 로비는 매우 한산했다. 그래도 간간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의식했는지, 백현은 그 사이 프런트 옆 구석 쪽에 서 있었다. 경수는 백현을 마주하고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죄송합니다. 룸을 배정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습니다. 사죄의 의미로 저희 호텔의 최고급 룸으로 바로 안내드리겠습니다.”


경수의 깔끔하게 정돈된 까만 정수리를 말없이 내려다보던 백현은 이내 슬쩍 미소지어 보였다.


“룸까지 안내는 도매니저님이 직접 해주시는 거죠?”

“네? 아 네, 물론입니다.”


당연히 자신이 안내할 생각이었지만, 백현의 의미 모를 미소에 잠시 당황한 경수는 서둘러 백현의 캐리어를 잡아끌었다.





엘리베이터 안은 적막이 흘렀다. 이 호텔의 최상층인 30층에 위치한 룸까지 올라가는데 이렇게까지 길게 느껴지긴 처음이었다. 경수는 엘리베이터 문 가까이에 서고, 백현은 야경이 훤히 보이는 유리벽면에 등을 기대곤 여유롭게 경수의 뒷모습을 관찰하고 있었다. 저 몸에 밴 듯 흐트러짐 없는 꼿꼿한 자세의 경수를 보고 있자니, 오랜만에 흥미가 일은 백현은 투숙 기간을 늘릴 수 있을지 스케줄을 가늠해보았다. 백현은 현재 나왔다 하면 시청률 40%는 기본으로 찍는 가장 핫한 배우다. 작년에 개봉한 영화만 해도 세 편이고, 그중 두 편은 천만 관객을 찍었다. 29세의 젊은 나이에 각종 연기대상과 영화제의 상을 휩쓸고 있으며,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탑 배우가 바로 변백현이다. 그런 백현의 구미를 간만에 당긴 사람이 고작, 이틀 동안 조용히 휴식을 취하기 위해 들린 호텔의 매니저, 그것도 남자라니. 게다가 자신이 누군지도 모른다. 백현은 이 상황이 신선하고 재밌어,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도착 알림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경수는 먼저 나와 열림 버튼을 누르곤 백현이 나오길 기다렸다. 백현은 엘리베이터 벽에 기댔던 몸을 일으켜 느릿한 걸음으로 밖으로 나왔고, 경수는 다시 캐리어를 끌고 라운지로 들어가는 입구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이 플로어에 있는 룸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만큼 이 호텔의 자랑이자, 아무에게나 내어주지 않는 특별한 룸이었다. 야경이 한눈에 보이는 공중 라운지를 지나 객실 문 앞에 다다른 경수가 문 앞에 부착된 센서에 카드 키를 갖다 대었고, 틱- 하는 소리와 함께 잠금이 풀렸다. 손잡이를 내려 두터운 문을 힘껏 민 경수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백현이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잡고서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백현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의아한 경수가 고개를 들자 ‘미안한데, 캐리어 좀 안쪽까지 가져다줄 수 있어요?’ 하며 백현이 웃었다. 경수는 뭐, 못 해줄 일도 아니니 ‘네.’하고 고개를 끄덕이곤 먼저 들어간 백현의 뒤를 따라 다시 캐리어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에게나 내주지 않는 만큼 다른 룸에 비해 잘 쓰이지 않는 편이지만, 항상 하우스 키핑(House Keeping)은 철저하게 되어있었다. 아로마 향이 은은하게 나는 복도를 지나자 탁 트인 넓은 거실이 나타났다. 긴 직사각형의 화이트 테이블과 양옆으로 놓인 2인용 가죽 소파, 그 뒤의 바 테이블과 미니 키친 모두 보컨셉(BoConcept)에 특별 주문을 한 것들이다. 저 안쪽에 있을 침실의 가구들도 마찬가지다. 모던한 디자인을 좋아하는 호텔 오너의 취향이 100% 반영된 룸이라 할 수 있었다. 한쪽 벽면에 캐리어를 세워놓고 경수는 백현을 향해 돌아섰다. 그러자 언제 와인을 꺼냈는지, 백현이 익숙한 손놀림으로 코르크를 따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한잔하고 가지 그래요?”

“근무 중입니다.”

“근데, 나 진짜 몰라요?”


그때, 뽕- 하는 소리와 함께 코르크가 빠졌다. 백현은 부쇼네(Bouchonne)가 있는지 확인한 뒤, 와인 잔을 꺼내 들었다. 그리곤 잔을 미니 바 위의 조명 빛에 반사해, 얼룩이나 흠집이 없는지 세심히 살폈다. 백현이 얼마나 깐깐한 사람인지 잘 보여주는 일면이었다.


“...몰랐는데, 이제 압니다.”

“그거 다행이네요. 나이는 어떻게 돼요?”

“서른둘입니다. 그럼 전,”

“동안이시네. 난 스물아홉인데. 내가 동생이네요?”

“네. 그럼, 편안한...”

“집은 어디에요?”


적당히 끊고 갈랬는데 백현이 그걸 작정하고 방해했다. 경수는 직감했다.


아.... 이 자식이 지금 나한테 수작을 걸고 있구나.


연륜도 연륜이지만, 경수는 나름 잘난 외모와 호텔리어란 (남들이 보기엔) 화려한 직업 탓에 대시를 받은 경험이 셀 수도 없이 많았다. 특히 남자들이 제게 어떤 목적을 가지고 던지는 추파는 정도는 뭐- 눈 감고도 알 수 있었다.


“손님.”

“네, 도경수 매니저님?”


백현은 와인을 따른 잔을 하얗고 긴 손가락 사이에 걸치곤 바 테이블에 기대어 있었다. 경수는 아까부터 자신을 보며 짓고 있는 저 여유롭고 오만한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는 곳은 논현동이구요, 현재 애인은 없습니다. 그리고, 저 게이입니다. 이 정도면 됐나요?”


그럼, 편안한 밤 되세요. 경수는 꾸벅 허리를 굽히곤 그대로 군더더기 없는 걸음으로 문 쪽을 향해 걸어 나갔다. 씨발.... 나 사고 친 건 아니겠지? 자신에게 호감을 내비치는 백현의 당황하는 얼굴이 보고 싶은 마음에 홧김에 지른 거였지만, 어쨌든 백현은 VIP 손님이다. 게다가 연예인. 작정하고 문제 삼아 위에다 찌른다면 시말서로 안 끝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경수가 입술을 감쳐물며 문의 손잡이를 잡고 당기는데, 문이 다 열리기도 전에 쾅! 소리를 내며 도로 닫혀버렸다. 


“.....”


놀란 경수의 눈에 방금 전까지 와인 잔을 들고 있던 하얗고 고운 손이 문을 짚고 있는 것이 보였다. 뒤에선 옅은 향수 냄새를 풍기는 까만 그림자가 자신을 잔뜩 뒤덮고 있었다. 경수가 뒤돌아볼 새도 없이 얼굴 바로 옆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백현이 경수의 귓가에 얼굴을 바짝 갖다 댄 탓이다.


“가도 된다고, 아직 난 말 안 했는데.”


속삭이듯 말하는 백현의 뜨거운 숨이 경수의 귀를 간지럽혔다. 너무 가까웠다. 혹시라도 입술이 부딪치는 불상사라도 일어날까 싶어 섣불리 고개를 돌리지도 못했다. 경수는 점점 달아오르는 얼굴을 느끼며 최대한 동요하지 않는 척 말을 내뱉었다.



“프런트로 돌아가 봐야 해서요.”

“내 소개는 아직 못 들었잖아.”

“관심 없습니다.”

“호오, 그래?”


아니, 근데 이 자식이 갑자기 왜 반말이지? 나보다 나이도 어린 게. 짧아진 말투에 경수의 기분이 슬슬 나빠지려 하는데, 백현이 경수의 어깨를 잡아 자신의 쪽으로 돌려세웠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갑자기 백현과 마주 보게 된 경수는 아까보다 훨씬 더 가까워진 얼굴에 숨을 흡...! 하고 멈췄다.



“나 어때요? 잘생겼죠.”


눈앞에 꽉 찬 얼굴이 씨익 웃으며 대뜸 한다는 말이 ‘나 잘생겼죠.’ 란다. 연예인들은 다 이러나? 자뻑이 좀 심하네. 경수는 어이가 없었지만 빨리 끝내버리고 나가자는 생각에 적당히 장단에 맞춰주기로 했다.


“네, 잘생기셨네요.”

“멀리서 보는 것보다 가까이서 보는 게 더 잘생겼지 않나요?”

“네, 그렇네요.”

“자주 보면 더 잘생겨 보일 걸요?”

“네 그렇...”

“앞으로 자주 봐요. 도매니저님?”



영혼 없이 대답하던 경수는 순간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자주 보자니? 뭘 자주 봐? 너랑 나랑? 왜??? 경수가 입을 벌리고 어버버 하는 사이, 백현은 손을 뻗어 자신이 닫았던 문을 손수 다시 열었다. 그리고 경수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갔고, 경수는 반사적으로 가까워진 거리만큼 뒷걸음질 쳤다. 백현은 경수의 얼굴을 보며 다시 한 번 씨익 웃었다. 경수의 몸은 이미 룸을 벗어나 있었다. 



“그럼, 이따가 봐요?”


서서히 닫히는 문 사이로 백현이 경수에게 윙크를 날렸다. 이...이따가? 아니, 잠깐...! 경수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문은 금세 닫혀버렸고, 입을 반쯤 연 경수의 입에선 이윽고 어이없는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아무래도 나, 저 인간한테 잘못 걸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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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저렇게 VIP 방 잘못 주면 시말서 써야 합니다… (호텔마다 다르겠지만;) 일단 숫자는 달았지만, 급한 성격에 갑자기 완결 날 수 있음 주의,,,,;

포타를 통해 글을 올리기 시작한 지 이제 한 달 좀 넘는 초보라(; 많이 부족하지만, 마음 찍어주시고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정말 감사드립니다.(하트)

@gongso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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