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써보는 #랑야방 #2차

*태자가 된 #소경염이 #매장소가 임수라는 것을 안 다음의 이야기.

과거 사람을 만나고도 왜인지 차갑고 도구로 이용한다는 느낌이랑 병자치고 아픈 게 너무나 얌전했다는 것에 모티브를 얻어 쓴 글.

*논커플링

*매장소/#린신/소경염이 나오는데 굳이 커플링이라 할 만한 부분은 없는 듯 ㅜㅜ

*과거 이야기는 망상입니다. 아니 이 패러디 자체가 망상입니다.

*드라마만 보고 맞춰 쓴 글이라 나중에 원작 읽고 하이킥 할 거 같단 느낌적 느낌...




화한지독 火寒之毒

                  written by 김개암


<01>






뜨거운 화기火氣가 사방에서 몰려든다. 곧 그것은 빠른 속도로 몸 주변의 공기를 때려 부수고 살갗에 달려들어 재빠르게 그것을 뜯어먹는다. 몸이 쥐어뜯기며 망가지는 고통. 핏줄까지 스며들더니 전신의 피를 말려 죄어올 때 즘에는 이미 고통이 척추를 뒤흔들어 진물과 같은 눈물마저 지독히 추악한 것으로 만든다. 피부가 망가져 더 이상 사람의 몰골이 아니다. 더 깊이 뼛속까지 스며든 뜨거운 기운은 강건하던 뼈대를 말라 부스러뜨리려했다. 그것이 화마가 안겨주는 고통이었다.

곧 엄습하는 한기寒氣. 뜨거움을 얼려버릴 한기다. 불꽃에 바짝 말랐던 살갗을 얼리더니 이내 깨부쉈다. 뜨거움이 남아 있는 몸에 얼음송곳이 퍼붓는 것이다. 몸은 식기는커녕 고통으로 더 뜨거워져 생생한데도 뭉툭하게 깎아버리는 한기가 고통에 고통만을 더 했다. 점점 피부를 식히며 들어오는 한기가 이미 화기로 인해 뼈와 살이 분리된 틈에 다시 칼을 꽂아 넣으니 고통이 가실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몸이 되살아났다. 이 두 종류의 끔찍함이 눈물을 말려 허공에 흩어지고 비명을 얼려 허공에 뿌려지는 것으로 죽은 자는 살아남았다. 살아남기만 했다. 혹자는 죽음에서 돌아왔다고도 했고, 죽음 속에서 살아간다고도 했다. 13년 전 매령에서 그렇게 한 남자는 살아 돌아왔다.





“화한독은 사람을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지.”

랑야각의 소각주는 여상 진심을 알길 없는 옅은 미소를 걸며 말했다. 강좌매랑의 지병에 대해 함부로 입에 담지 않는 것이 소택의 암묵적인 약속일지언정 괘념치 않고 떠벌릴 수 있는 것은 그만이 가진 권리였다. 소택의 다른 이들은 눈가를 몰래 흘기며 신경 쓰이는 지 눈치를 살폈지만 정작 강좌매랑은 영 다른 반응 없이 찻잔을 손바닥에 올리고 감쌌다.

“화한독 뿐만이 아니야. 한기와 화기는 늘 충돌하며 사람을 살리고, 죽이고.”

“추위를 느끼는 이에게 화기를 가까이 두면 살아나기도 하고, 추위에 몸져누운 자는 몸이 뜨겁고?”

매장소는 숨을 들이키는 지 내쉬는 지 아니면 코웃음 소리를 낸 것인지 모를 훗, 소리를 내며 되받아쳤다. 린신은 예의 웃음을 입가에 깊게 걸었다.

“잘 아는 군.”

부채는 펼쳐지지 않은 채로 매장소를 향해 한 번 허공에 찔리더니 다시 그의 손바닥에 둥글게 감싸였다.

“그래서?”

“적당한 게 좋다는 이야기지. 그래서 자네가 그 몸으로 활보하고 다니는 것이고. 내가 조치를 잘 하는 것도 있네만, 신기한 일이잖은가.”

손바닥에 감싸였던 린신의 부채가 다시 허공에서 매장소를 재듯 위아래로 흔들렸다. 그제야 매장소는 명확히 비웃기다는 웃음소리를 내며 어깨를 흔들었다.

“그거야 몸소 아는 일이고 세상 이치에도 맞닿아 있는 일인데, 그걸 지금 새로이 가르쳐줄 이야기라도 된다는 듯 말하는군? 랑야각 밑천이 다 떨어진 모양이지.”

매우 밉상인 말을 주절주절 내뱉을 때조차도 강좌맹의 종주는 우아하고 기품이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흘기며 퍼부을 때는 분명 한 대 치고 싶은 말을 하는데도 병약하게 몸이 늘어져있으면서도 생생하며 즐거움을 담은 눈을 보면 화가 오히려 가라앉아 버린다. 린신은 친구랍시고 미운 말을 퍼붓는 환자를 흘겨보다가 양팔에 팔짱을 꼈다.

“그렇지. 자네는 딱 그 정도가 좋아.”

“내가 뭘.”

“자네가 가진 격분의 크기가 어마어마한 만큼, 그것을 내리 누를 만큼만 소름 돋게 차가우면서.”

린각주는 말을 한 번 끊었다. 매장소의 반응을 본 참이다. 장소는 반응 없이 고르지 않은 숨을 내쉬며 자세만 조금 고쳐 몸을 틀 뿐이었다.

“크게 들끓지 않고, 크게 낙담하지 않는 것이지. 그게 자네가 살 길이야.”

그 말에는 매장소의 눈이 진득하게 감겼다가 뜨인다. 늘 힘겹게 눈을 뜨는 병자에겐 일상과도 같았고 또한 매장소에게는 어떤 상념으로도 보였다. 하지만 마음을 내보이지 않기는 매장소도 린각주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설령 그 마음이 어떠한지, 그를 아는 자라면 모두 알고도 남을지언정.

“자네 말대로 한다면 내가 얼마나 더 살 것 같은가?”

그런 말을 웃으면서 툭 던지는 것이 매장소가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가벼운 농담이었지만, 소택에서 그 농담에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02>





소택은 평온하게 흘러가다가도 매장소가 눈을 못 뜨는 그 순간부터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그리고 그 작고 큰 전쟁은 모두가 익숙해질 만큼 잦았다. 내내 여유롭던 린각주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지고 일상이 얼어붙은 듯 가라앉아버린다. 소택의 모두는 한 사람의 생환을 위해 뜨겁게 침묵하고 있었다. 화기와 말리고 한기가 얼려버린 공기는 숨소리까지 가라앉혔다.

“린공자. 이번에는 왜 이렇게 못 일어나시죠?”

려강의 목소리는 잘게 떨렸다. 고요하게 죽은 듯 누워있는 강좌맹의 종주는 더 나빠진 것 같았다.

“이번에는 저번만큼 심각하지 않네.”

린신은 보이는 것과 다른 대답을 하며 죽은 듯 잠자는 이를 내려다봤다. 그러다가 혼잣말처럼 툭, 내뱉어버렸다.

“그 지옥과 같은 고통을 어찌 이렇게 고요하게 받아들이는 걸까.”

“예?”

“사람이 고통을 모면하기 위해서 하는 것은 의외로 단순한 것들인데 말이야. 소리를 지르고 악을 쓰지. 그게 고통을 잡는데 도움이 되니까. 그런데 이 놈은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아. 언뜻 내비치는 표정을 보면 보통 괴로움은 아닐 텐데도 차갑게 앓지. 뜨겁게 앓으면 죽어버릴 것 같은가.”

려강은 린신의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의 나열이었다.

“이러다 모든 것이 끝나, 차갑게 참는 것을 끝내면, 뜨거운 마음에 무너질까봐.”

린신은 진맥하던 그의 팔을 이불 속으로 밀어 넣었다. 추위를 심하게 타는 몸은 세차게 떨려도 그 한기를 참는 매장소의 얼굴은 호수에 잔잔히 이는 파문처럼 이내 흩어졌고, 고열에 시달려 잠에 드는 모습 역시 간간히 내놓는 뭉그러진 소리 빼고는 평온했었다. 화한지독을 몸에 품고 그게 가능한 이야기일까?







불구덩이에서 고통과 분노, 두려움과 비통함, 그리움과 증오가 한데 뒤엉켰다. 여러 감정들이 한꺼번에 몰아치는 꿈에서는 감히 누군가를 그리워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었다. 죽도록 미워하다 죽을 거 같았고, 죽도록 그리워하다 죽어버릴 것 같았다. 몸 안의 한기와 화기가 맞부딪혀 지옥의 고통을 선사하지만 깨닫고 또 깨닫는다. 식혀야 살며, 적당히 데워져야 산다는 것을. 마음속에 불구덩이 같은 분노가 치솟아 뱉으려 하면 죽는 다는 것을 몸은 본능적으로 느끼는지 뼛골에 스며든 한기가 비져나와 분노를 달랬다. 그렇게 마음이 적절한 온도에 이르러야 숨 쉴 틈이라도 생겼다. 매장소는 눈을 흐릿하게 뜨며 뜨겁게 휘몰아치는 화기의 고통과 얼음 칼날로 살을 발라버리는 한기의 고통을 받아들였다. 증오와 분노가 정과 의의 기운에 뒤섞이자 기어코 살 길이 트였다.

“내가 얼마나 잠들었지?”

“사흘밖에 안 지났습니다.”

“하아. 중간에 한 번도 안 깼나?”

“한 번 깨셨고, 태자전하께서 문병오시는 걸 못하게 막으셨죠.”

“내가 그랬나.”

정신을 차린 매장소는 안색이 창백하고 호흡이 거칠었음에도 위태위태한 느낌은 아니었다. 강좌맹 사람들은 그제야 한 숨 놓은 듯 숨을 쉬며 간간히 얼굴에 미소를 걸었다. 매장소가 눈을 떠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야 정말로 두려울 것이 없으니 말이다. 그들의 걱정을 알기라도 한다는 듯 강좌매랑은 지쳐 어지러운 표정을 짓는 대신 여유가 묻어나는 예의 그 미소를 입가에 건다. 그 주변의 공기가 부드러워지고 본연의 청아한 기품이 ‘깨어있는’ 매장소에게서 흘러나오자 알게 모르게 동화된 자들은 이내 평온한 마음으로 돌아와 종주를 모신다.

“태자전하께서 일어나시는 대로 연락을 주십사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걱정 많으셨을 테지. 이제 쾌차했다고 알려드리게.”

“네, 종주.”

려강이 종주의 명을 받들고 뒤로 돌아서 나가려다가 몸을 주저하자, 매장소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눈을 천천히 치켜뜨자 려강은 고개를 약간 숙이더니 발길을 돌려 종주에게 물었다.

“태자전하께서 이미 다 알고 계시는데 왜 계속 문병을 막으십니까?”

의외의 질문인 듯 매장소는 선뜻 말을 잇지 않다가 한숨 쉬듯 말했다.

“말실수를 할 것이 두려운 거라 이미 일러뒀던가.”

“이제는 실수할 말도 없지 않습니까? 감추는 것도 없으시니.”

“내 꼴을 보여줘서 뭐하게?”

매장소의 어깨가 으쓱 오르다 내렸다.

“태자전하께서 얼마나 애태우시며 걱정하셨는지 모르십니다. 그 분 성격에 문병을 막았다고 쳐들어오시지도 못하고. 밖에 계속 서 계셔서 사람을 대신 보내라 말씀 드렸는데도 하루에 몇 번을 다녀가셨던 지요.”

려강이 뱉는 말에도 매장소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았다. 뜨거웠던 우정, 그리운 과거를 공유한 사람이며 앞으로 향할 곳도 같은 사람이다. 태자에 오른 소경염이라면 매장소의 모습을 보고 자기네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종주를 위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적이 많다. 하지만 정체가 드러난 이후에도 매종주는 부드럽지만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소경염을 대할 때마저도. 간간히 가슴이 아파보였지만 이내 업무적으로 상황을 판단하며 바라본다. 그것이 오히려 위태위태하게도.

“별로 보여줄 꼴은 아니지 않은가.”

“가까운 사람의 병이 어떤 지경인지 알려고 하는 것은 사람사이의 당연한 정이 아닙니까.”

려강은 저가 뭐라 말을 지껄이는지 스스로도 잘 모르면서 그저 안타까운지 말끝이 흐려졌다 펴졌다 반복했다. 도대체 경염이 매장소가 자는 동안 얼마나 유난을 부렸기에 이러는 건지. 눈에 그려지는 듯 그려지지 않았다. 다시 한숨인지 격한 호흡인지 모를 숨을 장소가 훅 내뱉더니 눈을 감았다. 훅 끼칠 것 같은 뜨거운 그리움을 매정한 인성이 식힌다.

“이제는 뵈어도 된다고 전하게. 직접 멀쩡한 얼굴을 보시면 걱정을 좀 더시겠지.”

려강은 조금은 주제넘은 말에도 저렇게 부드럽게 포용하는 매장소에게 절로 고개를 숙였다. 제가 자신을 걱정하기에 한 말임을 알면 매장소는 늘 저렇게 온화하게 무례를 용서해주곤 했다. 저런 분은 어디 기대시나. 린공자에게는 조금 기대시는 것 같지만. 려강은 사흘밤낮을 제대로 자지도 못한 채 소택 대문을 어슬렁거리던 귀한 분께 연통을 넣으려 잰 발걸음을 옮겼다.

려강이 좀 멀어지자 린신이 다가와 맥을 잡았다.

“센 척을 하면 수명이 주니, 대충 편하게 있으라니까.”

“편하게 있다가 완전히 가버릴까 봐 그러지.”

“의원이 편하게 있으라면 있는 거지 왠 말이 이렇게 많은 건지.”

린신이 입을 삐죽꺼렸다. 훅, 하고 웃는 매장소는 농담을 되받아쳤다.

“의원이 잘 하면 내가 편하게 있건 불편해 있건 오래 살려두지 않겠는가. 실력은 여전한데 자신감은 떨어졌어.”

“아하. 내가 너무 기운 좋게 고쳐준 모양이군. 됐네. 직성이 풀리는 만큼 입을 나불거려야 낫는 병이니까.”

린신의 투정에도 매장소는 옅게 웃었다. 몸은 늘 정직하게 자신에게 호소한다. 고통과 분노 그리고 두려움을. 하지만 그런 뜨거운 것들을 웃음으로 내리 눌렀다. 경염이 온다. 장소의 가슴에 뜨거운 폭풍이 일 거 같아 차가운 두려움을 만들어 눌렀다. 무의식적으로 오른손으로 왼쪽가슴을 눌렀다. 한숨을 들이켰다 내쉬자 조금 편안해졌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소철선생이 간신히 몸을 털고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새벽바람도 괘념치 않은 한 인영이 소택의 대문을 두드렸다. 대량에서 가장 귀한 인물 중의 하나였다. 그가 알현하려 한다면 한 밤중 대량의 황제일지라도 맞이했을 테지만 며칠을 몸져누워 스스로 일으키지 못한 병자 한 사람에게 사흘 내리 퇴짜를 맞은 참이다. 방문하기에 지나치게 이른 시각이라 병자를 깨우지 말라는 린신의 비웃음 섞인 나직한 호통에 정원 밖에서 초조하게 동이 트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귀한 신분임에도 그말을 곧이곧대로 듣곤 기다리고 있었다. 동이 튼다 한 들 소철이 깨어나지 못한다면 한 없이 기다려야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동이 트기 몇 각 남기지 않고 소택의 주인이 깼다. 밖에서 새벽이슬을 맞고 있을 태자를 뫼시게 하고 마주했을 즘에는 희한하게도 병을 앓던 매장소는 어디론가 사라진 이후였다.

“아팠다고?”

눈앞에서 창백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자가 자신이 알던 임수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물어보게 된다. 그의 창백한 안색만큼이나 그 얼굴에 걸린 평온하고 온화한 표정은 그가 병자임을 또한 잊게 만들었다.

“급히 상의할 일이라도?”

매장소가 본론을 묻듯이 궁금한 얼굴을 하자 소경염의 표정이 탁 풀리고 말았다. 감정이 표정에 다 드러나는 경염이기에 매장소는 바로 알아차렸다.

“친우가 아파서 몸져누웠다는데 나는 궁금해 하면 안 되는 것인가?”

“아니. 당연히 궁금해 해도 되지. 하지만 대단치 않은 병이고 또 금방 털어버리는 병이라고 내 이전에도 말했잖은가.”

“어머니의 말은 그렇지 않았어. 네가 자세히 묻는 것을 저어하니 묻지 못해 그렇지.”

“봐, 내가 이젠 병자 같은가? 몸이 약해 눕기는 하지만 죽을 만큼은 아니야.”

매장소가 팔을 들어 올려 보이지만 건강해보이진 않았다. 그렇지만 그만큼 온화한 생기가 미미하게 주변에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경염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다행히 나아졌다니. 내가 여기 온다고 해서 자네가 나아지는 것도 아니겠지만.”

“주변에 좋은 의원들이 많네. 나도 믿고 몸을 맡기면 이렇게 털고 일어나는 걸.”

“다만.”

경염은 늘 사람을 직선으로 쳐다본다. 하지만 그의 눈이 사선으로 내려 그어지면 그를 아는 사람은 금방 눈치 채기 마련이다. 무슨 말을 하려는 지 매장소가 가만히 기다려준다.

“아무 것도 못 하고. 아니, 아무 것도 못한 채, 나중에, 그것도 한참이 지난 나중에 모두가 사라졌다는 소리를 듣게 되는 상황은 싫네. 자네가 아무리 싫어한대도, 나를 물린대도 나는 찾아올 거고 확인할 거야. 그렇게 손 놓고 이별하는 건, 다신.”

회환을 집어 삼킨 듯 불같은 말을 내놓고 뜨거워진 숨을 다시 집어 삼킨다. 매장소는 경염의 저 격렬한 그리움이 문득 부러웠다. 같은 것을 제 마음에게 허락했다가는 몸이 망가뜨려질 것을 알기에 차갑게 그의 모습을 본다. 남의 일을 이야기하는 듯 쳐다보지만 경염의 말의 기저에서 밀어 몰아치는 격렬함이 오직 매장소 자신을 위한 것임을 깨닫는다. 그 불꽃에 데여 발끝부터 따뜻해져버릴까 두려웠다. 사선으로 내리깐 경염이 시선이 곧바로 치켜 올라와 매장소의 시선과 엉켰다. 매장소는 그런 태자의 다정함을 받아들이듯 옅게 미소 지었다.

“갈 때는 간다고 말하고 가겠네. 그건 걱정 마. 아무리 약해 빠졌어도 그렇게 갑자기 죽어버리지는 않아. 나에겐 할 일이 있어.”

“나는 자넬 걱정도 하지 말라는 말인가?”

“태자전하는 이제 걱정해야할 사람이 많아. 나는 걱정하지 않아도 정말 괜찮네.”

경염은 뭐라 한 마디 더 하려다가 입속으로 말을 꾸역, 집어넣었다. 소경염은 원하는 바가 있으면 말하는 성정이지 저렇게 삼키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뚱하게 삐쳐있을 때도 임수가 살살 굴리면 뭐든 말했던 어린 황자는 커서 태자가 되었다. 매장소가 된 자신과 태자가 된 경염 사이에 놓인 변화가 무참하게 느껴질 것 같아 스스로를 추슬러 올렸다.

“내가 잠든 사이에 있던 이야기를 좀 하세.”

그래, 둘의 뜨거운 원념. 그리고 목표를 함께할 때 이런 상념 따위 모두 버릴 수 있을 테지. 경염도 마음을 정리하고 허리를 바로 세워 자세를 고쳐 앉았다.



<03>






임수 10살. 22년 전 적염군 원수부. 오랜만에 놀러올 소경염과 어떤 놀이를 할까 생각하느라 임수는 사흘내리 진양장공주를 괴롭혔었다. 일찍 침소에 들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았고, 아침 일찍 일어나 부산하게 구는 것을 꾸짖기도 했지만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해했다. 더 어릴 적에는 꼭 같이 붙어 놀아도 괜찮았지만 이것저것 배울 것이 많아지니 늘 배움이 우선되었다. 서로 사정이 맞지 않아 그리워도 함께 놀지를 못했지만 드디어 사흘은 원수부에 머물며 놀 수 있는 시간을 얻었다. 소경염은 황제의 7번째 아들이기에 어렸을 때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았고 임수 자신도 원수부의 후계자인 격이니 늘 혹독한 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괜히 그것을 투덜댔다가 소경염이 뚱한 얼굴로 그래선 안 되는 것이란 말을 들었을 때 화를 버럭 냈다가 1각 만에 다시 돌아가 사과한 적이 있었다. 소경염은 그래선 안 된다고 말하는 주제에 매우 침울했으니까, 그런 것을 먼저 눈치 채 준 사람이 먼저 사과하는 것이 옳았다.

어딘가 꽉 막히고 할 말은 하는 주제에 말 수가 적은 편인 경염이지만 어차피 임수는 그가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무슨 기분인지 따위 금방 알았다. 정직하고 순순한 것이 얼굴을 살피는 자들과 달랐다. 임수는 어린 나이에도 사람의 수나 속이 금방 읽혔던 터라 경염과 함께 있는 것만큼 편안한 일이 없었다. 그는 늘 순수하게 칭찬하고 좋은 말을 해주면서 자신에게 엄격하니까. 게다가 농담도 곧잘 했다. 자기에게만 웃어주는 듯이 그 꽉 막힌 경염을 웃겼을 때가 즐겁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당일이 닥쳐 소경염을 만났는데 오랜만인지 데면데면했다. 경염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어깨를 늘어뜨리고 어색한 듯 적염군원수부에 뛰어 들었다. 진양장공주가 살뜰하게 밥을 챙겨 좋아하는 음식을 밀어주어도 영 기운이 없었다.

“경염. 입맛이 바뀐 거니?”

“아닙니다, 고모. 그게 아니오라.”

“이렇게 먹질 못하네. 속상한 일이라도 있는 게야?”

경염은 예의 표정으로 뚱하게 입을 다물었는데 임수는 번뜩 밥숟가락을 놓았다.

“어머니. 이제 그만 경염과 놀아도 되나요?”

“아직 밥을 다 먹지 않았는걸.”

임수가 밥숟가락을 야무지게 쥐더니 공주의 아들답지 않게 우걱우걱 밀어 넣었다.

“수야!”

“봐요, 다 먹었어요. 경염! 너 밥 먹고 왔어?”

경염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 고개를 가로로 저으려다가 임수가 눈을 번뜩 치켜뜨자 어깨를 좀 움츠리더니 얼버무렸다.

“개암과자 잔뜩 먹고 왔네. 경염 손 씻는 거 잊지 마. 어머니! 소자 이제 놀러 가도 되나요?”

“과자를 먹었구나. 오냐, 얼른 놀아야 또 밥을 많이 먹지.”

장공주가 허락을 해 줬으니 냅다 의자에서 뛰어 내려간 임수가 경염의 손을 잡아끌었다.

“빨리, 빨리!”

경염은 그에 팔팔거리고 함께 경쟁하듯 뛰어들어야 했는데 웬일로 영 기운이 없이 끌려갔다. 호들갑을 떠는 아들을 뒤로 하고 식사를 마친 장공주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아들과 조카를 배웅했다.



무작정 끌고 온 곳은 임수의 방이었다. 오늘은 작은 말을 타고 원수부를 휘저을 생각이었던 임수였지만 밖으로 끌고 나가는 대신 경염을 제 방 침대에 밀치듯 앉혔다.

“너 어디 아파?”

그리고 손바닥으로 경염의 이마에 손을 댔다. 제법 뜨거웠다.

“너 아프지?”

“아니야. 안 아파.”

“식은 땀 엄청 나!”

“아프지 않아.”

“왜 고집 피워?”

“고집 아니야. 나는 안 아파.”

이런 말을 듣고 있으면 답답해 팔짝 뛸 것 같다가도 임수는 마음을 고쳐먹고 그의 옆에 털썩 앉았다.

“안 아프다고 치고. 왜 안 아픈 거가 되어야 하는데? 정이모가 걱정하실까봐 그래?”

그 말을 듣더니 경염의 눈가에 핑글 눈물이 맺혔다. 고개를 얌전히 끄덕이더니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임수는 크게 한숨을 내쉬는 대신에 그의 이마에 다시 손을 댔다. 훨씬 더 뜨거워졌다.

“걱정하시는 게 싫어서 여기로 온 거야?”

경염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오지 못하게 하실까봐.”

그러더니 이제는 영 아파보이는 목소리로 울먹였다. 이렇게 강골인 놈이 아프다니. 개암을 먹지 않는 이상 딱히 아파본 적이 없는 임수만큼 아픈 적이 없었던 경염이다. 소경염은 스스로가 아프다는 사실에 크게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수는 눈치 챘다.

“너 여기 누워.”

“안 돼. 며칠이나 기대했단 말이야!”

“나도 기대했어. 그런데 너는 여기 누워.”

“싫어.”

“모처럼 원수부에 놀러왔는데 다시 황궁으로 불려 갈 거야?”

그 말을 들은 후에 경염은 왈칵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비장하게 흘려댔다. 임수는 한숨을 쉬며 경염의 등을 어설픈 손놀림으로 토닥토닥 두드렸다.

“내가 병간호를 해주면 되잖아. 그러면 우리는 노는 거야.”

“말은?”

“하루 만에 나으면 내일 타면 돼.”

“그럼 누울래.”

경염은 뚱한 얼굴로 소매로 뺨을 닦더니 순순히 침상에 누웠다.

“안 추워?”

“추워.”

“그럼 내가 이불을 더 가지고 올게. 기다려.”

“고모께 알리면 안 돼.”

“알았어.”

그제야 열에 무너지는지 입가로 뜨거운 김을 내면서 얌전히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렸다. 임수는 누워 눈을 감는 경염을 보더니 쏜살같이 달려 나가더니 어디서 이불 몇 채를 더 끌고 와 벽처럼 세웠다.

“경염, 걱정 마.”

열에 취해 멀어지는 의식 속에도 소경염의 귀에 뚜렷이 들렸다. 왜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고뿔이 걸린 것일까. 그렇게 함께 놀기를 고대한 날이었는데.

“손 잡아 줄까?”

수가 의젓하게 물었다. 경염은 약해진 마음으로 순순히 손을 내놓고 잡은 손을 꼭 잡더니 눈을 질끈 감았다. 눈꺼풀도 올리기 힘든 모양이다.

“푹 자고 나면 나을 거래. 푹 자둬.”

“어머니께 알리면 안 돼.”

“알았어.”

“고모님께 알리면 안 돼.”

“안다니까.”

“수야. 미안해.”

열에 들뜬 헛소리를 하면서 경염은 앓았다. 약해진 마음을 드러내며.

“경우형님께도 비밀이야.”

“형님께는 왜?”

“걱정하시니까.”

“알았어. 나만 아는 거야.”

임수는 그 와중에 더 어린 아이나 할 것 같은 새끼손가락 거는 약속을 해주고는 이불 덮고 떨며 자는 경염의 가슴팍을 톡톡 도닥였다.



열이 높아지는 것 같아서 수건에 물을 몰래 적셔 와 경염의 작은 이마에 댔다. 밖에서 놀아야 할 아이들이 방에만 처박혀 있자 자꾸 들어와 뭐하고 노느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어 물렸다. 재미난 책을 발견하여 읽으며 놀고 있으니 방해 말라고 어른스러운 말도 건넸다. 원체 똑똑한 임수는 전신을 땀으로 적셔 잠이든 경염에게 제 옷을 갈아입혀 주느라 식식거리기도 했다. 이불을 덮어주고 이마의 수건도 갈아주었다. 고통이 짙은 거친 숨소리가 점점 평안해지는 것을 확인하며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겼다.

소경염이 열에서 깨어난 것은 제법 컴컴해진 이후였다. 임수는 침상에 기대 졸고 있었다. 경염은 멍하니 깨어나 자신이 어디에 있는 지 확인했다. 원수부다. 자신은 이곳에서 실컷 놀 기대에 차서 왔었다. 그런데 아팠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침상에 기대 졸고 있는 친구를 발견해 흔들어 깨웠다.

“수야! 수야! 일어 나.”

번뜩 눈을 뜬 임수가 깨어나자마자 경염의 이마에 손을 댔다.

“열 내렸네!”

“열?”

“열 엄청 났어. 땀은? 많이 흘렀네. 기다려. 물수건 빨아 올 테니 좀 닦고 옷 갈아입어.”

“옷도 네가 갈아입혔다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제법 어른스러운 말만 늘어놓더니 건들건들 이깟 것 이 형님에겐 대수롭지 않다는 양 굴었다. 열기에서 벗어나 깨어 앉은 것이 태어나서 처음이라 경염도 어리둥절했다. 야무지게 빨아온 물수건으로 몸을 대충 닦고 꺼내준 임수의 옷으로 갈아입은 소경염은 임수의 눈치를 흘깃 봤다.

“고모님께 말했어?”

“아니. 어머니는 전혀 모르셔.”

“그럼 내일도 적염부에 있어도 되는 거야?”

“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완벽하게 처리했는데.”

열이 가신 소경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만 킥, 하고 웃었다. 이를 드러낸 주제에 어금니를 물고 웃었다. 기쁜 주제에 그걸 들키는 게 싫을 때 내는 웃음이었다.

“이제 완전히 안 아픈 거 같아?”

“안 아파. 말 탈거야.”

“진짜 안 아파?”

“하나도 안 아파. 다 나았어.”

임수는 그 말을 듣더니 허탈한 듯 침상에 기대어 앉았다. 그렇게 고생시키더니 이렇게 쉽게 나아버렸다니.

“아픈 거 귀찮아. 놀지도 못 했잖아! 나는 엄청 기대했는데.”

경염은 임수의 말을 다 듣지 않고 와락 달려들어 배를 간지럽혔다. 임수가 화내다말고 킬킬거리다가 반격하려고 경염의 배도 간질였다. 경염은 소스라치며 웃더니 계속 간질이다 못 참겠는지 도망갔고, 임수도 깔깔거리며 쫓아가 배를 간질였다. 어린 소년들의 웃음이 작열하듯 터지고 순식간에 불이라도 환하게 켜진 듯 밝음으로 가득 찼다. 한참을 장난을 치다가 경염은 배를 어루만졌다.

“배고파.”

“나도 배고파.”

간호하느라 같이 굶었던 임수는 더 큰 소리로 배고프다고 투덜댔다. 새벽까지 참지 못하고 남은 음식을 먹으려 주방에 들어가는 것은 둘에게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였다.










태자 소경염은 정무를 보다 궁인에게 물을 가져와 달라 부탁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차 한 잔 마신다는 핑계로 틈틈이 휴식을 취하는 융통성을 보였겠지만 오직 물만 마시는 인물이라 쉴 틈 없이 정무를 보곤 했다. 하지만 무슨 바람이 분 것인지 물을 가지러 자리를 비우려는 사람을 멈춰 세우고 차를 한 잔 부탁했다.

소경염이라고 차를 아예 안 마시는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와 대화하면서 늘상 마셔야하는 것이니. 따뜻하고 향기롭다. 아니, 향기롭다고 한다. 차에서 차향이 나는 것을 알지만 좋다 마음에 든다는 차이를 모르겠다. 대량에서 가장 좋은 차를 앞에 두고도 경염은 갸우뚱했다.

<이 차가 얼마나 좋은 질 모르겠다고?>

환청처럼 활발한 목소리가 자신에게 핀잔을 준다. 그 목소리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태자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몇 달 전이었다면 마냥 슬픔을 안겨주는 목소리였을텐데 지금 자신이 그 목소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웃음이 난다.

임수는 황실을 외가로 두는 좋은 혈통의 귀족자제다웠다. 입맛이 까다로와 짧은 정도는 아니었지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리는 섬세한 취향은 모두를 놀라게 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검술 훈련을 좋아하는 주제에 교양도 대단했다. 음악, 시, 미각이나 차 취향마저도 어른들 저리가라 할 만큼 고급스러워서 경염의 친모인 정귀비와 대화가 곧잘 될 정도였다. 귀한 향초부터 약초까지 냄새만으로 구별하고 맛의 차이를 정확하게 집어내는 정비마마의 취향을 얼마나 잘 알아차려 주었던지, 임수에게 보내는 과자를 어머니께서 얼마나 신경 써서 만드셨는지 모른다. 그것을 또 하나하나 일일이 어떤 맛이었는지 평하며 감사의 서신을 보내오는 점잖은 어린 귀족나리를 태자의 어머니도 너무나 귀여워했었다. 차를 마시는 취향도 고상했고 맛없는 차는 입에 대지도 않았다. 하물며 물이라니. 소경염은 일부러라도 맹물을 마시곤 했었던 기억이 났다.

“이 차를 좀 싸주게.”

황실에 들여온 차라면 무엇보다 훌륭할 터였다. 어떤 차인지 설명을 들어도 모를 것이기에 공공의 설명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다시 상소에 시선을 던졌다.




좋은 차를 선물한다는 것은 핑계였다. 많이 아팠다는 소철선생의 낯빛을 확인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사람을 보내 알아오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할지 모르지만, 생사를 모르고 이별한 세월만 생각하면 가슴 한 가운데 납이 얹힌 느낌이 들었다. 매장소로 화한 임수는 예전의 모습과 많이 달랐기에 소경염은 자기도 모르게 과거의 그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가 과거에 자신과 공유했던 것을 꺼내 보이려 하는 것이다. 매장소는 누구보다도 눈치가 빨랐기에 부드럽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태자를 맞이했다.

“오늘은 안색이 한 결 좋군.”

“안 그래도 덜 춥기에 산책도 했지.”

덜 추웠다는 말에 경염은 어리둥절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가 매장소가 그 반응을 훑는 것을 알아채고 나서야 턱을 들었다. 매장소의 주변인들은 본인들은 전혀 춥지 않아도 한기에 떠는 종주를 위해 ‘생각보다 쌀쌀하다’, ‘갑자기 추워지는 것 같다’며 호들갑을 떨어 매종주가 느낄 위화감을 없애주곤 했지만 과거의 임수를 알던 사람들은 그 장면을 목격할 때마다 아연해하는 것 같다. 매장소는 그들의 반응을 볼 때마다 당연히 편하지 않았다.

“오늘 상의할 일은 무엇이지?”

그렇기에 오히려 뺨에 미소를 걸며 사이에 울타리를 치고선 밀어냈다.

“그 전에 이걸 받게. 매우 좋은 차라 했어.”

소경염은 비단으로 잘 싼 뭉치를 밀어 매장소에게 내밀었다. 매장소가 그것을 받아 고개를 든 것만으로 수하들이 움직여 받아 들고 나왔다. 지금은 임수가 평민으로 살아가는 것임은 분명하지만 타고난 기품과 우두머리 기질은 남들이 먼저 깨닫나보다. 황궁에서 황제를 모시는 궁인들보다도 더욱 민첩하게 매장소를 모시는 사람들이 있다. 금전관계가 아닌 충성심에 가까운 행동들이었다. 자연스럽게 그런 위치를 받아들이고 시중을 받는 그가 새삼 ‘임수’임을 깨달았다. 부황에게 냉대 받아 전장을 누비며 알게 된 평민의 실상은 전혀 그와 같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헤어지기 전보다 책이 많은 풍경은 낯설지만은 않았다. 소박한 듯 하지만 주인의 취향을 반영한 작고 큰 물건들이 눈에 띈다. 그것을 알아볼 눈까지는 없는 경염이지만 매장소의 정취가 묻어있는 곳에서 당연한 듯 임수의 흔적도 보였다. 혼자 알아보고 또한 혼자 안심했다.

“바둑판은 없군.”

뜬금없는 태자의 의문에 매장소의 눈이 느리게 깜빡이더니, 핏, 하고 미소가 걸렸다.

“의례 있을 법한데도 없는 것을 보니, 그동안 바둑실력은 전혀 나아지지 않은 모양이야.”

“바둑실력이야 정평이 나 있지만 자네라고 더 나아졌을라고.”

“자네는 나보다 모든 걸 다 잘했지만 바둑은 영 아니었지.”

매장소는 의외로 태자의 농을 받아쳤다.

“내가 바둑을 자네에게 졌다고? 아니었을 텐데.”

“또, 또 억지를 부리는 군. 그래. 자네가 지진 않았지. 한 수를 가지고 밤새 고민하여 내가 질려했으니까. 게다가 벌써 진 것을 모르고 끝까지 두느라 고생한 것이 어디 한두 번인가.”

“그때야 할 일이 많았으니 바둑실력을 키울 시간이 없었지. 하지만 지금은 다를 걸.”

경염의 표정이 완전히 풀어지더니 활짝 웃음을 걸었다. 매장소로 만난 이후에 소경염이 웃는 낯 따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생경했다. 책사로서 주군 앞에 서야했으니 늘 여유로운 미소를 걸고 부드러운 말투로 설득해야했던 매장소와 비교해 늘 듣고 고집을 부렸던 소경염은 웃음을 보여준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을 모르고 살던 전장의 황자.

‘얼마나 잘 웃던 사람이었던가.’

경염과 장소는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입 밖으로 내지 않았고 얽힌 시선에서도 서로의 마음은 몰랐음에도. 미소를 거둘 생각 없이 웃음기 잔뜩 머금은 상태로 경염은 매장소가 대접하는 차를 받아들였다.

“맛있는 차인가?”

“직접 가져 와 놓구선.”

말을 툭 던졌다가, 매장소는 씩 웃는다.

“그런 것을 알 리가 없지. 물소는.”

찻잔을 손에 굴려 온도를 재곤 가볍게 코 근처로 당겨 올려 소매로 가려 향을 맡았다. 단숨에 들이키자 차향이 입 안 가득 채우더니 코를 지나 머리로 맑은 기운이 솟아 머물렀다. 좋은 차였다.

“좋은 차야.”

까다로운 매장소의 품평을 듣고 나서 태자도 찻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오늘은 왠지 향을 알 것도 같았다.

“좋은 차로군.”

매장소가 그리 말했다는 말인지, 아니면 자신이 마시기에도 그렇다는 말인지 알 수는 없었다.

“옛날 같아.”

동궁의 주인은 소택 뜰에 시선을 던졌다.

“옛 일은 옛 일이지요.”

거리를 만들며 매장소가 뒤로 내뺐지만 태자는 그 꽁무니를 쳐다볼 뿐이었다.

“옛 일을 오랫동안 그리워만 했으니.”

한 번 말을 끊었던 경염은 시선을 다시 매장소에게 던졌다.

“이 손에 잡힌 것처럼 느끼는 것 정도는 용서해주면 좋겠는데. 수야 너에게도.”

“나는.”

버릇처럼 매장소는 오른손으로 왼쪽 가슴을 내리 눌러 잡았다. 눈은 감지 않았다. 대신 그 동자 깊은 곳에서 새파란 불꽃이 튀었다가 사라졌다.

“앞으로 할 일을 위해 살아있는 사람이니 그때까진 살아야 해서 허락할 수 없을 거야.”

뜨거웠던 것을 급히 식혀 가라앉히고, 한 없이 차갑게 얼어붙을 몸을 화마가 집어 삼키고 뱉어내면 질척질척하게 식은, 다 타지 못한 울분이 머물러 그리움을 내리 눌렀다. 린신의 충고처럼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더 격렬하게 바라고 차갑게 복수하려 하면 아니 되겠지.

“수야.”

“내일은 절기 보고를 받느라 정신없을 텐데 이리 계셔도 됩니까?”

또, 물린다. 그 새 그의 안색이 새파래져서 태자는 감히 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안색은 저리 나쁜데 이상하리만치 고요하다. 고통을 앓는 뒤틀림은 어디로 숨겼는지 고상하고 청아하게.




<04>





태자를 배웅하자마자 매종주는 다시 쓰러졌다. 눈을 감자 어지럽게 과거의 나날들이 스쳐지나간다. 어릴 때부터 몸을 잘 써 누구보다 자유자재로 움직였던 자신이 육체적 한계를 이해해야 했던 시간이다. 말을 듣지 않고 무공을 못 하는 몸이 되어 꼼짝없이 지신地神에게 잡혔다. 몸의 쇠약함은 극복 가능한 것이라 믿었던 때, 화한독 치료술을 받고도 자신이 있었던 지도 모른다. 상상을 넘어서는 몸의 고통은 비명조차 빼앗고 철저하게 무너지게 했다. 몸을 움직였던 시간을 모두 잊고 문의 재능으로 모든 것을 쏟아 부어야할 때가 왔다. 눈알을 굴리고 펴지 못하는 몸을 구부려 책에 몰두해야 했던 시간. 사지가 묶인 무력함을 매일같이 극복해야했던 시간 동안 몸 안에서는 격렬한 분노의 기운이 매장소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만큼 독한 고통에 굴복한 매장소가 힘을 빼고 분한 마음에서 절망과 허무를 떼어버리며 천천히 화와 한을 섞어 왔다. 그게 살 길이었으니.

경염을 자신을 이해 못하는 주군으로 모실 때는 괜찮았다. 자신이 느꼈던 직접적인 절망을 깨울 필요가 없었다. 차가움으로 감히 내리누르지 않는 뜨거움을 가진 사내가 과거의 자신을 일깨울 때마다 격렬함이 가슴을 맴돈다.

“어디가 가장 불편한가?”

의식이 붙었다 떨어지는 와중에도 한기의 독이 매장소를 틀림없이 고정해두었다. 뜨거운 분노로 뒤틀리는 몸이 비명이라도 지를 때인데 한기가 무겁게 내려다보았다.

“몸 속에 균형이 깨졌는데 어디가 제일 불편하냐니까? 장소, 내 말 들리지?”

매장소는 대답 대신 가슴을 움켜잡았다. 몸이 얼마나 아프면 이만한 사내가 입을 벌리지도 못하는가. 그래도 이렇게나 스스로를 식히고 있었다. 당연히 고통이 가실 리가 없었다.

“왜? 소꿉친구 만나니 배알이 뒤틀려?”

린신은 가마솥같이 끌어 오른 매장소의 이마를 내리 누르며 성대를 눌렀다.

“린공자!”

“가만히 있어. 못 견딜 거 같으면 다 때려 쳐. 죽고 나면 무슨 소용이야.”

“린...신.”

“소리 낼 거면 비명을 질러.”

“살아서 할 일이.”

끊어지듯 이어지는 말은 희한하게도 린신에게 다르게 들렸다.

“죽고 싶어? 하루라도 빨리?”

“린공자. 왜 이러세요!”

견평이 벌떡 일어났다. 린신은 팔을 끌어내려고 하는 견평에게 팔을 벌려 젓고서 고함을 질렀다.

“소경염! 데리고 오게.”

“네? 태자전하를요?”

“그래, 당장!”

“린...신.”

“자네는 천성이 삭히면 안 되는 성격이야. 너 밖에 모르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죽어도 안 뱉겠다면 토하는 걸 받아줄 사람을 불러야지. 안 그래?”

린신은 몸이 약한 매장소가 내공을 실어 혈을 누르는 걸 견딜 수 없기에 늘 침을 써왔다. 하지만 이번엔 직접 혈을 눌렀다. 매장소가 ‘흡’ 숨을 들이켰지만 큰 비명은 들을 수가 없었다.




낮에 멀쩡한 상태로 보고 간 매장소가 위독하다며 새파랗게 질린 견평을 보내왔을 때 태자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토록 멀쩡하던 이가 어떻게? 밤에 말을 몰아 달려갔더니 소택의 매장소 침소까지 단번에 안내되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태자를 부른 린신은 자리에 없었다. 크게 앓는 소리를 내고 있진 않지만 어딜 봐도 매장소는 앓고 있었다. 견평은 안내해 들어왔는데 린신각주가 없자 대번에 사색이 되어 찾는다고 자리를 떠났다. 려강도 어디에 있는지 자리에 없었다.

“경...염.”

자그맣게 흘러나온 목소리가 태자의 귓가에 흘러들어왔다. 침상에 앉았더니 태자 옷깃에 묻은 찬기운이 끼쳤는지 기침을 시작했다. 등을 쓸어 주지만 호흡이 고르지 못해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무릎으로 일으켜 앉혀 등을 쓰니 그제야 좀 멎었다.

“경...염?”

“그래. 나야. 의원은 어디 가신거야?”

정신을 차리지도 못하는 환자에게 말을 거는 것만큼 쓸데없는 짓이 있을까. 사방을 둘러봐도 다른 인기척이 없다.

“많이 아픈가? 의원님은? 태의를 부를까?”

일으켜 세웠지만 기운 없이 숙인 고개가 늘어졌다. 다시 팔로 일으켜 세우니 몽롱한 목소리가 경염에게 대답했다.

“아파. 아파, 경염.”

그러더니 성대를 긁어 으르릉, 소리를 냈다. 활을 맞고 사로잡힌 날짐승이 내는 소리가 났다.

“아파. 너무 아파. 살갗이 타버리는 것 같아.”

그러자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점점 불규칙적으로 숨 가쁘게 새어나왔다. 그 사이로 힉, 하는 고통의 비명도 새어나왔다.

“못 참, 겠어. 죽을 것 같아.”

가쁜 숨 사이로 짐승이 나직하게 울었다. 경염은 임수의 팔을 잡고 힘을 줬다. 그러자 고통을 참는 사람들이 의례 그러하듯 뭐든 잡더니 찢어버릴 듯 힘을 줬다. 임수가 제 팔을 할퀼 태세로 매달려올 것을 알기에 준 것이었다.

“살갗이 새카맣게 타서.”

“수야.”

“갈기갈기 찢겨.”

기댔던 임수의 눈꺼풀이 뜨여 깊은 동공이 드러났다. 초점 없이 흐려진 눈은 공포에 안력이라도 잃은 듯 비었고, 그 아래로 눈가는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어느 정도의 고통인지 감히 상상도 가지 않았다.

“아파. 이제는 너무 아파.”

“의원님이 낫게 해주실테니.”

“아니, 아무도 고치지 못 해.”

헛소리처럼 흘러나오는 진심이 얼룩져 포효한다. 크르릉, 다시 고통이 소리로 새더니 몸이 크게 뒤틀렸다. 몸에 휘몰아치는 고통을 전신으로 막아서듯 경직되어 빳빳하게 굳어졌다가 풀리며 다시 물기 섞인 고통의 신음 소리가 터졌다. 전신에 흐르는 식은땀이 병약한 몸을 적시고 추위에 내쳐진 몸이 온기를 찾아 파고들었다. 소경염은 이불을 그의 몸까지 끌어당겨 덮게 하고 양팔로 안아 무릎에 눕혔다. 매장소의 손은 간간히 바르르 떨리며 엄청난 악력으로 소경염의 팔을 잡아 당겼다. 전장의 병사가 고통과 사투하다 품에서 전사했을 때 이렇게 전신에 힘을 줬다. 그에 비견될 고통이기라도 한 것일까.

“추워?”

“추워. 추워.”

헛소리처럼 웅얼거리던 목소리에 다시 억눌린 비명이 섞였다.

“경염.”

그리고 끝내 울음이 섞였다.

“어머니껜 말하지 마.”

경염은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을 받으며 태자의 어머니인 정귀비마마를 지칭하며 대답했다.

“어머니껜 알리지 않을게.”

“아버지께도 알리지 마.”

물기 섞인 목소리로 내뱉는 숨은 깊은 슬픔에 물들어 있었다.

“이모님께도 알리지 않는 거야. 내가 아프단 걸.”

태자는 잡혔던 팔을 풀어 대 뭐든 잡아 고통과 바꾸려는 병에 무너져 가녀려진 팔을 잡았다.

“수야.”

“걱정하실 거야. 나도 비밀로 해줬잖아. 네가 아팠을 때.”

“걱정 마. 말 안 할 거야.”

임수를 잡은 팔에 핏줄이 섰다. 그만큼 강하게 고통에 몸부림치는 매장소의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경우형님께도 비밀……이야.”

그 말에는 경염이 먼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후두둑, 경염의 눈가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의 무릎 위에 머리를 누인 매장소 얼굴에 몇 방울 떨어졌다. 눈물을 닦으려 해도 양손에 지옥에서 끌려 올려질 동앗줄 처럼 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탓에 턱으로 흘러내리도록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걱정하실 거야. 모두.”

소년장수 임수만 살아남아, 이토록 아파하며 그들의 명예를 위해 살아간다는 것을 이미 죽었을 그들이 가장 걱정할 것임을, 속상해할 것임을 충분히 알고 있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친우 품에서 고통을 내보이며 언제를 살아가고 있는 지 잊은 채 투정을 부리는 걸까.

“이번엔 네가…….”

누구의 눈물일지 모를 습한 얼룩이 매장소 뺨에 가득했다. 잠이 들었는지 경염을 잡고 매달렸던 손에 힘이 빠져 나갔다. 태자가 팔을 들어 그의 손을 조용히 떼어내자 순순히 떨어졌다. 호흡이 한층 규칙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사이사이 새어 나오는 신음은 그가 앓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그의 팔을 이불속에 밀어 넣고, 이불을 끌어당겨 덮었다. 그리고 편해진 오른 손 소매를 당겨 친우의 뺨을 닦았다. 눈물 얼룩이 남았지만 낯설고 익숙한 그리운 사람이 품에 있었다. 얼굴이 달라졌다고 다른 사람이라고 착각했다니. 이렇게 변한 게 없는데 확인하려 했다는 것에 자기혐오가 솟을 지경이었다. 왼 소매로 제 얼굴의 눈물을 닦고서 품 안에서 잠든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팔을 잡았던 손이 이불 속에서 태자의 장포자락을 쥐었다.

한 식경이 지나서야 매장소의 방에 사람이 들었다. 려강이었다.

“조용히 몸을 빼십시오.”

“이대로 재우겠다.”

“린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려강은 편안 얼굴로 잠든 종주 얼굴을 훔쳐보고선 안도의 숨을 가볍게 내쉬며 공수했다.

“종주께서 깨시기 전에 동궁으로 돌아가시지 않으면 내일 더 앓아누우실 거라고 합니다.”

“얼마나 아프기에 이러나. 매번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가?”

려강은 ‘고통스러워하다’라는 것의 무거운 의미를 듣고 삼켰다. 그들의 종주는 지나치게 멀쩡하게 아파왔으니. 사경을 헤매며 깨어나지 못함에도 빈틈이 보이지 않던 종주가 더 가슴 아팠다. 마치 억울하게 죽은 7만 명의 적염군을 위해 비명소리도 못 내며 견디는 것 같아서. 려강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한 번 더 태자에게 공수했다.

“깊이 잠드셨으니 깨진 않으시겠지만 조용히 동궁에 가서 쉬십시오. 오늘 아프셔서 와보셨다는 티도 내지 마시고. 아마 저 정도 아프셨으니 기억을 전혀 못하실 겁니다.”

소경염은 하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매장소를 좀 더 일으켜 세우자 힘없이 고개가 꺾였다. 려강이 그 목을 부축하고 그 사이 일어서려고 했더니 장포가 길게 당겨져 매장소의 팔이 들렸다. 그것을 조심히 빼보려고 노력하자 손아귀 힘은 더해졌고, 잠들었던 사람의 목에서 다시 ‘그릉’ 하는 소리가 들렸다. 혹여 깨는 걸까봐 려강은 숨을 멈추었다. 그 때 재빠르게 걸쳤던 겉장포만 조심히 벗은 태자는 제 옷을 쥐고 놓아주지 않는 친우에게 양보했다.

“태자전하. 소인이 급히 다른 옷을.”

“됐네. 속옷만 입고 다니는 것도 아니질 않는가. 깨거든 잘 치워주게.”

“예, 전하.”

“나오지 말게. 알아서 가겠네.”

그렇게 발소리도 내지 않은 채 스르륵 내장원을 빠져나갔다. 그러자 려강이 따라붙어 배웅을 했다. 말이 혹시라도 울까봐 달래며 올라탄 경염은 천천히 말을 몰아 소택에서 멀어졌다.








앓다가 일어난 일이 많았지만 유독 개운했다. 몸이 이완되어 있는 기분이었다. 정상인만큼 몸이 가볍다고 느끼는 일은 앞으로 없을 테지만 병자로서도 이렇게 몸이 가벼운 것은 오랜만이었다. 눈을 뜨자 묘한 미소를 걸고 맥을 잡고 있던 린신이 삐죽, 입을 내밀더니 ‘흥’ 못난 소리를 했다.

“눈 뜨자마자 그런 반응이라니.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나?”

“일어나자마자 못난 소리를 하는 것을 보니 잘 회복했네, 아주.”

“일어나자마자 자네의 그런 얼굴을 봐야 하는 내 생각도 좀 해주지?”

“허! 목소리에 힘들어간 것 좀 보라지. 아주 의원도 필요 없겠어.”

“몸이 한 결 가볍기는 해. 이런 걸 해줄 줄 알았다면 미리 좀 해주지 그랬나. 노각주가 귀띔해주신 방법을 이제야 써먹는 건가?”

린각주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피식 실소를 날리고 팔짱을 꼈다.

“이건 내 고유의 방법이지. 아버지였다면 잔뜩 후려 패서 엉엉소리나게 울게 했을테지.”

“노각주께서 자네처럼 경박한 줄 아나?”

“뭐, 경박?”

지금까지 어린 시절 친구 옷을 쥐고 밤새 편하게 잠든 주제에 감히 누구에게 경박을 운운하는지 모르겠지만 그 말은 삼켰다. 요 근래치고는 놀랍도록 밝은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내가 참 실력이 있다니까. 이런 불성실한 환자도 이만큼 살려놓으니.”

이번에는 대꾸 대신에 쓴웃음을 걸어 내보이곤 일어섰다.

“약은?”

“됐어. 오늘은 밥부터 먹게. 약은 내가 알아서 들여보내니까 그때나 먹어.”

등을 보이며 돌아선 친우에게 매장소는 피식 웃어주었다. 그러다 문득, 손가락이 뻐근하여 손을 내려다보았더니 낯선 장삼이 손에 걸려있었다. 려강이 린각주의 명으로 들여온 죽을 내려놓으러 들어왔을 때 종주는 물었다.

“이것이 왜 여기 있지?”

“종주께서 가지고 오라 하신 것인데 기억 안 나십니까?”

“내가 이런 명령도 했던가?”

“예, 종주. 저는 분부대로 해드렸습니다.”

매장소는 그 옷을 한동안 쳐다보더니 허리를 세워 침상에 걸터앉았다.

“앓을 때 헛소리가 점점 느는 듯 하니 자네도 대충 무시하게.”

“아닙니다. 종주님 명을 받는 건 저희 임무니까요. 자, 드세요.”

그 말을 듣고는 매장소, 빙그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죽을 한 그릇하고 기운을 더 차리면 비류가 무얼하고 있는 지 보러가야겠다며 려강에게 말했다. 려강은 마치 옛 활기라도 되찾은 듯한 종주의 건강한 목소리를 들으며 태자의 장포를 접어 치웠다. 종주는 그렇게 쥐고 자던 장포를 치우는데도 신경 쓰지 않는 듯 어느 샌가 고양이처럼 침상 아래 앉아 있는 비류와 웃으며 대화하고 있을 뿐이었다. 

<完>

1차BL 쓰는 계정: @bbokkwon 랑야방/엔네아드 덕질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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