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기사에서 말 하듯 그 이후는 꽤 볼만한 사태로 이어졌다. 곳곳에서 개인 위생과 생존, 생활 편의성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발명품들이 만들어지고, 공공위생과 생활편의를 위한 시설이 설치되었다. 위생과 편의가 먼저 잡히면 그 다음에는 풍토병과 전염병이 잡혔다. 의료가 발전한 건 아니지만 사망자가 현저히 줄었다. 여기까지는 뭐 귀족들이 지들이 잘 다스렸네 뭐했네 하면서 서로 공적을 가로채려 난리도 아니었다. 물론 문제는 그 이후였다.

출처 불분명의 고등교육을 받은 집단들이 곳곳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공공의료와 보건, 교육, 자원 생산, 경제, 복지, 생존자원생산, 건축……. 평민들이 살아남다 못해 그 격차를 귀족과 줄일 수 있는 수없이 많은 분야의 교육이 퍼져나갔다. 그게 20년도 안 돼서 갑자기 치고 올라오니 귀족과 황권들은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도 힘들었다. 지역에 따라서는 평민과 귀족의 생활 수준이 역전되는 곳까지 만들어지는 판국이었지만 이 사태를 누가 만들었는지, 아니 한 사람이 이런 상황을 만들 수 있으리란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평가하기론 어떻습니까?”

“생활수준이 주계 규약 중하위권에 올라왔으니 슬슬 해제해야하긴 하겠지. 그들은 모르겠지만.”

“당신이 이길 수 밖에 없다는 의미가, 이거겠죠.”


륀은 오늘도 그 정체불명의 존재를 쫓는다고 혈안인 신문을 반의 반으로 접고선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10년이 조금 넘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때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 선 남자는 퍽 나이가 든 모습이었다. 분명 그때는 자존심과 자만이 하늘을 찔러선 사람 심기 거스르는데에는 재능 있다고 했던 거 같은데.

옛 시기를 상상하곤 한다. 귀족이란 좌마저 없애버린다면? 무슨 자신이 땅에서 솟아났는지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계획조차 없이 무턱대고 이 계급제 사회를 타파해보겠노라고 호언장담을 하는 남자를 보고는 그의 앞에서 얼마나 내쉬었을지 모를 한숨을 뱉으려 고개를 대충 돌리려 하는데 그 검지가 그녀의 입술을 꾹 막았다.


“이 생명의 고리, 왜 계급제가 남아있다고 생각하나?”

“종족 생존에 좀 더 낫겠단 생각으로 남아있는 거겠―.”

“생명의 고리라 부르는 이 축복받은 땅은 백야지대라 부르는 작열하는 대지와 극야지대라 부르는 영구동토 사이에 존재하는, 행성의 규모에 비해 매우 좁은 땅을 갖고 있다.”


대충은 안다고 이 손가락 치우라는 말을 하려고 해도 케드릭은 계속 말했다. 륀은 처음 보는, 생존 가능한 행성에서 몸을 일으키면 해야하는 수칙이 있었다. 행성의 발전 정도와 사회, 정치, 경제, 역사, 생활 양식 등등을 알아내고 그에 맞는 행동을 설계해야 했다. 이번에는 적당히 대충 사는 요리사 역할이었는데, 륀의 입장에선 저 놈이 갑자기 뒤집어 엎어버리려고 했다.


“그리고 이 좁아터진 땅에 돌고도는 자들과 기억하는 자가 서로 섞여서 살았는데, 모든 삶을 기억하든 최초의 죽음만 기억하는 사람이든 둘 다 이 좁은 땅에서 서로 자기만 좋게 살기 위해 끝없는 전쟁을 불사했지.”

“그런 땅 많은 건 알고 있어.”


륀은 입술을 막은 검지를 자신의 손으로 치웠다. 다음 세계에선 기억하는 방식을 좀 더 유연하고 막연하게 깨우치는 방식으로 돌릴까 고민하던 때였으니. 아니, 아니지. 지금 이런 고민들은 결국 이번 세계를 버린다는 뜻과 같은 거 아닌가. 그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케드릭은 자신의 손을 치우며 말을 꺼냈다.


“그때는 생명의 고리가 아니라 피의 고리라 불렸지. 몸에 흐르는 피를 가진 존재들은 모두 대지에 그 액체를 적셔댔다고 하는데, 결국 이 악순환은 두 현자에 의해 해결된다.

그들은 ‘너무 일찍 기억하는 것이 문제다. 각자 생존하고, 타인과 교류하며, 사랑을 나눠도 모자랄 시간에 과거에 매달려 남들을 죽이는 데에 집착하니, 과거를 늦게 깨닫도록 하자. 그래야 모두가 산다.’고 말했다. 그 둘과 의견을 따르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술식이 ‘규칙 지연술’. 이 땅에 일어난 모든 생명체는 행성내 소속 종족 평균 수명의 절반쯤 왔을 때에야 자신의 과거를 깨달을 수 있게 만든다.”


평균 수명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깨달음은 늦어지고 그만큼 기존에 살아왔던 양식을 버리기 힘들어진다. 그러니 첫 단추가 계급제로 꿰어졌다면 당연히 이 상황도 꽤나 오래 지속됐겠지. 다른 행성에 비해 규칙지연을 꽤 길게 잡았군. 륀은 그제야 저들이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막 행동하는 지 알아챘다. 기억하는 자와 돌고 도는자 둘 다 아닌, 계승자인 륀에게 이 규칙이 통하지 않으니.


“그제야 피의 고리는 생명의 고리로 탈바꿈하고, 대륙은 그 현자를 중심으로 둘로 갈라진다. 각자 추대하는 현자를 황제의 자리에 앉히고 그 측근들이 귀족으로 앉는 전형적인 귀족정이 만들어지지.”


그 이후는 아는 바와 같이. 케드릭은 어깨를 으쓱였다. 전쟁이 이어지다가 언젠가 평화 협정이 이어졌다. 와 같은 이야기는 륀도 알겠다 싶었는지 접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계급제는 규칙 지연술이라는 게 발현돼서 그런거고, 오래 지속된 평화와 수준이 천천히 높아져가는 공공위생때문에 수명이 늘어나면서 지연술의 효과가 더 길어진거고, 그래서 발전이 더뎌졌다. 이 소리였다.


“나 또한 지연술의 효과를 받아 아직 과거를 다 깨닫지 못했다. 그러니 이쯤 왔을 때 이 술식을 제어한다면 모두가 계급제를 타파하려 하겠지. 그 이후의…….”

“그대로 반란이 일어났지만 황정이 숨긴 무기들로 제압되어 모두가 죽는다는 선택지는 없네, 안일한 생각하는 놈이랑은 별로 협업하고싶지 않아.”


허?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만한 혹하는 카드라고 생각했는데, 가능성만 존재하는 수 때문에 단칼에 거절당하는 걸 보자니 케드릭은 또다시 속이 뒤집어질 노릇이었다. 이래도 싫다, 저래도 싫다. 대체 뭘 해야 하는 건가? 싶어 쳐다보니 륀은 아까 전부터 어느 쪽이 좀 더 나을지 저울질하고 있었다.

아직까진 그렇게 큰 적폐정황은 안 보이기도 하고,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야 않은 것도 한 몫하고, 계급간의 사이가 나쁘지 않다면 그대로 둬도 되니까. 무엇보다 자신의 힘을 제대로 측정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휘두르면 그 여파가 어떻게 퍼질지 모르는 일이다.

당장 직전 카멜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생각해보자. 죽는다 해도 계속 살아남는 소년병, 살아나면 살아날수록 물리적으로 제압하기 힘들어지고, 그 힘으로 밀고 나아가서 평화를 유지시키는 단 하나의 쐐기가 됐다. 그렇게 꽤나 오랜 시간동안 평화를 유지됐다 생각했지만 결국 각자의 속내에는 전쟁을 하고싶어하는 마음만 커져선.


“있잖나, 난 밉보이고 싶지 않아.”


그 자가 나에게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으라 그래서. 그러려면 사람들에게 불호감을 받으면 안되지. 스치듯 들리던 마지막 유언이 문득 그녀를 감쌌다. 많은 이들을 사랑을 받게, 미친놈 사랑은 받지 말고. 그런 말, 그런 의연한 얼굴.


“무슨…….”


나는 미운 털 아닌가? 케드릭 입장에선 의문이 가득한 문장이었지만 륀의 얼굴을 보고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닳은 듯 은은한 미소를 짓고 그를 내려다보는 모습이, 그제야 자신이 이거 잘못 걸렸다. 란 생각을 머릿속 가득 채워냈다.


“그래도 전반적인 위생과 교육 수준을 높이는 거부터 시작해서 그 술식을 적당한 기간을 두고 해제한다면 괜찮아 보이는데.”


역시나 귀찮다. 굳이 나서고 싶지 않아. 오랜 시간 헛으로 산 것은 아니기에 가지고 있던 재능을 발휘한다면 어렵지 않겠지만, 또 나서서 그 꼴 만드는 게 싫다. 대충 말 하던 륀은 자리에서 일어나 곧바로 민박으로 돌아갔다.


“한 사람 속은 모르겠군.”


케드릭은 간단하지만, 길다 못해 년 단위로 돌아가야하는 길을 아무렇지도 않게 제시하고는 귀찮다는 듯 자신을 버리고 돌아간 륀을 향해 중얼거렸다. 자기 수명이 몇백년 되는게 아닌 이상 저렇게 말하는게 제일 이상하다.

분명 자신의 의견이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급진적인 건 언제나 피를 흘린다. 술식을 해제하고 분노에 찬 군중들의 목숨을 장기말처럼 사용하면 몇 년 내로 달성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도 아무렇지않게 반려시키고 모르는 사람 목숨을 먼저 생각하는 것도 기이하다. 천길 물 속은 알아도, 이번에는 이 쪽에서 한숨이 나올만 했다. 그래도 여태 밀쳐내기만 하던 사람이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걸 보니 이번 의견은 꽤 받아들여질만한건지. 진전이 있단 감상이라 그는 조금만 더 밀어보기로 다짐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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