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가영을 아십니까. 

엥, 내 친군데 너도 걔 알아? 하는 사람이 있고 단편 영화 <조인성을 좋아하세요>의 감독 겸 배우로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그의 영화를 재생했다가 진절머리 내며 꺼버린 기억에 얼굴을 찌푸리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까 정가영은 영화감독이고, 자기 작품의 주연 배우이며, 누군가를 진저리 치게 하는 영화를 많이도 찍었다. 나도 '정가영진절머리나' 파 중 한 명이지만 우리 엄마가 주말 연속극을 끝까지 보듯이 그의 작품을 끝까지 보고, 두 번 봤다. 어땠냐고 물으면 나오는 감상은 이랬다. 너무 싫은데 개 웃기고 싫어. 


정가영 감독은 시종일관 연애, 남자, 남자랑 연애하는 이야기를 한다. 내겐 그 셋만큼 싫은 주제가 없는데, 작품 검색창에 슬그머니 '정가영'을 써넣는 때가 가끔 있다. 몹시 자존심 상해 하며 주로 배란기 핑계를 댄다. 배란기엔 어쩐지 '모럴 없는', 올바르지 않은 이야기가 당긴다. 그렇다고 실제 범죄자가 나오거나 '너무 한남'인 영화는 기분이 상해버리는데, 정가영 감독의 영화는 진저리 치며 참을 수 있는 선 안에 있다. 


장편 개봉작 <비치 온 더 비치>, <밤치기>, <하트>에서, 주인공 가영은 술을 물처럼 마시며 '함 자자'는 말을 '밥이나 함 먹자'처럼 남발한다. 맘에 드는 남자에게 마음을 숨기기는커녕 염불을 외우는 듯하다. 넌 날 사랑하게 될 거야. <비치 온 더 비치>에서 전 남친 정훈은 가영에게 한 톨이라도 남은 마음이 있을지 몰라도 <밤치기>에서 진혁은 가영을 처음 만나는 남자다. 나는 건강하지 않게도, 자기애를 강하게 드러내는 사람을 몰래 경멸하는 면이 있다. <밤치기>를 보고 나선 가영도, 정가영 감독도 싫어졌다.


그런데도 이따금 생각나는 이유는 '개 웃겨서' 그렇다. 영화를 말 그대로 가득 채운 대사 사이 개그 코드에 코에서 압력밥솥 증기 배출하는 소리를 낸다. 그러나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성적 표현이 웃음 요소는 아니다. 'Cool~', '쎈 언니' 자막을 달고 '당돌하게’ 음담패설을 꺼내 웃음을 자아내는 예능 속 여성 캐릭터와 다르단 얘기다.
정가영 감독은 줄곧 따라다니는 수식처럼 홍모 감독의 후예가 되려는 것도, 성별 전복으로 쾌감을 노리는 것도 아니다. 걔는… 그냥 그걸 좋아하는 거야… 고백, 욕구, 사람과 사람 사이 지질하고 추접한 감정들 말이다. 그가 즐겨 봤다는 예능 <짝>을 예로 들면 가영은 모든 출연자를 사로잡은 마성의 여자 1호가 아니라 "아, 남자 1호님… 근데 어차피 1호는 나랑 자게 돼 있어." 하며 혼자 도시락을 까먹는 인물이다. 프로그램에선 마성의 1호들이 스타가 되겠지만 유튜브엔 '혼밥 정선생 독백 모음' 같은 게 분명 있겠지.


감정에 솔직할 수는 있는데, 가영은 상도가 없다. 애인이 있고 가정이 있는 남자들에게 치근덕댄다. 그게 용납되는 정가영 유니버스에 균열을 내며, <하트>에서는 처음으로 비도덕성을 지적하는 상대가 등장한다. 이런 영화를 왜 만들어야 하나요?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이런 이야기(혹은 관계)에 중독되면 어떡해요? GV에서 관객이 차마 묻지 못할 질문을 면전에 툭 던져 놓는다. 화면 속 정가영 감독은 당황하면서도 역시 답을 툭 내놓는다. 자신을 혼란하게 했던 사건, 오랜 의문을 영화로 만들고 연기하며 그것들을 소화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떠오르는 인물이 있는데, 바로 나다. 속에 얹힌 이야기, 눅눅하게 들러붙어 있던 감정을 잘게 쪼개어 글로 조립하고 나면 비로소 소화가 되었기에 뒤늦게 언어를 깨우친 마냥 시도 때도 없이 글을 쏟아내는 시기를 막 지나왔다. 야, 나두… 정가영 감독에게 정이 가려는 순간 이 대사가 등장한다. "자꾸 정이 가서 정가영인가."


실은 글 쓰는 이유 외에도 겹치는 점이 몇 있다. 최근 말과 글로 나를 소개할 기회가 몇 번 있었는데, '재미'라는 단어를 상당히 자주 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컨트롤 에프로 '재미'를 찾아 몇 개 수정했지만 말로는 얼마나 많이 언급했을지 모르겠다. 정가영 감독은 "강박이라 할 정도로 웃음에 예민한 편"이라고 밝히며 작업의 핵심을 '재미'로 둔다. 재미를 따라 직관적으로 움직인다. “재채기가 나오니까 재채기를 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쓰고 영화를 만들었다. 그래서 꿈에 조인성이 나온 뒤 <조인성을 좋아하세요>를 쓰고 조인성 배우에게 시나리오를 보냈다. 

전날 조인성 배우가 나온 영화를 본 탓이라는데, 역시 습관적으로 인물을 관찰하는 듯하다. 가영의 맹렬한 고백을 받고 허둥대는 남자 역을 봐도 그렇다. 뛰어난 생활연기로 대사 핑퐁을 잘 받아쳐서 가영을 돋보이게 할 배우를 찾아냈다. 또한 현실에 있는 인물을 반 정도 빌려온 덕에 가영의 생생함에 묻히지 않는다. 여기서 반만 빌려온 점이 핵심이다. <밤치기>에서 가영이 진혁(박종환 배우)에게 질척대지만 현실 그 자체인 '아는 형'에겐 건조하기 짝이 없듯이. 이야기, 직관, 관찰. 내가 재미있게 여기는 점을 재미있어 하는 사람이 또 재미있기 마련이라, 치명적으로 다른 관심사를 가진 정가영 감독에게 정이 가는 까닭이다.


정가영 감독의 목표는 입신양명, 짱이 되는 것이다. 청룡영화제 관객상을 받도록, 500만 관객이 재밌어하도록 얼마든 친절해지겠다고 한다. 욕망을 포장하지 않는 솔직함과 허세 없는 유연함이 정가영 감독을 반짝이게 만든다.
<하트>는 가영이란 인물에게 느끼는 불편한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창작자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되는 작품이다. 앞의 두 장편과 여러 단편에서 이어온 주제를 마무리하면서, 그림과 소리를 비롯한 영화의 즐길 거리를 확장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로써 정가영 유니버스의 1막이 내리고, 2막 첫 작품은 CJ 자본을 업었다. 감독의 혼이 깃들 새로운 페르소나는 심지어 전종서. <콜>의 살인마 영숙 역으로 작년 영화계를 뒤집어놓은 전종서 배우 말이다. 

여성 캐릭터의 범위를 훌쩍 넓힌 영숙과 가영의 만남이다. 나쁜 여자, 이상한 여자가 얽힌다니 기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배란기 핑계는 이제 필요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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