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요란百花燎亂 ::  온갖 꽃이 불이 피어 오르듯 피어 매우 화려함.

황금 사과 :: 권력과 지혜와 사랑 중,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 


로잔나는 새벽 위를 조용히 걷고 있었다.

코 끝을 스치는 붉은 향은 나붓하게 길을 밝히고, 길게 내쉰 한숨은 안개가 되어 흘렀다. 바다를 등지고. 어슴푸레 하늘을 비추는 아침은 오지 않고 가라앉은 밤은 채 걷어지지 않아 묵직했다. 군화가 땅을 딛는 소리마저 먹혀 버릴 만큼. 손에 들린 것은 부스럭거렸다. 그 소리가 매우 고요해 아무도 깨우지 않을 텐데도 로잔나는 주위를 느리게 둘러 보았다. 혹여나,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일어나기라도 할 것이라는 듯.



이상한 밤이었다. 밤은 깊게 여물었고, 달은 온데간데 없었으며 뒤척이던 로잔나는 꿈을 꾸었다. 로잔나 데 메디치가 안개 가득한 항구에 우뚝 서 있는. 바람 한 조각 없어 고요한 공간에는 새소리조차 울리지 않았고 광장의 큰 시계가 종을 울리길, 하나, 둘, 셋... ... . 묵직하고 섬뜩한 종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로잔나의 손 안에선 맑은 날의 바다처럼 푸른 액체가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꿈이란 그토록 이상한 것이어서 로잔나는 손에 쥔 미끌미끌한 무언가의 감촉을 느끼면서도 고개 숙인 자신을 보고 있었다. 손아귀 새로 뚝 뚝 떨어지는 액체에 로잔나는 간지러운 듯 손을 움켜쥐었다. 물컹거렸다. 그리고 그것은.


종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손 안에서도 울렸다. 그것은 살아 있던가, 아니면 죽은 것이던가. 알 수 없엇다. 

로잔나는 고개를 들었다.

헬가 슈미트는 눈 앞에 서 있었다. 고개를 들지 않았으므로, 로잔나 데 메디치는 헬가 슈미트를 볼 수 없었다. 꿈속임에도. 

로잔나는 헬가에게 손 안에 든 것을 건넸다.

로잔나는 손을 들어올리는 자신을 보았다. 입가에서 흘러내리는 것은 진득한 푸른색, 손 안에 고인 액체 또한 푸른색이었다. 바다가 흘리는 눈물처럼. 로잔나 데 메디치의 눈은 꼭 같은 색으로 넘실대고 있었다. 

로잔나는 헬가를 보았다. 헬가는... ... .


아, 깨어난 로잔나는 그 꿈을 아주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라 짐작했다. 



그래서 로잔나는 아주 이른 새벽 꽃다발을 들고 항구를 걷고 있었다. 

목적지는 알 수 없었다. 막연히 스스로 알고 있으리라 생각할 뿐이었다. 꿈에서 로잔나가 그러했듯이. 시계추가 무겁게 흔들렸다. 시간을 향해 달려가듯.


로잔나는 헬가 슈미트의 여관 문을 두드렸다. 녹슨 경첩은 삐그덕거리는 소릴 냈다. 아침은 오지 않았고 새벽조차 숨을 죽이는 찰나 로잔나는 문을 열고 나오는 여관의 주인에게 꽃을 던지듯 안겼다. 얼떨결에 헬가는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싱싱했다. 막 다시 심으면 지지 않을 것처럼. 그러나 꺾인 순간 질 것이 분명한 운명이었고 순간을 불사르듯 화려했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꼭 그러했다. 붉고 아름답고 화려해 세상에서 가장 빛나다가도. 헬가는 영문도 모른 채 꽃다발을 들고 서 있었다. 아주 붉고 싱싱해 갓 피어난 것 같은 꽃과, 지쳐 보이는 은퇴한 기사. 잿빛에 붉은 꽃이 엉겨 붙어 색이 옮았을까, 로잔나는 숨도 고르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네게 이걸 건네 주어야 할 것만 같은 충동이 들었어."

"통령."

"왜냐하면 네가 가장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아주 갑자기. 그 모든 살아있는 것들 중에서. 숨도 쉬지 않고 쏘아 붙인 로잔나는 아주 분하다는 얼굴이었다. 기가 찼을까, 아니면 억울했을까. 고작 사랑 하나에 흔들리고 고작 꿈 하나에 새벽을 가르며 달려온 자신이. 로잔나, 헬가가 그 종신통령을 느리게 불렀다. 로잔나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헬가를 꽃과 함께 껴안을 뿐. 헬가가 눈을 내리깔았다. 주름진 손이 느리게 흔들리는 금발을 쓸어 주었고 둘 모두는 아주 천천히 눈을 감았다. 헬가의 옷자락을 로잔나는 꾹 쥐었다. 새벽이 가고 아침이 오고 있었다. 언어는 필요 없었다. 언제나 소리 죽인 침묵만으로도 교류할 수 있는 관계였으니까.

로잔나는 그 침묵이 퍽 기꺼웠다. 부서지듯 구겨지는 헬가의 옷자락은 서늘했고 로잔나는 그걸 놓는 순간 헬가 슈미트가 소금 기둥이 되어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필사적으로 그 용기사를 껴안았다.


그 사내를 어리석다 생각한 적이 있었다. 신화조차 어그러져 살아남지 못한 이 세상에서 몇 남지 않은, 문헌에 담긴 사내. 황금 사과를 지혜에게도 권력에게도 건네지 않고 사랑에게 건넨 사내에 관해 로잔나는 생각했다. 헬가를 만나기 전의 로잔나는 그보다 어리석은 사내가 없으리라 여겼다. 권력은 제 손에 쥐면 되는 것이었고 사랑은 필요없는 것이었다. 정치인이라는 것은, 누군가의 앞에 서 누군가를 이끈다는 것은 언제나 지혜를 필요로 했다. 그것만은 스스로 쥘 수 없었다. 로잔나는 지혜를 택하지 않은 사내를 멍청하게 여겼다. 그 종신통령은 언제나 손해 보는 일 따윈 하지 않았으니.

그러나 아니었다. 사랑은 모든 것에 앞선 것이었고 그 무엇보다 가장 불가항력인 것이었다.

 로잔나는 스스로가 사르디나에 얼마나 필요한 사람인지 알았다. 로잔나는 그 자신의 가치조차 저울질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이 순간 로잔나 데 메디치는 정말 비합리적이고 모순적이게도 제 심장을 갈라 헬가에게 쥐여 주고 싶었다. 제가 죽고 나서도 영영 죽지 않도록. 

그 황금빛으로 빛날 심장을... ... .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


가장,

아름다운 사랑에게.





로잔헬가, 가장 아름다운 여신.

헬가가 없는 로잔나는 지혜를 택했을 테고 헬가가 있는 로잔나는 사랑을 택했을 것이란 날조와 망상에서 시작된 글입니다 헬가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로잔나가 보고 싶었어요... 제가 지금 죽으면 뭣도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 심장을 충동적으로 쥐여줄 것만 같은 기분에 휩쓸리는 그런...사랑에 휩쓸리고 마는 이성적인 사람 좋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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