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내려앉는다.

깊고, 깊게.

 

안식과 공포의 시간이 도래하고,

모든 이들이 안식에 취해, 공포를 피해,

잠에 빠져들 시간에

 

잠이 들지 못하는 건 누구일까.

 

 

 

 

차라랑…

 

깊은 밤.

등화원의 등롱들마저 잠이 드는 깊은 시간에 청의 수문장이 손님의 방문을 알리며 나를 재촉한다.

싸늘한 바람, 차가운 눈발.

아직 눈이 내리는 정월. 그것도 별빛조차 들지 않는 깊은 밤이, 이제야 막 새벽을 향해 달려갈 때였다.

비예도 인예도 깊이 잠든 이 시간에 손님이라니. 하지만 청의 수문장이 반길 손님이라면 어쩔 수 없지.

-어서 오세요, 손님.

돌아오는 것은 침묵. 눈발이 젖어 뚝뚝 흘러내리는 물기가 추워 보였다. 옷자락마다 지저분하게 묻은 흙검댕이. 다 해진 손발. 무리하게 움직여 발걸음을 옮긴 듯 온통 피곤해 보이는 건 내 생각만이 아닐 것이다.

용케도 추위에 떨지 않는구나. 저렇게 다 젖은 몸으로 한겨울, 한밤의 찬바람을 다 맞았으면서.

-이런, 다 젖으셨군요. 어서 이리 앉으세요. 따뜻한 차라도 한잔 드릴까요?

내 물음에 손님은 한 박자 정도 늦게 반응하여 고개를 저었다. 몸이 얼어붙어서 그런지 반응이 느렸다.

하긴 지금 차보다 젖은 머리칼과 옷깃을 닦는 게 더 급할 것 같았다. 바깥과 단절된 기문향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불이 꺼진 지 오래라 추운 건 마찬가지였다.

음, 필요한 건 수건과 따뜻한 물 한 잔. 그리고 따뜻한 불빛.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조금만 기다리시겠습니까, 손님? 따뜻한 물을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몸이 살짝 풀렸는지 이번에는 반응이 약간 빨랐다. 한 박자가 아닌, 반 박자 정도 느리게 답하여 고개를 끄덕였으니까.

그럼 갔다 올 동안만이라도 몸을 녹여야 할 테니 불이라도 두고 가야겠는데. 흐음, 귀린은 손님에게 너무 밝을 테니까, 안 되겠고.

온화한 빛을 뿌리는 등롱이 뭐가 있었더라. 자미등과 귀등은 너무 붉은 색이라서 곤란하고. 목단등이나, 옥란등이 좋겠지만 그네들은 너무 깊게 잠이 들어있단 말이야. 지금 깨우면 조금 싫어할 것 같고.

으음, 역시 매화등이 나으려나. 그네들도 잠자기에 바쁘지만, 그래도 눈 속에서 피어나는 데는 익숙할 테니.

잠시만 실례해도 되겠지?

내 부름에 잠에서 설핏 깬 매화등롱이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온화하고 우아한 그네들은 곤란한 내 부탁을 무리 없이 들어주었다.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부드럽게. 눈 속에서 자신의 꽃잎을 저버리지 않고 꽃을 피우는 강직한 이답게 말이다. 만일 이런 부탁을 귀등에게 했다가는… 으음, 뒷일은 보지 않아도 뻔한 일.

청의 수문장의 소리에 깨인 귀린이 화르륵 조그맣게 날아와 매화 등롱에 불을 붙이고서는 사라졌다.

이 녀석, 손님이 앞에 있는데도 조심하지 않다니. 그나마 손님께서 신경을 안 쓰니 망정이지. 다음부터는 조심해!

내 호통에 귀린이 엷게 웃으며 자신의 보금자리로 들어갔다. 정말이지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니까. 평소에는 조용하면서 이렇게 가끔 제멋대로 행동하니.

불이 당겨진 매화 등롱을 손님 앞에 올려두었다. 그러자 그 손님은 가만히 앉아 매화 등롱 안에서 타오르는 불빛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은은하고 아름다운 황금의 불꽃. 어둠을 밝히고- 여명의 아침으로 시작하여 저녁의 황혼으로 반나절의 시간을 보내는 태양과 달리 강렬하지 못한 불빛이다. 하지만 추위에 얼어붙은 손님은 그 불빛이 마음에 드는지 망연하게 매화 등롱을 바라보고 있었다.

음, 이제 좀 괜찮은 것 같네.

그럼 나는 수건과 따뜻한 물을 가져와야겠구나.

부엌에는 물을 올려두고, 일단 이층으로 가서 수건을 꺼내오려는데, 생각지도 못한 의문이 하나 들었다. 이 밤에 찾아오셨으니 오늘 묵으시려나. 흐음. 그럼 방 정리도 해야 할 텐데.

사실 기문향은 요리집이지 숙박업소는 아니었다. 그래도 가끔 쳐들어와서 막무가내로 자고 간다는 자들이 있어서 방이 있었다.

내려가서 손님에게 물어봐야겠군.

성심껏 불을 피운 매화 등롱 때문인지 손님의 얼어붙은 어깨가 약간은 풀린 듯 보였다. 축 늘어진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으로 보아 눈은 다 녹았나 보구나.

자자, 부엌에서 따뜻한 물 한 잔을 가지고 가자.

아무리 불빛에 눈이 녹는다 하더라도 추위는 쉽게 가시는 게 아니니까.

-손님, 여기 물입니다.

쟁반 위의 물잔을 손님 앞에 내려두고, 수건을 건네주었다. 가느다란 손이 수건을 받기 위해 느릿느릿 움직였다.

으음, 반응이 역시나 느리군.

얼굴선이 가는 것으로 봐서 여자애 같기도 하고, 남자애 같기도 하고. 나이가 어리니까 괜찮겠지. 마음을 정하고 일단 수건을 펼쳐 손님의 머리를 문질러주었다. 이런 건 내 본업이 아니지만, 오늘만은 특별이다. 아니나 다를까, 약간 놀란 듯 수건 아래 느껴지는 손님의 몸이 흠칫 굳는 게 느껴졌다.

-많이 추우셨죠, 손님? 따뜻하게 데워온 물이니, 마셔 보세요.

이럴 때는 내 필살 영업용 미소가 매우 쓸모 있지만, 뭐, 어두운데 제대로 보이기나 하겠나. 오늘은 그냥 넘어가자.

검댕이 많이 묻어서 제대로 닦여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쉽게 머리칼이 본래의 색을 드러내었다. 어둠을 완전히 밀어내지 못한 매화 등롱에 비쳐 보이는 그 머리칼의 빛깔은 약간 어두운 황금색. 물에 젖어 제대로 된 색깔을 드러내지 못한 태양의 빛깔이다.

의외네.

-자, 손님. 이제 좀 덜 추우시지요?

일단 손끝이 덜덜 떨리는 것은 멈추었다. 젖은 옷은 어쩔 수 없으니까, 수건을 걸쳐두는 게 좋겠지. 물기부터 없애야 따뜻해질 테니까.

머리카락 아래로 살짝 보인 얼굴은 무표정이었지만 확실히 한기는 덜 느끼는 것 같았다. 흐음, 추위가 한풀 꺾였으니 이제 화로라도 피워볼까.

그보다 이 손님, 자고 갈 건가부터 먼저 물어야겠다.

자고 갈 거면 방에 화로 들여야 할 테니까 말이야.

 

-…서… 어쩔… 수가….

중얼거리는 낮은 목소리.

제멋대로 늘어진, 어두운 황금빛 머리칼이 살짝 흔들리며 들리는 목소리.

무어라고 한 것일까.

-손님?

-…와서… 어쩔 수가 없어서….

약간은 기운 빠지고, 지친 목소리다.

무슨 힘든 일이 있었던 건가?

-괜찮아요, 손님. 이야기해보세요.

이런 상담도 내 본업은 아니지만, 오늘은 정말로 특별이다. 사실 이렇게 어린애들이 지치고 힘 빠져 하는 건 못 봐주겠으니까.

저기 벽 건너의 방에서 잠들어 있는 애들이 떠올라서 그런 건 절대로 아니다.

아무렴, 절대로 아니고말고!

어깨를 다독이자, 엷은 떨림이 전해졌다.

흐느끼는 걸까. 울고 있는 걸까. 아직 가느다란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 건, 왠지 아프게 느껴져 싫다.

-잠이… 오지 않아요….

잠이 오지 않는다고?

그래서 이 추운 한겨울, 한밤에 이런 행색으로 돌아다니는 거야? 기가 막히다 못해 약간 황당한 느낌이 들지만 그게 다가 아닌 것 같다.

-하얀 눈이 오고 추운데… 잠을 자야 하는데…. 잠이 오지 않아서… 눈을 뜨고 싶은데, 뜰 수가 없어서… 해님도 들지 않는 어둠 속에 있기 싫은데… 차갑지 않은 바람과 놀고 싶은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잠을… 자야 하는데… 잠이 오지 않아… 답답해…. 잠을 자지 못하는 게 답답해….

낮은 흐느낌이 서럽게 울렸다.

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못하게 되어서 슬픈 게 아니었다. 깜깜한 새벽을 헤매며 설움 가득한 한탄을 늘어놓는 어린아이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알겠다.

그저 아주 당연하고, 당연한 것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이 싫은 거겠지.

-깨어나고 싶은데… 다들 그럴 수 없다고만 하니까, 그러니까….

잠을 자야 해. 하얀 눈이 내리고, 추운 바람이 연이어지는 겨울에는 잠을 자야 하지. 그리고 봄이 되면 천천히 깨어나기를 기다려야 하는데 그게 안 되는 거잖아. 순리에 거스르더라도, 눈을 뜨고 세상을 보고 싶어 하는 거야.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가끔 이런 이들이 존재하지.

죽을 것을 뻔히 아는데도 불꽃 속으로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추운 겨울 한 밤의 헤매는 이들. 죽을 것을 아는데도 동면을 깨며 한줌 창백한 햇빛을 향해 잎을 펼치다, 결국 얼어 죽어버리는 작은 풀들 같은.

안 될 것을 알면서도 끝끝내 손을 내밀어 갈구하고 갈구하다가, 결국 무너지는 자들.

예전에 누군가도 그렇게 말했지.

꼭 해야 한다고.

만일 그로 인해서 죽어버린다면…?

그래도 한다고.

그렇게 말하고 정말로 죽어버린 아이가 떠오른다.

가늘게 떨리는 어깨. 불빛에 점점 드러나는 아름다운 황금빛 머리칼. 서럽게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애절한 어린아이.

나는 그다지 자비로운 안내자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과거에 얽매여서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지.

내가 보는 것은 ‘현실’뿐.

아마도 이 기문향을 지켜나가는 동안은 변함없이 그럴 거다.

그리고 가끔 너처럼 길을 잘못 들어선 이들에게 잘못된 손길을 내밀겠지.

어쩌겠어. 나 역시 알면서도 그렇게 하고 싶은걸.

하지 않아야 된다는 걸 알면서도 손 내밀던 그 누군가처럼 말이야.

-손님. 잠이 오지 않으시나 보군요. 그렇다면 방법이 하나 있는데요.

-방법?

-불면증을 없애는 방법이죠.

-뭐죠…?

-그건….

 

지금, 선택권을 주지.

하지만 나중에 후회해도 난 몰라.

 

 

***

 

 

“스승니임!”

아우, 저 동창에 울리는 북소리 같은 목청을 좀 보라.

그래 일어났다, 인마. 시끄럽게 소리치지 말란 말이다. 어제 제대로 잠을 못 자서 정신이 없는데 대체 무슨 억하심정으로 저리 떠드는 게야?

“내 일어났다. 일어났으니까 좀 조용히 해.”

“일어나셨으면 어서 나오세요!”

비예 저놈을 그냥. 아욱, 머리야. 술도 안 마셨는데 잠 못 잤다고 이렇게 머리가 아프냐.

아직 정신없이 울렁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밖으로 나와 보니, 비예 녀석이 밀걸레를 붙잡고 바닥을 박박 밀고 있었다.

허얼, 인상 구기고 있는 게 꽤 성질났나 보네.

“뭐하냐?”

“뭐하긴요! 대체 말이야, 누가 바닥에 물을 흥건하게 흘려 놓은 거예요? 그리고 이 수건은 또 뭐야!”

“왜 성질이야, 성질은.”

“그렇잖아요! 분명 어제 문 잠그고 잤고, 오늘 아침에서야 저 문을 열었는데! 누가 이렇게 물을 흘려놨냐는 겁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잖아요.”

뭐, 귀신이 곡할 노릇은 아니라고 본다만.

“하움, 너 그것 때문에 이 스승님을 꼭두새벽부터 깨운 거냐?”

“그리고! 이 등롱은 또 뭡니까!”

버릇없이 스승님 앞에서 소리나 버럭버럭 질러대고. 저놈을 내 그냥, 어릴 때처럼 확 엎어놓고 엉덩이를 때려줄까 보다. 윽, 머리 울려서 화도 못 내겠다.

“왜 처음 보는 등롱이 여기 있는 겁니까!”

비예 녀석이 정말로 까무러쳤다가 일어나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손에 든 등롱을 내게 내밀었다.

하얀 한지 위에, 곱게 피어있는 민들레.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하얀 눈밭 위에 황금빛 꽃잎을 유감없이 펼치며 피어있는 용감한 꽃님.

계절의 순환을 포기하고, 생과 생으로 이어가는 순리를 포기한 채, ‘불면증’을 이기지 못해 ‘영원’의 시간을 선택한 모순적이고 무모한 꽃님이기도 하고.

“우리 집에 등롱이 몇 개인데 네가 알고 말고야. 어서 저기에 가져다 놔.”

“한겨울에 웬 민들레예요? 매화나 동백이라면 모르겠지만.”

투덜거리는 비예 놈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듯 투덜거리는 게 조금 귀엽구나.

“뭐 어때. 세상에는 그리 무모하고 장렬한 이도 있기 마련이잖아.”

한겨울에 피는 민들레.

여기 기문향이 아니고는 절대로 볼 수 없지.

안 된다고 서러워 하지 말고 꽃잎을 피워도 돼. 여기 기문향에서는, 네가 원하는 대로 꽃잎을 벌려 해님과 마주하고 바람과 춤을 추며 세상을 볼 수 있을 거다.

차가운 눈밭에 묻혀있다고 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이제 잠들어야 할 시간에 잠을 못 자는 불면증은 없어진 거다.

…그렇지?

 

 

 

대신, 잠들어야 할 시간이 사라져버렸으니

영원히 잠들 수도 없게 되어버렸지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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