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하얗다. 분명히 슈퍼에 가서 뭘 좀 사다 오는 길이였다는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로는 어째 떠오르는 게 없다. 밤공기가 찬 까닭인지 나쁜 일이라도 날 것처럼 등골이 오싹했고,

그다음엔… 눈을 떴는데 제 앞이 온통 하얬다. 귀찮아서 몇 끼 안 챙겨 먹었다고 사람이 이렇게 픽픽 쓰러지구 그러나. 천장이 하얀 동네 병원이길 바라며 몸을 일으키는데 병원일 것 치곤 바닥이 딱딱했다. 다급하게 일어서긴 했는데 뭘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주변을 둘러봐도 점선면 조차 없이 민둥한 공간이었다. 제가 짚고 선 바닥이 진짜 바닥인지, 어디까지가 이 공간의 끝이며 천장은 어디까지인지 확신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냥 무의 공간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얗기만 했다.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윤기는 초조해졌다. 보기에 나쁜 습관이라 고치려고 손가락마다 약을 덕지덕지 바르던 노력이 무색하게 윤기는 손을 잘근잘근 씹었다. 제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아서 자꾸만 몸을 떨었다. 아, 그럼 꿈이다. 꿈. 윤기는 자꾸만 떠오르는 무서운 성격을 떨쳐내려 꿈에서 깨기 위한 방법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분명 꿈에서 뒤지면 다시 살아난다고 했다. 어떻게든 뒤져야겠다. 손으로 목을 조르려던 찰나에 시야 앞으로 짚을 엮어 만든 밧줄 하나가 슬슬 내려왔다. 엄마, 이게 뭐야! 질문에 답이라도 하듯 남자 하나가 곧 윤기의 곁으로 가뿐히 착지했다.


“성함이 민윤기. 맞죠?”

“…왜 밧줄을 타고 다니세요?”


그 남자는 이 더운 날씨에 검은 목폴라를 입고 있었다. 저 사람도 나처럼 어딘가 미친 구석이 있는 게 분명했다. 젊은 나이에 안타깝다.


“졸라 구식이죠? 제가 아직 짬밥이 안돼서 그래요.”

“…저, 여기가 어딘데요?”

“아이구야, 집 앞까지 와서 봉변을… 쯧.”


고작 중고딩 정도 되어 보이는 게 사람 말을 씹어댔다. 남자는 제 휴대폰에 시선을 쳐박을 뿐 윤기에게는 눈길을 한 번도 주지 않았다. 윤기는 계속 바쁘게 위아래로 움직이는 남자의 엄지손가락을 노려보았다. 유독 커다랗고 까만 눈동자에 휴대폰 화면이 반사되어 여러 빛을 내고 있었다. 그제야 깨달은 사실인데, 유일하게 남자만이 채도를 갖고 있었다. 그를 제외한 모든 공간을 포함한 윤기조차도 흑백이었다. 갑자기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나쁜 예감이 단지 예감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안타깝게 되셨어요.”

“저기, 사람 얼굴을 좀 보면서 얘기해 주시겠어요?”

“제가 맘이 약해서. 이거 아저씨 얘기에요.”

“…나?”

“그래요. 민윤기 님, 오후 9시 32분경, 급작스런 강도의 공격에 의해 후두부를 맞고 넘어지면서 난간에 머리를 부딪쳐 의식을 잃으셨습니다. 회복할 가능성은 20%로 아주 미미하구요.”


뭐? 갑자기 그 아이가 커다랗게 느껴졌다. 온통 까만 옷을 입은 이유를 알 것도 같았고, 머리가 아득한 게 곧 자신이 쓰러질 것 같았다. 휴대폰 화면을 이리저리 누르던 아이가 마저 입을 뗐다. 살아 전 집필하셨던 드라마 대본이 많이 히트를 쳤네요. 답지 않게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줬어요. 이거 좋은 부분이네요. 체크 해 둡시다. 오, 할머니네 슈퍼에서 라면 훔쳐 먹고 돈을 세배로 돌려 드렸군요. 윤기는 여전히 손을 물어뜯고만 있었다. 제 인생사를 줄줄 늘어놓는 남자의 앞에서, 지금 거짓말 하는 거 아니죠? 윤기가 한참을 망설이다 꺼낸 말이 확인사살 역할을 했다.


“아저씨는 그럼 여기가 정상적인 공간으로 보여요?”


남자가 픽 웃었다. 아저씨는 벌 받을 일은 안 했어요. 나락으로 안 가셔도 돼요.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착하게 살아서 다행이에요. 쓸데없는 연애도 안 하셨구, 법도 안 어기셨어요. 그런 말을 하는 남자의 표정은 하나의 미동 없이 잔잔했다.

아무리 하늘에서 넘기는 내 자료라도 빈틈이 있긴 한가보다. 미처 파악하지 못하는 마음의 사각지대라도 있는 모양이지. 윤기가 그토록 바르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제가 조금이라도 더 어렸던 시절에 제 곁을 지켜줬었던 누군가의 영향이 컸음을 모르는 걸 보면 말이다. 물론 그 아이가 스타가 되어버리는 바람에 지금은 스크린 너머로밖에 볼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렸지만.


“그게 비록 지민군 덕분이긴 해도… 어휴.”

그래, 하느님은 모든 걸 다 아신다더니, 씨발. 윤기는 고개를 돌려 작게 욕했다. 남자가 쪽팔림에 시선을 노골적으로 피하는 윤기의 손을 꼭 잡았다.


“아무튼 앞으로 49일 남았어요. 인간으로서의 아저씨 뒷수습도 곧 시작 될 거니까. 그 동안 미련이고 뭐고 다 속세에 내려놓고 깔끔한 맘으로 오셔야 해요.”





윤기는 일단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갈 곳 잃은 영혼이 되었다지만 아직 인간으로서의 생활이 더 익숙했기 때문에 귀소본능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제 육신은 병원으로 이송되고 있었으니 따라가 봤자 험한 꼴을 당하는 제 육신을 목격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 건 보고 싶지 않았다. 윤기는 어차피 죽었으니 육신에는 미련을 두지 않기로 했다.


아파트 도착. 그곳에서 시간이 얼마나 지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도착했을 땐 이미 노란 폴리스 테이프로 온통 입구가 봉쇄당한 후였다. 쓰러진 제 모양대로 하얀 스프레이가 칠해져 있었다. 아 씨발, 뭐 쓰러져도 저렇게 꼴뚜기처럼 쓰러졌대. 윤기는 혀를 끌끌 차며 제 집으로 향했다. 현관에 묻은 피가 제 것이 아닌 것 같은데 제 것이란다. 윤기는 머리를 한번 헤집었다. 뽀송했다. 다행이다. 뭐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책상 위에는 꺼지지 못한 노트북이 열을 잔뜩 내며 어두운 방구석을 밝히고 있었다. 새로 맡은 드라마 각본을 쓰던 중이었다. 간만에 맡은 주말극이었는데. 윤기는 그게 못내 아쉬웠다. 제 완벽한 커리어의 종점을 찍을 기회였는데.


그러다가 침대 밑에다 야한 잡지를 꽤 쌓아뒀다는 게 떠올랐다. 하필 하드한 것 위주로 모아둔 것이었다. 저는 이미 없는 존재라 잡지들이 손에 잡히지 않고, 제 손이 공기라도 되는 것 마냥 부드럽게 통과되었다. 윤기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죽을 줄 알았으면 잡지에다 불이라도 질러 버릴 것을. 쪽팔리게 이게 무슨 꼴이람. 아, 덤으로 피디새끼 면상에 엿이라도 날릴 것을. 그렇게 든 후회 하나가 두 개가 되고, 세 개가 되어 꼬리 물기를 시작했던 탓에 윤기는 며칠을 끙끙 앓을 수밖에 없었다. 힘들었다. 자신의 죽음에 대한, 엄연한 현실 부정이었다.


윤기는 그렇게 제집이 정리되어 나가고 가구들마저 뽑혀나가는 꼴을 보면서, 방구석에 앉아 조용히 손을 뜯었다. 피도 안 났다. 멍하니 제 흔적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걸 보다 꼬박 4일이 흘렀다. 윤기는 더 이상 제 집이 제 집이 아니게 된 탓에 거리를 방황해야만 했다. 제가 젊음을 만끽하던 시절에 쏘다녔던 동성로 거리. 대형 스크린 안으로 공익광고 같은 것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별일 없이. 윤기 또한 그렇게 별일 없이 살아갈 줄만 알았다. 날이 더워 아무도 앉은 이 없는 벤치에 퍼질러져 앉았다. 더위 또한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아스팔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기에 덥구나, 짐작할 뿐이었다.

갑자기 누군가 곁에 앉는 기척이 났다.


“뭐해요, 아까운 시간이 이렇게 흘러가는데.”

“나, 뭐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저씨 하고 싶었던 걸 하라니깐.”


그런데, 순간, 정국 뒤의 스크린으로 계속 흘러나오던 밋밋한 공익광고 대신에 뭔가 좀 더 컬러풀하고 톡톡 튀는 영상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분명 공익광고는 아니었다. 아마도 대학 축제 광고나 뭐 그런 것들. 윤기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곳을 향했다.


-지민아, 4년을 함께해줘서 고마워.


화면으로 검은색, 갈색, 빨간색, 주황색, 그리고 다시 검은색의 머리를 한 동일인물이 나풀대며 춤을 추고 노래했다. 곧 금색, 분홍색에 이어 카라멜색의 머리를 한 동일인물이 헤실헤실 웃으며 화면을 가득 채우다 사라졌다. 그리고 분홍빛의 문구가 파도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지민아, 너를 응원해. 벚꽃보다 아름다운 지민이에게. 메마른 윤기의 눈동자에 가득 잠겼다, 사라지는 사람. 다들 예상했겠지만, 윤기가 좋아하다 못해 사랑하는 가수 박지민이었다. 데뷔 4주년… 윤기는 순간 정신이 번뜩 들었다.


“아저씨 같은 사람 많아요. 결국 흐지부지하다 결국 기억청소 당하러 끌려가죠.”

“…….”

“청소가 뭔지 알고나 있어요? 불순한 감정을 억지로 없애는 거라구요.”

“……결정했어.”

“끓는 가마솥에 300명을 넣고 삶는다니까요? 아저씨?”

“나 지민이 보러 갈래.”

“예?”


지금 저 사람이요? 연예인 아니에요? 뭐 아는 사람이에요? 아니잖아요? 계속 졸졸 쫓아오는 남자를 두고 윤기는 엿을 날렸다. 알거든. 나 쟤 안다고. 아무리 저승사자라지만 이미 뒤졌는데 저한테 해코지라도 하겠나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직진하던 윤기는 자신도 모르게 빨간불에 멈춰 섰다. 남자가 그런 윤기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응? 왜 안 가요? 아. 그제서야 윤기는 차가 쌩쌩 달리는 차도 한복판을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사람인 척을 한 것 같아 민망해졌다. 차들은 유유히 걷는 둘을 바람처럼 통과해 지나갔다. 기분이 이상했다. 남자가 저의 발을 맞춰 나란히 걷고 있었다.

윤기는 보폭이 커졌다. 목표가 생기자 의욕이 돌았던 탓이었다.


“잠깐, 내가 그쪽을 뭐라고 불러야 하지?”

“뭐, 저승사자라고 해주세요.”

“그래도 이름이 있을 거 아녜요.”


정국이 잠시 주춤하더니 입을 열었다.


“전정국이요.”

그나저나 이름은 왜 묻죠? 정국의 말을 무시한 채로 윤기가 말을 꺼냈다.

“정국 씨, 내가 서울을 꼭 가야겠는데.”

“예? 저는 경상북도 담당인데요?”


그럼, 이 몸으로 서울 가는 방법만 좀 알려줘요, 예? 윤기의 말에 정국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픽픽 웃었다. 이런 귀신은 살다 살다 처음 봅니다. 이 아저씨가 진짜 같은 거 달린 남자 아이돌 보러 서울상경을 하시는군요. 윤기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무임승차로 알아서 이것저것 타고 가세요. 귀신이라도 그건 가능하니까. 윤기가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그렇다면 일이 쉬워지지. 마지막으로 정국이 주의하듯 윤기의 팔을 붙들고 당부했다.


“그리고 거기서 무슨 일 생겨도 전 책임 못 집니다? 제 구역이 아니니까요. 알겠죠?”

“정국씨, 당신은 꼭 천국 갈 거야. 고마워요.”

“다 뒤진 판국에 무슨 천국….”

“그리고 우리 전엔 깊은 관계였거든요.”

“예? 그런 사람이 왜 아저씨랑…”


마지막으로 정국에게 엿을 날리고, 윤기는 기차역으로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살아생전에 가장 좋아하던 사람을 만나기 위해.





인터네셔널 케이팝 선샤인이자 이 시대의 핫가이 섹스심벌이자 잘 나가는 솔로가수 박지민은 막 자신의 보금자리로 돌아온 참이었다. 최근 4주년을 맞아 특별 콘서트를 열었고 그것이 또 이슈가 되어 인터뷰 스케줄이 주렁주렁 달라붙었다. 그 콘서트야 데뷔 이후로부터 매년 하는 건데 왜 매년 새롭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되었다. 아무리 무대 서는 게 좋다지만 너무 피곤하니 무뎌지는 게 사실이라, 지민은 쉬고만 싶었다.

한 두어달 후엔 미니앨범이 나오기로 되어 있어서, 지금부터 좋은 곡을 걸러내고 가사도 몇 개 쓰고 작곡도 해야 했다. 아는 형 덕분에 작곡이나 작사에도 흥미를 붙이게 되었다. 결론적으론 골치 아픈 일이 되었지만. 이번엔 제발 멜로디 한마디라도 쓰자. 피곤한 와중에도 내내 앨범 생각밖에 없는 걸 보아하니 정말로 타고난 가수라는 말이 맞는 듯 했다. 너무 대책 없이 붙여주는 ‘한국의 마이클잭슨. 박지민’ 따위의 수식어는 짜증났지만 이 시대에 이만큼 멀티가 되는 가수는 한국에 없기도 했다. 지민 또한 그것을 파악하고 있어서 매사에 영민하게 움직이는 편이었다. 그것이 팬을 잃지 않는 비법이었고.


그러니 곧 연습실로 가야 했다. 지민은 이미 한번 땀에 절은 몸을 어찌해야겠다 싶어 훌렁 윗옷을 벗어냈다. 지구가 훼까닥 돌아버린 것 같은 더위였다. 그 더위 한복판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제가 대견하게 느껴졌다. 그러니깐, 오늘은 특별하게 입욕제도 쓰구 밥도 두 그릇 먹자. 지민이 음음, 노래를 흥얼대며 수도꼭지를 틀려고 손을 가져다 대는 순간,


“…….”


질척하게 묻어나는 시선을 느꼈다. 손을 거두고 찬찬히 고개만 빼 주변을 둘러보는데, 아무리 봐도 방에는 옷을 반쯤 발가벗은 저 뿐이었고 당연히 남이 들어온 흔적 따위도 없었다. 괜히 거울로 건너편 방을 주시하던 지민은 괜히 오바하는 것 같은 제가 민망해 억지로 하하! 하고 웃었다. 하핫! 하하! 스타병에 걸렸나 보다! 이런 걸 파파라치 병이라고 하지! 혼자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에 피실피실 웃으며 욕조에 물을 받아둔 지민은 천천히 모든 옷을 탈의했다. 그러던 순간에,


“와악!!! 왁, 와악!!!”


왠 웃는 듯한 사람 얼굴이 욕실 끄트머리에서 잠깐 스쳐나가는 것이 아닌가. 스쳐 지나가듯 본 것이었지만 명백히 사람 얼굴이었다. 지민은 놀라 욕조 속으로 넘어졌다. 쿠당탕! 다행히 몸이 유연했던 덕분에 다치지 않고 부드럽게 물속으로 입수한 지민은 놀라 몸을 벌벌 떨었다.


“어, 엄마아….”


이것으로 추측은 확신이 되었다. 최근의 제가 이상했다. 자꾸 남의 인기척을 느끼고, 웃는 얼굴이 보이는 게… 분명 보통 사람이 겪을 일은 아니지 않은가. 일단 씻고, 씨, 씻고…….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지민은 몸을 움직이려 애썼으나 몸이 움직일 리 없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쿵쿵대며 더욱 커질 뿐이었다. 지금 연습이고 나발이고 그런 걸 할 때가 아닌 것 같았다. 지민은 씻다 말고 겨우 가운을 걸친 채 휴대폰을 들었다. 형, 매니저 형, 나 지금 심각해애. 지민의 목소리가 염소처럼 애처롭게 떨렸다.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요즘 바쁘신데 스트레스를 많이 받거나 하시진 않으세요?”

“아니, 바쁘긴 하고, 그랬죠. 잠도 못 자고요. 근데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거든요…….”

“스트레스가 농축된 결과에요. 조금 쉬면서 안정을 취하는 게 어떨까요?”


정신과도 가고 상담도 받고 닥치는 대로 뭐든 다 했는데도 나아지는 건 없지, 의사들은 다 같은 말만 하지. 게다가 최근 지민이 병원에 자주 들락댄다는 목격담까지 인터넷에 유행처럼 퍼지는 바람에 지민은 자신이 벼랑 끝으로 몰린 것만 같았다. 연예인은 병원 가는 것도 소문이 나야 해? 이상한 것은 제가 아니고 그들이었는데……. 소문은 퍼지고 팬들의 걱정은 넘쳤다. 지민의 충격적인 근황이 기사화되기 시작할 무렵, 보다 못한 소속사는 지민이 병원에 가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꼼짝없이 집 안에 갇힌 지민은 애써 태연한 척하려 했다. 그러나 밥을 먹을 때도, 씻을 때도, 티비를 볼 때도 아른거리는 웃는 얼굴에 발끝까지 소름이 돋는 하루하루를 버텨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괜찮은 척 해야 했다. 집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 때는 두 손을 맞잡고 살려주세요, 기도하며 잠들었다.


지민은 하루하루 매일 비슷한 스케줄로 쳇바퀴를 달리고 있었다. 다만 그런 일상 속에서도 달라지는 게 있다면 그 얼굴이 점점 선명해지고 있다는 점. 처음에는 대충 눈 입 정도만 보여서 웃고 있구나, 싶은 느낌만 주었다면 이제는 눈 코 입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한쪽 눈에만 쌍커풀이 살짝 져 있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 같고, 치열이 곱고, 웃을 때마다 입안 양옆으로 검게 그늘이 졌다. 귀신은 익숙한 누군가의 얼굴로 나타난다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었다. 어디선가 본 것처럼 익숙한 얼굴이었다. 잠깐만. 이러다가 저 이상한 존재가 모습을 다 드러내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이대로 죽는 건가? 집에다 십자가를 둬야 하나?! 지민은 그 시점부터 지식인에다 질문을 하나씩 올리기 시작했다.



Q. 저 집에서 자꾸 귀신이 보이는대ㅜㅠㅜㅠ 저를 보고 웃고있어요 이거 머죠?? 진짜 무서워죽겟어ㅛ 살려주세요ㅜㅠㅠ어카죠???

A. 귀신 중에서 무표정인 귀신 담으로 화난 귀신 이구여 그담으로 웃는 귀신임여....... 얘가 젤 쎄고 젤 무섭습니다. 님 빨리 조취를 취하시길......... 내공얌얌

지민은 그날 밤 온 집안의 형광등을 모두 켜둔 채 잠에 들었다.




윤기는 불행했다.

이제 공기가 많이 차진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아침저녁으로 긴 옷을 걸치기 시작한 것을 보면. 그러나 윤기는 여전히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허기도 추위도 촉감도 차단된 채 눈을 뜨고 있으려니 그것도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마치 좀비라도 된 것 같았다. 그러나 인간 시절 느꼈던 따스함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이 딱 하나 있었다. 그건, 윤기의 사랑 지민을 몰래 훔쳐보는 것이었다. 신사적으로 아파트 앞에 앉아 지민을 기다리던 윤기는 이래서는 죽기 전까지 나의 더럽고 추접한 욕망을 떨쳐버리지 못하겠다는 생각에 과감히 집 안으로 침투하기로 했다. 어차피 사람이라면 저를 보지 못할테니 상관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웬걸, 첫날부터 지민이 다짜고짜 옷을 벗어 던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 지민아!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쾅.

지민은 차갑게 욕실 문을 닫아버렸다. 그렇다. 자신은 지민에게 없는 존재임을 잊고 만 것이다. 윤기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슴이 아파옴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도, 하나의 팬으로서 자신을 각인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과거에 스쳐 지났던 아는 형으로 끝나고 싶지 않았단 말이다. 새우젓 안의 수많은 새우 중에, 한 마리의 새끼 쭈꾸미라도 되고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방법이 있었던 건 아니라 윤기는 그냥 잠자코 있었다. 원체 무딘 인간인 윤기는 점차 그 생활에 만족하기 시작했다. 밥도 이것저것 오물오물 잘 씹어 먹고, 팬들을 위한 셀카도 찍고, 영화도 잘 골라보는 지민이 그렇게 대견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원맨쇼를 감상하던 14일째, 갑자기 지민이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닌가. 원인이 저 때문이라는 것도 모른 채 윤기는 방 안에 강도라도 들었나 보다, 하고, 어떡하나 발을 동동 구르다 거실로 우다다 달려가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물론 집어 들지 못하고 가볍게 통과되었지만.


그리고 꼬박 이틀을 그렇게 보내고서야 지민에게 제가 보인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왜냐하면 지민이 내내 지식인을 붙들고 살았기 때문이다. 지민이 마침내 노트북을 내려놓고 잠들자 윤기는 아빠 다리를 하고 앉아 화면을 구경했다. 뭐? 귀신? 이게 지금 누굴 보고 귀신이래? 씨발 뭐 웃는 귀신이 젤 쎄다고? 노트북 들고 있는 귀신이 젤 쎄 미친놈들아. 생전에 드라마 작가로서 글빨 하난 화려하게 날렸던 윤기는 근질거리는 손가락을 주체할 수 없어 노트북에다 대고 타자 치는 척을 했다. 타닥타닥. 손가락을 오랜만에 움직였더니 좀 살 것 같았다. 이제 됐어….

다시 윤기는 구석탱이로 가 몸을 웅크렸다. 여기가 윤기의 지정석이었다. 지민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그대로 시간에 몸을 맡겼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날 일을 예상하지 못한 채로.


“형 진짜, 심각하다니까요!! 무서워 죽을 것 같아 진짜!!”


고함 소리에 놀라 눈을 떴더니 지민이 노트북을 제 발 앞에다 둔 채로 통화하고 있었다. 뒤통수에 까치집을 커다랗게 지어놓은 채로. 헐. 너 지금 뭐가 보이는데. 나 혹시 지금 지민이 눈에 보이는 건가. 설레는 맘 반, 두려운 맘 반으로 윤기는 천천히 일어섰다. 지민이 뒤로 돌아 윤기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기다렸던 순간인 만큼, 윤기는 긴장해서 걸음을 떼지 못하고 굳었다. 나한테 온다. 박지민이, 나한테,


“아니 난 분명 키보드로 질문만 남겼는데, 댓글로 욕이 막 써져 있었다구요, 세진이 형. 내가 장난하는 것 같아요?”


아. 지민이 곧 윤기를 통과해 노트북으로 다가가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윤기는 비참했다. 이래선 도저히 미련이고 나발이고 풀릴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 애초에 불가능한 사안이었다. 이딴 몸으로 도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물건 하나 집지 못하는 몸으로 어떤 미련을 풀 수 있단 말이냐고. 마음을 전할 방법이 더 없을까? 절에라도 들어가서 108배라도 하다 돌아가야 할까?


윤기는 울적한 마음을 달래러 옥상으로 올라갔다. 떨어지더라도 죽지는 못하겠지, 이미 한번 죽었으니까… 죽었는데 죽지도 못하는 제가 한심했다. 이런 20일을 버틸 바엔 빨리 정국에게 돌아가는 편이 나을 것 같기도 했다.

윤기는 밤이 지고 달이 뜨고 별이 반짝일 때까지도 내내 옥상에 앉아 있었다. 진정으로 지민이 행복하려면 이렇게 내가 사라져야 하는구나, 나는 그 애 인생에 걸림돌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버틸 수 없이 외로워졌다. 정국이 보고 싶기도 했다. 아, 생각해보니 내가 온 동안 지민이 많이 불행해진 탓에 그곳으로 돌아가면 오히려 벌을 받으라고 할 것 같기도 했다. 윤기는 왠지 눈물이 나는 것도 같았다. 정국 말고는 저를 알아주는 존재가 이 세상엔 없었다.


순간, 바람이 불었다.


아주 서늘한 바람이…. 윤기의 모든 신경세포가 갑자기 각성이라도 한 것처럼 부글부글 끓다가 한순간 차갑게 식었다. 바람이 찼기 때문이었다. 윤기는 자연스럽게 체크남방을 걸친 제 팔을 끌어안았다. 오늘의 추운 밤공기는 유독 생생하게 와 닿는 것 같아.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이 더욱 윤기를 춥게 하는 것 같았다. 팔에 오소소 소름마저 돋았다. 남방 끝자락이 윤기의 머리칼 몇 가닥과 함께 바람에 힘없이 펄럭거렸다.


그리고, 난데없이 옥상 문이 열렸다.

옥상과는 어울리지 않게도 노트북을 우스꽝스럽게 껴안은 채 등장한 카라멜색 머리의 남자. 그리고 윤기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틀었고 그를 발견했다. 지민의 눈동자가 분명히 윤기를 응시하고 있었다. 당황한 윤기가 급히 일어나려다 발을 헛디뎌 엉덩이를 바닥에 찧었는데, 그게 너무 아파서 눈물이 찔끔 고였다.


“…형, 나 보러 온 거예요?”

아니, 사실은, 너무 좋아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어.”


형 아파요? 춥죠? 윤기가 고개를 끄덕이다 멈칫했다. 내가 왜 지금 아프고, 춥고, 온기가 느껴지고 막 그렇담…? 생각이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지민이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럼요, 형, 내가 보고 싶었어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윤기는 단박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요……. 형, 나 보러 와줘서 너무 고마워요.

이것이 잠깐의 기적이든, 아니면 뭐 죽은 줄 알았던 육신이 깨어났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딱 죽을 만큼 행복했기 때문이었다. 조심스레 걸어와 안긴 지민이 쑥, 통과되지 않고 품에 쏙 들어와 안겼다. 햇빛이 걸어와 안긴 것처럼 너무나도 따듯했다. 윤기는 지금이 영원했으면 하고 기도했다.


나, 생전生前에 너 좋아했었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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