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다시, 또...







끝이라는 것이 시작보다 더 쉬웠더라면 나는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멋대로 시작하게 해놓고, 멋대로 끝내버린 내 과거의 사랑은 자금, 여전히 가슴 속 깊은 곳에 묻혀있다.


날짜로는 가을이지만 아직 여름이 조금 남아있는 날이었다. 갑자기 이어진 강행군에 그날따라 조금 지쳐 있었고, 챙겨온 생수마저 다 마신 바람에 타는듯한 갈증과 싸우는 중이었다. 입안에는 찝찌름한 수영장 물이 남아있어 연신 침을 뱉었지만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어이, 린.”



내가 돌아보기 무섭게 날아오는 생수 한 병에 얼른 손으로 얼굴을 막았다. 알맞게 쥐어진 병 안에는 차가운 물이 가득했고 난 얼른 뚜껑을 열어 입 안을 헹궜다.



“뭐하는 짓이야, 소스케. 다칠 뻔했다고.”



“안 다쳤잖아?”



져지 사이로 보이는 어깨 테이핑이 신경 쓰였다. 내 시선을 눈치챈 소스케는 져지 깃을 쪽으로 바짝 당겨 지퍼를 끝까지 채웠다. 이 더운 날 뭐하는 거야.



“다쳤어?”



“아아, 옷 갈아입다가 케비넷에 긁혔어.”



바지를 갈아입으려고 허릴 숙였다가 일어나면서 긁힌 거라 상처 부위가 목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부분이었다. 소스케는 내 어깨를 붙잡더니 티셔츠 목 부분을 살짝 당겼다. 티셔츠 사이로 길게 나 있는 붉은 선을 따라 검지로 훑던 그는 마치 자기가 긁힌 것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어이, 린.”



“뭐야.”



“너, 지금 심장 소리 엄청난 거 알아?”



피식 웃는 그의 얼굴에 나도 모르게 온몸의 피가 얼굴로 쏠리는 것을 느꼈다. 모른 척하고 있었는데 소스케의 한마디에 전신이 심장이라도 된 것처럼 쿵쾅쿵쾅 뛰고 있었다. 지금 이거, 맞닿아 있는 소스케의 손가락을 통해 전해지는 걸까?



“린, 심장 소리 엄청나다고?”



“시, 시끄러워! 알고 있으니까.”



“아니, 모르잖아.”



갑자기 내 양쪽 어깨를 잡고 밀치는 소스케의 힘에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그대로 벽에 등을 박았다. 얇은 티셔츠에 차가운 건물 벽이 닿아 시원했지만 지금 시원함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몸은 떨어져 있지만 얼굴은 코끝이 닿을 듯 말 듯 할 정도로 가까워 숨도 함부로 내쉬지 못했다.



“너 말고, 내 심장 소리도 엄청나단 말이었어.”



“으읏-”



“있지, 린. 내가 이 타이밍에서 너에게 뭐라고 할 것 같아?”



“시, 시끄러-”



“좋아해.”



초록색이던 은행잎이 끝에서부터 서서히 노란색으로 변하던 때, 나는 소스케에게 고백을 받았고, 우리는 단순히 ‘친구’라는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헤어지자.”



그의 이별 통보는 덤덤했다. 너무 덤덤해 그것이 이별 통보라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 시간이 걸렸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대충 다른 말로 돌렸다.



“오늘 모모 녀석, 버터가 좀 늘었던데-”



“마츠오카.”



그에게 마지막으로 성으로 불린 게 언제인지 모를 정도로 오랫동안 이름으로 불렸다.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있고, 싸워도 늘 이름으로 불러주던 녀석이었는데, 그런 소스케가 나를 성으로 불렀다. 고작 성으로 불렸다고 몰려오는 섭섭함과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도 멀리 떨어진 것처럼 거리감이 느껴졌다.



“하하, 성은 오랜만이네. 나도 성으로 불러볼까? 야마-”



“우리 헤어지자고. 왜 자꾸 말을 돌려.”



“...그럼,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데?”



“.......”



“헤어지면, 뭐 달라져? 사실 우리, 말만 사귀는 거지 뭐 없었잖아, 안 그래?”



“.......”



“하하, 뭐 예전처럼 친구로 지내면 되지.”



좀 어색하겠지만.



“아니, 난 친구로도 지낼 생각 없어.”



“.......”



“정확하게는 친구로도 못 지내겠다. 그러니까, 여기까지야.”



“하- 어이, 소스케.”



“왜.”



“너 말이야, 진짜 나쁜 새끼야.”



“-마음대로 생각해. 네가 편하다면 나쁜 새끼로 해줄게.”



먼저 간다, 는 말을 남기고 그는 기숙사로 돌아갔다. 주머니에 넣어둔 손을 움켜쥐었다. 손안에 있던 종이가 본래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구겨졌다. 학기 마지막 날, 내일부터 방학이었고, 동계 훈련과 합숙에 들어가기 전 주어진 유일한 방학이었다. 늘 같이 있지만 그래도 학교 아니면 부 활동이 전부라 다른 곳이라도 놀러 가자고 제안하려 했었다. 어제 휴대폰으로 이것저것 찾아본 관광지나 유원지, 그리고 혹시 몰라서 야구, 수영, 배구 경기까지 찾아 적어뒀었다. 이제 쓸모없어진 거지만.

이제 숨을 내쉬면 뿌연 입김이 입술에 걸릴 정도로 추워졌고, 노란 은행잎으로 가득하던 나무도 헐벗은 겨울이 되었다. 태양이 눈이 부시게 높이 떠 있던 여름날 시작했던 우리의 관계는 두 계절을 온전히 넘기질 못했다.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구겨진 종이를 던졌다. 원점은커녕 그 이하로 추락해버린 우리 사이처럼 구겨진 종이는 쓰레기통 아래로,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어깨를 돌리며 들어온 수영장엔 아이와 모모가 이미 몸을 풀고 기다리고 있었다.



“선배, 그거 진짜입니까?”



“뭘.”



“소스케 선배님, 병원에 입원 하신 거요! 잠깐만 가신 줄 알았는데 방학 내내 계신다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데요. 설마 어깨 더 안 좋아지신 거 아니겠죠?”



손에 들고 있던 물안경을 바닥에 내던지고 밖으로 뛰어나왔다. 짐이 가득한 가방을 어깨에 메고 가는 소스케를 발견하자마자 다리에 더욱 힘을 실었다.



“너, 헉, 도대체, 허억, 뭐야...”



“뭘.”



“병원 가면 병원 간다고 말하면 되잖아!”



“...말하면? 말하면 뭐.”



“...뭐?”



“보나 마나 모모나 아이에게 들었겠지. 할 말 있으면 해. 1분 정도는 괜찮으니까.”



“끝까지... 끝까지 기다리라는 말은 안 하네. 넌, 역시 나쁜 새끼야.”



변함없이 덤덤한 얼굴에 나만 이렇게 미련이 남았구나, 나만 널 붙잡고 싶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보처럼 나만 너에게-

울컥 차오르는 눈물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고개를 숙였다. 소스케의 손이 올라오다가 다시 내려갔다. 이래도 붙잡지 않는구나. 이번엔 내가 먼저 자리를 뜨고 싶었다. 계속 그 자리에 서 있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고, 소스케를 더 붙잡고 싶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서로의 어깨가 부딪혔고, 소스케를 지나칠 때 나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잘 가라.”



잘 가라고 인사하니까 붙잡는 건 무슨 매너야?



“기다려.”



“싫어.”



“기다려.”



“웃기지도 않는 소리 그만해.”



소스케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고 이리저리 비틀었다. 다행히 손쉽게 손은 빠졌고, 나는 그를 남겨두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기다리라는 말에 바보처럼 순순히 기다릴 이유, 나에겐 없었다.







“선배, 오늘 프리 최고였습니다!”



“그래, 모모 너도 실력 많이 늘었던데.”



“고, 고우 상에게 빨리 보여주고 싶어요! 고우 상은 언제쯤 오시나요?”



“시끄러워. 남의 동생한테 눈독 들이지 말고 연습이나 더-”



“어? 소스케 선배? 린 선배, 저기 소스케 선배입니다!”



모모의 말대로 기숙사 건물 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사람은 소스케였다. 일일이 허리굽혀 반갑게 인사하는 후배들과 다르게 나는 못 본 척하고 그를 지나쳐 기숙사로 들어갔다. 아니, 들어가던 중 소스케에게 붙잡혔다.



“기다려.”



“놔.”



“다들 오랜만이라 반가운데 린하고 얘기할 게 있어서. 다들 내일 수영장에서 보자.”



“네!”



싫다는 내 외침에도 소스케는 애들을 헤지고 기숙사 뒤뜰로 나를 끌고 가더니 도망치치 못하게 막다른 골목으로 날 몰아넣었다. 왼쪽으로 빠져 나가려 하면 소스케도 왼쪽으로 움직이고, 오른쪽으로 빠져 나가려 하면 또 오른쪽으로 따라 움직였다.



“비켜.”



“나 봐, 린.”



“비키라고 했어.”



“왜 피해?”



“안 피했어.”



“거짓말.”



“안 피했다고.”



“나 봤잖아. 나랑 눈 마주쳤잖아.”



“그래서?”



“기다려 달라 했잖아. 나 돌아왔는데 아무 말도 안 해줄 거야?”



“기다린다고 말 안 했어. 비켜, 들어갈 거니까.”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앞에 버티고 선 소스케의 어깨를 밀었다. 그의 옆을 지나가려는데 갑자기 내가 민 어깨를 붙잡더니 그 자리에 주저앉는 모습에 놀라 얼른 다시 그에게 달려갔다.



“뭐야, 왜 그래? 어깨, 아직도 아픈 거냐?”



“린...”



“병원 간다며! 제대로 고치고 돌아온 거 아니었어? 야, 소스케!”



“미안.”



남은 걱정하고 있는데 녀석은 날 끌어안고 미안하다는 말만 했다. 아직 상황 파악이 제대로 안 된 나는 눈만 깜빡이며 그의 뒷말을 기다렸다.



“어깬 거의 다 나았어. 심각하게 무리하지 않는 이상 이제 병원 갈 일 없어.”



“...소스케...”



“미안, 린. 기다리게 해서.”



“나쁜, 새끼...”



“응. 그것도 미안.”


“나쁜... 새끼...”



“응. 전부 미안.”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마치 물속에 있는 것처럼 시야가 흐릿하고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오랜만에 듣는 소스케의 목소리, 오랜만에 느껴보는 소스케의 품.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린이 용서할 때까지 뭐든 다 할게. 미안, 내가 잘못했어.”



“...쉽게, 안 풀릴 거야.”



“각오하고 있어.”



“용서도 안 해줄 거야.”



“해줄 때까지 노력하면 되지.”



“...기다렸어.”



“다녀왔어, 린.”



바보처럼 네가 언제 돌아올까 틈만 나면 교문을 살피고, 혹시나 내가 부 활동 간 사이에 돌아오지 않았을까 싶어 괜히 비어있는 네 침대도 쓸어보고, 옷장도 열어봤다는 건 잠시만 비밀로 할게. 괘씸하지만, 돌아왔으니까 지금은 그걸로 됐어.







epi



“린,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유원지.”


“유원지? 수영 대결이 아니고?”


“하? 환자랑 무슨 대결이야. 됐거든?”


“하? 누가 환자래? 린쯤이야 거뜬히 이길 수 있거든?”


“그래? 그럼, 승부다!”



앞서 달려나가는 내 뒤를 바짝 따라온 소스케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데이트는 다음에. 린이 좋아할 만한 곳 찾아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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