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야 떨어지지 말거라 녹지 말거라.



ShE HAtEs IcAroS

: For all the wings that are melting slowly


w. Serinos



1

그날의 전투는 유독 길었다. 마지막 남은 오크까지 수로 분해되어 사라졌을 때서야 여섯 명의 빛의 전사에게 휴식이 주어졌다. 잔뜩 성이 난 얼굴로 나무 그루터기에 주저앉으며, 리엔님이 툴툴거렸던가. 아, 진짜 힘들어서서 못 해먹겠네. 우리 내일도 이런 식이야? 묻는 말에 미안하다는 듯이 웃으며 당신이 말하기를. 어쩔 수 없어. 마지막 남은 빛의 전사를 찾을 때까지는 조금 무리하는 한이 있더라도 서둘러야 하니까.

아카드와 자이나의 사이, 이미 마물들로 뒤덮인 숲 지역의 수색을 자처한 것은 당신이었고, 우리는 당신을 혼자 보낼 수 없기에 그 뒤를 따랐다. 전장에서 우리는 개별적인 무언가라기보단 하나의 유기체에 가까웠다. 당신이 간다면 우리가 따르는 것은 숨 쉬는 일만큼 당연했기에, 당신이 미안해하는 것 역시도 어찌보면 당연했다.

그러게 그냥 자이나에서 관광이나 하고 있으라니까, 리엔. 카림님의 말에 리엔님은 다시 투덜거리시고. 너네만 보내면 불안불안해서 이 누님이 편하게 발 뻗고 잘 수가 있어야지. 그리고 뭐라고 덧붙이셨더라. 따라와서 불평하는 게 차라리 마음 편하다구.

그래, 그리고 당신은 바로 피식 웃음을 흘리며 반박했었다. 누나는 무슨, 네가 여기서 정신연령 제일 어리거든? 거기에 카림님이 맞장구를 치시고. 맞아, 그건 아니다. 차라리 쿠푸가 누나라는 쪽이 낫겠어. 쿠푸님은 자기 이름이 불린 것에 잠시 귀를 쫑긋했다가 곧 관심을 잃고 풀잎으로 장난을 치는 일에 몰두하셨지.

쏟아지는 핀잔에 리엔님이 발끈하며 반박하고, 다시 반대쪽에서 되받아치는 과정이 몇 차례 반복. 그러다가 결국 전원이 웃음을 터뜨리며 일단락되는 것은 하나의 정형화된 일상이었다. 지극히 평화롭고 안온한 풍경.

언제까지 갈 것 같아? 

한때의 달콤함에 젖어 눅눅해질 틈도 없이 귓가에 바싹 대고 물어오는 목소리. 정신 사납게 낄낄대며 비꼬는 것을 무시했었다. 나와 운명을 같이 한다던 검의 부산물이 어쩌면 가장 명확한 나의 편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잔인한 현실로부터 눈을 감고 기만적인 달콤함을 삼켰다. 그래서 언제나처럼 얼굴의 반절을 가리는 스카프 뒤로 바싹 굳은 입꼬리를 숨겼었다.

날개야 떨어지지 말거라 녹지 말거라. 

속으로만 작게 읊조렸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저녁이나 먹자, 라고, 당신이 대충 상황을 정리하는 동안에 나의 의식 먼 곳에서는 나의 예정된 죽음을 알고 있었다. 당신은 꿈에도 몰랐을 사실이지만. 어쩌면 다행이라고도 생각한다. 알았다고 한들 무엇이 변했을까. 차라리 그때까지 당신이 몰랐던 편이 덜 비극적이다.


마물의 고기를 먹는 것에 익숙지 않은 이는 이제 없었으나, 방금 전까지 피에 흠뻑 젖어있었기에 아무도 육식을 바라지는 않았다. 아, 쿠푸님은 조금 예외셨을지도. 때로는 요정족 특유의 그 무덤덤함이 부러웠다. 그러나 아무리 긴 세월을 살더라도 소중한 사람의 죽음에까지 무뎌질 수는 없겠지. 적어도 나와 그를 뺀 나머지 사람들은 똑같은 비극을 겪지 않기를, 이런 날마다 고요히 소망했었다.

파크님이 식용 버섯 군락을 발견했다고 외치자 당신과 쿠푸님은 즉각 식량을 확보하는 데에 착수했었다. 나와 카림님은 불을 피우고 식사를 준비하느라 분주했고, 필요 이상의 말이 오가지 않는 그 편안한 침묵을 나는 썩 좋아했다.

카림님은 나에게 많은 것을 묻지는 않으셨다. 두 신의 사랑을 받는 이에게 세상은 어떻게 보일까. 그는 많은 사랑을 받는 만큼 많은 원망을 받았고, 그 탓에 오히려 나를 가장 잘 이해했다. 어쩌면 내가 그와 쿠푸님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눈치챘듯이, 카림님도 당신과 나 사이의 들뜬 바람을 알아차리셨을지도 모른다.

저기, 크리스. 분명 그때 카림님은, 그의 평소 어조와는 어울리지 않도록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하고 계셨다. 애써 입꼬리를 올려 웃지만 조금도 웃고 있지 않은 눈은 무언가를 미리 보았을지도 모르지. 그는 미래에 한해서는 지극히 말을 아끼곤 했다. 그럼에도 입을 여셨다는 것은, 아마 내가 생각하는 바로 그 장면을 전체이든 편린이든 눈에 담으셨던 탓이리라.

피타고라스의 정리 축제 때 말야, 라며 그가 간신히 운을 떼었을 때, 바로 그때 당신은 버섯을 한아름 따다가 돌아왔었다. 무슨 얘기 중이냐며 웃으며 끼어드는 낯이 어찌나 무구했는지 나는 도리어 아연해졌다. 기가 막히게 잘 짜여진 톱니바퀴는 돌아돌아 결국 외길로 우리를 이끈다. 덜덜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속으로 생각했다. 날개야 떨어지지 말거라. 그러나 차라리 날개를 만들지 않는 편이 좋았을 거라고, 지금에서야 돌이켜보기도 하고.

채집해 온 버섯을 쏟아놓으며 쿠푸님도 질문을 보탰었다. 피타고라스 정리 축제 때, 뭐가? 약간 뒤늦게 도착하셨음에도 요정족 특유의 청력으로 들을 내용은 다 들으셨던 모양이다. 카림님은 그제야 아차 하는 얼굴이셨다가, 곧 태연히 웃으며 말을 이으셨지. 으응, 다들 축제 때 무슨 옷 입을지 궁금해서. 혹시 비밀이야? 말이 넘어가는 것이 상당히 매끄러웠다. 신관 특유의 말솜씨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겠지.

그냥, 가지고 있던 예복을 입으려구요. 그 옷이 어머니의 유품이었다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삼갔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중 가장 좋은 옷이었고 또 미추美醜에 둔감에 내가 보기에도 썩 예쁘다는 생각이 드는 옷이기도 했다. 새 옷을 사 입어볼까 생각도 했으나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날개야 떨어지지 말거라.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꽤나 이상주의자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내 끝을 짐작하면서조차 당신에게 예쁘게 보이려는 욕심이 있었다는 말이다. 평생에 학파들을 증오했던 어머니께선 내가 그 옷을 입은 채 모순의 축제를 누빈다는 것을 알면 기절초풍하셨겠지. 내가 당신에게 가진 감정에 대해 아셨다면 내 눈알을 도려내셨을지도 모른다. 날개야 녹지 말거라. 그렇지만 눈이 없는 채로 사는 것도 어쨌든 사는 거니까, 죽음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태양을 꿈꾸기 전에, 그것을 바라보자마자 나는 내 눈을 찔렀어야만 했다. 사로잡히지 않도록.

그리고 이미 그러기엔 너무 늦었다는 것 정도는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잘 알았다.





2

다이달로스가 이카로스에게 말하였다. 너무 높이 날면 태양의 열 때문에 밀랍이 녹아 날개가 떨어지고, 너무 낮게 날면 바다의 습기 때문에 날개가 무거워지니 조심하거라.



3

발작적으로 터져나오는 비웃음을 눌러담자 도리어 흐느낌이 새어나온다. 어느쪽이 더 끔찍한지 판단할 수조차 없다. 모두가 잠든 밤에 홀로 쏟아지는 달빛을 받는다. 그 과중한 죄를 감내한다. 날개가 녹아내리는 끝이 다가온다.

기사님, 이라며, 흐느끼는 와중에 당신은 부른 것 같기도 하고. 태양을 향해 손을 뻗고 그 온기에 날개가 녹아 추락한다. 이제는 눈에 선한 훗날의 나와 미련한 이카로스를 향한 경멸. 조롱하듯 위로하듯 아틀란티스의 가없는 창공에서는 별들이 쏟아질 듯 찬란하다. 저들이 보기에 우리는 어찌나 하찮고 덧없는 존재일까. 그런 주제에 감히 태양을 우러러 날개를 만들고 하늘을 꿈꾸는 것이 어찌나 아둔하게 보일까.

부질없는 소망임을 알면서도 태양을 우러러 기원祈願하고, 그 기원으로 말미암아 추락하는 내일을 얌전히 기다린다. 크리스. 이름이 불리어 뒤를 돌아본다. 훗날 나를 죽일 남자가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본다. 괜찮냐며 물어오는 모습이 눈부셔서 눈을 깜빡거렸다. 흐느낌은 어느새 그쳤었다. 겉으로 그저 조용한 미소를 머금고 당신을 바라보았고, 심중 깊은 곳에서만 속삭여 물었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나요?

당신은 세계를 사랑하나요?

아마 그는 둘 모두를 사랑한다. 담백하도록 당연하게 납득이 간다. 그러나 꽃의 색깔이 하얀 동시에 검을 수는 없듯이, 모순되는 질문 역시 존재하기 마련이다. 나를 사랑하면서 어떻게 세계를 사랑하죠? 세계를 사랑하면서 어떻게 나를 사랑하죠? 불가능의 모든 비극 그 기구한 이름을 우리의 이야기에 붙였다. 나의 죽음은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기에.

당신은 내가 없는 세계를 사랑할 건가요?

구태여 묻지는 않았다. 어차피 때가 되면 그는 검을 들 것이며, 그것으로 나를 찌를 것이며, 과오를 번복하여 또다시 잃을 터였다. 또한 나는 당신이 나보다 세계를 더 사랑한다는 것도, 나를 죽인 뒤에는 세계보다 나를 더 사랑하리란 것도 알고 있었다. 추락사한 이카로스의 처참한 시신을 보고서야 태양은 숨을 멈추고, 오열을 토하며, 그를 죽게 만든 열기를 전부 저버릴 것이다.



4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기사님.

그 말 외에 내가 더 무엇을 말할 수 있었을까. 명백한 동요를 담은 당신의 눈은 실망을 담았을까 배신감을 담았을까. 어쩌면 그 모든 것이 복잡한 애증에 섞여 당신의 속내를 헤집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중간계에서 아틀란티스로 넘어와 텅 빈 백지와 같던 당신이 현재의 모습처럼 되기까지 걸렸을 시간과 들였을 노력과, 당신에게 쏟아졌을 피타고라스 학파의 말과 그네들 진리의 속삭임. 그 모두가 당신을 이루고 있었다. 당신이 나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당신을 이루던 것을 부수고 새롭게 재구성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나는 당신을 만나고 나를 이루던 모든 것을 부수고 새롭게 재구성했다. 그 똑같은 과정을 당신에게 요구할 수는 없다. 결국 선택의 문제였고 외부의 압력이 어떻든 우리는 나아갈 길을 스스로 결정했다. 고작 십대였지만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다. 전쟁터에서 어른들의 지령을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것과 똑같았다. 당신은 감정의 격전 한가운데에 있었고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그리고 당신에게 지워진 짐은 직선으로 굳어진 당신의 성정과 더불어 한 가지 답밖에 도출해내지 못했다.

때때로 정답처럼 보이는 것이 정말 정답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정답이더라도 진리는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진리를 탐구하는 x의 기사는 간과했다. 나는 내가 알던 것을 부수고 당신을 죽여야 하는 숙명을 무시했다. 나는 자유롭지는 못했으나 먼 곳을 통찰할 줄 알았다. 언덕 너머 지는 노을을 보듯이, 흑백으로 양분된 세계의 모순 너머를 볼 줄 알았다. 그러나 적어도 이 세계에서 나는 걸림돌이었고 사라져야할 악惡이었다.

오늘 안에 나를 죽이지 않으면 이 세계가 멸망한다는 전제에서, 당신은 망설이지 않고 나를 죽일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전제가 거짓임은 누구나 알 수 있겠지만, 당신의 세계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그 전제는 참이어야만 했다. 나는 침묵으로 칼을 받았고 피를 뒤집어쓴 당신은 울고 있었다. 그런 가까운 미래의 꿈을 꾼 것도 같고.

선심을 베풀 듯 나의 일상을 재단한 이들이 당신에게는 소중한 세계라면 나는 어디까지 양보해야 하는가, 얼마만큼 비극에 관대해져야 하는가. 눈을 가늘게 뜨고 허공을 노려본다. 이마에 자리한 표식에서 통증을 느낀다. 그 표식은 세계의 노예를 뜻하는 낙인이자 흉터이고, 미워할 수 밖에 없는 표식은 당신의 이마에도 새겨져 있었다. 당신을 죽이기 위한 연결을 나는 당신을 구하기 위해 쓴다.

사슬을 끊고 바닥을 박찼을 때 느껴지던 기묘한 해방감은 첫만남부터 나를 옥죄던 무력감과 날카롭게 대립한다. 끊어야 하는 것은 차가운 사슬이 아닌 끈덕지게 이어져온 연심의 끈이었다. 거스라미처럼 겹겹이 일어나는 먹구름 사이에서 날아오르고 날아올라 부자연스러운 각도로 날개를 꺾었다. 어두운 밤중에 태양은 보이지 않았고 앞으로도 보이지 않는 편이 더 나으려만.



5

거울 파편은 무수하고 흩어진 조각마다 당신의 분할된 감정들이 하나씩 덧붙는다. 극도의 혼란 속에서 당신과 나는 엇갈린다. 엇갈리고 엇갈려서 우리의 소망과 지향은 비틀린 문처럼 다시는 맞물리지 않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렇지, 나도 감정을 지닌 사람이기에 조금은 바랐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나를 반겨주기를, 나를 만나 기뻐하기를, 아니 최소한 안타까운 눈빛으로 흐리게 웃어주기를.

맹목적으로 쫓은 애정의 끝이 파멸이란 사실을 모르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 끝이 조금이나마 아름다울 거라고, 그런 헛된 희망을 간직하고. 어리석게 태양을 그리며 다가가지 말아야할 곳까지 날개를 뻗은 시인詩人을 나는 분명 싫어했다. 이카로스, 어리석은 이카로스. 이제는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어린 시절 이젠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께서 들려준 이야기, 그 이야기 속 어리석은 이카로스는 태양을 사랑해서 떨어져 죽었다지.

당신의 말들은 비수가 되어 나를 찌르지만 그보다 더 아픈 것은 녹아내리는 날개의 감각이다. 아아 돌이킬 수 없구나. 그렇게 깨닫는 순간에 태양에게 내쳐진 날개는 한낱 깃털 뭉치로 돌아가 끊어지고. 몸을 구성하는 조각들이 하나하나 끊어진들 그보다 더 아플 수 있을까. 소망을 들이부어 만든 날개는 하늘 끝에 닿지 못하고 바스라진다. 그것은 남용인가 오용인가.

날개야 떨어지지 말거라 녹지 말거라.

최후의 최후까지 그렇게 기도한다. 녹아내리는 밀랍과 같이 눈물이 흘러도 그냥, 빌지라도 않으면 내가 버틸 수가 없어서. 그러나 저주받은 일족에게 손을 내미는 신은 없기에, 나의 기도를 들을 이는 죽음밖에 없다. 저 멀리서 드리우는 그림자가 반갑고도 밉다. 끝이 다가온다.

기사님. 남은 힘을 다 끌어모아 부른다. 그렇지 않아도 코앞까지 다가온 죽음을 더욱 재촉하는 바보같은 짓이지만. 그럼에도 최후의 최후까지 기도하며 바라온 태양이 눈부셔서, 눈부셔서 이카로스는 떨어지는 순간에마저 손을 뻗었을 것이다.

당신을 용서할게요.

차마 형용할 수 없는 감정으로 굳어지는 얼굴을 향하여, 사력을 다해가며 웃었다. 아, 역시 나는 이카로스가 끔찍이도 싫다. 후회하고 원망할 수 없는 것은 목숨줄을 녹이는 온기가 그만큼 사랑스러웠기 때문일까. 당신이 밉다는 말조차 하지 못하는 멍청한 이카로스가 나는 끔찍이도 싫다. 죽음의 수마에 몸을 내맡기며 그렇게 생각했다. 심해에 잡아먹혀 사라진 이카로스의 마지막 깃털을 떠올리면서.

 


날개야 떨어지지 말거라 녹지 말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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