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등에 땀이 축축하다.


‘형 왔다.’


한 달 만에 집에 와보니까


‘민재원.’


모니터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다.


‘엄마는.’


주말. 날씨가 꽤 더워져서 이불도 바꾸고 밑반찬도 챙겨갈 겸, 겸사겸사 집사 들른 참이었다.


‘인마.’


하는데도 묵묵부답. 뒤로 조금 다가가서 슬쩍 보는데 어찌나 다닥다닥 붙어 있는지 화면이 보이지도 않는다. 어쩐지 예상이 가는 바... 방으로 발길을 돌리다가 다시 홱.


뒤통수들 사이에 녀석의 것도 있었다. 어쨌든 혈기왕성한 남자애니까 녀석도 한창 벗은 여자 몸에 관심이 많겠지- 이해는 하면서도 한편으론 씁쓸함을 감출 수 없어 마지못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


돌아보는 녀석과 눈이 마주침.


곧장 제 앞 재원이의 어깨를 뒤흔들며


‘야 너네 형 왔어.’


시선은 떼지 않고.


‘어, 형 왔어?’


아는 척은 아는데 정신 팔린 목소리. 뒤로 손을 흔들 뿐 여전히 돌아보지는 않는다.


‘엄마 어디 가셨어?’


묻는데도 성의 없이 어어- 거리더니 끝. 불쑥 성질이 나서


‘작작 봐라.’


했더니


‘뭘요?’


어느새 바짝 다가온 녀석이 물었다. 갑자기 훅 들어오니까, 아니 무엇보다 너무 가깝잖아- 괜히 올려다보던 시선을 살짝 내리고


‘너네... 보는 거.’


왜 식은땀이 나냐.


‘너무 많이 봐서 좋을 거... 없어, 아무튼...’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를 여는데 거기까지 따라온 녀석이 뭐라고 알아듣질 못할 말을 한다. 알고 보니 게임 얘기. 요즘 반애들 사이에서 한창 유행하는 거란다. 아- 거리면서 속으로 안도... 안도? 미친 왜 안도 하냐고. 혼자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다가 물을 꿀꺽꿀꺽 삼켰다. 냉수 먹고 속 차리자.


문득 시선이 느껴져 힐끗 보자 녀석과 또 눈이 마주쳤다.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


왜 계속 쳐다보지.


‘밖에 많이 덥죠.’


그렇지 뭐- 하면서 마저 물을 마시다가


‘...?’


녀석의 손부채질에


‘컥...’


뿜었다. 그러자마자


‘괜찮아요 형?’


얼굴을 들이밀기에 입가로 질질 흐르는 물을 손등으로 닦으면서


‘괘, 괜찮아.’


황급히 그 자리를 피했다.


갑자기 왜 손부채질이야...


-


그나저나


‘너도 가서 놀... 지?’


아까부터 옆에 딱 붙어 서 있는 녀석이다.


‘괜찮아요.’


저기 내가 안 괜찮은데...


‘...’


냉장고에서 엄마가 따로 챙겨 둔 반찬통들을 꺼내 비닐 가방에 집어넣고 창고에서 여름 이불을 꺼내와 마찬가지로 비닐 가방에 집어넣는 과정 내내 내 뒤만 졸졸 쫒아 다니고 있다. 심지어 이불 집어넣을 때 낑낑거리고 있으니까 도와주기까지.


‘고, 고맙다.’

‘별거 아니에요.’


진짜 불편하게 왜 이래...


‘형 간다.’


원래는 집에서 좀 빈둥거리다 가려고 했는데 동생 친구들도 있고 영 마음이 안 편해서 그냥 일찍 가려고 채비를 하니까


‘벌써 가게요?’


어쩐지 빤히 보는 눈이며 말투가 아쉬운 것처럼 느껴졌다면 착각일까.


현관으로 비닐 가방을 들고 가는 걸 나눠 든다. 고맙다니까 네- 무뚝뚝한 대답은 여전했다. 신발까지 다 신었는데


‘형 간다고 얌마.’


아주 신경 1도 안 쓰는 친동생이 얄미워 톡 쏘니까 그제야


‘어, 형 가.’


인정머리 없긴.


재원일 따라 하나 둘 인사를 해 보이는 녀석들을 등 뒤로 현관문을 나서는데 어쩐지 손이 가볍다.


‘어, 야...’


녀석이


‘가는데 까지 같이 가요.’


제 맘대로 비닐 가방을 들고 앞서 가버렸다.


‘...’


흠.


검지로 볼을 긁고 있는데


‘택시 탈거죠?’


돌아보며, 짐도 있고 택시 타요- 소리 따위에 대책 없이 설레 버리는 나란 인간. 지금 걱정해주는 건가?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면 분명히 역겨워하겠지.


‘빨리 와요.’


햇빛에 눈살을 조금 찌푸린다. 얼굴 위로 밝은 빛.


‘어...’


눈이 먼다.


‘그래...’


그게 빛 때문인지 널 향한 이 감정 때문인지.


‘이제 됐어.’


택시정류장 앞에서 택시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맙다. 들어줘서.’


그 말에 넌 또 뭘요- 무심하게 대답.


‘그만 가 봐도 되는데.’


녀석의 이마에 송송 맺힌 땀방울마저 좋다.


‘가는 거 보고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도로만 보다가 갑자기


‘형.’


내려다본다.


‘어, 어?’


시선이 딱 마주 쳤다. 죄 지은 것 마냥 더듬거리듯이 물으니까 뭐라고 입을 여는데 마침 택시가 와서 서는 바람에 흐지부지. 트렁크에 짐을 싣는 걸 도와주고 조수석 문을 여니까 뒤에 앉으라고 했다. 영문을 몰라 보니까 공기 안 좋아요- 더 영문을 모를 소리.


‘가.’


아쉬워서


‘네.’


에어컨을 켜놔서 학생 문 닫아요- 하는 기사님의 말에 창문을 올리다 말고 불쑥 여전히 이쪽만 보고 있는 녀석에게


‘다음 주가 기말이지? 그전에 재원이랑 한 번 보자. 수학이나 과학 정도는 봐줄게.’


*


그래놓고 까먹고 있었는데


‘어...’


진짜 왔다. 게다가 자취방으로


‘안녕하세요.’


재원인 또 어디가고


‘왜 너 혼자야?’


녀석 혼자.


‘재원이는?’

‘담임 면담이요.’

‘...’


이 자식 이거


‘무슨 사고 쳤어?’

‘그건 아니고요.’


더 무슨 말인가 나올 법도 싶었는데 입을 꾹 다물어 버린다. 비스듬히 내려다보다가


‘들어가면 되죠?’


더운데- 거려서 그제야 조금 젖은 교복 카라가 보였다. 황급히 비켜서며


‘어 들어와.’


바지 주머니에 양 손을 찔러 넣은 채 시선만 돌리며 둘러보는 등 뒤에 대고 뭐 마실래- 묻자


‘아무 거나 주세요.’


냉장고 앞에 서서 그때까지도 서서 두리번거리는 녀석을 곁눈질로 힐끔거리며 어째 볼 때마다 쑥쑥 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난주랑 또 다르다. 얼굴이라든가 분위기 같은 게 성장속도가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른 신생아 수준급으로 확확 변한다.


‘적당히 앉아.’


마침 배달 음식 시키면서 같이 온 탄산, 다행이 뜯지도 않은 새 캔이 있어서 그걸 컵에 따라 냈다. 컵을 건네니까


‘깨끗하네요.’


원룸이니까 구분이랄 게 없어 자칫하면 좀 어지러울 수도 있는데 정리정돈이나 청소에 무지 신경 쓰는 편이라 청결함에 있어서는 좀 자신 있었다.


‘감사합니다.’


목이 말랐는지 탄산을 벌컥벌컥 마신다.


-


집 구경도 끝나고 숨도 돌렸을 즈음,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여기서 이렇게...’


수학 문제집을 펼쳐 놓고 모르는 문제를 봐주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마주 보고 있으니까 각도가 잘 안 나와서


‘잠깐만.’


성큼 다가가 앉았다.


‘이렇게... 이걸 대입해서...’


그렇게 또 한참 설명하다가


‘... 이러면 돼.’


설명이 끝났는데 별로 반응이 없어서


‘이해했어?’


보니까


‘...’


가만히 보고 있다. 하긴 이 문제가 좀 까다롭긴 하다고 이해가 덜 됐나 싶어서 다시 설명하고 있는데 옆얼굴이 따갑다. 쏟아지는 거에 문득 힐긋 거리니까


‘...’


빤히 보고 있음. 좀 무안하다 싶을 정도여서


‘ㅇ왜...?’


정말 순수하게 궁금했다. 내 얼굴에 뭐 묻었나? 괜히 손끝으로 뺨을 더듬거리는데


‘형, 향수 뭐 써요?’


갑자기, 향수 얘기.


‘나 향수 안 쓰는데. 왜?’


샤워코롱 정도는 가끔 뿌렸다. 말하려고 고쳐 앉다가 팔뚝이 닿고 팔꿈치, 그러니까 맨살이 닿아버려서


‘...’

‘...’


동시에 그쪽으로 시선이 쏠렸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에요.’


고개를 돌려 문제집으로 시선을 꽂는 녀석의 얼굴, 귀와 턱으로 연결되는 부분의 솜털까지 다 보일 정도로 거리가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고


‘...’


침이 꼴깍. 큼- 괜히 목을 가다듬는 척 옆으로 조금 슬금슬금 비켜 앉는다.


‘어... 그럼 다음 문제...’


힐끔 보니까 녀석이 뒷목을 손으로 몇 번 매만지다가 아예 턱을 괴고 고개를 숙여 버린다.


그 이후로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설명을 하긴 했는데 제대로 한 건지도 모르겠고 말실수나 안 했으면 다행이었다. 집중도 하나도 안 되고 와중에 한 번씩 말이 제멋대로 튀어 나와 주워 담느라 고생했다.


‘하...’


화장실에서 얼굴을 감싼 채 한숨만 내쉬었다.


‘뭐 먹을래?’


시간도 저녁때고 그냥 보내기 그래서 밥이나 사주겠다며 데리고 나선 참이었다. 원룸에서 조금만 걸어 내려가면 큰 길이고 골목마다 식당이며 카페, 보세옷가게, 쥬얼리 가게, 술집 등등 꽉꽉 들어차 있었다.


‘맛있는 거 먹자.’


음식점들이 죽 들어선 거리에 들어서자 주변을 둘러보던 녀석이


‘형은 주로 뭐 드시는데요?’


눈을 맞추며 묻기에 어- 거리고 있었다. 내가 뭘 먹어봤더라...


‘어? 형!’


익숙한 목소리에


‘박이안?’


돌아보니까


‘뭐야, 둘이 왜 같이 있어?’


마침 맞은편 닭갈비집으로 들어가려던 재원이와 친구들과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거리는 친구들 인사를 받아주며


‘오늘 형이 너네 공부 봐주기로 했잖아. 넌 담임 면담이었다며.’


타박하듯이 말하니까


‘잉?’


발뺌.


‘무슨 소리야. 담임 면담? 누구, 나?’


어디서 오리발이냐고


‘그래. 그래서...’


추궁하기엔 표정이 너무 리얼해서 슬그머니 녀석 쪽을 올려다보니까 어쩐지 떨떠름한 얼굴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뭔소리야... 아 됐고 형 우리 밥 사줘.’

‘어?’


녀석이 홱 쳐다보고


‘닭갈비 닭갈비 사줘~’


재원일 주축으로 갑자기 주변으로 몰려드는데 살짝 옆을 보니까 녀석이 못마땅한 얼굴로 재원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래. 뭐...’


떠밀려 들어가는 와중에


‘아까 말도 없이 사라지더니 어떻게 된 거냐?’

‘뭐가.’


심드렁한 대답.


‘오늘 2반 여자애들이랑 반팅하기로 했는데 너 없어서 파토 났잖아 새꺄.’


그런 거였어?


‘싫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그럼 내일은?’

‘싫어.’


왜...?


‘모레,’

‘싫어.’


...


‘아 더럽게 치사한 새끼.’

‘정신 차려. 낼 모레 시험이다.’


그래 시험이니까.


‘아 떨어져.’

‘앙 행님 한 번만~’

‘처맞는다.’


다른 이유가 뭐 있겠어.


*


“어? 형!”


살 게 있어서 쇼핑하러 나간 참이었는데 편의점 근처에 모여 서 있던 무리가 알고 보니 또


“...”


재원이와 친구들. 나란히 선 녀석을 보곤 재원의 표정이 살짝 굳는다. 그 표정으로 나를 보고 제 옆으로 선 애들의 눈치를 살짝 본다.


그 와중에 살갑게 안녕하세요- 거리는 애들 얼굴이 하나 같이 낯이 익은 걸 보니 중고등학교 때 동창인 듯했다. 어 오랜만이네- 반갑게 인사해주는 내 앞을 녀석이 슬쩍 가로막고 선다.


둘이 같이 있는 걸 보곤 더 이상 놀라워하지도 뭘 묻지도 않는 재원과 달리 옆의 녀석들은 꽤나 우리 둘 사이를 궁금해 하는 눈치였지만 그것도 잠시 오래 만에 재회한 녀석과의 인사로 정신없고 그렇게


“그냥 집에 처박혀 알콩달콩 할 것이지 뭐하러 밖에까지 기어나오냐.”


녀석에게 속삭이듯 비꼬는 재원과 친구들과 함께 술집으로 이동 중.


한 녀석이


“혜지 기절하겠네.”


일행인 듯 아마도 술집에서 만나기로 한 모양인가 본데


“그러게.”


그러고는 지들끼리 눈짓을 주고받으면서 킥킥거리는데


“어 저기 있다. 주혜지!”


불린 이름으로 돌아보는 여자애의 시선이 곧장 녀석에게로 향한다. 느낌이 좀 그렇긴 했지만


“...”


시끄러운 음악소리에 정신이 없기도 했고 나란히 앉아있던 네다섯 명의 어린 여자애들이 한꺼번에 이쪽을 돌아보니까 주춤거려졌다.


“야 여자 있단 말은 안 했잖아.”


먼저 들어가던 나를 잡아 놓고 녀석이 재원일 보며 나지막이 따지니까 저도 모르는 일이었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 이제 와서 돌아갈 수도 없고 뒤에서 계속 밀고 들어오는 통해 일단은 착석.


앉고 보니까 머릿수가 제법 됐다. 열두 명 남짓. 수가 많다 보니까 대화 주제도 제각각, 앉은 자리대로 대화도 갈리게 됐는데 어쩌다 보니 내 자리의 얘깃거리는


“형, 여자친구 있어요?”


나에게로 쏠려 있었다. 슬쩍 녀석 쪽을 보고


“아니... 없는데.”


하자


“헐, 왜요?”


맞은편의 녀석이 펄쩍 뛴다. 그 옆에 앉아 있던 재원이 말소리에 깜짝 놀라 소주를 삼키다 사례가 걸려 켁켁켁.


“어?”

“말도 안 돼.”


그때까지도 녀석은 잠자코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러다


“그럼 제가 소개팅 시켜 드릴까요? 아 소개팅이란 말은 좀 그런가? 암튼 제가 아는 누나가 있는데-”

“야.”


불쑥


“엉?”

“오지랖 부리지 말고 술이나 마셔.”


경고하듯


“뭐야 이 새끼... 형, 그니까 그 누나가 얼굴도 예쁘고-”

“너나 잘 하라고.”


다시 한 번


“아 내가 뭐가. 형님 같은 남자가 여친이 없다니까 내가 또 안타까워서 그러지. 엄청 괜찮은 누나라서-”

“그렇게 괜찮으면 니가 만나라고.”


언성이 높아지는 걸 테이블 밑으로 손을 잡아 꾹 힘을 주는데


“아니 근데 너 왜 자꾸 태클이냐, 형님은 가만히 있는데... 형 제가 뭐 실수한 거 있어요? 혹시 기분 나쁘셨어요?”

“아... 니... 그...”


이번엔 녀석이 손에 꾹 힘을 준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날 보면서


“소개팅 할 거야?”

“...어?”


굳은 표정으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가


풉!


맞은편에서 재원이가 고개를 떨군 채 어깨를 들썩이고 있는 걸 보곤


퍽.


아마도 테이블 밑으로 날아간 듯


“악!!”


재원이 갑자기 종아리를 움켜쥐더니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녀석을 쳐다보며 씩씩거린다. 입 모양으로 씨.발.로.마. 그쪽으로는 쳐다도 보지 않는 녀석에게


“박이안. 근데 넌 지원이 형이랑 언제 그렇게 친해졌냐.


저쪽에서 얘기하던 한 녀석이


“내 기억으론 너 겁나 낯가렸던 거 같은데.”


그렇게 물어왔다. 듣고 있던 재원이 여전히 벌건 얼굴로


“어휴 이 순진한 것들.”


중얼거리자마자 다시 날아간 듯. 이번엔 소리도 못 지르고 허리를 접고 식은땀까지 흘려가며 끙끙거린다.


“어디가.”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나려는데 잡는다. 화장실- 하니까 내 얼굴로 고개를 조금 숙이고 같이 갈까, 귓속말을 해서 화들짝 떨어지면서 재빠르게 주변을 살피는데 다행이 아무도 관심 없는 듯. 고개를 저으니까 빤히 보면서 빨리 갖다와- 테이블 아래로 잡은 손을 한 번 꽉 잡았다가 놓아준다.


화장실에 갔다가 곧장 테이블로 돌아가지 않고 가게 밖으로 나갔다. 잠깐 서 있었다. 애들도 다들 착하고 동생 친구들인데 나이가 열 상 이상 차이 나다 보니까 뭔가 묘하게 어긋나는 느낌이랄 까 계속 나만 겉도는 기분... 그것도 그렇지만 그보다는 녀석과 나 사이를 숨기고 감추는데 급급해서


“...”


진이 빠졌달 까.


돌아가 보니까


“헐.”


녀석의 옆 자리가 어느새 여자애로 바뀌어 있고


“왜?”


제법 분위기가 좋다.


“양민희랑 탁마준 사귄대!”


아까 몇 놈들이 언급했던 혜진가 하는 여자애인 듯.


“대-박.”


공식 인정했다는데- 너나할 것 없이 인터넷을 보는 와중에 둘만 관심이 없다. 녀석에게 고개를 기울인 채 입을 가리고 뭔가를 말하는 그 여자애의 시선이 녀석에게 붙박여있다. 그제야 술집으로 오던 중 몇 놈들이 하던 얘기가 뭐였는지 감이 왔다.


“그렇게 발뺌하더니 존나 소름...”


앉으니까 돌아보며 왜 이렇게 늦어 와- 거리는 녀석 뒤로 보이는 그 여자애가 날 보며 싱긋 웃는다.


*


한 시 출근이랬다. 점심 먹고 사무실 들어가는 길에 잠깐 얼굴 보면 딱이겠다고, 가서 커피 마셔야지 하고 있었는데


“어라.”


카페 안으로


“저 과즙미 뿜뿜한 상큼이는 누구지?”


낯이 익은 여자애가


“꽤 친해 보이네.”


케이크 진열대를 사이에 두고 녀석과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야, 쟤 누구냐?”


생각났다. 며칠 전에 재원이랑 친구들이랑 함께 봤던 여자애들 중 한명, 혜진가 하는 여자애.


“예쁘장하네.”


그때도 느꼈지만 분위기가 좋다.


“둘이 잘 어울리지 않냐?”


그렇게 물으며 히죽거리는 얼굴이


“...”


무슨 의도인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았지만


“...그러네.”


인정해버리니까 얼굴을 들여 봐온다.


“열 받으라고 그런 건데.”


열이 왜 받아.


“...”


카페를 지나쳐 엘리베이터 쪽으로 방향을 튼다.


“사실인데.”


*


벌써 두시 반.


평소 같으면 퇴근하고 그냥 바로 집으로 갔을 텐데 저녁에 그때 그 애들이랑 다시 한 잔하기로 했다는 녀석의 말에 어쩐지 녀석의 집으로 와 있었다.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티비도 눈에 안 들어오고 일찍 이불을 덮고 누웠다. 자려고 눈을 감았는데도 잠이 오기는커녕 쓸데없는 생각에 망상까지 더해 정신은 점점 더 말똥거리고 옆으로 돌아누운 순간


삐비빅-


도어락 해제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리자마자 자는 척 하고 있었다. 현관 바닥에 신발 소리, 이어서 바닥에 가방 밑이 닿고 화장실 문이 열렸다가 물소리, 다시 나와서 벨트에서 지퍼 내려가는 소리, 티를 끌어올려 벗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형, 자?”


이불 속으로 들어와 뒤에서 어깨를 껴안으면서 묻는다. 등에 녀석의 따뜻한 맨살이 여지없이 닿아왔다.


“형.”


어깨를 살짝 흔드는 거에 미동도 않으니까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쪽쪽거린다. 녀석에게서 풍기는 술 냄새에 한숨.


“...”


하지 말라는 식으로 어깨를 움츠리니까 킥킥거리면서


“귀여워.”


목을 잘근잘근 깨물더니 귓불을 삼킨 채 혀를 굴린다.


“하지ㅁ...”

“왜... 잠깨 봐. 나 왔다니까.”


자꾸 생각났다.


“응? 일어나.”


낮에 봤던 게.


“진짜 자?”


살짝 돌아보니까 시무룩해있는 얼굴이 아마도 제 늦은 귀가 때문에 내가 화가 난 거라고 오해한 건지


“늦어서 미안해. 일찍 오려고 했는데 새끼들이 자꾸 못 가게 하잖아... 지금도 겨우 빠져나온 거라니까? 어?”


다시 한 번 미안해- 거리면서 치댐. 뺨에서 귀, 목에서 다시 어깨를 쪽쪽 거리면서 내려온다.


“알았어. 자. 그만...”


다시 돌아누우니까 허리를 껴안고


“하고 싶어...”


하체를 바짝 붙여 온다. 목덜미에 닿는 숨이 아찔할 정도로 뜨거운 동시에 허리를 감싸던 손이 옷 속으로 들어온다. 뒤에 닿는 그것이


“많이 피곤한 거 아니면...”


뒤로 비비고 있는 그것이


“하면 안 돼? 나 벌써...”


딱딱하게 서있다.


“집에 오ㄴ 내내 형ㅇ... 생각했ㄱ든...”


흐응- 웃으며 내 어깨를 돌려 바로 눕히는 녀석의 얼굴이라든가


“거기에... 그때 그 여자애들도 있었어?”


확실히 말도 꼬이고


“뭐, 그렇지...”


취했다.


“혜진가... 하는 애도?”


웃옷을 말아 올려놓고 유두를 빨아대던 녀석이 그 상태로


“어...?”

“걔도 있었냐고.”


슬쩍 고개를 들고 보더니


“아 어...”


다시 내리고 이번엔 혀를 세워 유두를 콕콕 찌르다가 입 속에서 혀를 굴려 핥는다.


“형 근데 이제 그런 얘기 그만하고...”


자극에 어쩔 수 없이 신음이 새려는 걸 막고


“걔랑... 별 일 없었어...?”

“무슨, 일? 형 나...”


속옷 위로 아래를 문지르다가 못 참겠는 듯 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잡아 치골 아래로 끌어내린다. 속옷 속으로 손이 들어오려는데


“걔가 너 좋아하잖아.”

“...”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들고 본다. 아직 호흡이 거친데


“근데.”


찔러 본 건 나면서 속절없이 온 가슴이 내려앉는다.


손을 잡아 빼니까


“알고 있었네.”


상체를 세우고는


“그래서 그게 뭐.”


취한 척 한 거였나 싶을 정도로 멀쩡한 정신머리로 보였다.


“...”


도리어 몰아세운다.


“안 그래도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그딴 거 묻는 이유가 뭔데. 진짜 뭔 일이라도 있었음 했어?”


말려 올라간 옷을 끌어 내리고 일어나 앉았다.


“안 그러게 생겼어?”


원망스러웠다.


보니까 하- 웃더니 침대에 걸터앉아 이쪽을 보면서


“어이가 없네. 지금 나 의심하는 거야?”


억울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충분히 나 같아도 의심받는 자체로 기분이 나쁠 거다. 그러니까 지금 녀석의 이런 반응을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의심하는 게 아니라...”


불안하니까. 녀석 옆에 그렇게 어리고 예쁜 ‘여자’ 애가 있다는 게, 하지만 그런 말을 할 순 없다. 유치하니까.


“기분 나빴다면 미안하다.


일어서면서


“오늘은 그냥 갈게.”


몇 번이나 울컥하는 걸 억눌렀는지 모른다.


“어딜 가.”


손목이 잡혔다. 고요한 방 안에 긴 한숨.


“이 분위기 어쩌고.”


일어서서 다시 한숨.


“걔가 날 좋아하는 게 뭐. 어쩌라고. 난 관심 없다고, 형 말곤.”


팽팽한 공기. 뚫어질 듯이 보다가 팔을 끌어당겨 부드럽게 안아온다.


“부탁인데,”


망설이다가 날개뼈 부근을


“제발 혼자 이상한 생각 좀 하지 마.”


꽉 안았다.


“아무도 안 보여. 눈에 안 들어온다고, 형이 아니곤. 그러니까,”

“...니가 그렇게 만들었잖아.”


가슴에 얼굴을 기대니까


“뒤집어씌우기냐.”


등을 쓸어내려준다. 다정하게 구니까


“니가 걔한테 웃어줬잖아. 말도 받아주고 친절하게 대해줬잖아. 원래 그런 애 아니면서 걔한테만 관대하게 굴었잖아.”


어쩐지 투정부리게 됐다.


“그런 건 나한테만 하라고.”


다른 사람한텐 하지 마- 칭얼거리니까 알았어 알았어.


“내가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어?”


품에서 떼어 내 얼굴을 들여다봐온다. 그게 또 자존심 상하고 창피하기도 하고 더 화가 나서


“내가 얼마나...”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가슴에 더 얼굴을 갖다 붙였다.


“얼마나 불안했는데...”


풉- 터지는 웃음소리. 단박에 미간을 구기고 올려다보니까


“난 뭐 멀쩡한 줄 아냐. 나도 형 때문에 불안해 죽겠다고.”

“니가 왜...”


순식간에 심각하게 변한 얼굴에


“형 주변에 다들 좀 잘났냐? 훈훈하고 능력 좋은 인간들 깔렸잖아. 솔직히 불안해서 바가지 긁을 사람은 나지. 성질대로 했음 형 매일 들들 볶여댔을 걸. 근데 그러면 또 애 취급 할까봐... 기적의 인내심으로 참고 있는 것도 모르고.”

“...”


할 말 없음.


“근데 기분은 좋네. 형 질투한 거잖아.”


듣기 좋은 목소리. 껴안은 팔에 힘을 꽉 준다.


“그래 질투했다. 당연한 거 아냐? 너 같은 애가 내 눈에만 좋아 보일 리 없으니까. 사람 눈 다 거기서 거긴데...”


생각만 해도


“그런 거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고...”


밀어내려고 하니까


“그런 건 또 뭔데...”


이리와- 거리면서 다시 안아버린다.


“나 같은 애가 뭔데.”


장난치니까


“몰라. 말해주기 싫어.”


약은 오르지만 어쩔 수 없이 좋아서 안긴 채 허리를 세게 껴안았다.


“마음 같아선 내 거라고 사방팔방 소문내고 싶어...”


진심인데


“호오. 지금 그 발언 나중에 굉장히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데 괜찮겠어?”


또 장난치니까


“왜, 뭐가.”


열 받아.


“...”


한참 대답 안 하더니 불쑥


“나 버리면 안 돼.”


한다.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데


“죽여 버릴 거야.”


농담이라기엔 사뭇 진지한 시선이며 말투에 순간 바짝 쫄았지만 농담이 아니면 또 어떠냐고. 등을 팡팡 치면서


“너나 딴 생각하면 나한테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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