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요새 가게 에어컨이 너무 빵빵하다 했다. 아직 여름도 아니고 환절기에 무슨 에어컨을 이렇게 틀어대? 어렸을 때보다 튼튼해지긴 했지만, 다현은 여전히 환절기만 되면 골골댔다. 눈이 빠지게 바빠서 가게에서는 추운 줄도 몰랐다. 에어컨을 그렇게 세게 트는 지도 몰랐다. 며칠 전, 주헌과 뒷문에서 담배 한 대 피우며 느낀 으슬으슬한 기운을 그냥 넘겨서는 안 됐다. 찔끔찔끔 나오는 콧물을 무시해서는 안 됐다. 잠의 유혹에 넘어가 예약한 병원을 빠져서는 안 됐다. 사장님과 민기 새끼에게 붙들려 어제 회식을 풀 코스로 달려서는 안 됐다!

"아오씨……."

저 세상에서 울리는 것 같은 핸드폰 알람을 겨우 껐다. 물에 젖은 솜 같은 몸을 일으켜 앉아 안경을 썼다. 눈 아래 다크써클이 눈동자까지 올라왔는지 시야 끝에 검게 테두리가 생겼다. 물론 보려고 하면 없어지는 그런 테두리. 시야도 약간 흐리멍텅한 것이 세상을 저화질로 보는 것 같았다.
다현은 손을 들어 이마에 얹었다. 열은…… 없는 것 같은데? 다현은 바닥을 짚고 낑낑대며 일어섰다. 현기증도 없고 멀쩡해서 몇 걸음 걸었다. 약간 붕 떠서 걷는 것 같지만, 별 문제 없었다. 다현은 반쯤 붕 뜬 기분으로 화장실로 갔다.

"돈 벌러 가자, 조다현."

가는 길에 약국에서 감기약이나 사먹자. 뜨끈한 쌍화탕도 하나 마시고.

"그럼 괜찮을 거야."

안 괜찮으면 곤란해.


회사를 나서는 주헌의 발걸음이 유난히 가벼웠다. 요 며칠 연속으로 야근하는 바람에 다현을 보러 카페도 못 가고 잠도 제대로 못 잤다. 오랜만에 정시 퇴근, 오랜만에 가는 카페, 오랜만에 보는 다현. 걸음이 가벼울 수밖에 없었다.

주헌은 밖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해결하고 오늘은 술이 아닌 다른 걸 만들어 달라고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반쯤 지하에 있는 두툼한 문을 열었다.
밖에서 움직이다보니 슬쩍 땀이 나 재킷은 벗어서 팔에 걸쳤다. 낮에만 잠깐 더울 뿐, 겨울이 완전히 물러간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봄이 더 생각나는 그런 날씨였다.
두툼한 문 너머 가게 안은 딱 알맞게 시원했다. 계속 있으면 좀 추울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1층 카페와 달리 지하는 한산했다. 오늘도 바쁘면 어쩌나 내심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주헌은 익숙하게 카운터석에 앉아 이젠 밖에서 봐도 인사를 할 것 같은 직원들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평소 같으면 싹싹한 인삿말이 들려야 하는데 다들 표정도 분위기도 심상치 않았다. 주헌은 그제야 눈으로 카페 안을 훑었다. 늘상 자기 앞에 서서 무뚝뚝하게 술잔을 내밀던 다현이 없었다. 어? 머릿속으로 휴무일을 세고, 믿을 수 없어 핸드폰을 켜 확인했다. 오늘은 다현이 일하는 날이었다.

"오늘 조다현 씨 일하는 날 아닙니까?"
"조다현 씨 일하는 날 맞고요, 마침 잘 오셨어요. 손님, 오시자마자 죄송한데 걔 좀 데려가주시면 안 될까요?"

되물으려던 찰나 뒷문이 힘 없이 열렸다. 주헌은 순간 주먹을 쥐었다. 어깨에는 두툼한 가디건, 눈에는 안경을 걸친 다현이 자신을 향해 다가왔다. 아니, 의무적으로 바 앞에 섰다. 안경 뒤에 눈은 흐리멍텅했다. 본인은 티내지 않으려고 살짝 살짝 코를 훌쩍이는데 본인 의지와 달리 아픈 기색이 완연했다.

"왔냐."

코맹맹이 목소리가 귀여웠다. 하지만 걱정이 더 컸다. 주헌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현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다현이 움찔하며 몸을 뒤로 뺐다. 주헌도 퍼뜩 손을 멈췄지만, 기어코 팔을 뻗어 다현의 이마를 짚었다. 손가락 끝에 흉터가 걸렸다. 둘은 잠시 돌처럼 굳었다.

"열 나는 것 같은데."
"안 나. 재봤어."
"언제? 몇 도 였는데?"
"……약 먹었어."
"약 먹었으면 쉬어야지. 약 먹고 안 쉬면 낫겠어?"
"일할 수 있다고."
"손님도 없으니까 그냥 가라, 제발."

다현이 옆에서 끼어든 직원을 째려봤다. 직원도 장난스레 화난 표정을 지으며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고 어필했다.

"너 아직도 여기 있는 거 사장님이 아시면 우리가 혼난다고!"
"사장님도 가라고 하셨는데 왜 고집을 부려. 가자, 내가 데려다줄게."

다현은 한참 더 일할 수 있다고 버텼다. 버텼다기 보다는 어린애처럼 찡찡거렸다. 누가 봐도 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 계속 일할 수 있다며 억지를 부리다 결국에는 사장님에게 들켜 주헌 옆구리에 낑겨 쫓겨났다.
다현은 막상 밖에 나오자 지금까지의 실랑이가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로 순순히 주헌의 어깨에 기댔다. 달달 떨며 자기에게 몸을 맡기는 다현의 무게에 주헌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많이 아파?"
"추워. 어지러워."
"열 나서 그래. 괜찮아. 괜찮아."

주헌은 추워하는 다현의 팔을 쓸어주며 다현이 택시기사에게 말한 집 주소를 머릿속으로 몰래 되뇌었다.

다현의 집은 좋게 말하면 아담했고 까놓고 말하면 답답했다. 주방, 화장실을 제외하면 딱 고등학생 때 본 다현의 방만한 크기였다. 방이었을 땐 참 안락하고 좋았는데 집이라니 이렇게 다르게 느껴진다. 자기도 모르게 집을 둘러보던 주헌은 자기 품에서 벗어나 흐느적 흐느적 안으로 들어가는 다현을 보고 황급히 뒤를 따랐다.
다현은 외투도 안 벗고 계속 펴진 상태인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손으로 바닥을 휘저었다.

"이거?"

주헌이 전기장판 스위치를 켜자 바닥을 더듬던 손이 도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겉옷은 벗자."
"잘 거야."
"다 구겨질 텐데. 힘들면 도와줄게."
"데려다줘서 고맙다. 택시비는 다음에 오면 줄게. 잘 가라."

다현은 빨리 잠들고 싶었다. 잠 속에 빠져서 이 숨가쁨도 뜨거움도 어지러움도 잊고 싶었다. 하다못해 자고 일어나면 훨씬 나아있을 테니까.
주헌은 아무 말 없었다. 멀어지는 발 소리와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다현이 들은 마지막 소리였다.

다음 날, 익숙한 알람소리에 눈을 뜨자 자신이 잠옷으로 입는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있는 걸 봤을 때는 잠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한 번씩 먹은 처음 보는 약 상자 몇 개와 냉장고에 보관된 만든 지 얼마 안 된 죽을 봤을 때는 혼란이 진정됐다.
수분이 채 마르지 않은 싱크대, 곱게 옷걸이에 걸린 외투, 가지런히 정돈된 현관 신발, 조금 전까지 누군가가 있었다는 흔적들이 다현을 뒤흔들었다. 집안에 감도는 타인의 기척, 조금 전까지 유주헌이 있었다.

"유주헌……."


37)

코맹맹이 목소리로 축객령을 내리고 이불 위에 굳어버린 다현의 등을 보다 밖으로 나왔다.
집 열쇠를 꺼내려고 다현의 가방을 뒤지다 종합감기약 하나를 찾았다.

'이런 건 감기 기운 살살 돌 때에나 효과 있지.'

마음 같아서는 병원에 데려가고 싶었지만, 이미 문 닫은 시간이었고 응급실까지 가는 건 유난 떠는 것 같았다. 병원 약이 제일 좋을 테지만, 주헌은 아쉬운 대로 택시 타고 가다 본 약국으로 달려갔다.
약사에게 최대한 자세히 증상을 말하고 받은 여러 약과 체온계를 들고 다시 집에 오니 다현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사실 잠든 건지 기절한 건지 분간이 안 갔다. 바로 눕히며 이름을 불렀지만, 다현은 눈을 뜨지 않았다. 대신 끙끙대지도 않았다. 그냥 식은땀만 흘렸다.
주헌은 잠시 고민하다 이불을 들추고 다현에게 손을 뻗었다. 두툼한 겨울용 가디건 단추를 풀고 일할 때 입는 셔츠 단추도 푸니 내의로 입은 흰 반팔티가 보였다.
그냥 겉옷, 셔츠, 양말만 벗겨주자. 벗기고 약 먹이고 집에 가자. 내일도 출근해야 하고. 너무 과하면 다현이 거북해할 테니까. 사심을 느끼게 해선 안 된다.

'사심?'

다현의 상체를 받쳐 들고 가디건과 셔츠를 같이 벗기던 주헌의 손이 멈췄다. 미쳤구나, 유주헌. 지금 아픈 애 앞에 두고 무슨 생각을…… 왜 그런 생각을…….

"미치겠다. 미쳤다."

조금 거칠게 벗긴 가디건과 셔츠를 바닥에 두고 양말을 벗겼다. 안에 받쳐입은 셔츠가 식은땀으로 축축했지만, 못본 척 이불을 덮고 일어나 물을 떠왔다. 작은 냉장고 안에는 생수 몇 통, 반 쯤 먹은 참치캔, 포장도 안 뜯은 소포장 김치, 카페에서 파는 베이글 몇 개만 굴러다녔다. 어이가 없어서 냉동실까지 열어봤다. 언제 얼렸는지 모를 얼음과 비닐봉투에 담긴 음식물 쓰레기뿐이었다. 주헌은 못볼 것을 봤다는 듯이 물만 따르고 냉장고에서 멀어졌다. 보니까 밥솥도 없었다.

"대체 뭘 먹고 사는 거지?"

자기도 모르게 찬장을 열어보니 줄지어 늘어선 햇반과 캔, 레토르트 식품이 얼굴을 내밀었다. 기가 찼다.
컵을 들고 죽은 듯이 자는 다현의 옆에 앉아 똑똑 약을 깠다.

"저런 것만 먹으니까 아픈 거잖아."

대답은 없었다.

막상 약을 까고 나니 어떻게 먹여야 하나 싶었다. 어깨를 토닥이며 이름을 몇 번 부르니 눈을 반도 안 되게 떴다.

"약 먹자."

촉촉한 눈이 다시 감기기에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툭 쳤다. 다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반 정도 떴다.

"약 먹어야 돼. 먹고 자."

옷을 벗길 때처럼 등에 손을 넣어 받치고 먼저 입 좀 축이라고 입에 컵을 대주니 미간은 찌푸리면서도 입술을 내밀어 물을 받아마셨다. 주는 대로 약도 받아 물고 목울대를 울리며 꼴깍꼴깍 삼키는 게 귀여웠다. 그 모습을 귀엽다 생각하는 자기가 미친 것 같았다. 약 먹이고 물 먹이고 도로 눕혀 겨드랑이에 체온계를 꽂을 때까지 유주헌은 내적갈등을 일으켰다.
바닥에 놓인 가디건을 옷걸이에 걸고 셔츠는 빨래통이 없어 세탁기에 넣었다. 체온을 재는 그 짧은 시간동안 뭘 해야할 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는 자신이 바보 같았다. 주헌은 결국 다현의 옆에 앉아 다시 깊은 잠에 빠진 다현의 얼굴을 봤다. 아까 이마를 짚었을 땐 미열인 것 같았는데……. 다현은 자기 집, 자기 이불 위에서도 뻣뻣하게 굳어 식은땀만 흘렸다. 손으로 느껴지는 체온과 표정으로는 다현이 얼마나 아픈 지 알 수 없었다. 창백한 안색과 식은땀, 만져야 느껴지는 굳은 몸으로나 가늠할 수 있어서, 다현의 몸을 받쳤던 느낌 때문에. 주헌은 그만 가자고, 할만큼 했다고 재촉하는 뇌와 다르게 감히 이 갑갑한 집을 떠날 수 없었다.

다현의 얼굴만 보다 조심스레 체온계를 꺼내 형광등에 비춰봤다. 주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을 부비고 다시 체온계를 비춰봤다.
38.8도. 수은체온계는 변함없었다.
주헌은 다시 다현의 이마를 짚었다. 뜨뜻미지근하다. 미열이다.
뭐지? 왜지? 혼란 속에 전기장판이 눈에 들어왔다. 막혀있던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이 났다. 이것 때문이었어. 주헌은 전기장판을 끄려다 생각을 바꾸고 온도를 조금 낮췄다. 그리고 약을 먹일 때처럼 다현의 상체를 안았다. 휘청 꺾이는 목을 황급히 반대손으로 받치니 두 팔로 다현을 꼭 끌어안는 모양이 됐다. 전기장판으로 따끈따끈해진 다현을 안고 있으니 자기도 열이 올랐다. 전기장판 성능 좋네. 주헌은 다현이 나으면 어디 회사 건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얼굴까지 후끈했다.

탐나는 전기장판 효과가 떨어지고 다시 잰 체온은 38.6도였다. 고장난 거 아닌가싶어 자기 겨드랑이에 넣어보니 36.8도. 체온계는 멀쩡했다. 다현은 정말 많이 아팠다.
다시 가슴이 답답해졌다. 마음 같아서는 택시든 구급차든 불러서 응급실에 끌고 가고 싶었다. 밤이 새도록 돌봐주고 싶었다. 인스턴트, 레토르트 다 치워버리고 직접 요리한 음식을 먹이고 싶었다. 이 갑갑한 집에서, 사람 냄새 안 나는 창고 같은 이 곳에서 꺼내와 자기 침대에 재우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까지가 친구로 있을 수 있는 선인지, 다시 다현이 사라지지 않을 선인지 알 수 없었다. 아주 간단하고 상식적인 선일 테지만, 다현과 관련되면 그런 쉬운 것도 선택하기 어려웠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주헌은 다현의 핸드폰을 켰다. 분명한 것은 지금 다현을 혼자 둘 수는 없었다. 다현네 집이 이사 간 뒤, 다혜와도 연락이 끊겼다. 아직 서울에 있을지 분명치 않지만, 일단은 가족에게 연락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얼른 주소록을 누른 주헌은 순간 말을 잃었다.
카페, 사장님, 지하-민기, 카페-희은, 알바-신애, 알바-영민…….
유주헌.
카페 사람들 뿐인 주소록 속에서 발견한 자신의 이름이 이토록 이질적으로 느껴질 줄은.

엄마, 아빠, 어머니, 아버지, 동생, 여동생, 다혜.
통화 목록, 문자 목록, 주소록, 카톡 그 어디에도 그런 명칭은 없었다.
어디에도 가족은 없었다.

주헌은 핸드폰을 끄고 다현을 바라봤다. 제 집, 제 이불 속인데 송장처럼 뻣뻣하게 굳어서, 아플 텐데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식은땀만 삐질삐질 흘리며 홀로 아파하는 다현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대체 언제부터……?"

언제부터, 어떻게, 무슨 마음으로. 홀로 아프게 되었는지. 홀로 아프기로 하였는지.

주헌은 전기장판을 끄고 깨끗이 씻은 대야에 받은 물과 수건 여러 장을 챙겨왔다. 다현의 베개 위와 등 아래에 수건을 한 장씩 깔고 축축한 반팔티를 조심스레 벗겼다. 추운지 몸을 옹송그리는 다현을 달래며 물 적신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이마와 달리 몸은 왜 이리 뜨거운지. 너는 왜 이리 말랐는지.
주헌은 수건 아래로 느껴지는 다현의 몸을 신경쓰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의 몸을 닦고 잠옷으로 보이는 반팔티를 입혔다. 바지는 잠시 망설이다 불편해보여서 벗기고 편해보이는 반바지로 갈아입혔다. 이마에 물수건을 얹고 종아리와 발을 닦아줬다. 수건은 빨리도 뜨듯해졌다. 옷을 갈아입힌 뒤에는 얼굴, 목, 보이는 곳만 닦았다. 가끔 옷 안으로 손을 넣어 닦기도 했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 아주 가끔만.

자신이 옆에서 몸을 식혀준다고 다현이 눈을 뜨지는 않았다. 열은 더디게 내렸고, 그동안 다현은 끙끙 대는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쌕쌕 내쉬는 숨이 다현의 앓는 소리였다.
그래도 결국에는 열이 내려 다시 이불도 덮고 약하게 전기장판도 틀고. 꾹 다물렸던 입도 살짝 벌어졌다. 코가 막혀 새액새액 숨소리가 들린다. 주헌은 몇 번째일지 모를 체온계를 비춰보고 다현의 이마에서 물수건을 치웠다.
새벽이다. 몇 시간은 잘 수 있겠다. 조용히 뒷정리를 하고 행거 밑에 이불보로 싸인 여름이불을 꺼냈다. 불을 끄니 다행히 어둡다. 주헌은 조심조심 다현의 옆 바닥에 누웠다. 맨날 침대에서만 자다 맨바닥에서 자려니 어색해서 자리 잡기 어려웠다. 여러 번 뒤척인 끝에 다현을 등지고 자기 팔을 베고 자기로 했다. 그러다 문득 쩌렁쩌렁하게 울리게 해놓은 핸드폰 알람이 생각나 다시 몸을 일으키고 바닥을 더듬었다.

'이쯤 있을 텐데…….'

손끝에 차가운 금속이 만져져 얼른 집어서 켜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 다현의 핸드폰이었다. 솔직히 피곤했지만, 주헌은 혹시나 싶어서 다시 다현의 핸드폰 주소록을 열었다. 어쩌면 다른 이름으로 저장해놨는데 못 본 걸 수도 있었다. 주헌 본인도 형을 형이나 이름이 아닌 도움 안 되는 새끼라고 저장해놨으니까. 형 새끼는 저장해놓은 걸 감사해야 한다.
천천히 주소록을 훑던 주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내 이름 지나가지 않았나?'

주헌은 스크롤을 올렸다. 유주헌.
주헌은 스크롤을 내렸다. 주헌.
친구나 지인 중에 주헌이라는 사람이 또 있나. 주헌을 눌렀다. 익숙한 핸드폰 번호가 보였다. 자신의 핸드폰 번호였다. 주헌은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까지 유주헌으로 되어있는 게 자신일 줄 알았다. 깜빡하고 두 번 저장한 걸까? 아니면 다현에게는 자기가 아닌 다른 유주헌이 있는 걸까.
불쾌해졌다.
스크롤을 올려 유주헌을 눌렀다. 설마. 같은 번호겠지. 왠지 모르게 불쾌한 동명이인일리 없다며, 같은 번호를 기대하며 유주헌을 눌렀다.

번호는 달랐다.
주헌은 숨을 멈췄다. 다르지만 낯설지 않은 핸드폰 번호. 기억을 더듬던 주헌은 숨을 멈췄다.
그것은 고등학생 유주헌의 핸드폰 번호였다.

툭, 툭, 눈물이 떨어졌다. 감정보다 앞서 떨어지는 눈물에 당황해하던 주헌은 다현의 핸드폰을 쥐고 꽤 오랫동안 소리죽여 울었다. 오래 울었다.


1차 글러/BL(현대/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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