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여 운

뷔민 슈짐

 *The Little Mermaid : 인어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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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쌤도 게이에요?"


한가로운 오후, 상담실 안으로 기분좋은 따뜻함이 창틀을 비집고 들어왔다. 상담히 시작하고 30분이 지나서야 처음 나온 말에 윤기쌤은 살짝 지민을 쳐다보고선 다시 시선을 종이뭉치로 내렸다. 


"어."

"그렇게 막 말해줘도 돼요? 내가 소문내면 어쩌려고."

"별로 상관없어."


쌤은 보고 있던 서류 끝에 대충 사인을 한 뒤  일이 다 끝났는 지 안경을 벗고 콧잔등을 지그시 눌렀다. 옆에 둔 아메리카노는 지민이 온 뒤로 벌써 세 잔째다. 담배는 아직 비닐 포장 그대로 책상 한 구석에 올려져 있었다. 


"담배피고 커피 중독에. 쌤 그러다 일찍 죽어요."

"괜찮아. 오래 살아서 뭐해."

"그럼 조금 살아서 뭐해요."

"조금 살아도 하고싶은 거 다 하면서 막 사는 게 나."

"......왜 안물어봐요?"

"뭘."


커피의 플라스틱 뚜껑을 열고선 차갑지도 않은 지 얼음을 두세개씩 씹어먹으며 쌤이 대답했다. 


"쌤 남자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는 지."

"어떻게 알았겠지."

"원래 게이는 게이를 알아보잖아요."

"......"

"......농담이고, 봤어요."

"뭘."

"쌤이 남자친구랑 있는 거."

"남자친구?"

"네. 그 젊고 귀엽게 생긴 사람이요. 쌤 철컹철컹은 아니죠?"

"애인 아니야."


지민은 어제 밤 골목에서 젊은 남자와 있던 쌤을 떠올렸다. 분명...... 그 장면을 다시 생각하니 또 얼굴이 살짝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분명 키스를 하고 있었는데......

윤기쌤도 지민이 무슨 장면을 보았고 왜 얼굴이 붉은 빛이 됐는지 알았차리고선 한껏 비웃어보였다.


"뭐야. 겨우 그 것가지고 애인?"

"겨우......? 쌤 키스 했잖아요!"

"그래서 뭐."

"애인 아니에요?"

"키스 정도야 여기서 너랑 지금도 할 수 있는데?"

"네?"


얼굴이 타오르듯 벌게졌다. 지민은 저도 모르게 소리지르며 의자에서 박차고 일어나 바보 꼴이 되었다. 아직도 쌤은 '겨우 키스?' 라는 한 껏 여유만만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지민을 올려다 보았다. 괜히 시선을 맞추기 부끄러워 쌤 염에 세워져 있는 달력으로 이리저리 시선을 돌렸다.


"앉아. 정신없어."


또 한 번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쌤이 한 말에 지민은 고분고분 다시 의자를 정리하고 자리에 앉았다. 


"이런 애가 무슨 뭘 강제로 해."

"네?"

"됐다." 


쌤의 얼음 씹는 소리, 서류를 뒤적거리는 소리, 시계 바늘이 똑닥거리는 소리, 지민의 숨소리. 모든 것이 편안하게 상담실을 이루고 있었다. '아- 여기서 계속 있고싶다.' 의자에 몸을 깊숙하게 눌러 넣고는 멍하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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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앉아있으니 멀지 않은 과거가 생각났다. 분명 얼마 전 일인데 벌써 아득히도 느껴진다. 몇 번 째 상담이었던가. 그냥 반복적으로 들려오던 얼음 씹는 소리만이 선명하게 기억나고 나머지는 모두 흐릿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그때는 그냥 쌤이랑 하루종일 상담실에 박혀있는 게 유일한 재미였는데. 어느새 그것도 부담이 되고, 상처가 되고, 결국 이렇게 까지 왔다. 눈을 감으니 반복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그래. 지금은 이 안정감이 지민을 소속하게 해 준다. 목소리가 낮아서 그런지 태형의 숨소리는 무거운 저음이었다. 다른 생활의 소리는 울리지 않지만 얽히고 풀어지는 두 사람의 호흡이 컴컴한 방 안을 메웠다. 언제 눈을 감았던 걸까. 태형을 만나고 나서 며칠이 흐른 건 지 가늠할 수 가 없다. 그냥 시도때도 없이 눈이 감겼고 잠들기 전에도, 깨어나서도 태형이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자연스러워졌다. 만족스러워 하는 얼굴이 보일 때마다 안도했다. 날 버리지 않겠구나. 사랑해주겠구나. 


"일어났어?"

"응."

"조금 더 자자."

"너 민기 밥줘야지."

"알아서 잘 먹고 돌아다녀. 지민아. 더 자자."


뒤에서 어깨를 끌어안은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고분고분하게 말을 들었다. 낮은 웃음. 기분이 좋을 때 내는 소리다. 지민은 더이상 핸드폰을 찾지 않았다. 대신 방 구석에서 부숴진 핸드폰을 찾았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이렇게 된 거. 그냥 모든 것을 잊자고. 태형은 어디선가 항상 먹을 것을 얻어왔고 낡아보이는 집과는 다르게 돈이 모자란 일도 없었다. 덕분에 배부르게 먹고 자고. 점점 살이 붙어가는 모습을 보며 민기와 닮아간다며 놀리는 태형의 머리를 한 번 쥐어박아 주었다.  어느샌가 들어온 민기가 지민에게 한 발자국 떨어져 자리를 잡았다. 제법 도도하다 이건 지 절대로 품 안에 파고 들어온다던가 애교를 부리는 깜찍함은 없었다. 그래도 생긴 거 하난 귀여워서 푸스스 웃음을 흘리자 눈을 가리는 따뜻한 손이 느껴졌다. 


"민기 보면서 웃지마."

"왜?"

"그냥. 싫어."

"뭐야. 그런 억지가 어딨어."

"싫어."

"민기는 고양이야."

"싫어."

"태형아?"

"싫어."


커다란 몸이 대형견마냥 지민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말 잘 듣고 충직한 개 한마리를 둔 것 같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습윤한 숨소리가 쇄골로 떨어졌다. 깊고도 깊은 심해처럼 낮아 무엇이 나올 지 몰라 긴장되는 소리. 배 주변을 서성이는 커다란 손은 여전히 차가웠다. 하지만 무엇인가 애처로운 손끝에 거절하지 못했다. 그런 지민의 마음을 아는건지 태형은 곧바로 입을 벌려 혀로 새하얀 목덜미를 유린했다. 


"으읏...... 태형아, 잠깐만......"


이상한 느낌에 몸이 움츠려 졌다. 자신의 입을통해 나오는 얇은 목소리는 곧 부숴질 듯했다. 목에서 뱀이 기어다니는 것 같았다. 산수유같이 붉은 혀는 지민의 몸을 전부 먹어삼킬 듯한 위험이었다. 태형이 잘근잘근 목을 씹는 동안 손이 가슴께에 가있는 걸 알지도 못한 체 그저 '잡아 먹힌다.'라는 문구가 머릿속을 지배했다. 불쾌하게 자신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이상한 느낌이 무엇인지 제대로 감지하지도 못하고 지민은 울음을 터뜨렸다. 지민이 작은 소리로 흐느끼자 목에 찰싹 붙어있던 따뜻한 것이 멈칫하며 행위를 멈추었다. 가슴을 지분거리던 열개의 손가락도 다시 옷을 내려주고선 어깨를 끌어안았다. 한동안 쉼표와도 같던 방 안에는 울음소리와 묵색의 호흡이 음을 만들어냈다. 


"미안해."

"미안해. 지민아, 미안해."

"화내지마. 울지마. 내가 잘못했어."


태형의 목소리는 마치 문어마녀가 인어를 꼬드기는 것 같이 부드럽고 달콤했고 애처로웠다. 예전에 윤기쌤이 해주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다리와 목소리를 건 계약에서 주도권이 마녀에게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아니라는 것.그 아름다운 목소리. 자신은 가지지 못했던 그 목소리를 빼앗아올 수 있게 인어공주가 계약을 성립해야했다. 여유로운 웃음을 띄고있지만 사실 제일 간절한 건 마녀였다. 공주는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마녀는 아니었다. 어리석은 공주는 사랑때문에 그 기회를 스스로 져버리려 한다. 그 찬란한 빛의 세상에서 하나라도 내 것이 될 수 있다면! 말해야 한다. 인간의 다리를 원한다고. 자신의 옥구슬 같은 목소리보다 다리를 원한다고! 말해, 인간의 다리를 가지고 싶다고!

사실은 초조한 건 태형일 지도 모른다. 이런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지민이 이 암묵적인 계약을 끊어내고 도망가 버릴까봐. 끝까지 강제로 잡아다 둘 자신은 있지만 지민을 믿지 못했다. 침착하자. 이렇게 생각하면 끝도없다. 저 조그만 녀석을 어떻게 해야 꼼짝도 못하게 할 수 있을까. 작게 훌쩍이는 머리통은 힘을 조금만 준다면 펑하고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또 없어져버릴까봐. 손 안에서 사라져 버릴까봐. 커다란 두 손으로 할 수 있는 건 품안에 들어있는 몸뚱아리를 틈새없이 껴안는 것 뿐이었다. 더 이상 떨림이 느껴지지 않았다. 울먹이는 습기 가득한 숨 소리도 안정적으로 변해갔다. 민기는 지민을 울린 태형을 탓하기라도 하는 듯이 태형을 째려보며 긴 꼬리로 지민의 허벅지를 감아 쓰다듬어 주었다.

지민의 폰은 그 '윤기쌤'이라는 사람과 통화를 한 직후 부숴버렸다. 자기가 뭔데 박지민을 그렇게 불러? 데리러 온다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말만 앞세우는 사람들은 질색이다. 

자신은 해줄 수 있다. 지민이를 위해서라면 모든 지 해 줄 수있다. 곁에 있어준다면 모든지. 


"태형아."

"미안해."

"아니...... 그게, 아파. 너무 쎄게 안아서."


말을 하면서 붉게 달아오르는 목덜미가 귀여웠다. 순간 또 입술이 닿을 뻔 했지만 우는 걸 원하지 않아서 참았다.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 우는 것도 상관없다. 울던, 웃던 내 옆에서. 다시 한 번 '미안해.'라고 중얼거리며 작은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하지만 팔에 준 힘은 풀지 않았다. 미안하다고 하면 지민은 용서해주었다. 비 맞은 개처럼 미안하다고 중얼거리면 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계속 그렇게 나를 불쌍하게 봐줬으면. 


"지민아. 화났어?"

"화 안났어. 놀라서 그래."

"앞으로 안할게."

"......그냥 갑자기 해서 그래. 싫은 게 아니라."


아까보다 더 벌겋게 달아오른 목은 이제 뜨겁게 까지 느껴졌다. 길 잃은 개가 주인을 만난 것 처럼 머리에 얼굴을 이리저리 부볐다. 갸르릉 거리며 움츠리는 모습은 주인이 아니라 버림받은 고양이 같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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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과 함께 감상해주세요 

The little mermaid(인어공주) - under the sea]





"나 자전거 못타는데."

"여태까지 뭘 하고 산거야?"

"자전거가 없었어."


태형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지민은 정말 자전거에 발을 올려 본 적도 없었다. 유난스러운 부모님 덕에 자전거는 무슨 씽씽이도 타 본 적 없었다. 워낙 운동을 못해서 스스로도 딱히 타고 싶다는 생각을 안했었다. 어차피 넘어질 게 뻔하니까. 태형은 어디서 얻어왔는지 낡은 자전거 두 개를 집 앞에 세워두었다. 애써 가지고 온 거 이번기회에 타봐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는데 태형은 '그럼 어쩔 수 없지.' 하며 한 개에만 자물쇠를 채웠다. 


"내가 가르쳐 줄게."

"뭐?"

"가르쳐 준다고. 이거 쉽게 오는 기회 아니다."

"싫어. 비웃을 거잖아."

"안 비웃어. 내가 왜 널 비웃어?"


하지만 그 말은 얼마 안가 거짓말이라는 게 밝혀졌다. '안 웃는다며!'라고 소리치자 태형은 웃느라 시뻘게진 얼굴을 붙잡으며 더 크게 웃었다. 


"어떻게 한 발자국을 못가?"

"안해!"

"아니야. 미안해. 진짜로 안웃을게. 다시 해보자."


가르쳐 준다더니 멀찍이 떨어져서 웃기만 하는 태형을 한번 째려봐 주고선 다시 페달 위에 발을 올렸다. 이상하게 평소 운동에는 생기지 않았던 오기가 꿈틀거리며 올라왔다. 민기도 지민을 비웃는 듯이 헹 하며 코웃음만 치길래 어두워져 가는 하늘을 무시하고 손잡이를 잡았다. 심호흡을 하고선 안장에 엉덩이를 올리고 오른발을 움직였다. 이번에는 그래도 첫 발이 느낌이 좋다 싶어서 들뜬 마음으로 출발했지만 왼발을 페달에 두는 순간 또다시 몸이 휘청거렸다. 이번에도 넘어지는 구나. 하며 눈을 꼭 감았는데 이상하게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뗄 수가 없어."


깊은 목소리가 귀 바로 옆에서 가슴 속 끝까지 내리 꽃혔다. 쿵-하고 심장이 뛰는 느낌에 순간 손에도 힘이 빠질 뻔 했지만 곧 차가운 손 하나가 지민의 손을 감쌌다. 한 손은 지민과 같이 손잡이를 잡고, 나머지 한 손은 앉아있는 안장의 뒤쪽을 잡아 자전거를 고정하고 있었다. 


"계속 이러다가 팔 다리 부러지겠다."

"할 수 있어."

"잡아줄테니까 발 올려봐."


조심스럽게 다시 두 발을 올리자 손으로 고정된 자전거가 가만히 서 있었다. 하지만 인제는 넘어질까 두려운 것 보다 귓가에 가까운 목소리가 더 가슴을 떨리게 했다. 원색적인 목소리. 그저 지민에게만 향하는 목적에 주체할 수 없을만큼 심장이 반응했다. 


"오른 발 부터 천천히 눌러봐. 양 손에 힘 꽉 주고. 앞을 봐."


곂쳐져 있는 손을 보고있자니 아득해져서 얼른 시키는 데로 저 멀리 풀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저쪽 풀 말고 앞을 봐야지.' 하고 핀잔의 소리가 들려왔다. 한 발도 못 갔던 좀 전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나름 모양을 갖추어서 페달을 밟아 나갔다. '계속 해.' 하며 촉구하는 목소리에 어느새 발에만 집중해서 페달을 굴렸다. 이마에 스쳐 지나가는 선선한 바람에 산뜻한 기분이 들었다. '잘하네. 계속 밟아.' 라고 간간히 들려오는 목소리는 원동력이 되었다. 조금 더 속도를 내어 발을 밟으니 빠르게 지나가는 주변 풍경이 느껴졌다. 처음이었다. 자전거를 타 본 것은. 이 곳에 와서 태형과 하는 대부분의 것은 처음이었다. 전통시장도, 고양이도, 바다도, 하루종일 잠만 자는 것도, 자전거도. 얽매여서 살던 예전은 이제 생각나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휩싸여서 매질을 맞던 일도 희미해진다. 이 곳에 왜 왔더라. 왜 내가 죽으려 했었더라. 다시는 행복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쉼 없이 자전거를 몰자 앞에 돌이 보였다. 포장되지 않은 도로라 그런지 제법 커다란 돌이 길 중앙에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이대로 간다면 분명히 부딪힐 것이다.


"태형아, 이거 어떻게 멈춰?"


하지만 들려오는 건 바람소리 뿐이었다. 언제부턴 지 태형은 손를 놓고 저 뒤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어떻게 혼자 달린 거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돌이 점점 가까워 졌다. 지민이 계속 소리치자 태형도 돌을 발견하곤 '브레이크!'라고 외치며 뛰어왔다. 


"브레이크?"


체육시간에 배웠던 것들이 생각났다. 모두 시시하다며 제대로 듣지 않았고 지민도 관심이 없어 제대로 보지않았지만 어째서인지 문득 떠올랐다. 두 손으로 손잡이에 달린 브레이크를 힘껏 눌렀다.


"야! 이거 안되는데?"

"맞다, 그거 고장났다고 했는데......"

"뭐라고?"


지민이 말을 체 다 하기도 전에 몸이 붕 뜨는 것을 느꼈다. 자전거와 함께 한 바퀴 빙 돌고선 그대로 땅으로 쳐박혔다. 자전거와 함께 떨어져서 손잡이와 안장에 몸이 찍혀 고통이 밀려왔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옆구리가 아팠다. 


"괜찮아?"


헐레벌떡 뛰어온 태형의 얼굴이 하늘과 곂쳐서 보였다. 아까 넘어질 때는 그렇게 비웃더니 지금은 내심 심각한 표정을 지어보이고 있었다. 고장난 걸 먼저 알려줬어야지...... 가르치는 방법이 시작부터 잘못됐다고 꼭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하며 괜찮은 손으로 땅을 짚고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태형은 몸에 묻은 흙을 털어주며 계속 괜찮냐고 물어왔다. 잘생긴 얼굴이 걱정으로 물들어갔다. 몸이 아팠지만 웃음이 났다. 기침을 계속 해야할 정도로 숨이 차고 옆구리는 예전에 맞았던 것 보다 아팠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괘심한 태형의 손을 잡아다 끌어당겼다. 중심을 잡고 있지 않았던 몸은 지민의 몸 위로 넘어졌다. 가쁜 숨을 모는 가슴위로 태형의 넓은 가슴이 닿았다. 지민보다는 느린 숨이었다. 얼마간 그런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로 숨을 고르다가 삐죽삐죽 웃음이 터져나왔다. 한참을 웃자 태형은 양손으로 땅을 집고 위에서 지민을 뚤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다간 곧 따라 웃었다. 뭐가 그리 재밌는 지 한 참을 깔깔거리며 웃다가 옆구리가 아파 다시 기침을 하면서도 웃었다. 지나가던 할머니가 '길거리에서 뭐하는 거야!' 하고 소리를 칠 때 까지 우리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땅바닥에 널브러져서 웃음만 흘렸다. 





-





"고장난 걸 먼저 알려줬어야지."

"네가 돌같은 건 알아서 피할 줄 알았지."


태형은 지민의 얼굴에 난 작은 생채기 들에 약을 발라주며 변명했다. '아파!'하며 찡얼거리자 원래 상처는 다 아픈 법이라고 더 쎄게 손을 움직였다. 손이 얼굴에 닿는 느낌은 편안했다. 자연스레 눈을 감고는 멍을 때리고 있으니 얼마 안 있어 '다했다.' 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선 오는 길에 사온 매운 떡볶이를 먹었다. 태형이는 맵다고 콜라를 3캔이나 마셨고 지민은 이런게 뭐가 맵냐고 자신 만만 하다가 물로 입을 다섯번이나 헹구어야 했다. 항상 원하던 평범한 일상이 이제는 익숙해지고 있다. 아무런 방해도 없이 순탄하게. 당장 오늘 있을 일을 생각하면 내일은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평화롭고 즐거웠다. 태형와 있던 이 짧은 시간에 여태까지의 인생보다 더 많은 것들을 경험했다. 엄마와 아빠는 가끔씩 떠올랐지만 그 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가슴이 차갑게 식는 건 그들의 잘못이라고 하자. 

씻으러 들어간 태형이를 기다리며 의미없이 이제는 익숙해진 방을 둘러보았다. 새삼 구석에 놓여져 있는 장식함이 눈에 들어왔다. 가끔 태형이 저 앞에서 장식함을 바라보고 이상한 표정으로 서 있는 모습을 몇 번 본 것도 같은데. 정작 그 안을 여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뭐가 들어있는 거지? 좋지 않은 직감이 여태가지 저 안에 관심을 가지지 말라고 무의식중에 말했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조금 가까워 졌으니 상관없지 않을까. 이제 불안한 건 없지 않을까. 있다고 해도 없애면 된다. 태형은 자신을 좋아해 준다. 무슨일이 있어도 그러겠다고 말했다. 가슴 깊숙히서 여전히 다가가지 말라고 경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지만 무시했다. 궁금함이 앞섰다. 아직 화장실에서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나오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조심스럽게 장식함 앞으로 다가갔다. 잠겨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쉽게 결합 장치를 푸니 열렸다. 묵직한 뚜껑에는 유치한 장식이 가득했다. 마치 초등학생 만들기 시간에 만든 것 같은 모양새였다. 두뼘 정도 되는 크기에 맞지 않게 않에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작은 꽃모양 이름표 같은 게 들어있었다. 이름을 보기 위해 이름표에 손을 가져가 집었는데 심연에 잠긴 듯한 목소리가 행동을 포박했다. 


"내려놔."

"태형아?"

"내려놓으라고."


처음 듣는 더러운 흑색과도 같은 목소리는 이 공간 자체를 기묘하고 낯설게 만들었다. 이리저리 굴려지고 뭉개져서 더이상 본래의 색을 잃고 처절한 검은색이 된 지저분하고 소름끼치는 저음이었다. 아직 물기를 머금고 있는 머리카락에서는 물이 떨어져 똑. 똑. 거리는 소리를 만들어냈다.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두려움이 발가락에서 부터 끈적하게 몸을 기어 타고 올라왔다. 뒤를 돌아보고 왜 그렇게 화를 내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거. 놓으라고."


손 끝이 떨려왔다. 왜그래. 태형이잖아. 지금 뒤에 있는 건 태형이다. 전혀 무서워 할 이유가 없다. 마음을 다잡으며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손에 잡고 있던 그것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표정이 없는 얼굴은 지민이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저런 얼굴이 아니었다. 두시간 전 까지만 해도 더러운 흙바닥 위에서 어이없게 웃던, 떡볶이를 같이 먹으며 시시콜콜 거리던 사람이 아니었다. 


"태형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지만 태형의 눈은 지민이 아니라 그 이름표에만 고정되어있었다. 바라봐 주지 않았다. 그 눈은 지민을 향하지 않았다. 불러도 쳐다봐 주지 않았다. 대신 커다란 손으로 지민의 몸을 밀고선 장식함의 앞에 앉아 그것을 다시 똑바르게 놓고 뚜껑을 정성스럽게 닫을 뿐이었다.  방과 함께 저물어가는 뒷모습은 가슴을 쿡쿡 쑤셔왔다. 우물쭈물하며 그저 뒤에 서서 가만히 바라보았다. 침도 삼키지 않고 있자 태형의 목소리가 다시한 번 명령을 내렸다. 


"꺼져."


처음에는 잘못 들었나 싶었다. 병신처럼 '뭐라고?' 라며 다시 물어보자 바로 전과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꺼져."


태형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뒤에 누가 있는 지 알고 싶지도 않고, 알 필요도 없어 보였다. 도저히 다가갈 수 없는 경계선을 밟고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더이상 모진 소리를 듣기 전에 바로 뒤를 돌아 뛰어나왔다. 신발도 신지 못했다. 슬플 겨를도 없었다. 공포라는 원초적인 감정만 뇌속을 잠식했다. 문을 열고 나오자 턱. 하고 숨이 막혔다. 그래도 뛰었다. 호흡은 계속 조여와 이대로 있다간 질식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뛸 수 있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저 앞에 바다가 보였다. '그냥 이대로 뛰어들어가 죽어버릴까.' 라는 생각은 한 번 머릿속을 지배하자 암세포처럼 멈추지 않고 거대해져 갔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허탈했다. 허무했다. 역시 이렇게 되는 건가. 어차피 죽으려고 온 거 시기가 늦춰젔을 뿐이었다. 자신에게 행복함은 허용되지 않는 것이었다. 애초에. 처음부터.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졌으니 버티지 못하는 것이다. 인어공주가 다리를 가졌지만 결국 물거품이 되어 죽는 것 처럼. 가지지 못하는 것을 탐했다가 벌을 받는 것이다.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달리는 발을 멈추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거짓말 같이 파도가 몰아치는 물 바로 앞에 서자 몸이 멈추었다. 발가락에 간간히 닿는 차가운 물은 가쁜 호흡을 고르게 해주었다. 바다 앞에 망부석 처럼 서있었다. 그러자 점점 맨발로 달려와 발바닥에 이리저리 생긴 생채기들이 아픔을 호소했다. 죽으려던 주제에 발바닥이 아팠다. 여태까지 흐르지 않았던 눈물이 꾸역꾸역 밀려 들어왔다. 걸죽한 피가 역류하는 것 같았다. 파도가 들어서서 발을 간지럽힐 때마다 상처가 아파왔다. 손목의 오랫동안 묻혀있던 흉터도 저릿해왔다. 아팠다. 따가웠다. 오다가 유리라도 밟은 건지 피가 흥건했다. 

그대로 주저앉았다. 아팠다. 자살앞에서도 울지 않았는데 발바닥이 너무 아파 울었다. 그새 간사해진 마음에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살고싶었다.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고싶었다. 작은 생채기들은 저마다 아프다며 소리를 질러왔다. 이런 상처쯤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여겼었는데. 아프기 싫었다. 서러웠다. 살고 싶었다. 살고 싶다. 죽음의 문턱에서 무너져내린 몸뚱아리는 바다에 일렁이는 달빛을 따라 힘없이 흔들리기만 할 뿐이었다. 

사랑하는 왕자를 위해 물거품이 되어버린 인어가, 지민은 되어버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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