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숨에 달려 백현의 집 앞에 도착했다. 찬열이 몸을 숙이고 거친 숨을 몰아쉰다. 백현이 어디가지도 않을 텐데, 빨리 보고 싶어서 마음이 급했다. 잠시 숨을 고른 찬열이 백현의 집으로 들어선다. 이미 수도 없이 온 곳이지만 올 때마다 마음이 들뜬다. 준면이 비밀번호를 알려주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찬열이 사는 집은 아니니, 그건 정말 비상시에 써야할 거 같은 느낌도 들고 백현이 문을 열고 찬열을 맞이해주는 느낌이 좋아서 항상 벨을 누른다. 벨을 누르고 잠시 기다리니, 백현이 현관문을 열고 달려 나온다.


“뇨르뇨르야!”


저 어디서 온지 모를 별명 한동안 안쓴다 했더니 또 나왔네. 반갑게 맞이해주는 백현을 꼬옥 안았다. 훗날 가족이 생긴다면 꼭 이렇게 누군가 맞이해주는 집을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백현네처럼 마당이 있는 집에서 백현을 닮은 하얀 강아지도 길러야지.


“드러가자!”

“그래.”


백현이 척하고 하얀 손을 내민다. 찬열이 자연스럽게 그 손을 잡고서는 안으로 들어간다. 들어가자마자 한 번 더 꼬옥 끌어안고, 입술을 맞췄다. 너무 좋아서 조금 숨이 막힐 때까지 붙어있었는데도 백현은 발개진 얼굴로 헤헤 웃을 뿐이다.


“숨 안 막혔어?”

“으응, 쪼끔 그랬는데, 괜찮아아..”

“괜찮았어?”

“백혀니는 찬열이랑은 다 좋아야..”


웃는 백현이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백현이 들어가서 게임을 하자고 했지만, 찬열이 고개를 저었다. 둘이 있는 것만으로도 조금 머리가 아찔해지는데 백현의 향이 가득한 방안에 있으면 안 될 거 같아서였다.


“우리, 게임 대신에 만화영화 보자.”

“찬열이가 보고싶은 거 이써?”

“응, 찬열이가 보고 싶은 거 있어서. 괜찮아?”

“그럼 백현이가 형이잖어!”

“큽, 그래. 고마워, 형.”


선심쓴다는 백현의 말투에 찬열이 피식 웃었다. 나란히 앉아서 월-e를 보던 두 사람의 어느새 하나로 겹쳐져 있다. 찬열의 넓은 등에 백현이 폭 안긴 자세였다. 먼저 보자고 한 것은 찬열이었지만, 사실 이 애니메이션을 더 좋아하는 것은 백현이기 때문에 백현이 더 눈을 반짝거리며 티비화면을 보고 있었다. 여러번 봤는데도 질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백현따라 몇 번 본 찬열도 몇몇 장면을 외울 수준인데 말이다. 애니메이션이 끝날때까지 계속 빛나던 눈으로 집중하던 백현이 화면이 어두워지자 훽하고 찬열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만화는 뒷전이고 백현을 감상하고 있던 찬열이 화들짝 놀란다.


“백혀니가 차녀리 그려주꺼야!”


한참을 찬열의 품에서 바르작거리던 백현이 갑자기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 방에서 캔버스와 연필을 가지고 나온 백현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차녀리가 배켜니 모데리하는 거야아-”

“알겠어.”

“응! 이러케 안자서 쪼오기 바... 쪼기 있는 뽀로로 보고이써!”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얘기하는데 그 내용이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뽀로로라니. 작은 입을 쫑알거리던 백현을 보던 찬열이 백현이 가리킨 인형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 나쁜 일이 있었을까. 제 앞에 있는 백현을 보기만 해도 꿈만 같다. 너무 좋아서 저도 모르게 힐끗힐끗 자꾸 백현에게 눈이 간다.


“이잉! 쪼기 바야지!”


딴엔 제법 엄하게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그것마저도 너무 좋아서 웃음이 난다. 아, 중증이네. 힘들게 웃음을 참은 찬열이 다시 뽀로로 인형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목이 뻐근하다고 생각될 때 즈음, 백현이 캔버스를 들고 일어섰다. 백현이 그것을 찬열에게 건넸다. 천천히 눈을 내리자, 백현이 보는 찬열이 그려져 있었다. 찬열은 그다지 감성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미술작품을 보면서 눈물을 흘린다는 이들을 신기하게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백현의 그림을 보는 순간, 정말 왈칵하고 눈물이 나올 거 같았다. 코가 시큰해져와 찬열은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일부러 너스레를 떨었다.


“백현이는 내가 이렇게 보여?”

“아니이-!”


고개를 저은 백현이 양 팔은 잔뜩 벌려 원을 그려 보인다.


“차녀리는 이이만큼! 이만큼! 더 머시써! 왕쟌님 보다도 더어 머시써! 근데 배켜니가 이만큼 바께 못그려써...”

“......”

“그래서 대시네 사랑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려써! 이 선 하나마다 배켜니가 차녀리를 백개씩 백번 사랑하는 거야!”


그래서 그렇게 눈물이 날 거 같았구나.


“고마워, 백현아. 내가 받은 최고의 선물이야.”

“지인짜?”

“응. 누가 와서 백만원을 백번씩 준다고 해도 안 바꿀 거야.”


잠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왔더니(백현의 집에 제 옷을 여러 벌 갖다놓았다.) 만화영화도 보고, 그림도 그리느라 진을 뺀 모양인지 백현은 어느새 쌔근쌔근 잠이 들어있었다. 잠자는 모습만 보면 아기라고 해도 믿을 거 같은데. 찬열은 아직도 백현이 저보다 두 살이나 많은 형이라는 게 믿겨지질 않았다. 어휴 우리 애기형. 찬열보다도 통통한 볼살을 만지작거렸다. 백현이 으응-하고 잠투정을 부린다. 얼른 손을 떼고 볼에 쪽 뽀뽀를 해주니 금세 표정을 풀고 편안한 표정을 짓는다.


“아, 자는 것도 이렇게 귀여울 일이야?”


핸드폰을 꺼내 자는 백현의 사진을 찰칵찰칵 찍어댔다. 윽, 귀여워서 죽을 거 같아. 정택운도 이건 없을 걸. 조용히 강한 택운이었지만 탑시드 홈마(=찬열)에겐 당할 바가 아니었다.


잠든 백현을 구경만 했을 뿐인데 어느새 점심시간이 됐다.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가지. 백현이 점심 먹여야 하는데. 생각을 하며 채널을 돌리고 있는데, 마침 TV에서 자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식욕이 강한 편은 아니지만, 맛있게 먹는 사람들을 보니 조금 구미가 당긴다. 그럼 짜장면 시켜 먹어야겠다. 핸드폰을 꺼내 자장면을 주문시킨 찬열이 백현을 바라봤다. 자장면은 금방 올테니까 미리 깨워놔야지. 자다 일어나면 입맛 돌아오는데 시간 좀 걸리니까.


“백현아, 일어나.”

“으응...”

“일어나야지, 우리 백현이.”


백현에게 다가가 백현을 품에 안고 볼에 쪽쪽 입을 맞췄다. 백현이 부스스 반쯤 눈을 떴다. 그새 눈이 조금 부었다. 손가락으로 부은 눈두덩이를 살살 쓸어주니 눈도 잘 못 뜨면서 입술부터 내민다.


“차녀라, 뽀뽀오...”


아, 어쩌다 이런 끼쟁이가 된 거야. 사람 피말리게. 백현의 뒷목을 잡고 입술을 혀로 핥으니 자연스레 통통한 입술이 벌어진다. 작은 행동도 죽을 거 같다.한참을 에피타이저로 백현의 입술을 맛보던 찬열이 벨소리에 깜짝 놀라 백현에게서 떨어졌다. 찬열의 것인지 백현이 것인지 모를 타액들로 번들거리는 제 입술과 백현의 입술을 서둘러 정리한 얼른 나가 자장면을 받아왔다. 제가 시킨 건데도 뭔가 분해서 돌아가는 배달원을 살짝 노려봤다.


“어으, 왜 갑자기 추운지 솔묭해 줄 수 이써?.”


배달원(장이씽, 24, 특기: 혼잣말)이 팔을 쓸며 중얼거렸다.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자장면을 보면서 백현이 침을 꼴깍 삼켰다.


“짜장며니다! 짜장며니!”


전에 먹어본 적이 있던지 자장면이라고 좋아하며 작은 손으로 박수를 깔짝깔짝 친다. 아, 귀여워. 요즘 귀엽다는 말을 아주 달고 사는 거 같다. 포장지를 벗겨내니 고소한 냄새가 솔솔 풍겨온다. 백현이 저도 모르게 킁킁 거린다. 그 모습이 꼭 뼈다귀를 기다리는 강아지 같아서 찬열은 픽하니 웃었다. 젓가락으로 잘 섞어서 건네니 호로록 호로록 맛있는 소리를 내며 잘도 먹는다.


“아해.”

“아-”


위에 놓인 메추리알을 집어주니 아-하고 잘도 받아먹는다.


“다 묻혔네, 애기네. 으이그, 칠칠이래요.”


자장면 잔뜩 묻힌 백현의 얼굴을 찰칵찰칵 찍고 그제야 저도 자장면을 먹기 시작한 찬열이었다. 나란히 식탁에 앉아서 문득 조금 닭살스러운 생각이 든다. 이제는 이런 제가 어색하지도 않다.


“잘 먹었어?”

“잘머거써요오! 차녀리는요?”

“나도.”


갑자기 또 존댓말이야. 나 죽이려고 작정했나. 백현이 잘 먹어서 통통해진 배를 문질렀다. 눈은 부은데다가 입엔 자장면 소스가 잔뜩 묻었는데도 이놈의 콩깍지는 껌딱지처럼 단단하게 붙어있는 모양인지 마냥 귀엽고 사랑스럽기만 하다. 연애에 대해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이 단단한 콩깍지는 꽤 오랫동안 벗겨지지 않을 것 같다.


베르다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