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형은 아무래도 단단히 삐친 모양이었다. 근데 삐치던지 말든지. 스카우트 건으로 상의하고 싶은 게 있었던 것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아마 말한다면 뭐든 각자가 하는 건데 알아서 선택하라고 말 할 것 같았다. 그 대답을 들으면 나조차도 이성을 잃고 화를 낼 것만 같아서 묻고 싶지 않아졌다.


"늦는다 이거지?"


열한시를 넘긴 시각. 여전히 이민형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예전엔 안 그랬는데 이제 둘 다 자존심을 부리는 건지 먼저 연락할 생각도 없는 듯했다. 핸드폰을 힐끗 바라본 순간, 막 온 알람이 보였다. 설마 이민형인가 싶어 핸드폰을 들자 설마 했던 기대가 사라졌다.


[여주님 밤 늦게 미안.]


Baby 미안이었다면 내 마음이 달라졌을까. 나를 여주님이라고 부를 사람은 내가 기다리던 사람이 아니었기에 망설임 없이 온 카톡을 확인했다.


[내가 좋은 소식 들은 게 있는데... 사실 이거 나중에 다른 사람 통해서 들으면 내가 기분 상할까봐.]


다른 말도 아니고 나는 그 카톡을 보자마자 바로 알아버렸다. 아, 내 스카우트 소식을 들었구나 싶었고 동시에 든 생각은 아 이 사람 참 솔직하다였다. 기분 안 상하게 잘 말할 줄 알다니 역시 괜히 높은 직급에 있는 사람이 아녔다. 그래서 연락을 보자마자 냅다 전화를 걸었다.


"재민님... 미리 말씀 드리고 싶었는데 먼저 연락하셔서 감사해요."

-응 나도 사실 너무 좋은 제안이라 할 말을 잃었어요. 신생 회사라 끌어모아서 인재 영입하려는 것 같은데.


재민님은 내 연락을 기다렸다는 듯, 할 말을 하셨다. 인재라. 그렇게 말하는 재민님에 내가 풉하고 웃자 재민님은 왜 웃냐며 갑자기 급발진을 했다.


-아니 나도 여주님 엄청 공들이고 있잖아요. 솔직히 이건 나중에 얘기하고 싶었는데... 나는 여주님을 내 사업 파트너로 생각하고 있거든요.


사업 파트너라니. 재민님의 말에 나는 입을 떡하고 벌렸다.


"아니 저 그 정도의 사람 절대 아닌데요."


아무래도 재민님이 날 너무 고평가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같이 회사 키워보고 싶어요.


재민님의 말에 나는 여전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이 사람의 진심이 너무 크게 느껴져서 부담보다도 기대에 부응하고 싶어졌으니까. 회사를 키워보자는 제안이 아까 본 0의 숫자보다 훨씬 두근거렸다.


-내가 지금은 막 미국 가자고 조르는 여건밖에 안 돼서...마이쮸꾸미의 미래를 생각해야 하는 부모 입장에서는 어려운 선택이겠죠?


가족 전체가 이민을 간다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수도 있는 일이고. 재민님 역시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사업을 진행할 텐데 나 역시도 한 곳에 말뚝 박고 있을 순 없을테지. 그렇게 되면 기러기 엄마가 되는 걸까. 그런데 내가 진짜 애 셋이랑 이민형 두고 갈 수 있을까 고민이 되었다. 각자 알아서 해결하라는 말에 이렇게 잔뜩 삐친 이민형을 두고 갈 수 있을까.


-나 진짜 내 연봉 털어서 여주님 줄 수 있는뎅.

"거짓말."

-진짠뎅.


재민님의 말에 결국 심각해졌던 분위기는 웃음으로 무마되었다. 어찌 되었건 두 개의 좋은 제안이 들어왔고 선택은 나의 몫이었다. 아니? 이제 딸린 식구가 있으니 부부간 상의하고 결정해야 할 일이었다. 전화를 끊고도 한참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에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발 걸음이 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술 냄새가 풍겨오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예상을 전혀 못한 건 아니었는데 중요한 대화를 앞두고 기다리던 터라 맥이 풀렸다.


"...술 마셨어?"


비틀 비틀 걸어온 이민형은 제 앞에 선 나를 보고 헤헤 웃었다.


"베뷔 화나따."

"아무리 취했어도 얼굴만 보고 화가 난 줄 아는 모양이네."

"오브콜스!... 우린 부booooo인데...."


이민형이 입술을 쭉 내민 채 순간 휘청거리자 나는 그의 멱살을 살짝 잡았다.


"정신 차려. 애들 다 깨울 거야?"


내 말에 이민형은 제 입술에 검지 손가락을 대고 쉬이이하는 소리를 냈다.


"아니이..."


그렇게 이민형의 멱살을 잡고 질질 끌고 가자 그는 또 반항 없이 내게 끌려왔다. 조용히 안방 침대에 그를 앉히고 문을 살짝 닫았다. 아이들이 우리 부부 싸움 하는 걸 절대 몰랐으면 했으니까. 아예 각을 잡고 대화 할 거라는 걸 알았는지 이민형은 입술을 삐죽이더니 넥타이를 손으로 잡아 풀었다.


"베이뷔 어떻게 그럴 쑤 이써? 나 솔찌키 많이 서운해."


서운해 할 거라는 것도 알았는데 대뜸 제 감정을 드러내는 이민형에 나 또한 감정이 훅하고 올라왔다.


"야. 내가 더 서운해."

"...야?"


이민형은 뭔가가 툭하고 끊긴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치기 어린 말투와는 달리 눈가가 벌겠다.


"내가 왜 서운한지 몰라?"

"...알아."

"아는데 왜 그랬어?"


아는데 이렇게까지 서운해하는 건 이해가 안 갔다. 그게 그렇게 서운한가. 평소라면 나 서운행 하고 넘어갔을 텐데 똑같이 너도 당해보라는 식의 태도로 나오니까 나도 화가 났던 거였다.


"너도 나 이해 안 간다고 이렇게까지 할 일이야?"


내 말에 이민형은 대답 대신 후우 하고 진한 한숨을 뱉어냈다. 한숨에 섞인 술 냄새에 미간을 찌푸렸다.


"술까지 마시고. 잘 했네."


비꼬듯하는 내 말에 이민형은 눈을 가늘게 떴다.


"누구 때문에 좀 마셨네요."


깊어지는 감정의 골. 누구 하나 질 수 없는 팽팽한 기에 결국 긴 정적이 이어졌다. 그때. 훌쩍하고 이민형이 소리를 내더니 고개를 돌리는 거였다. 아구 서운했구나. 나도 모르게 마이쮸 대하듯 달래는 말이 나올 뻔해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런 내 얼굴을 이민형이 보지 못한 게 다행이었다. 뭐가 그렇게 서운하니 민형아. 돌린 고개, 삐죽 튀어나온 잔머리까지. 네가 나 때문에 삐친 모습을 바라보자 그냥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이민형이 져줬던 매번의 싸움의 끝과는 다른 분위기에 결국 나는 두손을 들었다.


"...오케이. 내가 졌어 민형아."


완벽한 패배였다. 보기만 해도 귀여워서 웃음이 나오는데 무슨 싸움이 되겠나. 패배 인정은 의외의 대답이었던지 이민형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너는 모르겠지만. 네가 날 사랑하는 만큼 나도 널 많이 사랑하니까. 그 조그맣고 빨개진 코에 입을 맞추고 사랑한다고 밤새 속삭이고 싶었다. 상처 난 마음을 어루만져주며 미안하다고 말해줄 수도 있었다.


"각자 알아서 하자는 말, 서운했을 것 같아. 상황에 따라 그런 건 혼자 해결하려고 했는데 민형이가 내 말을 오해한 것 같아. 너 말대로 우린 부boooo잖아."


내 말에 이민형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더니 곧 굳은 얼굴이 눈 녹듯 풀어졌다.


"나도 유치하게 굴어서 미안."


응 너 좀 유치했음. 나도 동의하자 이민형이 풉하고 웃었다. 그러더니 내게로 대뜸 두 팔을 뻗는 거였다. 뭐 하자는 건가 싶어 물끄러미 바라보자 이민형은 입술을 쭉 내밀었다.


"화해의 포옹."

"왜 이렇게 애 같이 굴어."


안아달라는 제스쳐에 당장이라도 껴안아 줄 수 있지만 툴툴거렸다. 그치만 비뚤어진 내 사랑의 방식에 이민형은 이미 완벽한 해답지를 들고 있었다.


"안아주면 다 풀릴 것 같네요."


이럴 때 보면 연하는 연하였다. 못 이기는 척 한 발자국 다가가자마자 이민형은 내 팔을 잡아끌어 제 품에 나를 끌어당겼다. 그럼 난 자석에 이끌리듯 이민형의 품에 안착하는 구조였다.


"술 냄새."

"고양이같애. 맨날 튕겨."


좋으니까 튕기지. 튕겨도 받아줄 사람인 거 아니까. 나도 누울 곳 보고 발 뻗는 거였다. 따끈하게 울리는 심장 소리에 안정감이 들었다.


"민형아."

"응."


내 정수리에 코를 박고 숨을 깊게 들이 마쉰 이민형은.


"근데 앞으로 따로 할 일이 생길 것 같은데... 그럴 때마다 영통을 해야 하나?"


내 말에 숨을 토해내듯 뱉어냈다.


"What?"







이민형은 좋은 아빠인가 ²

프레이즈








"What? Wild goose mom?"


이민형은 인상을 찌푸리고는 말도 안 된다며 중얼거렸다. 재민님의 계획은 곧 기러기 엄마를 뜻한다는 걸 알아채곤 침대에서 방방 뛰어댔다.


"재민님... 진챠... 혼나야겠다."


혼자 막 그러더니 이제는 침대에 벌러덩 누워서 영어로 뭐라 뭐라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고민을 하는 듯 해 그냥 내버려 두고 화장대 의자에 앉자 이민형이 천장을 보고 누워 말했다.


"Baby만 괜찮으면 넌 일하고 난 주부 해도 돼."

"주boooo?"

"엉. 주boooo."


한껏 힘이 빠진 목소리였지만 내 장난을 받아주는 이민형이 귀여웠다. 누워 있는데 입술만 삐죽 나온 걸 보고 참지 못했다. 침대를 올라 이민형의 위로 올라타자 고민스러운 얼굴이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왜 쉬운 게 없어."


이민형의 말대로였다. 한 번도 비관적으로 굴지 않던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자 나 역시 미안해졌다.


"주부면 살림을 잘하셔야 하는데... 어떻게 가능하시겠어?"


애써 아까의 화제로 되돌아가려고 장난스레 분위기를 풀어보려 했다. 그런 내 의도를 알아챈 이민형은 내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노력해야지..."

"너 하던 일은 어쩌고 주부가 되려고 해."

"그게 중요해? Baby가 나랑 떨어진다는데!"


내 말에 결국 참지 못한 이민형이 미간을 찌푸리며 상체를 살짝 일으켰다. 그 덕에 나는 이민형의 허벅지 위로 앉아 그의 코를 손가락으로 톡하고 쳤다.


"안 떨어지는 방법도 있긴 하잖아."

"그러고 싶어?"


이민형이 물었다. 우리가 안 떨어지려면 내가 새로 스카우트 받은 회사로 가는 방법도 있기는 한데. 내가 망설이자 이민형은 중얼거렸다.


"너무 잘난 것도 죄다 Baby."

"아니 말을 왜 그렇게..."


그러더니 이민형은 내 허리를 양손으로 잡고 나를 번쩍 들어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는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가는 거였다.


"...내가 아직 간다고 안 했잖아. 너의 의견이 중요하지."


이민형의 뒷모습에 대고 외치자 냉장고에서 생수를 가져온 이민형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가지 말라고 하면 안 가고?"


그의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이민형이 가지 말라고 하면 정말 안 갈 수 있나. 나는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언제든 뭐든 내 뜻대로 했던 나였음을. 이번 한 번만 너에게 져준 거였지만 수백번을 내게 져줬던 이민형은 말 없이 물을 들이켰다. 그런 이민형을 바라보다 나는 필터링 없이 마음의 소리가 나왔다.


"보내줘."


그리고 내 말에 이민형은 물을 질질 흘리며 못 믿겠다는 듯 나를 보았다. 그리고 나 역시도 내 입에서 나온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치만 이게 내 진심이라면? 모든 게 타이밍인데 이걸 놓치면 정말 영영 이런 제안이 들어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게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내 마음 확실히 알았어. 이기적이라고 욕해도 좋아."


내 말에 이민형은 여전히 물방울이 턱 끝에 맺힌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근데 너니까... 나 이해해줄 거라 믿어."


책임감 없는 엄마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좋은 아빠인 이민형을 믿었다. 그리고 염치없는 아내일지도 모르지만 좋은 남편인 이민형을 믿었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 당당했고 언제나처럼 그 믿는 구석은.


"...알아서 해."


결국 언제나처럼 내 뜻을 따라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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