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쌍흑 전력 참여 글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 불이 말 없이 녹는 밤
오동(梧桐) 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 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조지훈 - 승무 



-


내가 할 수 있는거라고는 너를 바라보는 일, 그 뿐이였다. 나는 아무런 힘이 없었고 너를 지지해줄수도 그렇다고 반대할 수도 없었다. 지금 이 불빛아래에서 네 유려한 몸짓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그저 감고 싶은 눈을 감지 못하고 덜덜떨리는 내 손을 서로 부여잡는 수밖에. 그렇게라도 해서 나는 너를 보아야 했다. 너를 봐주어야만 했다. 나는 내 죄를 마주할 용기가 없으므로 사죄하지 못하므로.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속에서 네 무대는 이 조그마한 가로등이 비춰주는 그런 뿌연 타원형의 빛이 다였다. 네가 정한 무대였으며 나는 그것에 따라야했다. 네 손끝과 발끝 그리고 온 몸을 보고 있노라면 그 날은 꼭 악몽에 시달리곤 했지만 그래도 내 시선은 언제나 너를 향해있었다. 네 춤의 클라이막스는 언제나 눈물로 장식했으며 나는 그것을 닦아줄 수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 유일한 관객으로써 느릿한 박수를 쳐주는것이 다였다. 그리고 너는 그 소리에 아이러니하게도 웃어주었다. 


네 춤은 그날을 상기시켰고 그날은 어김없이 꿈속으로 나를 찾아왔다. 처절했던 그 날, 나와 마주쳐버린 너의 그 눈빛을 나는 죽어도 잊을 수 없을거라 생각했다. 너는 그 일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우물쭈물하던 나를 그저 지긋이 바라보기만 했지만 나는 그런 너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 때의 우리는 고작 고등학생일 뿐이였다. 






靑春舞 (푸르른 봄의 춤)  上


- 언젠가 네 춤은 그렇게 말했지. 괜찮아- 라고




네가 있는 곳은 내가 돌보아 주고 싶어서 나는 비겁하게도 '소꿉친구'라는 지위를 빌려 조금 더 노쇠하신 너의 어머님께 말씀드렸다. 작은 부분들을 굳이 신경쓰실 필요 없이 자신이 하겠다고. 너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눈물짓기 일쑤이신 네 어머님은 마지막으로 뵈었던 그 때보다 조금 더 마르셨었다. 나는 그런 네 어머니의 슬픔, 그 틈을 파고 들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제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시는 어머님에 나는 웃기게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었다. 


"어때?"


오늘의 꽃은 내가 제일 좋아했던 수선화였다. 쭉 뻗은 아름다운 자태가 꼭 너를 닮았다고 생각했었다. 너를 생각하여 사오는 꽃들은 하나같이 우아하고 아름다웠지만 청초하며 고독했다. 어쩌면 내가 좋아하는 꽃들이 실은 너를 닮은 꽃들 뿐이라 그런 것 일지도 몰랐다. 이 곳에 발을 들일 때마다 하나씩 심던 버릇을 들인 탓에 어느새 온통 꽃밭으로 변해버린 주위를 보며 나는 마른세수를 했다. 어디선가 네가 보고 있길 바라며 하는 이 짓들이 부질없는것이 아닐까 싶었다. 너보다 내가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었던적도 있었지만 결국, 나는 여기를 떠날수없다는것을 깨달았다. 


"아쿠타가와, 여긴 어때? 높은 곳이라 전경이 끝내주지?" 


어느새부터인가 혼잣말이 익숙해져버려서 처음의 쑥쓰러움조차 없어져버렸다. 나는 너가 나를 잊지 못하도록 우리의 일들을 하나씩 얘기해주었다. 더도 덜도 말고 한번에 하나씩만. 부스럭거리며 가방속에서 꺼내든 것은 우습게도 너와 나의 이야기로 가득 적셔진 다이어리였다. 손때가 많이 묻어 종이자국이 일어난 곳도 많지만 어느 누구에게 줄수도, 보여줄수도 없는 오롯이 나혼자 안고 가야할 것들이었다. 


"오늘은 말이야-"


접힌 부분을 펴고 빽빽하게 적힌 페이지를 한번 훑었다. 너를 잊지 않기위해 나는 너와 있었던 일을 필사적으로 적어나갔다. 오늘이 아니면 없어져 버릴 기억들같아서 나는 손가락이 아프고 벗겨져도 끝까지 적어나갔다. 어디서든 너가 생각나면 펜을 꺼내들고 손에 단어라도 적었다. 그런 날은 어김없이 손가락이 부서질 것 같았다. 


"내 죄에 대해 이야기 해줄께. 너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거든"


아무에게도 이야기 하지 못했고 너에게만 털어놓는 내가 한없이 비겁했지만 더 미룰수도 없었다. 아니, 이제 미루는 것에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더이상 너에게 용서를 구할 수도 없으니까 말이야. 그때의 나는 너에게 말할수가 없었어. 말해버리면 마치 인어공주처럼 너가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릴 것 같았거든. 근데 이젠 괜찮은 것 같아. 여기엔 듣고 있을 너만 존재하니까.

 

-


"아쿠타가와!"


이럴것같았다. 그래서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다. 온통 아이들에게 둘러쌓여버린 아쿠타가와를 보고 싶지 않았다. 친구들의 말에 아무런 말도 없이 힘들게 제자리를 찾아 앉아버린 아쿠타가와는 어떠한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 광경이 너무 끔찍해서 나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떻게 된거야?"
"학교는? 와도 괜찮은거야?"
"누가 그랬어?!"


귀를 막고 있어도 들리는 저 수없는 질문들에 아쿠타가와는 베이고 또 베였다. 답이 없는 질문들을 아이들은 끊임없이 던졌고 또 재촉했다. 단순한 호기심에 빛나고 있는 눈동자들이 빛을 내면 낼수록 아쿠타가와는 빛의 이면의 짙어지는 그림자에 숨을 수밖에 없었다. 글자 한마디 한마디에 무너져가는 저 마음을 나는 짐작조차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벌써 재가 되어버렸을지도 몰랐다. 


"아츠시... 넌 왜 안물어봐? 뭐 알고 있는거라도 있어?"
"아니"


제 앞에 앉아 물어보는 반장을 얼굴에 나는 아무것도 말할수 없었다. 들어버린 것, 봐 버린 것 그 어떠한 것에 대해서도 나는 아무것도 얘기할 수가 없었다. 아쿠타가와가 얘기하지 않았고 혹여나 그가 이에 대해 입을 연다고 해도 나는 말할 수가 없었다. 그 날, 나는 그곳에 있으면 안되는 것이였다.

 

해는 저물었고 아쿠타가와는 조퇴를 하였다. 그리고 나 또한 조퇴를 해버렸다. 하루종일 구역질이 날 것같은 분위기 속에서 스트레스 받아서 그런지 열이 나버려서 담임은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나에게 도장을 찍어주었다. 교무실도 상실감이 크다며 가장 친한 친구인 네가 위로를 잘 해주라는 식의 담임의 중얼거림을 얼핏 들은 것 같기도 했다. 다들, 아쿠타가와 얘기뿐이였다.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남의 얘기를 하느라 정신없었다. 


오늘의 화제가 된 소년은 하나를 잃고 두개로 지탱했다. 그 힘든 걸음걸이 한걸음 한걸음을 나는 천천히 뒤에서 밟아갔다. 같이 걸을 수 없으니 뒤에서 한발자국씩 따라서 움직였다.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한 길바닥이, 곧 어두워질 이 곳이 왠지 지금의 너에겐 위험할 것 같았다. 엄한 걱정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나에겐 그저 너를 보고 있는 이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아츠시"


한숨이 섞인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얕은 숨을 계속해서 내뱉으며 서버린 소년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자신의 뒤에 내가 있다는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너에 놀라지 않았다.

 

"응"
"괜찮아"


무엇이 괜찮다는 것인지 말해주지 않았지만 서로가 알고 있었다. 너와 내가 소꿉친구라는 사실이 지금처럼 증오스러웠던적이 있을까. 너와 내가 이렇게나 많은 것들을 공유하고 있는 사이라는 것이 미웠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너에게 '뭐가 괜찮다는거야?' 따위의 질문을 했을텐데.

 

"네가 그런것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괜찮아"


시선을 마주하고 얘기하지 않았지만 네 표정쯤은 눈을 감고도 알수있었다. 아아 너는 체념을 해버렸구나. 벌써.  

"이제. 더이상..."
"응. 맞아"


너는 내가 말을 잇지 못해도 알아주었고 나는 그 대답에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감히 막을 수 있는 범위는 아니였지만 그 상황속에 방관자가 되어버렸던 자신을 내가 질책하는 방법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도 나에게 잘못했다고 너가 책임지라는 말같은건 할 수 없었지만 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건 뭘까. 어설픈 위로조차 해도 괜찮은것인지 알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날의 너와 나는 오랜시간을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보지 않은채 보듬어주었다.

 

-


너에 대한 관심도 점차 식어 아무렇지않게 섞여 살 수 있게 되었던 고등학교 삼학년, 그 해 겨울이 지나고 이듬해에 우리는 대학생이 되었다. 여전히 우리는 친구였고 우연인지 운명인지 과는 달라도 같은 대학을 진학하게 되었다. 누구는 징하다고 그랬고 누구는 부럽다고 그랬다. 하지만 우리는 벌써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았다. 다만, 우리는 서로를 보며 다른 웃음을 지었을 뿐이였다. 


"공부많이 해야겠네"
"그러게"


어느새부터인가 적어져버린 네 말수는 나를 수다쟁이로 만들었다. 원체 말이 많은 아이는 아니었지만 내 말에 간간히 장난을 쳐오곤 했었던 너는 추억속의 한 장면이 되어버렸다. 그 때가 그리웠지만 이제는 영영 그 때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내가 수다쟁이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단지 네 변화를 네가 알아차리지 못하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여전히 그 시간에 머물러 있었으며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츠시, 너는 좋겠다"


봄내음을 담은 바람에 실은 네 조그마한 말에 나는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왜라는 시덥잖은 물음까지도 던질수없는 내가 진절머리가 났다. 이 말을 하는 네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서 더더욱 나는 내가 싫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어깨에 매고 있는 바이올린 가방을 꾹 쥐는 것 뿐이었다.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너를 뒤늦게 따라갔다. 네가 들고 있는 책의 무게는 온전한 책의 무게가 아니라서 나는 네가 걷는 걸음마다 네가 알지 못하게 가방의 밑창을 받쳐주었다. 분명 마음의 무게만으로도 너는 충분히 무거울테니까. 


너는 언제나 착실한 학생이였다. 그때조차도 착실한 학생이였다. 조그마한 소망을 입밖으로 내어버리고 남은 것은 처참한 결말밖에 없었다. 찢어발기어져 버린 네 소망의 잔해들을 평생 짊어지고 다니게 되어버린 너는 하루하루 시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유일하게 그 사실만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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