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다.

불이 꺼진 자신의 방 천장이 잠에서 깬 레너드의 눈에 들어왔다.


레너드는 잠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알람 소리가 울리고 불이 켜져야 눈이 떠지곤 했다. 이렇게 일찍 눈이 떠지다니, 기분이 묘한걸. 기지개를 켜면서 레너드는 세면대로 향했다.


샤워를 하고, 유니폼을 꺼내 입어도 평소와는 다른 기묘한 이질감이 계속해서 레너드를 따라붙었다. 그저 어제와도 다를 바 없는 아침일 뿐인데. 결국 그는 묘한 감각이 어디에서 느껴지는지 원인을 찾지 못한 채 출근을 하기 위해 메디베이로 향했다.


메디베이로 가는 복도조차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왠지 조금 색이 바랜 것처럼 탁했다. 잠을 못잔 것도 아닌데, 내가 지금 피곤한 건가? 레너드는 괜시리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안녕하세요, 닥터.


닥터, 좋은 아침입니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대원들이 그에게 인사를 전하자, 레너드도 고개를 끄덕여 줌으로써 화답해 주었다. 오늘따라 대원들의 미소를 띤 얼굴이 어딘가 어색했다. 삭막하고 건조한 느낌. 게다가 유난히 많은 레드 셔츠의 대원들이 복도를 오가고 있었다. 잠든 새에 함선에 무슨 일이라도 있던 것일까? 고개를 갸웃하며 메디베이로 들어선 그는 곧이어 밀려드는 업무에 집중하느라 더 이상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오늘따라 새로운 시약 연구 과제들과 메디베이로 찾아오는 환자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레너드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오전 시간을 보냈다. 잠시 의자에 걸터앉아 한숨 돌리고 있을 때, 함교에서 호출이 왔다.


본즈, 지금 당장 함교로 와줘.


오늘 처음으로 듣는 커크의 목소리. 커크는 뭔가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인지,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짐, 나 지금 바쁜데. 무슨 일이야?


내가 지금 엄청난 행성을 발견했어! 완전히 새로운 곳이야. 모험 냄새가 난다구.

우리 저 행성 탐사 다녀오자!


기쁨에 찬 커크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레너드는 아파오는 관자놀이를 꾸욱 눌렀다. 또 잔뜩 위험한 냄새가 나는 곳을 찾았군. 짐 저 자식은 내가 싫다는데도 왜 자꾸 데려가려고 하는지, 원. 물론 그 이유는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단 둘이 보낼 시간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겠지.


Damn it, 짐. 난 의사지 모험가가 아니야. 네 들뜬 목소리를 들으니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잘 알겠군 그래.


아아, 알겠으니까 우선 함교로 와줘, 본즈. 얼른!


이미 잔뜩 신이 난 커크는 레너드의 대답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호출을 마쳤다. 레너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항상 안가겠다며 으름장을 놔도, 커크가 보석같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부탁할 때면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핫 하고 정신을 차려 보지만 이미 때는 뒤늦은 후였고,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울며 겨자 먹기로 따라 나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뭐, 사실 단 둘이 시간을 보내는 것은 나쁘지 않았으니까. 아니, 사실 둘만이어서 좋았던 적이 더 많은 것도 같다.

이번에도 그 아름다운 눈에 내가 질 수밖에 없겠지. 피식 웃음을 흘린 레너드는 메디베이를 나서서 함교로 향했다.


어때, 본즈.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커크는 새로 발견한 행성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연신 설명하면서 어찌나 신이 났던지 볼까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레너드의 눈에 보이는 그 행성의 모습은 불안과 걱정, 그리고 불길함을 한데 뭉쳐놓은 덩어리 처럼 보였다.


벌써부터 끔찍한데. 꼭 가야되는 거야?


응, 두근두근하잖아! 저 곳에 꼭 본즈와 둘이서 가고 싶어.


커크가 해맑게 웃으며 대원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말하자, 레너드가 그만 사레들린 기침을 몇 번이나 해댔다.


나랑 단 둘이서?


응. 둘이서만. 오붓하고 좋잖아?


보석같은 눈을 빛내며 천진난만하게 웃는 커크를 보자, 레너드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젠장, 오늘따라 더 예쁘잖아. 오늘따라 커크의 말에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원체 예쁜 얼굴을 하고 능글능글 가슴 설레게 하는 말들을 잘 던지는 커크지만, 업무 중에는 전혀 그런 적이 없었는데. 아침에 느꼈던 그 기묘한 이질감이 다시금 스멀스멀 레너드의 발목을 잡았다.


별로 예감이 좋지 않은데.


그러지 말고, 본즈. 나랑 같이 가자! 바깥 공기도 쐴 겸, 기분 전환도 하고. 오랜만이잖아. 둘만의 시간을 갖는 건.


커크의 손이 부드럽게 레너드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을 장난스럽게 지분거리더니, 피부에 닿을 듯 말 듯 천천히 팔을 쓸어올렸다. 살과 살이 스치는 아찔한 느낌에 레너드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가, 대원들이 모두 자신들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아, 알았어. 짐. 갈게, 간다고!


오옷, 좋았어! 그럼 당장 전송실로 가자!


아무렇지 않게 생글생글 웃는 커크를 보니 레너드는 기가 찼다. 대원들의 눈은 전혀 신경쓰지 않고 오늘따라 적극적인 그의 모습이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커크는 레너드의 손을 꼭 잡은 채 함장석을 박차고 일어나 전송실을 향해 앞서서 걸어갔다.


신나지 않아, 본즈? 가장 먼저 행성에 도착하면 우리 뭐부터 할까? 행성 탐사도 좋지만, 오랜만인데. 본즈가 원하는 걸 해도 좋고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커크는 킥킥거리고 웃었다. 얼굴이 붉어질 만 한 말을 서슴없이 꺼내며 레너드의 손을 잡아당겨 자신에게 밀착시키자, 레너드의 심장이 아까보다 더 심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짐, 임무 중에는 이런 적 없었잖아.


부끄러움에 귀가 새빨개진 레너드가 커크의 팔을 슬쩍 밀어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커크는 손을 빼내기는커녕, 장난꾸러기같은 미소를 지으며 레너드의 팔을 꽈악 껴안았다.


본즈와 같이 가는 것이 좋아서 그래. 어디까지나 함께 해 줄 거지?


레너드는 걸으면 걸을수록 이상하게 더욱 달라붙는 커크를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들을 스쳐 지나가는 다른 대원들은 어떤 표정도 짓고 있지 않았다. 기묘한 삭막함에 오싹한 기분마저 들었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전송실로 가는 길이 더 먼 것처럼 느껴졌다. 색이 바랜 듯이 보였던 복도는 앞으로 나아갈수록 점점 낡고 녹이 슬어 가는 듯이 색이 짙어졌고, 두근거리던 레너드의 심장은 이상할 정도로 심각하게 쿵쿵거려 숨을 쉬기 힘들었다.


윽, 짐, 내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아무래도 가지 않는게...


안 돼, 본즈. 가기로 했잖아. 가야만 해.


숨을 헐떡이는 레너드를 보며 커크는 웃고 있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저 멀리 있는 것 같이 느껴졌던 전송실이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왔다. 커크는 본즈를 붙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레너드를 끌고오다시피 하면서 전송실로 들어갔다.


쿠웅!


레너드는 누군가 자신의 가슴을 강하게 내려친 것 같은 통증이 느껴져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후들거리던 다리는 버티지 못하고 차츰 무너져 내렸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쌕쌕거리며 레너드는 커크를 올려다보았다.


커크는 아까와 변함없이 예쁘게 웃고 있었다. 마치 가면을 쓴 것처럼. 가슴께를 움켜쥐고 주저앉아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는 레너드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커크는 전송실 밖에서 전송기를 만지고 있는 붉은 셔츠의 대원에게 소리쳤다.


어서 우릴 전송시켜줘!


레너드는 신음을 흘리며 힘겹게 고개를 들어올렸다. 명령받아 전송기를 만지는 저 붉은 셔츠의 대원은 분명... 한달 전 크롤의 습격 사건 때 함선이 부서지면서 실종됐던 그 대원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메마른 미소를 짓고 있는 다른 대원들 모두, 그때 실종됐던 대원들이었다. 이 자리에 모여있는 대원들 뿐만 아니라, 메디베이로 출근하면서 인사를 나눴던 대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젠장, 왜 이제야 깨달은 걸까.


쿠웅!


또 한 번, 느껴지는 강한 통증에 레너드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흐려지는 시야에 뭐가 뭔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그의 손을 잡고 있는 커크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으면서 연신 전송하라며 소리치고 있었다.

곧이어 전송의 신호음이 울리고, 레너드와 커크의 몸 주변이 빛으로 산산히 부서지기 시작했다.


본즈!


그와 동시에,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이 목소린... 커크였다. 눈 앞의 기묘한 커크가 아닌,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랑하는 커크의 목소리였다.


본즈! 가면 안 돼!


커크의 목소리와 함께,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통증이 느껴졌다. 레너드의 시야가 하얗게 부서지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칫 하고 혀를 차는 소리와 그를 부르짖는 커크의 목소리가 정신없이 뒤섞였고, 결국 레너드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눈을 떴다.

레너드가 느릿느릿 눈을 깜빡였다. 마치 늪의 밑바닥에서 끌어올려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귀는 웅웅거려 잘 들리지 않았고, 밝은 빛에 눈이 부셔 잘 보이지 않았다. 곧 그는 자신이 메디베이의 침대에 누워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몸은 천근만근이었고, 그의 입에는 산소 마스크가 씌워져 있었다.

레너드가 시선을 천천히 옮겼다. 침대의 주변으로 의료부의 대원들이 무언가 다급하게 움직이며 여러 기구들을 레너드의 몸에 가져다 대고 있었고, 그의 옆에서 얼굴이 눈물로 잔뜩 얼룩진 커크가 자신의 얼굴을 붙잡고 그의 이름을 연신 외쳐대고 있었다.

감각이 어느 정도 돌아오자, 심장 제세동기가 작동을 멈추는 소리와 함께 닥터가 의식을 찾았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으... 여긴... 어디지...


본즈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흑, 본즈 네가.... 내 대신 페이저건에 맞아서.... 흑.. 다신 못 보는 줄 알았어...


커크가 결국 말을 잇지 못하고 레너드를 껴안으며 눈물을 터뜨렸다.

안심하는 대원들의 얼굴, 입을 막으며 눈물을 흘리는 대원들의 얼굴이 레너드의 눈에 들어왔다.

아아, 그런 거로군. 그는 그때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미안해... 걱정시켜서.

나 돌아왔어, 짐. 네 덕분이야.


아니, 사실. 너 때문에 못올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레너드는 자신에게 안긴 커크의 머리칼을 몇 번이고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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