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 안은 빗소리 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숨 막힐 듯한 침묵 속에 재환과 다니엘은 대치 상태로 서있었다. 재환은 다니엘의 화난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 창밖으로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다. 다니엘은 그런 재환의 옆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나 때문에 불편한 거면, 내가 나갈게.”

그 말에 재환에 고개를 돌려, 다니엘을 본다. 좀 진정이 된 걸까. 사투리가 아닌 표준어를 쓴다. 이제는 서울 사람이라고 해도 믿겠네. 연습생 시절 내내, 사투리를 고치고 싶어 하던 다니엘이 떠올랐다. 사투리 쓰는 다니엘, 참 귀여웠는데.

“어차피 스케줄 때문에 가야 된다.”

“...그런 거 아니야.”

다니엘에게 이런 꼴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것만큼, 재환은 생계가 시급했다.

“그럼 뭔데.”

“수업도 가야 되고, 아르바이트도 있어.”

다니엘의 이마가 다시 구겨진다.

“너. 지금 장난치냐.”

그 말에 재환은 울컥하고 만다. 정말 이 모든 게 장난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몸이 아파도, 끼니를 굶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일을 해도 돈이 없는 삶을 다니엘이 알기나 알까. 수십억이 오가는 개런티를 받는 광고 모델. 전 세계에서 개최되는 콘서트. 다니엘은 명실상부 전 세대를 아우르는 스타였다. 강다니엘의 숨소리만 음원으로 나와도 1위를 할 거라는 우스갯소리가 나돌 정도였다. 그런 삶을 사는 다니엘에게 25만원이 채 되지 않는 고시원 월세를 못 내 허덕이는 제 삶이 얼마나 장난처럼 보일까.

“내 인생이 장난처럼 보이나 보네.”

자조 섞인 재환의 목소리에 다니엘의 목소리가 격앙된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

“도와준 건 고마운데. 네가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할 건 아닌 거 같다.”

“김재환.”

“만나서 반가웠다. 잘가라.”

재환은 다니엘을 없는 사람 취급하며, 병원복을 벗고 옷을 입는다. 땀으로 눅눅해지고, 여기저기 때가 묻은 옷. 재환은 제 검지에 끼워진 반지를 보며 신을 원망한다. 어째서 저에게 이런 재수 없는 일이 매번 몰빵인 걸까. 삶에서 가장 도려내고 싶은 순간 만난 다니엘. 열아홉 시절의 밤마다 잠 못 들게 했던 첫사랑. 다니엘이 보낸 문자를 읽고, 또 읽으며 가슴 설렜던 순간들. 작곡 노트에 다니엘이 장난스럽게 캐릭터처럼 그린 제 얼굴을 보물처럼 간직했던 시간. 그런 것을 떠올리던 재환의 눈시울이 뜨거워졌을 때, 다니엘이 병실을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매몰차게 굴어놓고, 막상 다니엘이 나가버리니까... 왜 이렇게 버려진 기분이 드는 걸까. 재환은 옷을 갈아입다 말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문이 열렸다. 다니엘이 양손에 무언가를 잔뜩 들고 들어오는 게 보였다. 또 한 사람이 다니엘만큼 짐을 들고 따라 들어왔다. 그리고 재환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다니엘 형 매니저 박우진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재환에게 명함을 내민다. K엔터테인먼트 매니지먼트팀 실장 박우진. 다니엘이 우진에게 잠깐만 나가 있으라고 말했다. 그러자 우진이 난감한 얼굴로 대꾸한다.

“형. 10분 안에 나오셔야 돼요. 상암까지 길 엄청 막혀요.”

“어. 잠깐만.”

우진이 재환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병실을 나가자, 다시 정적이 감돌았다.

“길게 말 안 할게.”

다니엘이 재환의 앞에 선다. 훅 끼쳐오는 좋은 냄새. 다니엘의 냄새. 참 그리웠었는데.

“받아라. 옷이랑 충전기. 대충 필요한 거.”

“...얼마인지 알려줘. 갚을게.”

“...됐다.”

“아니, 갚을 거야.”

다니엘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다. 그리고는,

“재환아.”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재환은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때 왜 나 버리고 갔냐, 너.”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이런 꿈을 꾼 적이 있었다. 다니엘이 나와서 저를 찾고, 원망하는 그런 꿈을. 재환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너를 버린 게 아니라고 다니엘에게 설명할 자신이 없다. 그런 일로 데뷔를 앞 둔 너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고. 스스로가 비참해지는 지리멸렬한 과거, 그리고 구구절절한 변명.

“딱 사흘만 여기 있어라. 더 안 잡는다.”

재환은 그 말에 안주하고 싶어진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다니엘이 병원에 사흘만 더 있으라고 한다. 그럼 한 번이라도 다니엘을 더 볼 수 있는 거 아닌가. 사흘 동안 한 번은 더 들를지도 모른다. 재환은 자꾸만 다니엘의 말대로 하고 싶어지지만.

“...말했잖아. 가야 한다고.”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다니엘에게 더 이상 이런 꼴을 보이고 싶지 않다.

“고집 부리지 말고."

다니엘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지지만,

“상관 마.”

재환은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리고.

“알았다. 마음대로 해라.”

화를 못 이긴 다니엘이 결국 병실을 나간다. 홀로 남은 재환의 눈시울이 뜨끈해진다. 손목에 감긴 붕대를 보다, 문득 통증을 느낀다. 몇 년 만에 우연히 마주한 다니엘. 그 앞에서 기절한 저를 다니엘이 병원에 데려왔다. 그리고는 왜 자신을 버렸냐고 묻고, 입원을 하라고 화를 낸다. 옛 친구를 원망하면서도 저버리지 못하는 다니엘의 착해빠진 심성. 재환은 사라진 다니엘을 다시 구축해낸다. 더는 열아홉 소년이 아닌 다니엘. 길게 선을 이룬 두 눈. 단단한 턱. 어깨가 더 넓어졌고, 키도 더 컸다. 마냥 아이처럼 웃지 않는다. 재환아. 그때 왜 나 버리고 갔냐. 상처 받은 듯한 목소리.

나는 너를 버린 게 아니라, 나를 버린 거였는데.



“수납 다 하셨는데요.”

재환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만다. 직원이 몰랐냐는 듯 재환을 올려다본다.

“대신 수납하러 오셨다고 하면서 김종석님 것까지 다 내고 가셨는데.”

김종석. 재환의 아버지다.

“...누가요?”

“저야 모르죠.”

재환의 손에 고모가 빌려준 돈이 쥐여져 있었다. 재환의 가족보다 형편이 좀 더 나은 고모였지만, 여유가 있는 편은 아니었다. 그랬기에 재환은 고모가 인색하게 구는 것을 이해했다. 고모는 최대한 빨리 갚아달라고 거듭 당부하며, 재환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언제까지 그러고 살 거냐. 네 처지에 대학이 웬 말이냐. 어릴 때부터 헛짓거리 하더니 이게 무슨 꼴이냐. 가수하겠답시고 설치던 거 뒷바라지 다 해준 네 아버지가 불쌍하지 않냐. 차라리 공장에라도 들어가서 돈을 버는 게 나을 것이다. 틀린 말들은 아니었다.

“좀 젊은 남자분이었어요. 친척 분 아니세요?”

직원의 말에 재환의 머리에 다니엘이 스쳤다. 하지만 직원이 다니엘을 못 알아 봤을 리 없다. 그렇다면 누구일까. 원무과를 나온 재환은 그 길로 부모님의 병실에 올라갔다. 때마침 식사 시간이었다. 엄마, 하고 부르자 아버지의 발치에 앉아, 밥을 먹여주던 어머니가 놀란 얼굴로 재환을 반겼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시간이 좀 났어요. 아부지, 저 왔어요.”

언어 능력을 상실한 아버지는 눈으로만 대답할 뿐이다. 재환은 간이침대에 앉아 제 부모를 올려다보았다. 새삼 두 분이 많이 늙으셨다는 게 실감이 났다. 재환이 누구보다 가수로 성공하는 것을 바랐던 아버지였다. 재환이 부른 노래를 CD로 구워 택시 운전을 하며 틀고 다니셨다고 했다. 노래를 흥얼거리는 손님들에게 ‘우리 아들 노래예요. 조용필, 김건모보다 잘하죠?’라고 자랑했을 아버지.

“밥은 먹었어?”

그리고 아버지를 돌보며 더 많이 야위고 늙은 어머니. 네, 먹었어요. 재환은 익숙하게 거짓말을 한다. 어머니는 재환에게 왜 이리 말랐냐며, 정말 제대로 먹고 다니는 거 맞냐고 걱정 어린 잔소리를 한다.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었어. 친구한테 고맙다고 전해줘, 아들.”

“....친구요?”

“여기 병실 난리 났었어. 인기 스타 왔다 가는 바람에.”

어머니의 얼굴에 간만에 미소가 번졌다. 뒤이어 병실 여기저기서 맞장구를 치는 소리가 이어진다. 그래, 재환이 학생. 그 친구 실물이 훨씬 잘생겼더라. 피부가 어쩌면 그래. 백옥 같더라고. 서글서글하니 성격도 좋고. 재환이 학생한테 그런 친구가 있는 줄 몰랐네. 여기 과일바구니 싹 돌리고 갔어. 그 친구가 강다니엘 맞지? TV에 많이 나오는 잘생긴 가수. 우리 딸이 엄청 좋아해서 사인도 받아놨어.

“옷이랑 과일이랑 매트랑 베개랑 뭘 그리 잔뜩 사왔는지...”

돌아보자 과일바구니와 백화점 종이가방이 잔뜩 놓여있는 게 보였다.

“예전에 너 만날 데려다 주던 그 친구 맞지? 고맙다고 전화 좀 해줘.”

재환은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병원비도 다니엘이 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뭘 사다주고도 더 필요한 게 없냐고 묻더라. 너랑 몇 년 만에 연락이 닿았다고 하면서, 앞으로 자주 찾아 뵙겠다 그러고 갔어. 그때 친구들이랑 다 연락 끊고 지냈던 거야? 우리 아들도 부모 잘 만났으면 다니엘처럼 멋진 가수 됐을 텐데... 엄마가 미안해.

병실을 나온 재환은 아까 다니엘의 매니저가 준 명함을 꺼냈다. 박우진 실장. 우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는다. '아까 병원에서 뵈었던 김재환입니다. 문자 보시면 연락주세요.' 그렇게 문자를 보내고, 재환은 병원 앞에서 버스를 탔다. 그리고 잊고 있었던 도시락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사장은 난색을 표했다. 재환으로 인해 도시락 배달이 늦어졌고, 그로 인한 컴플레인이 상당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동안 일한 것까지 정산해서 이번주 내로 넣어주겠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재환이 몇 번 더 사정을 했으나, 사장은 완강했다. 그렇게 재환은 아르바이트 자리 하나를 잃고 말았다.

그렇기에 더욱 주점 아르바이트를 빠질 수 없었다. 왼손으로 어떻게든 일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손목이 이렇게 됐으니, 당분간 이삿짐센터 일은 불가능이었다. 재환은 민현에게 문자를 넣었다. ‘어제 말씀하셨던 일 하고 싶어요. 추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프다고 해서 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니엘이 내주고 간 병원비를 하루 빨리 갚고 싶었다. 재환은 버스 차창에 머리를 댄 채, 눈을 감았다. 온몸이, 그리고 가슴이 욱신거렸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고시텔에 들른 재환은 우연히 주인을 만났다. 전화는 왜 자꾸 안 받고 그래. 도대체 월세 밀린지가 몇 달 째야. 더 까일 보증금도 없어. 나 더 이상은 못 봐줘. 내일까지 안 넣어주면 그냥 방 빼요. 나도 이렇게 매정하게 안 그러려고 했는데... 아무튼 내 사정도 좀 봐줘요.

고시텔 건물 앞에서 재환은 주인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 좋은 일은 왜 이렇게 켜켜이 쌓여서 덮쳐오는 걸까. 재환은 고모의 말대로 학교는 그만 두고, 기숙사가 딸린 공장 일자리를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재환은 더 이상 절망할 겨를조차 없었다. 어떻게든 스스로 살아가야 했다. 살아남아야만 했다.



아르바이트를 가기 위해 전철에 탔을 때, 우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재환은 거두절미하고 병원비를 냈냐고 물었다. 우진은 다니엘이 그렇게 하라고 지시했고, 자신이 병원비를 냈다고 대답했다. 재환은 돈을 갚겠으니 계좌번호를 불러달라고 했다. 그러자 우진이 말했다. 직접 이야기 하시죠. 운전 중이라 통화 길게 못합니다. 다음에 뵐게요. 그렇게 전화가 끊어졌다. 다시 전화를 걸려던 재환은 운전 중이라던 우진의 말이 생각나 문자를 남겼다. '다니엘 계좌번호 보내주세요. 꼭 좀 부탁드려요.'



오늘따라 주점은 평소보다 몇 배로 바빴다. 쉴 틈 없이 들이 닥치고, 바깥에서 기다리는 손님들로 주점은 인산인해였다. 재환은 긴 팔 티셔츠로 손목의 붕대를 가린 채, 아픔을 꾹꾹 참아가며 일했다. 무거운 것은 최대한 왼손으로 들고, 오른손을 사용하지 않으려 애쓰며 일했다.

고모가 빌려준 돈에서 10만원을 빼내어 매니저에게 갚았다. 늦게 갚아도 된다고 손사래 치는 매니저에게 재환은 10만원을 쥐여주며,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때 과의 동기들이 들이 닥쳤다. 그들은 재환에게 비아냥거리며 아는 체를 해왔다. 하지만 재환은 그들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연신 테이블을 치우고, 다시 세팅하고, 다시 손님을 안내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손목의 통증이 거세졌다. 진통제를 두 알을 털어 넣고, 재환은 다시 뛰었다. 주방에서 안주가 나왔다는 소리가 들렸다. 커다란 양푼 냄비에 나오는 찌개 안주였다. 과 동기들의 테이블에 나갈 음식이었다. 재환은 휴대용 가스 버너에 냄비를 받쳐 들고 걸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오른쪽 손목이 시큰거리더니, 이내 힘이 빠졌다. 우당탕 소리와 함께 찌개와 가스 버너가 바닥에 떨어졌다. 바닥은 물론 재환의 바지와 운동화에도 찌개가 흥건하게 쏟아졌다. 와중에 과 동기 중에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아, 씨발. 국물 튀었잖아요.”

재환이 밀대를 가지러 가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였다.

“재환이 형.”

뒤에서 또 다른 동기가 저를 불렀다.

“운동화랑 옷에 김치 국물 튀었는데. 이거 어떻게 변상하실 건데요?”

낄낄낄 웃는 소리. 다들 테이블에서 고개를 빼고 구경했다. 근데 사과는 왜 안 하세요? 미안하다고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이 운동화 비싼 건데. 형 알바 일주일은 하셔야 할 걸요. 아, 사과부터 하시라구요. 예?

“제가 드릴게요. 얼마면 되죠?”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동기들 테이블로 다가가 지갑을 꺼내드는 우진의 옆모습이 보인 것은. 동기들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우진을 올려다 볼 뿐이었다. 우진이 이곳에 있다면, 다니엘 또한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는 뜻이리라. 재환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얼마면 되냐고요. 예?”

그리고 재환은 그 광경을 보다 몸을 돌렸다. 두르고 있던 앞치마를 풀고, 직원 휴게실로 가서 가방을 들고 나왔다. 재환은 진심으로 다니엘이 원망스러웠다. 거지같은 내 인생. 너는 어디까지 끼어들어야 속이 시원한 걸까. 퇴원을 하던 순간부터 꾹꾹 눌러왔던 눈물이 터질 거 같았다. 그리고 매니저에게 다가가 말했다.

“형, 저 오늘까지만 일할게요. 죄송해요.”

“갑자기 왜 그래, 인마.”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형.”

“야, 재환아.”

재환은 그 길로 주점을 나섰다. 뒤에서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번화가를 걸었다. 빚에 허덕이며, 제때 먹지 못해 영양실조까지 걸린 상태로 재회한 첫사랑. 누구보다 다니엘에게 동정 받는 게 싫었다. 이대로 죽으라면 죽을 수도 있을 만큼, 싫었다.

재환은 도망치듯 버스에 올랐다. 사람들이 재환의 바지와 운동화에 묻은 김치 국물을 흘끔거렸다. 다행히도 우진은 따라오지 않았다. 재환은 계속해서 진동하는 휴대전화기의 전원을 끄고 가방에 넣었다.



고시텔로 가는 언덕을 오르며 재환은 숫자를 센다. 하나, 하고 따라오는 것은 오늘 낮에 본 다니엘의 화가 난 얼굴. 가장 힘들었던 순간마다 네가 보고 싶었다고 하면, 너는 믿을까. 둘, 하고 따라오는 것 역시 다니엘의 목소리. 재환아, 그때 왜 나 버리고 갔냐. 너. 어젯밤 의식을 잃기 전에 보았던 다니엘의 얼굴.

“학생. 전화는 왜 또 꺼놨어?”

생각에 잠겨있던 재환은 고시텔 건물에서 나오던 주인과 다시 마주쳤다.

“월세는? 내일까지 줄 수 있겠어?”

“어떻게든 마련해보겠습니다.”

“내일까지예요. 내일까지 안 주면 진짜 방 빼야 돼.”

주인은 몇 마디 더 하고 나서야 사라졌다. 재환은 입구에 한참을 서 있었다. 집으로 들어갈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숫자를 센다. 셋, 하고 따라오는 것은 그 언젠가 저를 집까지 데려다주던 다니엘이다.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가지? 너네 집에 더 멀었으면 좋겠다. 한 시간이나 되는 거리를 걷고도 그렇게 말하며 웃던 해사한 얼굴. 왜 이런 순간 그런 게 떠오르는 걸까. 뒤이어 넷, 하는 순간.?

재환의 손목이 잡아 채였다. 그리고 돌아보면 검정 모자를 쓰고, 검정색 티셔츠를 입은 다니엘의 굳은 얼굴.

“우리 집 가자.”

다니엘의 그 말에 재환은 터질 거 같은 눈물을 삼켰다. 목안이 쓰라렸다.

“내가 왜?”

“싫으면 딴 데 구해줄게.”

“가, 제발. 부탁이야.”

재환은 진심으로 호소했다. 하지만.

“도시락 배달하고, 이삿짐 나르고, 서빙하고. "

"...."

"니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건데."

다니엘의 말이 흉기가 되어 재환을 난도질 한다. 다니엘은 다 지켜보고 있었다. 병원 앞에서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주점에서 우진을 보낸 것도 다니엘이었으리라. 재환은 난데없이 나타나 제 인생에 끼어들려고 하는 다니엘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노래 안 할 거가?"

“안 해.”

재환은 꿈과 다니엘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와서 다 무슨 소용인 걸까. 어차피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이다. 다 지나간, 뒤늦은 일. 그것도 아주 많이. 재환은 점점 격정에 휩싸였다. 가방을 뒤적여 고모가 빌려준 돈이 든 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다니엘에게 내밀었다.

“받아. 네가 내고 간 병원비.”

다니엘은 그 돈을 받지 않는다. 재환은 거듭 다니엘의 앞에 봉투를 내밀었다.

“나머지도 곧 갚을게. 매니저 통해서 계좌번호 보내줘.”

“안 그래도 된다.”

그 말에 꾹꾹 참고 있던 재환의 설움이 터졌다. 동정하지마.

“내가 이렇게 빌빌대며 사니까 불쌍하냐?”

“아니.”

“아니면? 갑자기 나타나서 왜 이러는 건데, 진짜!”

손목이 너무 아팠다. 아니, 온 몸과 마음이 욱신거렸다. 너무 아파서 정말 죽어버릴 거 같았다. 기어코 재환은 울음이 터졌다. 눈물로 형편없이 젖은 재환의 얼굴. 그 얼굴에 다니엘의 손이 닿았다. 희미하게 담배 냄새가 났다. 제 눈물을 닦아주는 다정한 손길. 그리고 저의 눈을 바라보는 다니엘의 까만 두 눈. 재환은 가슴이 시렸다.

“사운드 클라우드. 아이디 blue527.”

다니엘이 재환의 눈물을 닦아주며 입을 열었다. 재환의 심장이 곤두박질친다. 재환이 1년 전까지 음악을 만들어 올렸던 플랫폼의 아이디였다. blue527. 

“천 번도 넘게 들었다.”

<Yesterday>, <가벼운 날들>, <첫사랑>, <2시 23분>. <블루>. 거기에 업로드 된 재환의 자작곡들. 듣자마자 알았다. 니 노래라는 거. 아픈 재환의 손목을 쓰다듬던 다니엘의 손이,

“다시 노래하자, 재환아.”

이내 단단하게 깍지를 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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