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은 초조하다. 수빈은 투박하게 설거지했다. 접시를 벅벅 문질러 닦고 개수대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려놨다. 손이 미끄러져 세제 거품이 잔뜩 튀었다. 인상을 찌푸린 수빈은 고무장갑을 벗고 손등으로 얼굴을 훔쳤다. 뒤에서 지켜보던 태주는 혀를 찼다. 마음이 콩밭에 가 있으니까 그렇지 인마. 수빈은 아니거든? 하고 팩 쏘아 붙였다. 말만 밉게 하지 등돌리고 귀를 붉혔다. 곧 요란하게 차려입은 노란색 머리통이 유리문을 열고 매장 안으로 들어왔다. 팔짱끼고 카운터를 지키던 태주는 어어, 왔다 하고 수빈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무심코 돌아본 수빈은 앞치마를 벗어 던지고 주방을 뛰쳐 나갔다.

종강하고 수빈과 연준은 술을 먹었다. 수연이 했던 말을 몇 번이고 곱씹던 수빈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연준을 만나러 갔다. 짝사랑 체질이 아닐 뿐더러 처음 해보는 짝사랑이 너무 힘들었다. 이쯤에서 정리하고 저 좋아해주는 마음씨 좋고 다정한 남자에게 넘치도록 사랑받고 싶었다. 감정을 억누르는데엔 도가 텄고 혼자만의 애달픈 감정이니 죽여 없애면 그만이었다. 수빈은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연준을 헐뜯으며 약속장소로 향했다. 물 빠진 파란 머리털을 개털같다 비꼬고 비쩍 마른 몸은 뼈밖에 없어 정나미가 떨어진다 힐난했다. 사랑해 마지 않던 남자를 난도질 하고 나니 품었던 마음도 보잘 것 없는 휴지 조각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너덜난 마음으로 연준을 마주했다. 연준은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나왔다. 늘 보던 색이 지겨워 발표회가 끝나는 대로 파란 물을 뺐다고 했다. 안 그래도 말랐으면서 살이 더 내려 있었다. 오대오로 가른 앞머리 아래 담백하던 이목구비가 선명하게 각잡히고 티존은 전보다 훨씬 뚜렷했다. 아랫배가 야속하게 당겨왔다. 형, 금발이 잘 어울리네요. 하고 싶은 말을 이번에도 빙 돌려 표현한다. 연준은 민망한 듯 배시시 웃으며 수빈의 잔을 채워 주었다. 잔을 비울수록 수빈은 야릇한 절망을 맛보았다. 겨우 짓밟아둔 감정이 순식간에 되살아나 곪아버린 마음을 활활 불태웠다. 이 얼굴을 마주하는 것, 이 목소리가 말을 걸어오는 것, 이 남자의 인생에 끼어드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오늘로서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수빈은 속상했다. 연준을 좋아하는 일이 힘들었지만 수빈의 인생에서 힘든 일이야 수도 없이 많았다. 이게 마지막이라면 앞으로 그 어떤 것도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수빈은 힘들게 정리했던 마음을 다시 난장판으로 더럽혔다. 아무것도 모르는 연준은 여전히 살갑게 굴었다. 그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왜 나 안 좋아해 주느냐고 방금 전까지 잔뜩 물어 뜯어 놓은 게 미안했다. 탈색 하는 거 아프진 않았나요. 살은 왜 그렇게 많이 빠졌나요. 수빈은 미안한 만큼 더 싹싹하게 굴고 더 밝게 웃어 보였다. 수빈의 연애 얘기가 궁금하다던 연준은 정작 연애의 이응도 물어보지 않았다. 대신 방학때 무얼 하느냐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수빈이 밀치고 끊으려 하면 연준은 당기고 붙든다. 싫어서 정 떼려는 게 아니었으므로 수빈은 더 붙잡아 줬으면 하는 마음에 제 얘기를 구구절절 불었다.


"아는 형이 카페 개업했거든요. 시급 많이 준대서 주말빼고 거기서 알바해요. 오픈부터 미들까지만. 오전 8시에 출근해서 오후 5시에 끝나요."

"우와, 나 거기 놀러 가도 되냐."

"네?"

"이제 개업 하는 거라며. 손님 한 명이 아쉬울 때잖아. 내가 가서 매상 올려줄게. 너 퇴근 시간에 맞춰가면 거기서 너랑 커피 한 잔 하면서 얘기도 할 수 있구, 출출하면 같이 저녁 먹어도 되구. 너무 좋다."

"만나러 올 시간이 돼요? 형도 바쁘잖아요."

"수요일에 갈게. 무용학과는 방학때도 하루종일 학교에서 살아야 하거든. 월화목금 전부 특강이야. 주말은 뭐, 연애하면 반납해야지. 늘어지게 자다가 여자친구 만나러 가야 돼."


여태까지 겪어온 연준은 빈말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나 수빈은 더는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일말의 기대도 하지 않고 연준과의 술자리를 없던 일로 쳤다. 하지만 연준은 정말로 개업 첫 주부터 수빈을 만나러 왔다. 퇴근시간을 초 단위로 카운트다운하며 포스기 앞을 지키고 있던 수빈은 유리문을 열고 들어오는 노란색 머리통을 발견하고 괴상한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왜 그래? 괜찮아? 놀란 태주가 덩달아 쭈그려 앉아 수빈을 살폈다. 수빈은 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저 형 내가 좋아하는 형이에요. 태주가 연준에게 주문을 받는 동안 수빈은 오리걸음으로 탈의실 안에 기어들어가 흐트러진 머리와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이후에도 연준은 수요일마다 수빈을 보러 왔다. 연준이 음료 두 개를 시켜 매장 구석 자리에 앉아 있으면 수빈은 다섯시 땡 치기 무섭게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들뜬 얼굴로 연준에게 달려갔다. 한 번 앉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방학이잖아. 우리 과 이번에 제대한 애들이 꽤 많거든. 덕분에 나도 좀 덜 심심해. 새내기 애들이랑도 이번에 좀 친해지고 싶다. 여자애들은 나랑 두루두루 친한데 남자애들이 낯을 많이 가리더라구. …하긴 뭐, 나도 고학번 형들이랑은 안 맞고 어색하긴 한데. 내가 원래부터 좀 여자애들이랑 잘 맞는 것도 있지만. 내가 좀 그런 편이긴 하잖아 옷 좋아하구 꾸미는 거 좋아하구……."


수빈은 마음 편히 털어 놓을 이야기가 별로 없었다. 아쉬운대로 일주일간 카페에서 있었던 일이나 겪어본 진상손님 이야기를 탈탈 털면 연준은 웃겨 죽으려고 했다. 여자 손님 번호 적힌 종이 셀 수 없이 받은 이야기는 뺐다. 연준은 살면서 알바 한 번 해본 적 없었다. 그래서 수빈은 배라, 올리브영, 버거킹, 쿠우쿠우 알바 경험까지 싹싹 긁어 실감나게 말해 주었다. 연준은 감탄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너 정말 대단하다 수빈아. 난 내 손으로 땡전 한 푼 벌어본 적 없는데. 나보다 네가 더 형같고 어른같아. 부모님이 널 정말 기특해 하시겠다. 수빈은 씁쓸하게 웃으며 연준의 카드 영수증 끄트머리를 지익지익 뜯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허기지면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갔다. 오픈과 미들 두 타임 알바 뛰는 수빈의 점심시간은 워라밸과 거리가 멀었다. 매장 맞은편 이삭토스트나 편의점 도시락, 혹은 은박지 돌돌말린 싸구려 김밥 한 줄로 급하게 점심을 때웠다. 연준은 그게 안쓰러웠는지 수빈에게 비싼 밥만 사먹였다. 고기도 썰게 해주고 날생선도 먹게 해줬다. 초복이라며 삼계탕까지 사주었다. 연준은 수빈이 돈 쓰는 꼴을 못 봤다. 수빈이 사려고만 하면 너 알바로 돈 좀 번다고 펑펑 쓰다가 패가망신한다며, 돈 아껴서 너 사고 싶은 거나 사라며 막았다. 염치는 사치다. 돈 없는 수빈은 그게 미안하면서도 고마웠다. 당장은 궁핍해도 노동은 값졌다. 보는 눈도 미감도 없었지만 연준에게 어울릴만한 14K 피어싱을 인터넷으로 봐 두었다. 수빈은 월급이 들어오면 연준에게 작은 기쁨을 선사할 예정이었다. 일 가기 싫어 이불 속에서 뭉개다가도 선물 받고 좋아할 얼굴을 생각하며 고된 몸을 일으켰다. 

연준은 특강 끝나고 집 가는 길이면 종종 수빈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무료한 귀가길이 이유였다. 수빈은 헬스장에서 몸 만들던 중에도 복도로 나와 허겁지겁 전화를 받았다. 연준이 집 들어가기 직전까지 말동무를 해주고 나면 핸드폰은 뜨겁고 땀범벅 된 몸은 오한이 들었다. 통화 시간 59분 11초를 확인하고 재채기를 하는 일이 빈번했다. 연준은 춤 추다 말고 틈틈이 카톡도 보내왔다. 수빈이 일 끝나고 핸드폰을 확인하면 연준에게 온 카톡이 열댓개는 쌓여 있었다. 연준이 저녁 먹고 있다며 음식 사진을 보내오면 수빈도 제 저녁밥 사진을 찍어 보냈다. 꼴에 귀여워 보이려고 수빈이 카카오 프렌즈 이모티콘을 보내면 연준은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그런 걸 쓰냐며 유행하는 이모티콘 선물을 보내주었다. 교양 같이 듣던 학기 중보다 연락 빈도가 훨씬 잦았다. 연락 할 이유가 없는데도 이유를 만들어 연락했다. 태주는 부쩍 얼굴이 밝아진 수빈에게 잘 해보라며 농담을 건넸다. 수빈은 질색하면서도 얼굴을 붉히고 싫지 않은 내색을 했다.

7월도 거의 끝나갔다. 매장 구석 자리는 에어컨 냉방이 극단적이었다. 마감 알바 한 명이 병원을 다녀 오는 동안 수빈은 두 시간을 초과근무 했다. 반바지 입은 다리를 문지르던 연준은 길건너 문방구에서 유치한 담요를 사다 덮었다. 퇴근하고 나온 수빈은 보자마자 웃었다. 이거 여고생들이나 두르고 다니는 거잖아요. 연준은 아이스티에 꽂힌 빨대 끝을 잘근잘근 씹으며 민망하게 웃었다.


"특강도 이번주면 끝나. 시간 진짜 빠르다."

"그러게요. 개강까지 한 달 남았네." 

"이제 8월이라 더 바빠. 9월 정기공연 준비해야 하거든. 그래서 내일모레 여자친구랑 부산 여행 간다. 금요일 오후 출발, 월요일 아침 서울 도착."


연준은 핸드폰을 만지더니 수빈에게 호텔 예약 내역을 보여 주었다. 1박에 34만원인 웨스틴 조선 호텔 객실이 세금 및 봉사료 포함 3박 126만원 이었다. 연준은 객실 뷰 사진도 보여 주었다. 퀸베드와 욕조가 딸려 있었다. 여기 진짜 좋지, 객실 안에서 바다가 한 눈에 보여. 몇 년 전에 엄마 아빠랑 하얏트에서 묵은 적은 있는데 웨스틴 조선은 처음이야. 조식이 그렇게 끝내준다던데, 너무 기대 된다 야. 연준이 웃었다. 수빈은 못 웃었다.


"이따 유진이 자취방 가서 짐 싸는 거 도와 줘야 돼. 걔도 정기공연 준비 때문에 도통 집에 붙어 있질 못하거든. 여자들은 어디 한 번 갈 때 준비 해야 할 게 많잖아 챙겨 가야 할 것도 많구. ……걔 근데 요즘 청소는 하고 사나 모르겠다. 야 내가 예상하는데 오늘 나 거기 가잖아? 백퍼 집청소 다 해주고 온다. 걔는 왜 정리를 안 하고 살까? 혼자 살면 다 그렇게 된다든데 나는 이해가 안 가. 바닥에 머리카락이 그냥 막, 어우. 연애 초반에는 나 오기 전에 청소 싹 해놓고 그랬는데 이제는 뭐, 잘 보일 게 없다 이거지. 바쁠 때는 나한테 빨래도 막 시켜. 그냥 나는 걔 노예야, 노예."

"형."

"응?"

"저랑 술 한 잔 해요."

"지금?"

"형 저번에 제 연애 얘기 더 듣고 싶다 하셨잖아요. 그거 말해드리려구요."


연준은 무언가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인상 굳히고 다짜고짜 술 먹자 한 것에 대해서도 맥락 없이 연애 얘기 해준다는 뚱딴지 같은 소리에 대해서도 묻고 싶은 눈치였다. 수빈은 표정관리 할 생각이 없었다. 아무 말 없이 연준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시선이 오고 가던 끝에 연준이 먼저 눈을 깔았다. 연준은 유진에게 조금 늦게 갈 거 같다는 메세지를 남기고 수빈을 따라 일어났다. 둘은 여대 근처 크래프트 비어 전문점에 갔다. 조명이 어둡고 빈티지한 브라운 계열 목재 인테리어가 고풍스러웠다. 술 마시기에 애매한 요일이라 사람이 적었다. 수제맥주 두 잔과 감자튀김을 시켰다. 수빈은 말 없이 맥주잔을 빠르게 비웠다. 천천히 마시라는 연준의 말에 수빈은 알았다며 실실 웃었다.


"형은 싫어하는 게 뭔가요."

"싫어하는 거?"

"형은 좋아하는 게 많잖아요. 춤, 패션, 악세사리, 친구, 인스타그램 하는 거, 맛있는 음식 먹는 거, 공연 보는 거, 여기저기 돌아 다니는 거, 여자친구랑 노는 거. 형이 좋아하는 거잖아요. 저는 좋아하는 게 별로 없거든요. 저는 싫어하는 게 많아요. 그래서 궁금했어요 형은 싫어하는 게 뭘까."


스피커에서 잔잔한 블루스 음악이 흘러 나왔다. 술집 특유의 웅성거리는 소리 하나 없었다. 수빈의 낮게 깔린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누구 하나 감자튀김에 손 대지 않았다. 연준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거짓말 하는 거. 거짓말이 제일 싫어. 솔직한 게 좋아. 속이는 건 나쁜 거야."

"형은 저를 싫어하겠네요."

"무슨 말이야."

"여태 형한테 거짓말 했거든요."


수빈은 전부 말했다. 말하다가 숨을 고르기도 하고, 북받쳐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기도 하며 그간 전하지 못한 모든 말을 오래도록 털어놨다. 울지는 않았다. 마음고생의 연속, 그걸 끊어내려 말 하고 있는 이 순간 조차 처참하게 무너져내리는 가여운 마음을 억지로 부여 잡았다. 언젠가는 한 번 겪어야 하는 일을 서둘렀을 뿐이라고 수빈은 생각했다. 열 아홉 수능 성적표 받아든 날 이름도 모르는 끔찍한 남자와 잤을 때처럼, 대학 합격자 발표날 아버지에게 죽기 직전까지 맞았을 때처럼, 불같은 성미는 충동의 방아쇠를 당겨 수빈을 지옥으로 밀어넣는다. 울어도 도와주는 이 없었다. 늘 혼자였다.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덤덤하고 차분하게, 연준이 쏘아 붙일 모진 말들을 수빈은 기다렸다.


"형이 너무 좋아 견딜 수 없는 날이 있어요. 그럴 땐 형이 여자친구 얘기를 할 때마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어요. 이젠 괜찮아요. 곧이 곧대로 들어 드릴 수 있을 거 같아요. 제 연애사는 구질구질해요. 어디 꺼내놓지도 못할 만큼 추잡하고 별 볼 일 없어서요. 만나 보긴 많이 만나 봤는데 죄다 빈 껍데기 뿐이었어요 저는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이 없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보면 형이 제 첫사랑이에요. 형만큼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알아서 정리 할게요. 너무 좋아해서 형 곁에 남고 싶어요. 좋은 친구로, 좋은 형 동생 사이로. 저랑 알아두시면 언젠가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몰라요 왜냐면 저 정말 잘 될 거거든요. 돈 많이 벌어서 형이 먹고 싶어 하는 거, 갖고 싶어 하는 거 다 사줄 거예요. 형이 저한테 해준 것들 전부 돌려줄 거예요. …형이 제 거짓말 때문에 정 떨어지셨다면 어쩔 수 없지만요. 거짓말은 나쁜 거잖아요."


말을 마친 수빈은 종업원을 불러 맥주 한 잔을 더 시켰다. 종업원이 오백 한 잔 더 가져다 주자마자 수빈은 절반 넘게 비웠다. 도수 낮은 맥주는 취하지 않는다. 맨정신에 이야기 하고 싶어 소주를 피했으나 맨정신에 이야기하고 나니 소주가 간절했다. 저지르고 나니 클로짓을 실감했다. 가족말고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를 처음으로 타인에게 꺼내 놓았다. 연습 없이 실전을 들어간 셈이다. 무모했다. 입술을 깨물던 수빈은 어색한 기분을 이기지 못하고 억지로 입꼬리를 당겼다. 연준의 얼굴 표정을 확인할 용기가 없었다. 수빈은 허벅지 위 가지런히 놓은 두 주먹에 힘을 주었다. 파드드 떨렸다. 내뱉는 숨소리도 떨렸다. 블루스 음악 아래 흐르는 소름끼치는 정적 끝에 연준이 입을 열었다.


"너랑 봤던 영화 말이야. 나는 그 영화에 대해 가끔 생각하거든. 그 때 곱창 먹으면서 니가 뭐라고 했는지 아냐. 거짓말이 늘상 나쁜 건 아니라고, 누구든 이해 받지 못할 사정이 있을 거라고, 니가 그랬다."

"……."

"이제 그 말이 이해가 돼 수빈아. 그동안 고생 많았어. 나한테 말해줘서 고마워."

"아니에요."

"좋아해줘서 고마워. 나 같은 게 뭐라고 이렇게 마음고생을 해. 너 같은 애가…. 너같이 잘생기고 키도 크고 똑똑한 애가 왜 나 하나 때문에 이렇게 힘들어 해."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형도 참……."

"나 말이야…. 지금은 만나는 여자친구가 있잖아. 그렇지."

"그렇죠."

"미안해……."


술집에서 나온 둘은 지하철 역까지 천천히 걸었다. 플라타너스 나무에 붙은 매미가 밤인데도 울어댔다. 헬로키티 잔뜩 그려진 핑크색 담요가 연준의 넓은 등을 감쌌다. 바지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계속 울리는 것을 수빈이 채근했다. 저기 형, 전화가 왔어요. 팔짱을 끼고 상념에 젖어 있던 연준은 응? 하고 되묻더니 당장 받지 않아도 괜찮다며 웃었다. 십오 분 쯤 걷자 지하철 역이 나왔다. 수빈은 연준을 개찰구로 보내고 길건너 버스를 탈 생각이었으나 연준은 좀 더 걷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둘은 삼십 분이나 더 걸었다. 다시 돌아온 13번 출구 앞에서 연준은 내려가지 않고 자꾸만 망설였다. 수빈은 얼른 가보라며, 여자친구 기다리지 않느냐며 연준을 재촉했다. 연락할게, 몸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어야 해. 밥도 잘 챙겨 먹고. 연준이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 꼴랑 삼 일 갔다 오는 거 뭘 아예 가는 사람처럼 그래요. 수빈은 애써 농담했다.



***



차이고 난 다음 날에도 수빈은 평소처럼 출근 준비를 했다.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 무거운 몸을 욕실에 처박고 꾸역꾸역 씻고 면도했다. 잘 때 입었던 반바지를 빨래통에 던져넣고 흰색 티셔츠와 여름용 청바지를 꺼내 입었다. 나가기 전 에어컨 끄고 환기 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샘소나이트 레드 백팩을 매고 운동화발로 자취방을 나섰다. 빨대 꽂은 편의점 커피우유를 들고 천천히 버스를 타러 내려갔다. 버스 창가 자리에 앉은 수빈은 에어팟을 끼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연준에게 이렇다 할 연락은 없었다. Flanagan & Allen의 Run, Rabbit, Run을 재생했다. 학교에서 온 문자 몇 개와 광고 문자 두어 개 사이로 모르는 번호가 눈에 띄었다. 수빈은 메세지를 확인했다.



010-0000-0000
제목없음

연준 오빠한테 네 얘기 많이 들었어. 본론만 말할게 오빠한테 연락하지 마. 오빠가 뭐라는 줄 알아? 너 되게 짜증난다더라. 너무 귀찮게 굴어서 성가시다고. 불쌍해서 잘 대해줬더니 착각하고 달라 붙는다고. 우리 오빠는 정이 많고 착해서 거절을 잘 못 하거든. 그래서 내가 오빠 대신 연락 하는 거야 오빠는 너한테 모진 소리 못 할 테니까. 오빠 너한테 관심 있어서 그러는 거 아니야. 그냥 너 받아 주는 거야 네가 하도 부담스럽게 들이대니까. 오빠가 너한테 좀 잘 해준다고 그동안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았나본데 착각하지 말아줄래? 오빠가 사랑하는 건 나야. 그리고 너한테 연락한 거 오빠가 아는 일 없도록 하면 좋겠어. 만약 오빠가 이 일을 알게 된다면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 지 몰라. 명심해.

-연기예술학과 17 이유진-

AM 04:25
MMS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까지 수빈은 메세지를 읽고 또 읽었다. 읽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유니폼 갈아 입고 탈의실을 나온 수빈의 얼굴이 창백했다. 눈에 초점이 없고 맹했다. 너 무슨 일 있냐? 태주가 물었다. 수빈은 고개를 저었다. 어제 연준이 형이랑 술 마셨거든요, 너무 마셨나봐요. 수빈은 넋이 나가 있었다. 오전 내내 수빈은 엉망으로 일했다. 주문 받는 매뉴얼을 더듬고 익숙하게 만들던 음료 레시피를 수차례 실수했다. 컴플레인이 계속 들어왔다. 늘 딴짓하지 않고 열심히 일해오던 수빈이었다. 태주는 손님들에게 환불해주면서도 의아해했다. 수빈은 사색이 되어 죄송하다는 말만 계속 되뇌었다.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수빈은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변기 붙잡고 쉴새없이 토했다. 놀라 뒤따라온 태주가 수빈의 등을 쓸어주며 뭐 때문에 이러느냐고 성질을 냈다. 주저앉은 수빈은 질질 울며 유진이 보낸 문자를 태주에게 보여주었다. 태주는 다 읽자마자 두통을 호소하더니 연준인지 뭔지 하는 새끼 묵사발 만들겠다고 수빈에게 난리쳤다. 태주는 전과만 없지 폭행으로 여러번 경찰서 신세를 졌다. 수빈은 태주를 겨우 진정시키고 조기퇴근을 했다. 양치를 하는 내내 연준에게 건넬 끔찍한 말들을 생각했다. 갈기갈기 찢겨진 마음으로 학교로 가는 버스에 몸을 맡겼다. 목요일도 특강이 있다 하였으니 무용학과 연습실로 가볼 생각이었다. 수빈은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전날 밤의 일을 생각했다. 어쩔 줄 몰라하며 말을 고르던 상냥한 얼굴을 머릿속으로 되감기했다. 미처 읽어내지 못했던 불쾌하고 언짢은 표정을 뒤늦게 깨닫는다. 수빈은 여행 짐 싸다 말고 엉겨붙어 자취방 침대에 누워있는 연준과 유진을 생각했다. 최수빈 그 새끼 게이더라. 내가 좋대. 나 좋아한댄다 걔가. 토나와 진짜 미친 새끼 아니야. 그걸 나한테 왜 말해. 나 가지고 딸친 거 아니야 더러운 새끼. 연준이 낄낄 웃다가 유진의 품에 파고 들었다. 유진은 깔깔 웃으며 연준을 품에 안고 뒹굴었다. 과속방지턱에 걸린 버스가 덜컹거렸다. 수빈은 백팩에 얼굴을 묻고 소리없이 흐느꼈다.

무용학과 연습실은 예술관 1동 지하 3층에 있었다. 계단을 밟는 수빈의 발걸음이 후들후들 떨렸다. 연준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무슨 말을 꺼낼지 짐작가지 않았다. 강의실 벽면에 특강 시간표가 붙어 있었다. 와본 적 없는 곳이 낯설었다. 굳게 닫힌 실용무용 연습실 안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입술을 깨물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수빈은 무작정 서서 연준을 기다렸다. 계단 쪽이 시끄러웠다. 노란색 머리통이 사람들과 히히덕거리며 털레털레 계단을 내려왔다. 검정색 티셔츠를 핏되는 청색 데님에 넣어 입고 검정색 구두를 신었다. 매점 다녀왔는지 꼬북칩을 품에 안고 손에는 테이크아웃 민초 프라푸치노 한 잔 들려 있었다. 여자애에게 등짝 맞으며 웃던 연준은 수빈을 보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뭐야?"


연준은 주변 사람 다 제쳐두고 수빈에게 뛰어왔다. 


"왜 여기 있어? 설마 나 보러 온 거야? 알바는?"


연준이 다정하게 웃으며 수빈의 팔을 만지작 거렸다. 이내 엉망이 되어 하얗게 질린 얼굴을 마주한다. 연준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뭐야, 왜 이래? 수빈은 눈도 못 마주치고 달달 떨며 말했다. 형 저 지금 중요하게 해야 할 말이 있어서 그러는데요. 지금 많이 바쁘신가요. 망설이던 연준은 나 잠시 얘기 좀 하고 오겠다며 뒤에 서있던 후배 애들에게 군것질 거리를 떠맡겼다. 연습실 문이 닫혔다. 복도에는 수빈과 연준 외에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연준은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수빈이 감당이 안 됐는지 어떻게든 달래 보려 했다.


"수빈아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뭐라도 마시면서 얘기할까. 형이 시원한 거 하나 사 줄까?"

"사람 없는 곳이었으면 해요 부탁해요."


잠시 생각하던 연준은 수빈을 발레 연습실에 데려갔다. 천장이 높고 사방이 거울이었다. 지하 연습실이라 공기가 냉방 없이 차가웠다. 먼저 들어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연준이 수빈에게 손짓했다. 수빈은 문을 닫자마자 연준에게 물었다.


"형 여자친구한테 제 얘기 했나요."

"응? 뭔 얘기."


수빈은 유진에게서 온 문자를 연준에게 보여주었다. 핸드폰을 쥔 수빈의 손이 벌벌 떨렸다. 익숙한 열 한자리 번호가 연준의 눈에 들어왔다. 연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연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유진이 문제 있는 여자친구라는 것을 연준은 수빈에게 말한 적 없었다. 연준이 뭐라고 입을 열어도 이상한 상황이었다. 내가 설명할게 라는 말은 이미 뒤에서 호박씨 깠다는 반증이 된다. 연준은 핸드폰을 꺼내 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스피커폰도 켰다. 통화 연결음이 길게 이어졌다. 유진은 받지 않았다. 수빈은 벌개진 눈으로 헛웃음을 쳤다.


"얘 왜 안 받냐. 받아. 받으라고……."

"전화 걸어서 뭐 하시려고요. 여자친구분이 형 대신 욕 해줬으면 해서요?"

"뭐?"

"왜요. 그냥 욕 하세요. 말 하세요 더럽다고. 어제 말 해줬어도 됐잖아요. 더럽다. 연락하기 싫다. 다시는 얼굴 보고 싶지 않다. 잘 해줬던 걸 후회한다. 직접 말하시라고요 사람 병신 만들지 말고. 내가 눈 돌아가서 형 치기라도 할까봐 무서워요?"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아니야. 아니라고. 전부 아니야."

"형이 좋은 사람 같아 보여서 좋아한 거예요. 근데 내 눈이 틀렸나봐요 그냥 사람 좋은 척 하는 거였는데. 나는 남자에 미쳐서, 그냥 남자면 다 좋아하나봐요. 내가 내 무덤 파는 줄도 모르고. 이런 꼴 같지도 않은 싸구려 새끼 뭐가 좋다고."

"야, 말 가려서 해."

"아까 그 사람들. 형이랑 연습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도 내 얘기 알아요? 어디까지 말하고 다녔어요 그거나 말해요."

"야 이 개새끼야!"


수빈은 물러나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벽 쪽으로 연준을 몰았다. 연준은 뒷걸음질 치다가 등에 닿는 서늘한 벽의 감촉에 움찔 떨었다. 연준의 얼굴과 몸 위로 수빈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두번째 전화 연결을 했다. 누구 할 것 없이 숨소리를 떨었다. 백팩을 집어 던진 수빈은 주먹을 힘 주어 쥐었다. 연준은 치켜뜬 눈을 피하지 않은 채 침을 꿀꺽 삼켰다. 통화 연결음이 또 다시 길게 이어졌다. 수빈은 뻐근한 목을 두둑 꺾었다. 연준의 쌍꺼풀 없는 눈매가 젖어들었다. 치고 받으려던 찰나 유진이 전화를 받았다.


"어엉 오빠~. 전화 했었어?"

"니가 수빈이를 어떻게 알아."


연준은 수빈을 노려보며 말했다. 유진은 말이 없었다. 연준이 계속 말했다. 대답해 너 최수빈이 누군지 어떻게 아냐고. 유진은 계속 말이 없었다. 야 대답해! 연준이 큰 소리를 냈다. 정적 끝에 유진이 웃었다.


"왜? 그 기집애가 오빠한테 바로 연락 했나봐?"


수빈은 얼빠진 얼굴을 했다. 2녀 1남 팔자 부모님 아래 태어나 평생 달고 다닌 이름이 여자애 이름이라는 것을, 시커먼 남자애는 종종 망각했다. 연준은 씁쓸하게 웃으며 수빈의 가슴을 밀치고 벽 모서리에서 빠져 나왔다. 유진의 목소리가 조용한 발레 연습실 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오빠 요새 맨날 그 기집애 만나잖아. 맨날 카톡하고 한 시간씩 전화하고 그러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야……. 너 내 핸드폰에 손 댔냐."

"맞아. 오빠 핸드폰에 손 안 대기로 약속한 거, 나도 알지. 안다고. 그게 우리 다시 만나는 조건이었잖아. 근데 이번 일은 내 잘못 아니야. 오빠 잘못이야. 오빠가 먼저 딴 기집애한테 눈독 들였잖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내가 괜히 오빠 핸드폰 뒤지는 줄 알아? 오빠가 틈만나면 다른 기집애들한테 껄떡대니까, 오빠가 날 불안하게 하니까 내가 이렇게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는 거잖아!"

"수빈이 여자 아니야. 남자야."

"오빠 친구들중에 내가 모르는 오빠가 어디 있는데. 민재오빠, 승호오빠, 도현오빠, 오빠랑 친한 무용 오빠들 이게 끝이잖아. 고학번 오빠들 새내기 남자애들 동아리 친구들 이름까지 대 볼까? 내가 못 할 거 같아?"


수빈은 유진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연준 같은 애들은 평범한 여자애들이 건드리지도 못한다던 수연의 말을 생각했다. 영상통화 마치고서도 이어지는 인스타 댓글, 눈물 젖은 화려한 주문 제작 꽃다발, 깨 쏟아지는 순간들만 편집해둔 십여 분짜리 커플 브이로그. 아름답게만 보이던 남녀관계의 포장지를 벗겨내고 썩어 문드러져가는 민낯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수빈은 어쩌면 유진도 저만큼 미쳐 버린 게 아닐까 생각했다. 연준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지겹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수빈이 남자야. 저번 학기에 교양에서 만났어. 아끼는 동생이라 자주 연락하는 거야. …야 수빈아 말해. 뭐라도 말 하라고."


연준은 수빈에게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수빈은 머뭇거리다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최수빈입니다…. 남자 맞아요 저."


낮게 깔리는 걸걸한 목소리로 분명한 남자임을 드러냈다. 여자친구 있는 남자와 놀아난 죄를 남자라는 이유로 면죄 받는다. 유진은 말이 없었다. 연준은 스피커폰을 끄고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댔다.


"너 때문에 진짜 창피하다. 수빈이한테 사과 문자라도 따로 보내." 


연준은 전화를 끊었다. 수빈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 앉았다. 긴장이 풀려 쉴 새 없이 울었다. 끅끅거리며 서럽게 통곡하는 수빈을 연준이 다독였다. 수빈의 곁에 앉아 애처롭게 떨리는 커다란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등에 식은땀이 흥건했으나 연준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연준이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이랑 나랑 언젠가부터 그렇게 좋진 않아. 일부러 여태 말 안 했어 좋은 얘기는 아니니까. 남녀사이 일이니까. 내가 미안해. 수빈이 싸구려라 매도하고 물어뜯던 남자는 여전히 수빈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돈 가져본 적 없는 사람은 억만금을 줘도 쓸 줄 모른다. 사랑 받아 본 적 없는 사람은 진심을 보여도 믿을 줄 모른다. 싸구려 눈엔 싸구려만 보인다. 수빈의 눈에 보인 연준은 딱 그 만큼인 사람이고 사랑이었다. 겨우 그 만큼 밖에 되지 못하는 제 자신이 수빈은 증오스러웠다. 제 마음이 걸레짝 된 건 상관 없었다. 연준의 마음은 그렇게 두어선 안 되었다. 수빈은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으려 애썼다.


"오해해서 미안해요. 형한테 와 보기 잘 한 거 같아요. 그냥, 그냥 형한테 오지 말고, 번호 바꾸고 다시는 연락 하지 말까 생각도 했어요."

"고마워. 나 보러 와 줘서…. 정말 고마워."

"형 좋은 사람이에요. 내가 나쁜 사람이에요. 나야말로 사람 좋은 척 하면서 형한테 못할 짓 했어요. 형 같이 착한 사람한테 왜 나 같은 정신 나간 새끼가 들러 붙는 건지 모르겠어요. 나는 인간말종이에요……."

"수빈아…. 그만."


연준은 수빈을 끌어 당겨 품에 안았다. 놀란 수빈이 몸을 뒤로 뺐으나 연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훌쩍이던 수빈은 어색하게 연준의 등을 끌어 안았다. 그렇게나 안아보고 싶던 것을 결국 이렇게나마 안아본다. 연준의 목덜미에서 기분 좋은 살냄새가 났다. 굳은살 하나 없는 부드러운 손이 수빈의 짧게 친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연준의 마른 어깨가 수빈의 눈물로 축축이 젖어 들었다. 수빈의 헐떡거림이 잦아들 때까지 연준은 수빈의 등을 어린 애 재우듯 토닥였다. 수빈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나 남자 좋아하는 거 알잖아요. 내가 형 좋아하는 거 알잖아요. 그거 다 알면서 왜 나 안아줘요. 나 어제 고백했는데. 내가 아무리 마음 정리 한다고 했지만 어떻게 하루만에 마음 정리를 해요. 연준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수빈은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연준이 먼저 밀어낼 때 까지 안겨 있기로 했다. 굶주린 짐승 새끼 마냥 파고 들어 연준의 품을 탐했다.

연준은 특강 끝나고 유진의 자취방으로 내려갔다. 자취방 문 열고 들어가자마자 둘은 싸웠다. 연준은 긴말하지 않겠다며 여행을 없던 일 치자고 했다. 핸드폰 숙박 어플 켜서 호텔 예약 취소하려던 걸 유진이 뺏으려고 덤볐다. 머리 하나 차이나는 덩치였으나 유진은 엉엉 울며 연준을 쥐어 뜯었다. 물어 뜯지 말라고 붙여 놓은 네일아트 큐빅이 흉기나 다름 없었다. 연준의 팔에 빨간 줄이 그어지고 피가 비쳤다. 어이 없어 팔을 문지르던 연준에게 유진은 화내지 말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화는 니가 내고 있잖아. 사과 해야 하는 건 넌데 오히려 니가 화내고 있잖아. 연준이 차분히 말해도 유진은 울며 난리쳤다. 긴 머리를 풀어 헤친 채 꺽꺽 울며 바닥에 쓰러져 흐느꼈다. 그러다 숨이 모자라면 껄떡껄떡 헛구역질을 했다. 연준은 이러다 정말 무슨 일 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예정대로 부산여행을 가기로 했다. 새로운 장소에 가서 바람을 쐬고 그간의 앙금을 풀면 이 뒤틀린 관계가 조금이라도 나아지지 않겠느냐고 연준은 애써 좋게 생각했다.

수빈은 연준과 오해를 풀자마자 다시 매장으로 복귀해 일했다. 나갈 때 질질 짜던 얼굴이 들어올 때는 퉁퉁 불어 있었다. 어떻게 됐느냐는 태주의 물음에 수빈은 잘 해결 되었다고 적당히 둘러댔다. 한 차례 밀려 들어오던 손님들을 전부 받고 한숨 돌리던 차에 유리문을 열고 연준이 들어왔다. 급하게 뛰어 왔는지 숨을 헐떡거렸다. 태주가 눈에 불을 켜고 뛰쳐 나가려는 걸 수빈이 막아 세웠다. 연준은 할 말 있어 왔다며 잠깐 밖에서 볼 수 있느냐고 수빈에게 물었다. 수빈은 태주의 눈치를 보았다. 태주는 아니꼬운 표정으로 그러라고 했다. 수빈은 연준의 뒤를 따라 매장 밖으로 나갔다.


"내일 부산으로 떠나."

"알고 있어요."

"사진 많이 찍어올게. 부산 고래사어묵이 그렇게 맛있다던데. 네 것도 사올게. 자취방 냉장고에 넣어 두고 밥 먹기 귀찮을 때 하나씩 먹어."

"안 그러셔도 되는데. 잘 다녀와요. 몸 조심하구."


퇴근시간이라 도로가 차로 붐볐다. 경적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수빈은 신발코로 보도블럭 바닥을 툭툭 쳤다. 할 말 있다던 연준은 정작 별 말 없이 수빈의 얼굴만 한참 들여다 보고 갔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수빈은 오래도록 배웅했다. 수빈은 씁쓸한 기분을 안고 매장 안으로 들어왔다. 현실은 영화가 아니다. 기승전결도 엉망이고 개연성도 없었다. 여자친구라는 이유만으로 유진은 연준과 여행을 간다. 핸드폰을 뒤지고 인간관계를 파탄내고 내면의 바닥까지 보여줘도 연준과 여행을 가는 것은 유진이었다. 아무리 그런 여자여도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연준은 유진을 사랑한다. 남자인 수빈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담배를 끊고, 종태원 생활을 접고, 내키지 않는 여자친구 공연에 따라가고, 집 가는 길 내내 전화통화를 하고, 몇 시간씩 의미 없는 카톡을 주고 받고, 갖은 노력을 다 했다. 침전된 삶에 변하는 건 없었다. 불행에 익숙해져 가는 게 무서웠으나 이젠 그마저도 무디게 느껴졌다. 수빈은 슬슬 이 모든 것이 지겹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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