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성을 증명하는 과정










눈두덩이가 퉁퉁히 부었다. 베개맡 언저리를 뒤적인다. 슬기는 손에 쥐면서도 계속해서 울리는 핸드폰의 화면을 켰다. 과제 제출하기 전날을 제외하면 늘 조용하던 단체방에 메시지가 삼백 개도 넘게 쌓여 있었다. 슬기는 맨 처음 메시지로 거슬러 올라갔다.


[우리 중근대 교수 바뀐대]


잠기운을 몰아내고 허리를 벌떡 일으켰다. 이게 다 무슨 소리야. 화면을 내리면 원성만 가중될 뿐 이유를 파악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졸논 어떡하냐, 우리. 나 정양인 교수님한테 허가서 받았는데 이렇게 되면 어떻게 진행해. 그러니까, 나도 그 교수님한테 졸논 맡아 달라고 했는데 모르겠어. 어떤 교수로 바뀌는지도 몰라. 일단 우리 캠퍼스 쪽 교수님은 아닌 것 같아. 조교가 더 안 알려 줘서 나도 많이 못 알려 줘. 이 상황에 맥을 못 추는 건 과대인 승완도 매한가지였다. 수업계획서에 공란으로 있던 칸에 방심하고 수강 신청한 강의에, 바로 2주차부터 공지가 떨어진 광대한 범위의 쪽지 시험에도, 멋모르던 1학년 시절 같은 팀원이 벼락치기로 제작한 보노보노 프레젠테이션을 모조리 들어내서 재발표하라는 교수님의 무리한 요구에도 눈썹 하나 꿈틀이지 않고 밤샘을 강행하던 그 손승완이.

졸업을 목전에 두고 발등에 불똥 튄 것처럼 안 굴 수가 없다. 거기다가 중근대는 토의가 주요한 과목이었다. 슬기는 제 몫의 발표를 미리 마쳐 놔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때마침 수영에게서 카톡이 왔다.


[언니 어떡할 거야? 허가서 다른 교수님한테 제출할 거야?]


머릿속이 백지장같이 하얘졌다. 정양인 교수에게 날인받아 놓은 허가서가 가방 안의 파일에 꽂혀 있었을 것이었다.

 

아메리카노에 시럽을 두 번 넣었다. 스트로우를 꽂고 한 모금 쭉 머금었다. 퍼지는 원두의 향이 썼다. 슬기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면서 부디 카페인이 몸에 통하길 빌었다. 글쎄 난 내가 4학년이 되면 밤 같은 거 새울 줄 몰랐다니까, 교수님들이고 어른들이고 4학년 때는 인턴 다니는 게 흔한 일이라더니 현실은 학점 채우는 거에 허둥대고 있고. 슬기는 문득 어깨에 매고 있는 에코백의 끈을 부자연스럽게 의식했다.


학생.

네?

길 좀 묻고 싶은데….


교수연구동으로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돼요? 깔끔한 블라우스 차림의 여자가 슬기에게 길을 물어 왔다. 그녀는 머리를 느슨하게 묶고 있었다. 동글뱅이 안경을 걸쳐 잔머리가 귀 옆에 흘러나왔다. 저 방향으로 쭉 직진하시면 보이는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으시면 돼요. 가장 위로 우뚝 선 건물 보이실 거예요. 알림판도 있을 거고요. 그녀는 가볍게 인사하고 슬기가 알려 준 방향으로 등을 돌려 걸었다. 슬기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여자에게서 쉽사리 눈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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