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르카인과 데이안은 오늘부터 신성 기사의 임무를 다하게 될 디알브 행정구로 향했다. 중앙 신전이 있는 시에랑에서 디알브까지는 쉬지 않고 말을 몰아 달리면 한 시간 가량 걸린다. 황궁이 위치한 르웰리아로 이동하는 거리의 두 배인 셈이다.

 

옆 도시와 맞닿은 디알브는, 차분하며 정적인 시에랑보다 활기찬 한편 화려하고 번잡한 르웰리아보다 수수한 면이 있는 행정구였다. 수도 라쿠스의 그 두 중심 구역에서 멀리 벗어나 있는 덕택에 오히려 사람 냄새가 나 평화롭다.

 

건장한 신성 기사 둘은 앞으로 같이 지낼 예배당의 신도들과 인사를 나눈 뒤 바깥으로 나와 지리를 익힐 겸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신성 기사단을 가까이서 마주칠 일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는 시선이 꽂혔다.

 

 

“원결주님의 약속된 평안을!”

 

 

개중 용기 있는 몇몇 사람을 시작으로 디알브 주민들과 새로운 신성 기사의 대화가 잇달아 물꼬를 트게 되었다.

 

대부분의 구민들은 며칠 전 불길하기 짝이 없던 새벽하늘에 대해 묻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고 하르카인과 데이안은 이미 그에 관한 명령을 받은 바가 있었으므로 정해진 답변을 내주었다.

 

 

“원결주님께서 후일 다가올지도 모르는 악을 예측하시고 그로부터 우리를 구하겠노라는 뜻을 전하고자 하늘을 까맣게 칠하셨습니다. 저희는 그것을 받들어 위험에 대비하려 이곳에 온 것입니다. 그러니 안심하시고, 혹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저희를 찾으십시오.”

 

 

바로 그들이 대신관에게 들어서 아는 만큼 솔직히 대답하는 것이었다. 단, 사람들이 너무 큰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말을 아끼긴 해야 했다. 그래서 수상한 낌새를 발견하면 알려달라든가 하는 소리는 부러 덧붙이지 않는다. 어차피 안 좋은 상황이 발생한다면 가까운 신성 기사단을 찾게 될 터였다.

 

 

“혹시 이 동네에 여러분들이 곧잘 어울려 즐겨 찾는 곳이 있을까요? 이참에 다른 주민 분들과도 자주 인사를 나누고 싶어서 말입니다. 저희도 이제 디알브 주민이나 다름없지 않겠습니까?”

 

 

주민들의 궁금증 해결이 끝나면 데이안은 넉살 좋게 웃어가며 공식 서류만으로는 쉽게 파악할 수 없는 디알브의 일상적인 분위기나 문화 등 여러 정보를 수집했다. 단순히 그러한 목적이 아니더라도, 낯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데이안의 모습은 즐거워 보였다.

 

하르카인은 그 옆에 동상처럼 서서 간간히 묻는 말에 대답하는 게 전부였다.

 

하르카인에게는 남을 유쾌하게 해줄 말재간이 없었다. 루체드 공작가는 그런 걸 익힐 만한 가풍이 아니었고, 그가 한가롭게 재미있는 말주변이나 익히고 있을 만한 위치는 더더욱 아니었다. 애초에 말이 많으면 많은 대로 루체드 공작가의 일원들에게 욕을 얻어먹었을 터이니 구태여 양어버이와 그 자제들의 예쁨을 받겠답시고 아양을 떨지 않았다.

 

하르카인과 줄곧 함께하는 동기가 데이안이라서 어찌나 다행인지. 데이안뿐만 아니라 데이안이라는 사람을 보내주신 신의 안배에 은공을 바치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주민 여럿과 인사를 나누던 하르카인과 데이안은 맞은편에서 나란히 걸어오는 그들 또래의 세 청년을 발견했다.

 

맨 왼쪽에 있는 바다색 머리는 이제 막 성년이 될까 말까 한 외모였고 맨 오른쪽에 있는 갈색 머리는 셋 중에서 제일 연장자 같은 느낌이 났다.

 

마지막으로 하르카인이 둘 사이에 반걸음 앞서 걷는 사람을 쳐다보고는 멈칫했다. 사실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는 인상은 아니었다. 도리어 눈에 띄는 쪽은 양옆에 서 있는 둘이다. 그러나 하르카인은 살굿빛 피부에 대비되는 새까만 머리칼과 눈동자로부터 더 이상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최초의 약속이 당신께 닿기를.”

“당신과 함께이길.”

 

 

결국 은발의 기사는 갑자기 든 기시감의 정체를 밝혀내느라 제때 인사하지 못하는 실례를 저질렀다. 그가 데이안의 신호를 알아듣고 정중하게 인사말을 꺼냈으나 마찬가지로 이후의 짤막한 대화는 데이안이 주도했다.

 

하르카인은 그리 쾌활하지 않은 목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였다. 당연하게도 처음 듣는 낯선 목소리였으나 그 목소리의 주인과 참 잘 어울리는 차분함을 지니고 있었다.

 

쨍쨍한 여름햇빛을 피해 들어온 그늘처럼 서늘하고도 무감한 분위기에, 문득 인연이라 부르기에도 볼품없는 그 아이가 기억났다.

 

 

“으뜸된 맹약의 빛이 당신을 어둠으로부터 지켜주기를.”

 

 

헤어질 때 늘 하던 대로 인사를 건넨 이유는 그래서였다. 하르카인이 변함없이 단단하듯이 그 사람 또한 여전히 그러할 것임을 믿기에. 그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믿었다.

 

 

“이런……, 이…… 둔한 친구야!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완전한 제삼자인 데이안이 그러한 마음을 알 리가 있나. 덕분에 하르카인은 아까 만난 셋과 한참 멀어지고 나서 답답함에 펄쩍 뛰는 동기에게 등짝을 한 대 맞아야만 했다. 아프지는 않았으나 하르카인으로서는 억울한 일이었다.

 

 

“전 평소처럼 했을 뿐입니다.”

“어휴, 그러니까……. 상대를 봐가면서 해야 하지 않겠냐. 실례일지도 모르는데.”

 

 

데이안이 제 붉은 뒤통수를 아무렇게나 헤집었다. 하필 그 흔하지도 않은 흑발에 검은 눈을 가진 사람에게 하르카인이 어둠 어쩌고 운운한 게 신경 쓰인 모양이었다.

 

하르카인은 데이안의 그런 사려 깊은 점을 좋아했지만 이번만큼은 그 뜻에 동의하지 않았다. 만약 데이안이 알았더라면, 언제는 네가 내 말에 빠릿빠릿하게 동의한 적이 있느냐며 뒷목을 잡겠다만.

 

 

“전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무슨 색깔을 가지고 태어났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검정은 어둠의 색이자 욕망의 색이다. 그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사람이 그 빛깔을 품고 태어나는 것은 그와는 전혀 무관한 인과의 법칙이다. 그 사람을 낳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닮았을 뿐이고 그들 역시 그들의 어버이를 닮았을 뿐이다. 그 모두를 거슬러 올라가면 분명히 톄무하브가 손수 탄생시킨 인간이 있으리라.

 

그렇기에 하르카인은 도리어 묻고 싶었다.

 

태초의 약속을 쥔 주인께 영원한 믿음을 맹세한 인간 된 도리로써, 어찌 감히 어둠의 색채를 품었다는 까닭만으로 누군가에게 돌을 던진단 말인가?

 

 

“그게 우리를 규정하지 않습니다. 그런 원칙이 가장 고결한 맹약에 의해 허용될 리가 없잖습니까.”

 

 

얼굴도 모르는 아비에게 물려받은 생김새로 인해 한평생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사람이 하니 더욱 울림이 강한 단언이었다.

 

그 사실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뷰던 공작가의 차남은 잠시 말문이 막힌 듯 이마를 짚더니, 아이고 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데이안은 과장이 심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런데 정작 제일 중요한 당사자는 그 깊은 뜻을 모를 거 아니냐.”

“알 겁니다.”

 

 

하르카인이 낮고 담담한 목소리로 곧바로 답하자 데이안은 더욱더 황당해했다.

 

 

“뭘 믿고 그렇게 확신해?”

 

 

머리카락을 만지면 청아한 은빛이 묻어나올 것만 같은 신성 기사는 구태여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닫았다. 그가 알듯이 그 사람도 알 것이라는 믿음의 근거를 데이안에게 한사코 설명해줄 필요는 없었다. 막연하다고 치부하기엔 분명한 이유가 있지만 썩 거창하지도 않으니까.

 

하르카인은 루체드 공작가에 입양되었던 그해의 일을 떠올렸다. 벌써 십사 년이나 지났음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은 듯한 그 자신과 그 사람의 어릴 적을.

 

그래봤자 그다지 회상이라 할 만한 기억도 없었다. 그들은 서로 이름조차 모르는 사이였다.

 

중앙 신전 관할의 보육원은 건물 자체가 매우 크고 넓었으며 딱 그만큼 고아들로 넘쳤다. 라카이튼 제국에서 가장 번화한 수도에서마저 그리 수많은 아이들이 부모를 잃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아직도 속이 답답하다.

 

하르카인은 그 많고 많은 아이들 중 말수가 적은 편에 속했는데 그건 그 애도 똑같았다. 다 같이 모여 식사할 때나 예배를 올릴 때 지나가듯 몇 번 마주쳤겠으나 그게 전부였다. 둘 다 타인에게 막대한 관심을 가지는 성향이 아니었던지라 개인적으로 얽힐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일곱 살이었던 하르카인이, 신심으로 보육원을 후원하러 방문한 루체드 공작의 눈에 띄어 양자로 입적되기 불과 일주일 전, 보육원 한 구석에서 몇몇 아이들에게 가려져 있던 그 아이를 목격한 것은 아주 일어나기 힘든 특별한 일이었다.

 

 

“넌 여기 있으면 안 돼.”

“맞아. 어둠은 나쁜 사람한테만 있는 거랬잖아.”

 

 

하르카인은 그게 말도 안 되는 소리임을 알았다.

 

여긴 톄무하브 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중앙 신전의 힘이 닿는 보육원이며 그분으로부터 신성력을 부여받은 신관들이 때때로 들락날락하는 장소였다. 만약 눈동자 속에 암흑을 담은 저 아이가 진정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더라면 진즉 쫓겨났으리라. 즉 저 녀석들은 첫 번째 약속의 주인이 나눠주신 힘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하르카인이 헛소리를 뇌까리는 아이들한테 다가가 오목조목 따지며 물리쳐버리고는 본인도 그냥 휙 자리를 떠나버린 이유는, 그러니까 단순한 정의감보다도 더 앞선 순수한 신앙심 때문이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바라서가 아니다.

 

설령 바랐다 치더라도 정말 그 아이에게 감사 인사를 들었을지는 의문이었다. 한껏 권태로운 표정으로 헛소리들을 한 귀로 흘리던 그 말간 낯을 돌이켜보자면 말이다. 또래 아이들한테 둘러싸여 그런 망발을 듣는 상황이 제법 무서울 법도 하건만. 굳세다면 굳센 애였다.

 

그날 이후, 하르카인은 그 아이에 대해 알려 하지 않았고 이내 루체드 공작가의 수양아들이 되어 보육원을 떠났기에 하르카인과 그 아이 사이의 담백한 만남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래도 나중에 마주치거든 실례했다고 하는 게 어떻겠어?”

 

 

데이안의 제안에 하르카인이 회의적으로 고개를 기울이다가 그냥 져주는 시늉이나마 해주기로 했다.

 

 

“그럼 만나게 되면 대화를 나눠보겠습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 여상한 인사가 정녕 당신에게 사과할 일이었는지부터 물어보겠다는 속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데이안 역시 그를 모르는 눈치가 아닌 듯싶다만 오늘도 마지못해 수긍했다. 사실 상대에게 져주는 쪽은 언제나 데이안이었다.

 

좋은 사람이다. 데이안은 귀한 집안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저보다 못한 사람을 모욕하는 법이 없었다. 하르카인의 출신에 대한 얕은 호기심으로 기웃거리지도 않았고 함부로 비아냥거리지도 않았다. 성품이 고왔다.

 

여기서 하르카인의 생각은 무심코 그 사람에게로 재차 흘러들어갔다. 한때의 보육원 동기 말이다.

 

양쪽에 있던 사람들을 살짝 뒤에 둔 채 홀로 나서 데이안과 이야기를 주고받던 모습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친구라기보다는 아랫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아마 하르카인처럼 제법 괜찮은 집에 입양되었거나 보육원에서 일찍 독립하여 자수성가했을 것이다.

 

아랫사람이 둘씩이나 붙을 정도면 어지간한 형편일 터이니, 수수한 차림새는 단순히 취향일 뿐이겠다. 지금 다시 그를 떠올려보자면, 거만하지 않고 단아한 그 모습이 타고난 천성처럼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돌연 하르카인이 멈칫했다. 여기까지 그가 참견할 바는 아니었다. 이름도 모르고 스쳐지나간 얄팍한 인연을 깊게 파고들 필요는 없었다.

 

새로운 일터에서 재회한 오래된 인연은 그렇게 하르카인의 마음 한 귀퉁이에 처박힌다. 이상하게도 버려지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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