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고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단체, 장소 및 강의 등은 실제와는 무관함을 밝힙니다.


0.


  “그래서 이번 학기엔 계획서에 써있는 대로 하기로...."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야유. 대학생들이래 봤자, 중고딩이랑 다를 바 하나 없다. 싫은 건 싫은 거고, 좋은 건 좋은 거며, 귀찮은 건, 귀찮은 거다.

  “조는 제가 임의로 짜서 다음 시간에 알려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번 학기도 어김없이 교수님은 학생들을 시험에 들게 하신다. 공산주의가 왜 망하는지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 소시오패스 생성기. 번거로움의 끝판왕. 만악의 근원.

  조모임.



1.


  국문과 수업은 이번이 두 번째다. 우리 과 애들이 탱자탱자 놀기만 하는 건 아니지만 - 그런 놈들도 물론 많다 - 여기 애들은 정말로 열심히 공부하는 것 같다. 그나마 이번에 듣는 강의는 어려운 수업이 아니라 좀 해볼만 할 거다. 뭐, 뚜껑을 열어 봐야 알겠지만. 아니, 정확히는 이름이 불려봐야 알겠지만.

  조모임이 있네 없네 학기 마다 말이 많은 과목이었다. 교수님이 변덕스러운 건지 학교가 변덕스러운 건지 유독 정원이 고무줄 같은 강의였고 그에 따라 조모임도 있다 없다를 반복했다.

  개인적으론 조모임이 있는 게 꼭 단점인 건 아니었다. 제대하고 한 학기 더 쉰 다음 복학하는 거라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보고픈, 마치 새내기 같은 욕심도 갖고 있었고, 조원들이랑 마음만 맞는다면 이쪽이 오히려 개인과제보다 훨씬 수월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뭐, 나이도 먹었으니 이젠 능력도 의지도 없는 선배들한테 시달릴 일도 없을 거고.

  제대하고 돌아온 학교는 마치 물갈이라도 한 듯 뉴페이스들로 그득그득했다. 그래봤자 우리 과 애들이 아니면 잘 모르긴 하지만, 간간이 캠퍼스에서 보이던 얼굴들은 없어지고 (혹은 도서관 구석에 추레한 모습으로 앉아있고), 과방에 가면 문 열기가 민망하게 방금 개장한 식물원인 양 파릇파릇한 묘목들만이 가득했다. 걔들 눈엔 내가 목탄 쯤으로 보이겠지.

  “이제 5 조 불러드릴게요. 허진철 학생?”

  “예?”

  경제? 경영? 뭔진 몰라도 일단 고학은 아니다. 아직 군대도 안 갔다온 것 같은데. 별로 도움은 안 되겠고....

  “신유리 학생.”

  “네-”

  호오, 예쁘장하게 생겼다. 근데 예쁜 애들은 얼굴 값을 하니까 카톡이나 안 씹으면 다행이다. ppt 는 만들 줄 알겠지? 선입견일진 모르겠지만 어쩌니 저쩌니 해도 여자애들이 꾸미고 만들고 하는 데엔 더 소질이 있는 편이다. 더군다나 쟤는 과 후배 놈 페북에 올라온 사진에서 본 것 같기도 하다. 신방과 여자애라면 어깨 너머에서라도 ppt 만드는 걸 구경했을테니까, 도움은 되겠지.

  “이국문 학생.”

  “풉!!”

  아, 실수.

  “이국문 학생?”

  “예.”

  입을 틀어막고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쪽을 봤다. 국문과다. 이름만 국문과가 아니라 생긴 것도 국문과다. 사내 새끼가 보기 좋게 머리를 딱- 잘라야지 저렇게 목까지 덮어가지곤 묶을 수도 있겠다. 으, 머리 묶은 놈은 질색인데. 어쨌든 딱 봐도 대학판 문학소년이다. 피부도 허여멀건하고, 어딘가 우수에 젖은 눈빛에, 가는 몸매에, 보아하니 말수도 적은 것 같고. 분명히 가방 안엔 기형도 시집이 있겠지. 그나저나 너무 크게 웃어서 어떡하냐. 좀 미안한데? 그래도 이름이 국문이 뭐냐 국문이. 어쨌든 저 조만 아니면-

  “그리고 김신방 학생.”

  아, 씨발.



*


  강의 시간도 끝나가겠다, 교수님은 조원들끼리 모이게끔 시켰다. 나는 사람들의 비웃음과 빈축을 사며 강의실 구석탱이에 모인 5 조로 향했다. 거기에 앉아있던 허.. 허.. 뭐였더라... 아무튼 경영대인 것 같은 애랑 여자애는 멀리서 오는 날 발견하곤 큭큭대며 웃었고,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국문과는 날 본 척도 하지 않았다. 그래, 씨발 내가 잘못했다. 지 이름은 신방인 신방과가 이름이 국문인 국문과를 비웃은 게 잘못이다.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비웃어서 미안하다. 참을 수 없는 무안함과 맞서며 나는 꿋꿋하게 그의 옆에 앉았다.

  “뭐, 연락처나 교환 하죠? 저희 발표도 아직 멀었는데.”

  군대엘 다녀오니 느는 건 뻔뻔함이다. 예전 같았으면 입술만 삐죽댔을텐데, 지금은 이 희대의 망신살을 겪고도 선수를 친다. 나 김신방, 올해로 스물 넷인 늙다리 복학생이다. 나에게 있어서 두려운 건 재입대 뿐이다.

  “먼저... 하세요.”

  여자애가 새어나오는 웃음을 힘겹게 참으며 말했다. 자존심 상하지만... 이번 학긴 이미 망했으니까, 그냥 이대로 망해가련다.

  “에, 전, 아까 잘 들으셨겠지만, 10 학번 김신방입니다. 신바... 신문방송학과구요,”

  빌어먹을, 그래도 웃지 말라고...

  “스물 넷입니다.”

  킬킬대던 여자애가 웃음을 겨우 멈추곤 목청을 가다듬었다.

  “저는, 13 학번, 신방과 신유리에요. 사실 신방 선배님 얘긴 전에 다른 선배들한테서 들었는데, 직접 만나뵐 줄은 몰랐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쪽팔림의 물결이 한층 더 거세게 몰아쳤다. 하긴, 입학 때부터 유명했다. 출석 불리는 게 싫어서 개강 날 수업에 안 들어간 적도 많았다. 신방과 김신방이라니, 운명의 데스티니도 아니고. 엄마 아부지, 왜 그러셨어요. 아니, 열 아홉 살의 나새끼야, 왜 신방과를 지원했니. 사실 그 땐 이렇게 덜컥 붙을 줄 몰랐다. 싸그리 다 떨어지고 여기만 달랑 붙었는데. 그 땐 신방과 다니는 김신방으로 사는게 재수생 김신방으로 사는 것보다 만만할 줄 알았다. 졸업할 때까지, 아니, 내 출신학과를 말할 때마다 이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을 감내할 생각을 하면 그때의 나를 대차게 패고만 싶어진다. 누가 그랬던가, 인생은 고통이라고. 내 인생이야말로 영원히 고통받을 운명이다.

  "아 예.... 그럼 그쪽은..."
  "아, 저는 경영학과 12 학번 허진철입니다."

  역시, 내 촉은 아직 죽지 않았군.

  "12 학번이면 아직 군대는 안 가셨겠네요?"

  "네... 가을에 가요."

  요시, 그란도 시즌!

  "그럼 이제...."

  나는 나머지 한 명을 가리키다가 말았다. 내가 아까 의도치 않게 쪽을 준 사람. 그리고 그 자신은 의도치 않게 나에게 역으로 쪽을 쳐먹인 사람.

  “국문과 이국문입니다. 신방 씨랑 동갑입니다.”

  지금 이건... 아까의 무례를 얼른 수습하라는 무언의 압박인가? 나를 스리슬쩍 언급함으로써 내가 치고 들어와서 사과할 여지를 열어두는 그런? 아, 이런 생각 할 때가 아니지.

  "아.. 저 아깐 죄송했습니다. 저도 제 코가 석잔데...."

  "아뇨, 별로..."

  어쭈, 쿨하게 나오는데?

  "그리고 내 코가 석자라는 표현은 약간 핀트가 안 맞는 것 같네요."

  뭐?
  "그럼 전 다음 수업이 있어서."

  이국문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멘다. 홀연히 강의실을 떠난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이번 학기, 정말로 망할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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