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티넬/가이드버스

센티넬 성현제 X 가이드 한유진

오만가지 트리거워닝 주의

11편은 너무 길어서 세 편으로 나눠 올립니다. 


[짧은 공지]

  • 현재 내사종말 1, 2권의 통판과 선입금을 받고 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이곳에서 확인해주세요! 
  • 2권 분량이 몇 부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책이 나오기 직전까지 계속 연재됩니다. 3권은 내사급에서 나올 거 같아요.








12월 14일 세계 가이드 구호 단체 브레이커는 에밀리 스펜스의 유작 <폭력의 봄> 이라는 책을 펴냈다. 학술출판사 팰그레이브에서 출간된 이 책은 센티넬 억제제 사용에 대한 환경적인 영향과, 환경에 풀어진 화학물질이 생태계나 사람의 건강에 끼치는 영향을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스펜스 박사는 센티넬 억제제의 사용이 센티넬이라는 생물종을 멸종에 이르게 할 것이라 고발했지만, 더 많은 주목을 받은 것은 책과 함께 동영상 공유 사이트에 올라온 영상이었다. 

브레이커의 가이드들이 찍은 영상 속에서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밀림의 정글나무 아래에서 중국정부가 보낸 특수부대에 의해 주민들이 총에 맞았고,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그들이 에밀리를 죽였어요! 살인자! 살인자! 그 다음으로는 노인이 된 스펜스 박사의 장례식이 이어졌다. 영상 속에서 브레이커의 문현아가 카메라에 대고 설명했다. 

“스펜스 박사는 센티넬 억제제의 부작용에 관해 모든 것을 밝혀냈습니다. 중국정부가 박사를 죽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죠.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까지 파괴하진 못했습니다. 이 영상 아래 링크에 억제제 부작용에 관한 모든 증거를 첨부합니다. 억제제는 먹이사슬에 의해 생물농축이 됩니다. 이것은 분해가 잘 안되는 오염물질로, 센티넬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도 영향을 끼칩니다. 당신의 자녀도 센티넬이거나, 가이드일 수 있습니다. 국제사회는 이렇게 위험한 약물을 우리 아이들에게 의무복용하게 하려 했던 것입니다. 센티넬-가이드는 현재 폭력의 사각지대에 놓여 고통받고 있습니다. 1월 10일 이란 람샤르에서 센티넬 협정 강화기준안을 위한 국제회의가 열립니다. 이 기준안에는 의무등록된 센티넬과 가이드의 권익을 군견보다 못한 수준으로 축소하겠다는 논의가 포함되어 있지요. 이 기준안을 만든 게 바로 다름아닌 중국과 미국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센티넬-가이드 권리운동가이기도 했던 에밀리 스펜스를 죽인 그 중국과 미국이요.”

그리고 인터폴 대테러총괄과의 사건대응팀 요원 송태원은 휴대폰으로 영상을 본 마이야 요원이 입을 딱 벌리는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그들은 시위대가 도로를 거의 점령하다시피 해서 기어가듯 느릿느릿 굴러가는 렌트카 안에 앉아 있었다.

“이게 언제 올라온 영상이라구?”

마이야가 묻자 송태원은 휴대폰을 돌려받으며 대답했다. 

“어제 입니다.”

쾅! 그때 시위대 중 한명이 송태원이 앉은 운전석 창문에 피켓을 들이밀고 공격적으로 외쳤다. 

“센티넬에게 자유를!”

송태원은 피켓에 쓰여진 글자를 읽었다. ‘학살자 사피엔스’, 그렇게 써 있었다. 

“이래서 정보가 끊긴거군. 이 영상이 풀릴 걸 알았던 거야.”

마이야는 근심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이 맞았다. 몇 달 전 부터 그들은 사건대응팀으로 ‘우연히’ 들어오는 정보의 근원이 중국정부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정보를 받는 사건대응팀은 정작 중국정부의 생각보다 행동이 굼뜨고 확신 없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쁜 말로 하면 관료주의의 불필요하고 숨막히는 형식주의라고도 볼 수 있으나 좋게 보면 신중하고 책임감 있다는 말이다. 거기에 더해 송태원은 지난 몇 주간 사건대응팀으로 들어오는 미묘한 압력을 느끼고 있었다. 성현제와 한유진을 둘러싼 몹시도 정치적인 흐름이 있었는데, 사건대응팀은 거기에 휩쓸려가지 않기 위해 내부적으로도 외부적으로도 싸워야 했던 것이다. 

중국정부는 인터폴이 성현제와 한유진에 테러 의심자 수배통지를 발부하길 바랐으나 그러면서도 동시에 상해의약 센티넬억제제 공장 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한 경위는 감추고 알리지 않았다. 송태원은 그들이 인터폴을 사냥개 처럼 부리고 싶어했음을 느꼈다. 그러나 송태원이 세성을 초국가적 범죄조직이라 확신하는 것과는 별개로 성현제를 수배할만한 명확한 법적 근거를 얻지 못했다. 모든것은 전부 정황상의 심증에 불과했고 인터폴 요원은 더 뚜렷하고 확정적인 근거가 있어야만 실제로 대응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실패한 사냥개였다면…….”

송태원은 저 멀리 회담이 이루어지는 호텔에서 그들이 기다리던 사람이 걸어나오는 것을 보고 안전벨트를 급하게 풀며 말했다. 

“이제 새 사냥개를 구했겠군요.”

두 인터폴 요원은 차를 버리고 호텔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시위대를 막기 위해 바리케이드를 지키는 군인에게 신분증을 보여주고 막 차에 타려고 하는 미국 대표를 향해 신분증을 내밀면서 다가갔다. 

“비쿠스 장관.”

미국 센티넬 특수안전부 장관 롬 비쿠스는 그들을 힐끔 바라보면서 세단에 올라탔으나 출발을 보류하고 창문을 내렸다. 송태원은 멀뚱하니 자신을 올려다보는 장관에게 말했다. 

“인터폴의 송태원과 마이야 요원입니다.”

“댁들이 누군지는 이미 알고있으니 용건만 간단히 하시오. 난 몹시 바쁜 사람이라서.”

“왜 미국 센티넬 특수안전부가 이 가이드에게 관심을 갖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송태원은 차창 너머로 사진을 내밀었다. 한유진의 사진이었다. 비쿠스 장관은 그쪽을 성의없이 힐끔 바라보았다. 

“우리 특안부가 세성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아주 많지. 질문은 그것 뿐인가?”

“성현제를 잡기 위해 한유진을 조사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랬으면 한유진이 수면 위로 드러난 4개월 전 부터 조사를 시작했겠죠.”

비쿠스 장관은 피식 웃었다. 그는 운전사에게 출발하라는 신호를 준다. 송태원은 그가 창문을 완전히 올리기 전에 급하게 말했다. 

“미국정부가 한유진을 위험에 모는 이유가 뭡니까?”

그러나 마지막 말이 끝날 때 즈음에는 차가 호텔 정문을 빠져나간 뒤였다. 송태원은 쓴맛을 다시며 꺼내놓았던 사진을 안주머니에 넣었다. 

“성현제가 한유진을 옆에 두는 이유가 있을겁니다.”

“중국정부가 새 사냥개를 구했을거라고 했지?” 

“예?”

마이야 요원은 멀어지는 세단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새 사냥개는 우리와 다른 방법을 통해 사냥하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들어.”

“다른 방법 말입니까?”

송태원이 되묻자 마이야가 그를 돌아보았다. 경력있는 인터폴 요원은 정말 심각하게 염려가 된다는 듯이 말했다. 

“더 무자비하고, 불법적인 방법 말이야.”


-


한유진은 기침을 하면서 눈을 떴다. 누군가 그의 머리채를 움켜잡고 있었다. 한쪽 코가 막혀 있는데 계속 목구멍에 비린 맛이 느껴지는 걸 보니 이게 피가 굳어서 그런 것 같았다. 어두운 공간에서 그들은 유진의 머리를 들게 한 후 사진을 찍어갔다. 즉석인화지가 밀려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빛 바로 아래 있었기 때문에 눈이 부셔서 그를 둘러싼 어둠 속에 뭐가 있는지 잘 몰랐다. 얻어맞아서 한쪽 눈덩이 위에 피가 고였고, 그때문에 눈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어쨌거나 사진을 찍은 뒤에는 그를 붙잡아 들었던 사람이 그를 놓아주었다. 유진은 바닥에 쓰러졌다. 머리를 너무 많이 걷어차여서 어지러웠다. 다시 정신을 잃을 것만 같다고 생각하는데 그의 시야가 닿는 빛 아래에서 두 짝의 구두가 보였다. 구두의 주인은 혀를 쯧 차면서 말했다.

“얼굴을 때려놓으면 값을 더 못 받을텐데, 다들 너무 열심히 일했구나?”

“죄송합니다.”

그러나 죄송하다고 말하는 놈들은 실제론 웃고 있었다. 여자도 웃었다. 그는 구두 굽 끝으로 유진의 뺨을 쓱 밀어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얼굴이 상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여자는 노인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힘없고 무기력하다는 말이 아니라, 중후하고 어딘지 섬뜩하다는 말이었다. 

“더 질이 안좋은 놈들에게 팔려가게 되지.”

유진은 그 얼굴을 확인해보려 했으나 그의 머리 위로 빛이 너무 밝아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인지 알 것도 같았다. 한유진은 말했다.

“키아라 그레이.”

“우리 친구 공부 좀 하고 왔구나?”

“나는 나이먹으면 빨리 죽어야지 안되겠네요.”

유진이 이죽거리자 그를 두들겨 패던 갱스터가 걸어와 멱살을 잡고 올려서 주먹질을 했다. 눈덩이에 고이던 피가 터져서 한쪽 얼굴을 모조리 적셔놓았다. 유진은 그러면서도 비명 한번 지르지 않았다. 그는 폭력이 익숙하다. 그러나 정신이 멀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가 기절하려던 순간 키아라 그레이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나는 너희같은 족속이 싫어. 건방지게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너희들이 다 죽기를 바라.”

그는 눈 앞에서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사진과 달리 키아라 그레이의 한쪽 얼굴에는 짙은 화상 자국이 있었고, 그때문에 노인의 얼굴은 더욱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한유진은 온 힘을 쥐어짜내 히죽 웃었다. 

“신이 그렇게 좋으면 이웃을 사랑하시지 않고 왜.”

그리고 다시 정신을 잃었다. 


그는 어디론가 계속 이동했다. 덜컹거리는 대형화물트럭 안에서 잠깐 정신이 들어 눈을 어떻게든 떠보려고 했으나 시야가 흐리고 자꾸만 잠이 와서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조금 지난 후에는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바닥에 다리가 끌리는데 신발이고 뭐고 없었다. 그는 어딘가로 던져졌고, 그를 끌어낸 자들은 문을 닫은 뒤 잠궈버렸다. 한유진은 그 상태로 다시 기절했다. 

누군가 그를 건드렸다. 눈을 뜨고 싶었으나 너무나 피곤했고 정신이 돌아올수록 너무 고통스러웠다. 누군가 그를 몇시간동안 거꾸로 메달아놓고 야구배트로 온 몸을 때린 것 처럼 팔다리가 아프고 쑤셔왔다. 물론 실제로 그 정도로 얻어맞은 게 맞았다. 뼈가 여기저기 부러지거나 금이 간 것 같았다. 어디가 얼마나 다쳤는지는 알 수 없었다. 숨을 쉬려고 할 때 마다 가시 덩어리를 삼키는 것 처럼 목 안쪽이 찢어진 것만 같았고 내장이 다 뒤엉켜서 아무렇게나 놓인 것 처럼 뱃속이 뒤틀렸다. 눈커풀에 피가 들어가고 그게 굳어서 눈이 잘 떠지지도 않았다. 유진은 너무 아파서 신음하다가 다시 정신을 잃었다. 

누군가 중얼거렸다. 

“건드리지 마. 어차피 죽을거야.”

프랑스어였다. 유진은 프랑스의 중국대사관에서 일하는 센티넬을 위해 일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어를 하지는 못했으나 알아들을 줄은 알고 있었다. 

“애들이 괴로워하는 거 안 보여? 우리가 도와줘야해.”

“도와봤자 소용 없을거야. 제발 나서지 마. 저 사람이 깨어났다가 우릴 해코지하면 어떡해?”

“싫어. 도와줄거야.”

“블랑!”

애들 목소리였다. 누군가 와서 젖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고 입 사이로 물을 흘려넣어주었다. 유진은 그제서야 눈을 간신히 떠서 아이를 올려다보았다. 블랑이라 불린 아이는 유진이 눈을 떠서 놀란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진은 간신히 입을 열어 목이 다 쉰 채로 말했다.

“영어도 할 줄 알아?”

“네.”

“날 돌봐줘서 고맙구나. 물 좀 더 주겠니?”

블랑은 당황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유진의 입 사이로 물을 흘려보내주었다. 유진은 그 애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시 천천히 정신을 잃었다. 


몇 번 씩이나 정신이 들었다가 기절하기를 반복했다. 처음에는 멀리서 불안한 눈으로 보기만 한 채로 머뭇거리던 아이들도 하나둘씩 나서서 유진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유진을 매트리스 위에 올려놓았고, 그때부터 상처를 닦아주고 피를 닦아내주었다. 유진은 한동안 고열이 났기 때문에 열을 내려야 할 때도 있었다. 시일이 조금 지난 후에는 블랑이 항생제를 가져와 유진에게 먹였다. 그런 다음부터는 그래도 살만했다. 

유진을 돌봐주는 아이들은 모두 센티넬과 가이드로 보였다. 한 묶음의 아이들은 모두 블랑과 누아 라는 두 아이의 말을 따랐다. 누아가 가장 나이가 많았는데, 10대 중반 정도였고 블랑이 그보다 세네살 정도 어렸다. 둘 다 가이드였다. 가장 어린 아이는 일곱 살도 채 되어 보이지 않았다. 

며칠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조금씩 상황파악이 되기 시작했다. 우선 유진은 창문이 모조리 나무판자로 막혀있는 가정집 2층에 있었다. 내부조명은 램프 몇 개가 전부였고, 벽난로가 있었으나 장작이 없어서 사용하지 못했다. 방 세 개짜리 2층으로 모두 사용했으므로 아주 좁은 건 아니었고 욕실도 쓸 수 있었으나 찬물 밖에 나오지 않았다. 밖으로 통하는 구멍은 모두 막혀있고 다만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만 뚫려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마피아들이 돌아가면서 보초를 서며 포커를 치거나 술을 마시거나 했다. 매춘부를 데려오는 날이면 아래층에서 아이들이 듣기에 부적절한 소리가 났다. 음식은 하루에 한번만 블랑이 내려가 곰팡이 핀 빵과 물을 들고 올라왔다. 항생제도 아마 밑에 층 마피아들이 준 모양이었다. 

어느날은 유진이 가벼운 미열을 느끼며 잠들어 있는데 애들이 아주 작게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작은 램프 빛을 의지한 아이들이 한 아이를 둘러싸고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유진은 아직 온 몸이 욱신거리고 아팠으나 자리에서 일어나서 아이들에게로 다가갔다. 

“어떻게 하지?”

“나도 몰라.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어.”

블랑과 누아가 양쪽에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안에 떨고 있었다. 아이들 모두 그랬다. 유진은 그들이 둘러앉아서 어쩔줄을 모르는 상대가 열살 난 센티넬 아이임을 알았다. 센티넬 아이는 웅크려 누워서 온 몸이 땀으로 젖어 헐떡거리고 있었다. 아이의 온 몸이 유리처럼 변했다가 다시 사람 피부로 바뀌기를 반복하는데 이 애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각성을 갓 시작한 센티넬들이 겪는 열병이었다. 이걸 멈추지 못하면 능력이 폭주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블랑과 누아는 가이딩을 하기 위해 손을 잡고 있었으나 심각한 열병은 그들도 어찌하지 못할 것이 틀림없었다. 다른 게 아니라 경험의 부족 때문이다. 유진은 둘러앉은 아이들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서 비켜달라는 제스처를 하고 매트리스 위에 앉았다. 블랑과 누아가 동시에 유진을 바라보았다. 유진은 두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한번 해봐도 될까?”

유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아이를 조심스럽게 안고 무릎 위에 눕혔다. 아기를 안듯이 안아주는 동안 센티넬 아이의 피부가 서로 스칠 때 마다 유리가 서로 스치는 듯한 불유쾌한 소리가 났다. 

“가이딩은 한 명이 해야 해. 한 센티넬에 한 명의 가이드란다. 두 명이 동시에 가이딩을 할 수는 없어. 우린 그런 관계가 되지 못해.”

유진은 블랑과 누아에게 말하고 나서 곧 아이를 가만히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러자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헐떡거리다가 곧 무언가 느낀듯이 유진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렇지…나도 만나서 반가워.”

유진은 이제 덜덜 떠는 아이의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며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그는 아이의 내면으로 들어갔다. 유진은 이제 문 앞에 서 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따듯한 가정집이었다. 아래층에서는 가족들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창문으로는 햇살이 들어왔다. 가족사진이 잔뜩 걸려있고 싱싱한 꽃내음이 났다. 그가 마주서있는 문에는 ‘앨리의 방’이라고 써 있었다. 유진은 문고리를 잡았다. 그 순간 갑자기 밤이 되었다. 어둠 속에서 조명 하나 없었다. 유진은 문을 열었다. 문 안쪽 가득 베개와 이불 같은 푹신한 것들이 잔뜩 쌓여 도무지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었다. 유진은 거침없이 베개와 이불들 사이를 벌려서 그 안으로 몸을 우겨넣었다. 그는 힘겹게 앞으로 나아갔다. 숨이 턱턱 막히고 위에서 몇백겹의 솜이 그를 눌러대서 앞으로 가는게 어려웠으나 악착같이 헤집어 들어갔다. 그러다가 어디선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유진은 이제 거의 다 왔음을 알았다. 이건 이 센티넬 아이의 벽이었다. 이걸 뚫어야만 중심으로 갈 수 있었다. 그는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전신이 아프다거나, 숨이 막힌다거나, 아니면 성현제라거나. 그때 유진은 자신이 뻗은 팔이 더 이상 이불을 잡는 게 아니라 바깥을 만났음을 깨달았다. 그는 곧 이불더미에서 데굴데굴 굴러 푹신한 베개들 위로 툭 떨어졌다. 작고 둥근 공간 안에 앨리가 무릎을 모아 앉아 고개를 숙인 채 울고 있었다. 유진은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내가 어떤 위로를 할 수 있지?

과거에 교육원에서 한유진은 가끔 거울을 보고도 자신을 못 알아보는 경우가 있었다. 내가 아닌 것 처럼 느껴지는 정도가 아니라 내가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의 내면 어딘가가 망가져서 스스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고 즐거움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가 아무리 필요로 하고 절박하게 원해도 그런 상태는 그의 삶을 이해할 수 없는 고문으로 만들어버렸다. 

그건 트라우마였다. 생애 초기에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은 아이들은 감정적인 감각을 인지하는 기능이 떨어진다. 지속된 두려움에 대처하기 위해 신체의 직관적인 느낌과 감정을 전달하는 뇌 영역의 기능을 정지시키는 법을 습득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극적인 적응의 결과였다. 정신은 끔찍한 감각을 차단하기 위해 삶을 온전하게 느끼며 사는 기능마저 없에버린다. 정서적 학대는 그만큼 파괴적이다. 특히 세상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으려고 한창 노력하는 어린아이들에겐 특히 심각한 파괴력을 발휘했다. 한유진이 그랬고, 이제 이 아이들이 그랬다. 

한유진은 앨리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 그냥 아이의 손을 잡았다. 그런 상태로 한참을 우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슬픔을 억지로 막는다고 그 슬픔이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슬픔은 쏟아지도록 둬야만 했다. 곧 앨리는 자기 손을 잡은 유진의 손을 마주 잡았다. 얼굴은 여전히 무릎 사이에 숨긴 채 였다. 더 이상 울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냥 그것만으로도 지금은 위안이 되었다. 아이에게도 그랬고, 유진에게도 그랬다. 


눈을 떴을 때, 한유진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앨리를 내려다 보았는데 아이는 더 이상 피부가 유리로 변하거나 하지 않았다. 대신 유진을 올려다 보면서 조금 웃어주었다. 그도 아이를 보며 마주 웃어주었다. 가이드가 말했다.

“안녕, 앨리. 내 이름은 한유진이야.”

그러자 센티넬이 지쳤으나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블랑과 누아는 한유진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


한유진은 걸을 수 있을 만큼 기력이 돌아온 후 누아가 아래층에서 빵과 물 뿐만 아니라 개사료도 들고 온다는 걸 알았다. 나중에 누아에게 물어보니 아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따라오라고 했다. 유진은 누아를 따라 절뚝거리며 세번째 방으로 갔다. 문을 열자마자 그 안에서는 지독한 가축 냄새가 났다. 

“맙소사.”

한유진은 즉시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세번째 방에는 거대한 창살 감옥이 있었고, 그 안에 동물들이 지푸라기 위에 무기력하게 앉아 있었다. 모두 똥과 오줌으로 뒤덮여 심각하게 아파 보이는 동물들도 있었다. 냄새가 너무 역해서 유진은 눈과 목구멍이 따끔따끔해지는 걸 느꼈다. 가만히 있는 것 만으로도 병이 날 수 있는 환경이다. 누아는 한유진을 물끄러미 올려다 보다가 그가 악취에 토하거나 밖으로 뛰쳐나가지 않는 것을 보고 그를 조금 믿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았다. 

“여긴 아무도 안 와요. 애들은 저랑 누아가 못 오게 하고, 아래층 아저씨들은 오기 싫어해요.”

“냄새 때문이구나.”

“맞아요. 그래서 제가 사료를 줘야해요. 아래층 아저씨들은 이 애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아요. 적어도 창살을 열고 깨끗하게만 할 수 있다면…….”

“…….”

유진은 창살 안쪽에 멍하니 누워있는 동물들을 하나씩 들여다보았다. 하나같이 아파보였다. 성현제가 보여줬던 파일에서 나온 여섯마리의 동물들이었다. 그 중에는 그냥 겉보기에 평범한 가축처럼 보이는 동물도 있었으나 독수리의 머리를 하고 등에 날개가 달린 작은 살쾡이 같은 생물도 있었다. 오물때문에 털이 엉켰으나 분명 자연계에서 나오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붉은 털을 가진 사자 같은 거대한 동물도 있었다. 특히 그 사자는 어딘가 조금 달라보였다. 모든 동물이 다 멍하니 앉아있는 반면 사자는 유진을 보더니 적개심을 드러내며 낮게 으르릉거렸다. 유진은 그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적개심은 생명력의 증거였기 때문이다. 

“그러지 마, 피스. 이 아저씨 우리랑 같은 처지야.”

누아는 그렇게 말하면서 사료를 철창 사이로 쏟아주었다. 사료가 쏟아지자 동물들은 기운을 내서 먹으러 왔다. 

“이름이 피스구나.”

“네. 우리가 지어줬어요. 저기 독수리 같은 애는 블루, 검은 양은 태산이, 사슴은 소록이…….”

누아는 동물들 이름을 하나씩 모두 불러주었다. 애들 이름을 말하는 동안은 조금 표정이 풀어졌다. 아이가 웃는 얼굴을 처음으로 보았다. 참 선한 아이였다. 이제 유진은 피스라는 이름의 사자가 간간히 귀를 파륵 털면서 사료를 먹는 모습을 내려다 보았다. 앞이 막막했다. 이 애들과 동물까지 모두 데리고 여길 나가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혼자서도 어려울 수 있는 일이다. 이전 같았다면 패배감과 고통에 천천히 목졸려 죽어갔겠지만…유진은 이제 붉은 사자의 싸우고자 하는 의지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생각했다. 

좋아. 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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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아라 그레이는 자신있었다.

남미, 러시아, 중국계 갱 조직에 밀려 ‘동네 갱’으로 전락한 미국 마피아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원인의 중심에는 키아라 그레이가 있었다. 그레이는 본래 뉴저지 출신의 민주당 정치가의 딸이었다. 그는 젊을 시절 살인, 방화 등 잔혹한 방법을 동원하여 뉴저지의 도박장, 조선소, 노동조합 등 이권에 개입했다. 불법적인 방법으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면서도 그것을 묻어둘 돈이 있었고, 그 시절만 해도 그레이는 조금 과격한 정치인으로만 보였다. 그러나 사실 그의 어머니는 시실리 출신으로 ‘진짜 마피아’가문의 뿌리를 가져와 키아라 그레이에게 정통성을 제공했다. 키아라 그레이는 이 정통성이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레이는 젊을 시절 상당히 정치적이었고 뛰어난 수완가였으므로 워싱턴의 친구들을 소중히 여겼고, 정치가들의 부탁을 들어주며 일종의 ‘장부’를 만들었다. 실력있는 로비스트를 고용하여 입지를 넓혀가던 중에 한 번은 하원의원 파누즈의 위스키가 디트로이트 시를 지나는데 소위 ‘통과세’를 지불하지 않은 채 그냥 지나쳤다. 이에 발끈한 지역 중국 갱은 아일랜드까지 쫓아가서 배에 실은 파누즈의 화물을 강탈했을 뿐만 아니라 전체 조직에 파누즈 살해 명령까지 내렸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하원의원은 곧 키아라 그레이에게 가서 보호해줄 것을 간청했고, 그 덕분에 죽음을 면했다. 파누즈는 이후 2선까지 성공한 미국 대통령이 되며, 그레이는 그에게 거액의 선거자금을 대 미국 정계의 깊숙히 관여한 채로 조직의 덩치를 불렸다.

그렇게 정계와 지하세계의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며 성장한 키아라 그레이가 워싱턴 젊은이들이 힘과 조언을 빌리기 위해 찾아오는 오라클적인 성격을 띌 무렵 그는 ’어떤 소문’을 듣게 되는데, 이는 지하경제의 진짜 주인이 따로 있다는 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 소문을 무시할 수 있었다. 지하경제의 진짜 주인 같은 건 미신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월이 지났다. 당시는 필라델피아의 가장 거대한 러시아 갱단을 한 손에 쥐고 굳건히 자리를 지키던 세르게이 이바노프가 갑작스런 뇌졸중으로 머저리 같은 아들을 후계자로 둔 채 급사하는 등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키아라 그레이는 자신의 작고한 어머니와 자기 혈통의 정통성을 위해 찾아온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는 언제나 진짜 마피아가 되고 싶었고, 이제는 때가 온 것이다.

그레이는 이제까지 모은 자신의 정치적 수완과 자금, 인력을 모두 동원하여 뉴저지를 지배하던 다른 4개의 세력을 정리하고 뉴욕의 암흑가에 새로운 경종을 울렸다. 진짜 지배자의 자리를 넘보는 경쟁자는 잔인한 방법으로 거세시킨 뒤 모든 세력을 자기 발 밑에 두었고, 이 일은 그가 했던 어떤 일 보다도 쉬웠다. 그러나 또 소문이 돌았다. 왕좌의 주인이 돌아왔다는 소문이었다. 키아라 그레이는 헛소리를 참을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하던대로 본보기를 삼기로 결정했다. 자리를 넘보는 경쟁자를 숙청하는 일이 그것이었다. 일을 진행하는 데에는 CIA의 갑작스런 도움을 받았다. 그들은 성현제와 그의 가이드가 어디에 있는지 정보를 넘겨버렸다. 마치 알아서 하라는 듯이.

그러나 성현제는 조롱하듯이 마호가니 상자에 찰리의 머리를 넣어 보냈다. 분노한 그레이가 그가 데려온 가이드를 똑같이 하려던 때에 그의 장성한 자녀들이 혼비백산 한 채로 찾아왔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와서 키아라 그레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장남을 납치했다는 것이다. 한유진을 건드리면 똑같이 하겠다는 잔인한 선전포고였다.  


뉴저지가 피바다가 될지도 모른다는 소식은 성현제의 소재지에 관한 갈피를 전혀 잡지 못하던 인터폴 요원들에게도 전달되었다. 송태원와 마이야 요원은 즉시 JFK공항으로 향했고 연방경찰에 도착을 알렸다. 그런데 연방경찰은 그들이 도착하는 것을 달가워하지도 않았으며 정보의 공유조차 입을 꽉 다물어버렸다. 관할권 문제로 떨떠름해 할 수는 있으나 그런 문제가 아닌 것으로 보였다. 

송태원과 마이야 요원은 미연방경찰의 부패한 수뇌부가 인터폴의 개입을 불편함을 느낄 것이라 미리 예상했다. 그러나 부서 전체가 다 입을 다물어버리는 건 이상했다. 단 한명의 양심고백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공포에 질려 있었다. 더 두려운 건, 이러한 공포를 주도한 성현제의 세성이 그들의 개입을 기가막힐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해놓았다는 것이었다. 결국 인터폴 요원들은 연방경찰의 도움 없이 수사를 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며칠동안 뉴욕의 골목을 쑤시고 돌아다니던 중 어느날 따로 떨어져서 수사를 진행하던 마이야 요원이 전화하여 BBC뉴스를 확인하라고 재촉했다. 송태원은 자신의 낡은 렌트카 안에서 휴대폰으로 뉴스를 확인했다. BBC뉴스는 충격적인 장면을 송출하고 있었다. 다름아닌 맥시코만의 석유 시추선에 10분동안 멈추지 않고 비처럼 내려친 낙뢰 사고 장면이었다. 번개가 아니라 하늘에 구멍이 뚫려서 거대한 빛기둥이 시추선을 반복적으로 찍어대는 것만 같았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두렵고 절망적일 정도로 신적인 힘이었다. 송태원은 이어서 마이야 요원으로부터 메시지를 하나 받았다. 

[그레이 가족 소유의 시추선임을 확인함]

즉 이것은 성현제가 키아라 그레이의 자금줄을 완전히 끊어버렸다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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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트 윈저 루히르는 키웨스트의 리조트 해변 비치체어에 앉아 있었다. 리조트를 전세내버렸기 때문에 손님은 그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멀리 미군함선이 사고지역 지원을 위해 떠나고 있는 모습이 보였으나 그는 피식 웃으며 웨이터를 불러 술을 더 따르게끔 했다. 한참 뒤에 쌍안경을 들어 바다를 죽 훑었는데 아직 점 처럼 작아 보이는 스피드보트가 이쪽으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강소영과 성현제가 틀림없었다. 아주 멀리 있었으니 아마 한두시간 뒤면 뭍에 도착할 것이다. 그런데 리조트 지배인이 오더니 노아 루히르 라는 사람이 왔다고 전했다. 곧 노아가 해변으로 걸어왔다.

“누님이 한 짓이죠! 다 압니다!”

노아 루히르는 너무 화가 난 채로 옥스포드 슈즈를 신고 모래 위를 성큼성큼 걸어오다가 약간 비틀거렸다. 얼굴이 좀 벌개진 채로 그는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성현제가 더 큰 사고를 치지 못하게 돕지는 못 할 망정 지금 어떤 일을 저지른건지 알기나 하시는…….”

그런데 그때 주차장에서 바퀴가 아스팔트를 긁는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곧 누군가 고래고래 난동을 피워댔다. 리에트가 뒤를 돌아보며 쓰고 있던 썬글라스를 쓱 들어보았는데 로비로 통하는 투명 유리문 너머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문현아와 최근 그가 데리고 다니는 쪼끄만 여자아이였다. 박예림이라고 했던가? 그런데 문현아가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악을 쓰는 동안 박예림이 이쪽을 힐끔 보더니 리에트와 눈이 마주쳤다. 박예림은 그 순간 로비 문을 벌컥 열고 리에트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이크.”

리에트는 우선 손에 들고 있던 술을 급하게 입 안에 다 털어놓고서 일어섰다. 박예림은 문현아보다 화가 난 것 처럼 보였다. 그건 문현아가 당황할 정도였는데, 노아 루히르는 문득 해변가의 바닷물이 뒤로 주우욱 빠지는 걸 보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박예림은 히죽히죽 웃고 있는 리에트 앞에 딱 멈춰서더니 양 손 주먹을 꽉 움켜쥐고 말했다.  

“석유가 그대로 바다에 유출되면 물고기들은 어떻게 되는 지 알아?”

“물고기?”

리에트는 그 말 자체가 웃기다는 듯이 킬킬댔다.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예림아!”

문현아가 이제는 당황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노아 루히르는 문현아가 왜 저렇게 당황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지각변동이 일어나지 않는 한 영원히 보이지 않을 것 같았던 모래바닥이 보일 정도로 해수면이 낮아지고 있었다. 그건 저 먼 곳에서 거대한 쓰나미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문현아는 히죽거리는 리에트를 밀쳐놓고 분노로 눈이 돌아버린 박예림의 어깨를 움켜잡으며 시야를 가렸다.

“예림아. 여기는 사람이 사는 섬이야.”

그제서야 박예림은 정신이 퍼뜩 든 것 처럼 조금 당황했다. 해수면이 천천히 다시 차오르기 시작했다. 노아 루히르는 소름이 쭉 끼치는 걸 느꼈다. 아직 어리다 뿐이지 순간적으로 성현제만큼 강한 센티넬이 여기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걸어다니는 재해. 그런 느낌이 들었다. 

어쨌거나 이 일은 리에트가 불을 붙인 일이 맞았다. 맥시코만에 있는 그레이의 시추선은 위치가 드러나지 않았었는데 그 위치를 성현제에게 알린 게 리에트였기 때문이다. 영국의 검은 용 리에트는 지구상의 석유매립지를 정확히 짚어내는 능력이 있었으므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사실 리에트는 한유진이 납치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성현제에게 연락하여 정보를 넘겨버렸다. 벨라레를 인신매매 시장에서 어렵게 구해내야만 했던 그는 다시 센티넬-가이드 매매를 시작한 그 여자, 키아라 그레이가 아주 불쾌했다. 그는 그레이를 죽일 수만 있으면 무슨 짓이든 도울 의사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과는 별개로 어린 센티넬이 분해서 바닥을 노려보고 있는 걸 보고 있으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모두에게 각자 중요한 게 다른 것이다. 그에게는 벨라레였으나, 이 아이에게는 생명 그 자체였다. 그건 좀 예뻐 보였다. 리에트는 분해 하는 박예림을 달래는 문현아를 힐끔 보고 씩 웃더니 아이를 향해 말했다. 

“애기야. 원심분리가 뭔지 아니?”

그러자 문현아가 으르렁거렸다.

“우리 예림이에게 헛소리 하면 가만 안 둬.”

“이거 봐, 내가 좀 도와주려고 하는 거잖아. 세성은 복수를 하고, 브레이커는 이미지를 세탁하고. 요즘 그거 필요하지? 폭력의 봄인지 뭔지 하는 책도 팔아야 하고 말이야.”

리에트가 빈정거리듯이 말했기 때문에 문현아는 좀 짜증이 났으나 가만히 듣고 있던 노아 루히르가 중재를 했다. 

“문대표. 저도 누님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제가 예상하는 게 맞다면…무슨 소리를 하는건지는 들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리에트는 그때 좀 의외라는 듯이 노아를 힐끔 돌아보았으나 노아는 그 시선을 외면했다. 리에트는 피식 웃으면서 다시 화가 덜 풀린 박예림을 향해 말했다.

“내 말대로 하면 넌 아마 물고기와 브레이커의 이미지를 동시에 구할 수 있을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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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시간 뒤 등에 ‘바다와 센티넬-가이드를 구해주세요’라는 문구를 새긴 티셔츠를 입은 여자아이를 따라 방송사 카메라들이 쫓아왔다. 아이는 생방송 카메라 앞에서 석유 유출로 검게 물들어가는 바다 앞에서 무지막지한 센티넬 능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석유가 포함된 바다를 통째로 퍼올려 허공에 거대한 구체로 떠올리더니 안쪽에서 천천히 소용돌이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기자들은 흥분해서 이 소녀 센티넬이 눈 앞에서 바로 원심분리를 하고 있다고 떠들어댔다. 원심력으로 물과 석유를 분리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분리된 바닷물은 다시 바다로 돌아가고, 석유는 환경연대가 가져온 탱크에 나눠 담았다. 환경연대가 나머지 유출된 석유 정화 작업을 하는 동안 소녀는 인터뷰를 했다. 소녀는 말했다.

“저는 1999년 센티넬-가이드를 대상으로 자행된 비윤리적 환경실험, 아르샤빈 온실에서 구조된 센티넬입니다. 절 구해준 건 세계 가이드 구호 연합 브레이커이고, 저 또한 브레이커의 일원으로써 지구상의 모든 생명이 소중해요.”

전 지구적 위기가 센티넬 소녀의 기지로 해결되었다. 이것은 세계를 들끓게 만들었다. 평화의 바람이 퍼지고 있었다. 

어쨌거나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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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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