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게키리는 자신의 무릎에 놓인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보았다. 희게 질린 뺨은 봄볕 처럼 희미하게 따뜻하고 말랑말랑하다. 핏기가 가신 입술과 풀려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동공은 자칫 시체처럼 보였지만 귀를 기울이면 옅은 숨소리가 간헐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더라, 잘 기억 나지 않는다. 책임을 회피하고 싶은 거짓말이 아니라 사실이 그러했다. 기억에 남지 않을 정도로 사소한 일이었나? 그래도 히게키리는 파편만 남은 기억 조각들을 이어붙이기 위해 머릿속을 헤집었다. 


가장 처음의 기억을 떠올려보자. 검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몸을 얻고 나서의 기억. 처음으로 안구를 통해 본 세상에는 약간 상기된 얼굴의 형제도와 냉담한 시선을 보내는 인간이 있었다. 이제 됐지? 인간이 히자마루에게 툭 던졌고 히자마루는 제 주인에게 감사인사를 몇 번이나 했다. 히게키리는 동생의 손에 이끌려 겐지 소속이였던 검들과 대면했다. 그 후로는, 음... 출진이나 원정을 가거나 했던 것 같고. 


히게키리가 본 이 혼마루의 사니와는 상당히 신경질적이었다. 언제나 효율과 전적을 검들에게 강조했다. 그래서 실력이 뛰어난 편이였냐고 물으면 글쎄, 다른 사니와와 비교할 필요도 없이 역량이 부족하다는 게 공공연하게 드러났다. 검을 단도하기라도 하는 때는 두서 날을 앓아눕기 일쑤였고 도장을 만들 때 토혈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 되었다. 


그래도 그 인간은 실적에 집착했다. 자신보다 잘난 인간들을 질투하며 자신은 그들보다 더 잘 해낼 수 있다고 믿었다. 협회에서 사니와의 사정을 감안해 타 혼마루 보다 적은 업무량을 부과하면 사니와는 그것을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자신도 보통만큼 할 수 있다고 큰소리 치며 자신을 채찍질 하고 자신의 검들에게도 같은 행위를 강요했다. 적을 물리치고 온 단도들을 기다리던 건 칭찬이 아닌 다음 출진 명령이었고 잦은 원정 때문에 혼마루에서 지낸 시간 보다 원정지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은 검들도 있었다. 얼굴이나 팔을 물들여 가릴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넓게 퍼진 검푸른 멍은 지적하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익숙해졌다. 

 

히게키리는 주로 원정에 보내지는 쪽이었고 히자마루는 종종 수행을 다녀온 단도들과 함께 출진을 나가고는 했다. 비록 히게키리와 히자마루가 같이 보내는 시간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일 정도로 적었지만 히자마루는 제 형님이 같은 혼마루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했다. 히게키리도 그랬을지도. 


사니와는 어느 날 노력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정해진 업무량을 초과하는 실적을 추구하지도 않았고, 강박적으로 창고에 자원을 쌓아 올리는 일도 뜸해졌다. 검들은 희망을 품었다. 어쩌면 그들의 주인은 이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더이상 당신과 당신의 검들을 혹사시키지 않을지도 모른다.  


히게키리는 그날 밤 사니와의 침소로 오라는 호출을 받았다. 


혼마루 밖으로 나설 때 으레 입는 정복이 아니라 활동하기 편한 내번복을 입고 침소의 문을 열었다. 평소에는 검이 근처에 오기만 해도 신경질을 내며 쫓아내기 바쁜 곳이라 낯설기만 했다. 사니와는 방의 가운데서 목욕재개를 마치고 머리까지 단정하게 틀어올린 채 흰 이불 위에 정좌하고 있었다. 사니와는 히게키리가 완전히 방에 들어온 것을 확인하자 비릿하게 웃으며 자신의 앞에 놓인 작은 상에서 중간 부분이 흰 종이로 싸인 히자마루의 본채를 들어 자신의 복부에 찔러넣었다.  


태도로 할복이라, 오니가 아니고서야 못할 짓이다. 그러니까 항상 말 했는데. 마음을 넓게 먹지 않으면 오니가 되어버린다. 


히게키리는 언젠가 오니의 팔을 베어 오니기리라는 이름을 받은 적이 있다. 어쩔 수 없지. 칼의 이름 같은 건, 주인이 깊이 생각해주는지 아닌지에 달렸으니까. 


그 인간이 바라던 것은 너무 명확했다. 카이샤쿠. 히게키리의 날은 정확히 오니의 목을 그었고 간신히 가죽에 달라붙어 본인의 품 안으로 떨어진 목은 흰 의복과 바닥에 깔린 이불을 온통 붉게 물들였다. 마치 화염에 휩싸인, 혹은 동백꽃 같은 모습이었다. 


히자마루는 괴로워했다. 그것도 주인이라고 나름대로의 충의를 보이던 히게키리의 동생은 자신이, 비록 자의로 그런 것이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주인을 베었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무너진 히자마루의 마음을 사니와가 마지막으로 목숨을 걸어 심은 원념이 삼켰다. 몸을 비틀며 뭍에 내동댕이쳐진 물고기처럼 힘겹게 버티던 히자마루의 숨이 끊어지자 그 자리에서 악귀가 피어올랐다. 


부정은 흰 종이에 떨어진 먹물처럼 주변을 좀먹어가며 잠식했다. 이 혼마루는 주인 되는 사니와가 죽기 전에도 흰 종이와 같이 청렴하다고는 하기 어려웠지만 밑바닥에는 더한 밑바닥이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부정은 부정을 끌어당기며 혼마루와 주변 공간을 통째로 심연으로 가라앉혔다.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저들의 주인과 좋든 나쁘든 가장 많은 교류가 있던 단도들이었다.  


단도들 뿐만 아니라 다른 도종들도 차례차례 악귀가 뿌리던 방향 없는 질투와 세상에 대한 막연한 분노에 잠겨갔다. 이 감정은 그들의 주인이 느끼던 것이리라. 모든 것이 거슬리고 증오스럽다.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미쳐 날뛰기 시작했고 폐쇄된 공간 안에서 눈에 띄는 것은 닥치는 대로 부수고 폐허로 만들어버렸다.


그렇게 무의미한 파괴를 계속하던 어느 날, 이질적인 기운이 단절되어 고립된 혼마루로 비집고 들어오는게 느껴졌다. 부정에 눈이 먼 히게키리에게는 침입자의 모습이 뚜렸하게 비치지 않았지만 혼마루의 모든 검들이 이변을 눈치 챘다. 


그 후로부터의 기억은 더더욱 흐리다. 침입자에게 날을 세우던 검들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히게키리도 그들 중 하나였던 것 같기도 하다. 침입자는 자신이 데려온 검과 함께 부정을 덜어내려 분주히 돌아다니며 그들 앞을 가로막는 이 혼마루의 검들과 맞섰다. 혼마루는 점차 정화되어갔지만 근본적인 문제인 악귀는 좀처럼 퇴치 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침입자는 그녀의 검이 다른 검들의 주의를 끄는 사이 마침내 히게키리가 지키던 이 방에 들어올 수 있었다. 자신을 향해 겨눠진 히게키리를 피하는 대신 일부러 팔등으로 스치고 지나가 피를 낸 후 히게키리의 뒤로 돌아가 히자마루의 육신이 사라지고도 제자리에 남아 검은 연기를 피어올리던 도검 히자마루를 향해 혈액을 뿌렸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히자마루의 잔해와 악귀는 깨끗이 사라졌고, 팔을 상당히 깊게 베인 인간 아이는 의식을 잃고 쓰러져서 이성이 돌아온 히게키리가 이리저리 만지고 눌러봐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너는 이 아이의 검이지?”


히게키리는 문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문 밖에서 검을 겨누고 돌입할 기회를 노리던 야만바기리에게 물었다. 야만바기리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다만.”


쿡,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뭐가 우스운 거지. 야만바기리는 불편한 심기를 억지로 눌렀다. 히게키리가 어떻게 나올지 예상할 수 없으니 그의 주인은 인질로 잡힌 셈이나 마찬가지다. 


“이 애도 검들에게 윽박질러? 마음에 드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구타해?”

“아니. 적어도 지금까지 그런 적 없다.”


단호한 대답이다. 불공평하다. 왜 저 검은 자신과 동생이 겪은 일을 경험하지 않았어도 됐던 걸까, 히게키리는 궁금해했다. 뉘인 머리를 쓸던 손에 힘이 한층 더 들어가 잠든 인간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가빠져가는 숨을 아랑곳하지 않고 점점 더 강하게 얼굴의 윤곽을 따라 그려도 인간은 깨어나지 않았다. 


만약 동생이 그 인간이 아니라 이 아이에게 현현되었다면 그런 고생을 하지 않았을까? 


히게키리는 머리를 쓸던 손을 멈추고 얼굴을 양 손으로 살짝 잡아 자신을 향하도록 했다.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다. 고개를 숙여 숨과 숨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얼굴을 가져다대서 관찰했다. 자신의 검이 아닌 동생을 구하기 위해서 상당한 손해를 감수할 정도면 자신의 검인 동생에게는 얼마나 잘 해줄까? 


동생을 다시 보고 싶었다. 이왕이면 좀 더 행복한 동생을.


“나도 이 아이의 검이 될래.”

사니와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