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민 뉴트와 탐험가 조수 민호 이야기.

뉴트와 민호의 파트가 한세트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민호-









1.





“아 씨...도대체 어디야...”


투덜거리며 나는 들고 있던 짐을 내려놓았다. 시선 닿는 저 끝까지 전부 초록으로 덮여있어 방향은커녕 거리조차 제대로 가늠되지 않았다. 어디를 봐도 사람의 흔적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풀이 있으니 올 거 같긴 한데..”


입안으로 말을 씹어 삼킨 건 점점 바싹 말라가는 목 때문이었다. 지나치게 건조한 공기는 피부 위는 물론 잠깐 벌리는 입술 사이로도 거침없이 파고들어 귀한 수분을 다 뺏어간다. 잠깐 더 망설이다 나는 풀 위로 몸을 숙였다. 한 번 앉으면 영원히 일어설 수 없을 거 같아 땅에 무릎은 대지 않는다. 핑-하고 시야가 돌아 손으로 땅을 짚는다. 손 아래로 풀이 으깨졌다. 한숨과 함께 괜히 손으로 한 번 쓸어본다. 유목민들은 풀만 봐도 땅주인이 있는 곳인지 알 수 있다던 말을 떠올리며 지금까지 본 풀들과 무엇이 다른가 한참을 쓸어보았다. 전혀 알 수가 없다.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보이는 회색 점이 혹시 양이나 염소가 아닐까 한참을 노려보았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또 바위인가보다.


“저게 돌무더기라도 되면...좀 나은데...”


이 지역 사람들은 길이 갈라지는 데에 돌을 쌓아놓고 여행의 안전을 기원한다고 신나게 떠들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그 망할 목소리 때문에 요 모양 요 꼴이지만.


“끙차.”


몸을 일으키는 겨를에 절로 신음이 샌다. 변화무쌍한 기후라곤 들었지만 여름이라고 할 시기에도 회오리바람이 몰아칠 줄은 몰랐다. 그 때문에 일행하고 떨어진지....아마도 하루? 솔직히 잘 모르겠다. 중간에 날려가며 머리를 부딪친 탓에 정신을 잃었고, 눈을 떴을 때는 언제 회오리바람이 불었냐는 듯 새파란 하늘로 돌아와 있었다. 꼬박 하루를 정신을 놓은 건지, 아니면 잠깐 기절한 건지도 분간이 안 된다. 이대로 누군가를 만나지 못하면 아마 영영 모르겠지만...

나는 다시 주변을 휘 둘러봤다. 뭐라도 표지가 될 만한 것이라던가, 희망이 될 법한 것이 있나 찾아봤지만, 여전히 아까 그대로 별 다를 바 없는 초원이었다. 땅은 초록과 갈색으로 얼룩덜룩하고 하늘은 파랗고 햇빛은 작열하고 이렇다 할 큰 나무나 암석 하나 제대로 안 보이는. 아마 있기야 하겠지만 나처럼 익숙하지 않은 사람 눈에 보일 리는 없으니 남는 건 내 막연한 감뿐이다. 나는 내가 이제껏 걸어왔던 방향을 뒤로 한 채 남은 세 방향을 차례로 노려봤다. 고개를 들어 태양을 보며 방향을 가늠하고, 다시 시선을 내린다. 마침내 한 곳을 정하고 나는 똑바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발바닥이 갈라질 것만 같다. 발을 조금 드는 것만으로도 다리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계속 비어있던 위장은 허기로 쥐어짜이는 것 같은데다 구름 하나 없이 햇빛을 계속 받으며 걸어온 머리가 타들어갈 것처럼 지끈거리고 아팠다. 옷으로 가려보긴 했지만 택도 없는 게 분명했다. 멈추고 싶었지만 멈춘 걸음을 다시 걸을 자신이 없어 나는 그저 묵묵히 발을 계속 옮겼다.

해는 어느새 많이 기울어있었고 밤이 되면 온도도 내려갈 텐데, 게다가 무슨 들짐승들이 날 공격해올지 모르는데 여전히 눈에 보이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다른 방향으로 갔어야 하는 걸까? 나는 뒤를 돌아봤다. 내가 지나온 길이 내 앞의 길과 별다를 바 없는 모양으로 있었다. 이제와 돌아간들 출발점을 찾을 수조차 없을 것이다. 짐에 남아있는 물통의 마지막 물 한 모금이 간절하다. 하지만 저걸 마셔버리면 더 이상 마실 물이 없다. 입에 남아있던 침조차 바짝 말라붙은 지 오래라 숨소리마저 갈라진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발이 꼬이며 몸이 훅 꺾였다. 강한 충격과 함께 나는 땅바닥으로 머리를 세게 부딪쳤다.


“.....허..윽.”


말라붙은 입 사이론 제대로 된 신음 소리마저 나오지 않았다. 아, 이런 데서 뒈질 거라 생각한 적 없는데....하여간..망할...똘...추..같으니.....

그리고 까맣게 세상이 잠겼다.









2.





눈을 뜨자마자 흐릿한 빛이 번졌다. 나는 눈을 깜박였다. 모래가 들어간 듯 뻑뻑한 눈 때문에 쉽지 않았다. 겨우 시야가 제대로 돌아왔을 때 보인 건 천과 나무 뼈대로 이루어진 천장이었다. 천막 안.. 꿈이었나? 안도와 함께 몸 여기저기서 통증이 올라왔다. 몸이 바닥으로 잡아 끌어당겨지듯 아프고 목이 갈라지는 것처럼 아팠다.


[AWESSKLNMKLK?]


갑작스레 목소리가 들려와 나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낯선 얼굴이 천막의 문가에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에 뭐라고 말하려했지만 목에 쇳소리가 나며 말이 삼켜졌다. 마른기침을 토해내는 사이에 문 밖으로 사라졌던 얼굴이 다시 돌아왔다. 찻잔을 들고 온 그가 내게 다가와 몸을 일으켜주고는 그릇을 내밀었다. 지금 그 무엇보다도 간절한 것, 바로 물이 찻잔 가득 담겨있었다. 받기가 무섭게 입가로 가져가려는 내 손을 잡으며 남자가 제지했다.


[ERRTFSSS.]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남자가 내 얼굴을 보더니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찻잔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입가로 가져가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리고 마시고 잠시 쉬는 시늉을 하더니 다시 마시는 흉내를 냈다. 아, 그러니까..


“천천히 마시라고?”


이번엔 그의 미간이 찌푸러들면서 고개가 기울었다. 난 다시 말했다.


“천천히?”


남자는 여전히 못 알아듣는 눈치였다. 어차피 나도 이쪽 언어는 하나도 못 하니 무의미한 시도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찻잔을 들고 조금 마시고 입가에서 떼고 남자를 보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모금으론 어림도 없을 만큼 목이 말랐지만 남자가 굳이 말린 데는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 나는 그 작은 그릇에 담긴 물을 네 번에 걸쳐 천천히 나눠 마셨다. 그러는 사이 천천히 아까까지 꿈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하나하나 선명해졌다. 꿈이 아니었다. 난 낙오되었고 혼자 방황하다가 쓰러졌다. 그 이후 여기인 걸 보면 이 사람이나 다른 사람이 구해서 여기까지 데려온 모양이었다. 방향을 아예 잘못 잡은 건 아닌 모양이지.


[LLLJMIOPPKCKSKSSSKSK?]


내가 찻잔을 내려놓자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뭔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어조로 미뤄 짐작 건데 뭔가를 묻는 것 럼 들리긴 하는데 확실한지 알 수가 없었다. 물을 더 죽겠단 소린가?


“물요? 이거? 물? 더 주면 좋겠는데...”


내가 그릇을 가리키며 묻자 남자는 고개를 저으면서 계속 뭐라 말했다. 여전히 그의 말 중에서 알아들을 수 있는 건 단 한마디도 없었다. 남자는 몇 번 더 천천히, 아마도 단어라 생각되는 무언가를 반복해서 묻더니 내가 조금도 못 알아듣자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더니 빈 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저기요. 그....”


남자는 돌아보더니 기다리라는 듯한 손짓을 해보이곤 나갔다. 혼자 천막 안에 남게 된 나는 내가 이해한 게 맞기를 바라며 엉거주춤 앉아있었다. 문득 가슴팍이 서늘해 내려 보니 옷의 앞섶이 풀려있었다. 드러난 피부에 손을 얹자 미지근한 열기가 손 아래로 고여 들었다. 내 옆에 놓여있는 젖은 수건을 들어 나는 목과 어깨에 얹었다. 시원했다. 저 사람이 날 구해서 지금까지 돌봐준 건가?? 내가 또 의식을 잃은 지 얼마나 지난 거지? 여긴 도대체 어디쯤일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난 토마스랑 달리 이쪽의 말은 하나도 몰랐다. 애초에 여기 오게 된 이유도 토마스의 조수이자 심부름꾼으로 오게 된 거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지금은 좀 후회가 됐다. 한 마디라도 알아들었으면 좀 나았을 텐데.


[OSMXKLLPLCLS.]


문이 열리며 남자가 빵과 찻잔을 들고 들어왔다. 빵과 이곳에서 자주 먹게 되는 우유를 탄 차를 보는 순간 갈증에 밀려 잊고 있던 허기가 밀려들었다. 아까 못지않게 급한 손길로 빵에 손을 데려는 순간 남자가 빵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ERRTFSSS. ERRTFSSS.]


남자가 또박또박 같은 발음의 단어를 반복해서 말했다. 문득 아까 물을 줄 때도 비슷하게 말했던 기억이 났다. 적어도 하루 이상 굶었으니 천천히 먹는 게 맞기도 했기에 나는 혹시나 싶어 남자의 말을 따라해 보았다.


[청청히?]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풋, 작은 소리와 함께 웃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있을 때에 비해 확 어려 보여 나는 그가 나와 비슷한 또래일 지도 모른단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남자의 이목구비가 꽤 번듯하다는 것도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좀 더 또렷한 발음으로 내가 했던 말을 반복했다.


[천천히.]

[천, 천히.]


내가 따라하자 그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나는 감사의 기도를 습관적으로 중얼거리고 내 앞의 빵을 여러 개의 작은 조각으로 나눠 그 중 하나를 따뜻한 차에 담갔다. 그리고 하나씩 오래도록 씹어 넘겼다.

약간 거친 빵과 따뜻한 차로 식사를 하고 나니 한결 정신이 돌아왔다. 빈 그릇을 들고 일어서려는 남자를 보다 문득 지금껏 감사인사도 제대로 안했다는 게 떠올랐다.


“저...”


남자가 돌아봤다. 무슨 일이냐는 듯 묻는 시선에 나는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생각해보니 감사인사도 감사인사지만 이름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름이 뭐냐고 물어봐야 어차피 못 알아들을 게 뻔했다. 잠깐 고민하다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민호, 민, 호, 민호라고 해요.”


나는 내 이름을 다시 반복하고 손가락으로 남자를 가리키며 시선으로 물었다. 아.. 애매한 소리가 새어 나오더니 천천히 남자의 얼굴에 이해의 빛이 어렸다.


[뉴트.]

[뉴트?]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몇 번이고 토마스를 따라 어설프게 했던 감사인사를 떠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함니다, 뉴트.]


작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친 그가 누우라는 손질을 하면서 말했다.


[OXMDKEPSLS, 미노.]


낯선 언어에 이어져 어설픈 발음으로 흘러나온 내 이름이 묘한 느낌이 들어 나는 가만히 그를 봤다. 내가 자신의 말을 이해 못 했다고 생각한 건지 그가 다시 몸을 숙여 내 어깨를 가볍게 밀며 베개를 두들겼다. 충분히 잔 거 같은데 생각하면서도 더 실랑이를 이끌어 나가고 싶지 않아 나는 누웠다. 그리고 이내 까무룩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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