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가을비가 쏟아졌다. 바람에 겨울이 오는 소리가 난다. 흔들리는 창문을 보며 커튼을 쳤다. 바닥에 내려둔 등불이 불안하게 주변을 밝혔다. 케일은 고개를 돌려 상대를 본다. 어둠 속에서도 퇴색되지 않는 화사한 색이 눈에 들었다. 허리를 숙여 등불을 들었다. 발을 옮길 때마다 삐걱삐걱 낡은 소리가 났다. 한숨을 쉰다.




고단하던 전쟁이 끝났다. 놀고먹는 생활만 남았는데, 이것도 여의치 않다. 이를테면 아침, 점심, 저녁으로 뭘 먹지? 라던가, 제 철 과일이 뭐가 있지? 하는 배부른 고민이 있다. 다음으로 애매한 고민이다. 로잘린의 정책 상담이나 알베르의 SOS. 렉스의 우는 소리다. 머리가 아프지만 할 만 하다. 마지막으로 곤란한 고민이 있다.




고민을 꺼내기 전에 왜 낯선 곳에 있는지 먼저 설명해야 했다.




쉐리트가 꺼낸 책 중 다락방 모험기가 있던 모양이다. 짱돌 저택도 헤니투스 저택도 마뜩한 다락방이 없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던 별채로 모험을 떠나고 싶단다. 어디 가도 맞고 다닐 아이들이 아니니 케일은 선선히 허락했으나 정작 별채의 주인은 거절했다.




온과 홍. 라온이 묘족이며 대단한 용임을 피력해도 데르트의 눈에 ‘그래도 어린아이 아니냐.’ 인 모양으로, 100년 가까이 사용하지 않던 건물이 얼마나 위험한지 일장연설을 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며 ‘정비를 해 줄 테니 그때 가려무나.’ 하는데, 아이들이 바라는 건 수리가 잘 된 별채가 아니라 낡아빠지고 거미줄이 켜켜이 쌓인 별채였다.




아이들답게 몰래 벌이고 사고 쳐도 될 일을 굳이 허락을 받겠다며 집무실 앞에 쪼로록 앉아있는 모양새가 안쓰럽고 귀여워서 결국 나서고 말았다. 케일이 보호자를 자처하자 데르트는 썩 마뜩찮은 얼굴을 했다가 마지못해 허락했다. 하늘을 뱅글뱅글 도는 라온과 품에 안긴 온과 홍을 본 데르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지만 케일은 아무 말도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별채는 케일이 생각한 것보다 컸다. 먼발치에서 지붕만 보고 작은 건물이겠거니 했었는데 짱돌 저택만 했다. 케일은 에르하벤을 돌아보았다. 뭐든 잘 하고 유능한 고룡께서 손가락 한 번으로 건물을 무너지지 않게 했단다. 엉덩이를 씰룩대던 아이들은 좋구나 하며 달려들었다. 조심하란 말도 붙이기 전이었다.




이후는 뻔했다. 밖에서 멀뚱히 서 있을 순 없으니 안으로 들어갔다. 겸사겸사 모험도 했다. 아이들처럼 기력이 넘치진 않아 방 몇 군데만 어슬렁거렸다. 어른의 메마른 감성은 먼지 쌓인 물건들을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자본주의적 생각만 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 눈에 안 들었다. 케일은 등불을 어깨 높이만큼 들었다.




“뚫어지게 쳐다본다고 줄 게 없다만.”




시선을 느꼈는지 부드럽게 웃은 에르하벤이 들고 있던 등불을 대신 들었다. 케일은 에르하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어리광 부리듯 비비적거리자 조심스레 등을 다독였다. 케일은 눈을 감았다.




어제 처음으로 잤다. 사실 못 잤다. 제대로 시작도 못했다. 과거, 업무적인 일로 관계를 했던 만큼 경험도 있겠다. 자신만만했는데 뚜껑을 까 보니 여러 문제가 있었다. 케일은 예민했고 에르하벤은 너무 잘했으며 김록수는 사랑이 처음이었다.




입을 맞췄다. 아카시아 향기가 진동을 했다. 큰 손이 머리를 감싸며 좀 더 깊게 들어섰다. 달콤한 혀가 치열 하나하나 파고들었다. 아랫입술을 당겨 물다 잡아먹듯 입을 벌렸다. 숨이 막혔다. 감정에 질식한다. 케일은 저도 모르게 흐른 눈물로 에르하벤을 보았다. ‘좋아서 그래요.’ 흘러 넘기며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젖은 눈 위로 숨결이 닿았다. 천천히 흐른 생명이 목덜미를 지분거렸다. 팔이 잘게 떨렸다. 시작부터 달려 나간 감정은 브레이크가 없었다. 에르하벤이 가슴을 짚자 낯선 목소리로 신음하며 아까보다 더 많이 울었다.




베갯잇이 눅눅해 질 쯤, 에르하벤은 눈썹을 휘어 웃었다. 케일이 당황하여 괜찮다고 했지만 에르하벤은 고개를 저었다. 이불 채 아이 안 듯 번쩍 안았다. 머리 위로 얼굴이 닿았다. 그리고 잔뜩 달아오른 것도 느꼈다. 케일은 할 말이 많았다. 많았는데 눈물이 멎질 않았다. 도리어 더욱 커져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렇게 밤을 보냈다.




“어제 왜 그렇게 안아주셨습니까?”




케일은 고민의 시작을 꺼냈다. 에르하벤은 대답 대신 몸을 돌려 적당한 곳에 등불을 내려두고 가구에 씌운 천을 잡아당겼다.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다. 희미한 빛이 피아노를 감쌌다. 새 것처럼 반들반들하게 변했다. 만족스런 얼굴로 커다란 피아노 의자를 당겨 앉은 에르하벤이 옆자리를 톡톡 쳤다. 케일이 눈썹을 모았다. 불만은 접수하지 않겠단 태도로 건반 뚜껑을 열었다.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




아이가 건반을 누르듯 성글게 계이름을 따라가다 돌변하여 건반 위를 돌아다녔다. 화려한 선율에 케일은 한숨을 삼켰다. 비적비적 걸어 에르하벤의 옆자리에 피아노를 등지고 앉았다. 두 팔을 무릎에 기대 허리를 숙여 턱을 괸 케일이 말했다.




“피아노도 잘 치시네요.”

“그래. 천 년 쯤 살았으면 못하는 게 없지.”




장난치듯 건반을 노닌 손이 천천히 잦아들더니 부드러운 선율로 변했다. 케일이 피식 웃었다.




“네 대답에 대한 답을 해주자면 그렇게 하고 싶었으니까.”




에르하벤은 뒤늦은 답변을 했다. 케일이 원하는 답이 아님을 알면서도 하는 소리였다. 말을 붙일까 하다 에르하벤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안의 어린아이가 이런 일은 처음이라 어쩔 줄 몰라 했으니 달래야 할 게 아니냐.”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케일은 입술을 우물대다 퉁명스레 답했다.



“섹스요?”

“허어, 말하는 거 하고는. 그게 아니라는 건, 너도 잘 알지 않나?”




손끝이 높은 음에 잔걸음 했다.




“사랑을 처음 받아 어쩌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구니까 나 또한 그에 맞춘 거란다.”




소리가 천천히 내려왔다. 그와 함께 케일의 기분도 곤두박질 쳤다. 두 손을 그러모아 이마에 기댔다. 감정은 부정해봐야 소용없을 것이다. 케일은 앞을 보았다. 일찌감치 세상에 떨어져 아득바득 홀로 살아남느라 사랑을 모르고 지내던 어린 김록수가 있었다. 그 어린 것이 처음 받는 사랑에 어쩔 줄 몰라 울고 만다. 소리라도 내면 좋은데 그럼 미움받을까봐 받았던 사랑을 빼앗길까봐 숨죽여 눈물만 흘렸다. 바보같이.




고민은 해결됐다.




왜 울었는지 알았고, 왜 그렇게 안아주었는지 알았다. 뭐야, 내가 섹시하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니었잖아. 케일은 이제 중간 고민만 가진 후련한 사람이 됐다. 그와 별개로 섭섭한 점이 있어




“에르하벤님은 냉정하세요.”




툴툴대듯 말했다.




“제가 사랑스러워서 어쩌지 못하시면서.”




이어 꺼낸 말에 에르하벤은 웃었다.




“사랑하니까 할 수 있는 시선이지.”

“하자고 자리까지 깔았는데 그렇게 넘어가시다니…”




케일의 말은 맺어지지 못했다. 피아노 소리는 멎었다. 대신 서로의 숨결만 남았다. 케일은 슬며시 웃었다. 이내 빈손을 들어 에르하벤의 뺨을 잡고 깊은 입맞춤을 했다. 이번엔 울지 않았다. 다시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케일은 에르하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이번엔 싫다고 해도 할래요.”

“꼭 중요한 게 아님에도 그러는구나.”




텁텁한 공기에도 선명하게 도드라진 아카시아 꽃향기가 기분을 뜨게 했다.



“혼자서 해결하시게 하는 것도 못할 짓이라.”




에르하벤은 야트막하게 웃었다.




“그래. 그럼 다음엔 싫다고 해도 밀어붙이마.”




하며 건반에서 손을 떼고 다시 입을 맞췄다. 이제는 울지 않는 붉은 눈을 쓸어내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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