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전부 지났을 무렵이었다. 병원을 나서자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마치 퇴원을 축하한다는 듯, 부드럽게 머리칼을 훑은 느낌이 썩 나쁘지 않았다. 한산한 병원 앞에서 잠시 바람을 즐기던 한도윤은 멍한 표정을 지울 수 없었다.

 오늘 데리러 갈 테니까 기다려. 며칠 전 다정한 약속을 건넨 그가, 정말로 병원 앞에 있었다. 

 "도윤아."

 "……형?"

 "먼저 가려고 했어? 내가 데리러 온다고 했잖아. 무리하면 안 돼."

 "아니, 아니.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스케줄로 바쁠 사람이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야. 황당함을 숨기지 못한 도윤의 말에 병원 앞에 서 있던 남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노을을 등지고 서 있어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분명 웃고 있을 터였다. 성큼성큼 도윤의 앞에 다가온 남자는 대답 대신 제대로 잠그지 않은 낡은 가방을 뺏어 들었다. 

 촬영장에서 바로 온 것 같은 옷에는 명찰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규혁. 얼굴이 팔릴 대로 팔린 남자가 이렇게 당당하게 여기에 오다니. 도윤은 어쩐지 머리가 아파졌다.

 "이럴 시간 있으면 연습해."

 "도윤이 네가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네."

 함께 익숙한 차에 다가가자 그늘진 얼굴이 똑바로 보이기 시작했다. 도윤의 예상대로 규혁은 웃고 있었다. 달라질 것 없는 그 다정함이 가슴을 쿡쿡 찔러온다. 

 또 이런다. 괜히 고개를 돌린 도윤은 허전한 양손을 꾹 쥐었다. 사람은 극한에 처하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고 하는데, 그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얘기들이었다. 죽을 위기에서 벗어난 순간은 초인이라는 히어로 무비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 더 맞다고 해야 할까.

 지금 가지고 있는 마음의 장르를 따지면 로맨스에 가까웠다. 고난 속에 피어나는 우정과 사랑이라던가. 쓸데없는 생각을 지우지 못하고 규혁의 차에 올라탄 도윤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데리러 온 게 그렇게 싫었어?"

 "그런 게 아니야! 그냥. 형은 바쁜 사람이니까."

 "아무리 바쁘더라도 나는 항상 네 곁에 있을 거야. 알잖아."

 그의 옆에 앉아 차 문을 닫은 규혁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가만히 앉아있는 도윤에게 손을 뻗어 안전벨트를 매어주는 손은 꼼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겉과 내부가 모두 익숙한 차 안. 도윤은 규혁의 전담 스태프가 인사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 

 곧 시동이 걸린 차가 유유히 병원을 벗어났다. 엔진이 터덜거리는 소리를 제외하곤 조용한 차 안에서 규혁은 계속 도윤을 바라봤다. 얼굴 뚫어지겠어. 따끔거리는 시선을 견디다 못한 도윤의 말에 규혁은 그제야 시선을 뗐다. 

 "다 나아서 다행이야."

 "죽을병도 아닌데 호들갑이었지."

 정확히는 도윤의 주변 사람들만이 호들갑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힘없이, 바람 빠진 인형 같은 도윤의 반응에 크게 반박하는 건 규혁이었다. 

 "아니. 충분히 위험한 상황에서 빠져나온 거니까 호들갑이라고 할 수는 없어!"

 "그렇게 치면 형도 다쳤었잖아?"

 "나는 괜찮아. 도윤이 네가 걱정이었지."

 불쑥 도윤의 뺨에 조금은 거친 손이 닿았다. 규혁의 큰 손이 한창 큰 밴드가 붙어있던 부분을 쓸어내렸다. 흉지지 않아 다행이라는 말을 중얼거린 것 같지만, 도윤에게 그 말은 닿지 않았다. 장르가 로맨스라고 했던 건 역시 정답이었다. 한도윤은 지금 심장을 토할 것만 같았다.

 억지로 돌아가던 머리는 꼭 자신이 뭐라도 된 것만 같은 기분을 만들어냈다. 여러 가지를 추리하고, 구조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부풀려 모두를 이끄는 그런 모습은 결코 제정신이 아니었다. 구조대가 다가올수록 초조함은 커졌고, 점점 한 사람에게 의지하게 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사랑에 빠졌답니다! 순간 귀를 의심하게 만든 큰 소리에 도윤은 제 입을 막았다. 스태프가 튼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소리였다. 규혁은 바른 자세로 앞을 보고 있어 도윤의 행동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황급히 얼굴을 돌린 그는 창밖을 바라보는 척 숨을 삼켰다.

 "근데 어디로 가는 거야? 여기, 좀 다른 길인데."

 "밥부터 먹어야지. 너 배부르게 먹이고 갈 거야."

 굳이 안 먹어도 되겠다는 말을 삼킨 도윤은 애꿎은 창틀을 툭툭 건드렸다. 창문을 열어 이 감정을 씻어낼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그럴 수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어 문을 열지 않은 그는 식당에 도착할 때까지 규혁을 쳐다보지 않았다.

 "완전 고급 식당이네."

 "널 위해서 힘 좀 썼어."

 "부담스러워."

 "그러지 말고. 가자."

 규혁은 차에서 내려 가만히 서 있던 도윤의 어깨를 끌어안고 가게로 향했다. 누가 보아도 소중한 것을 대하는 태도가 이어졌다. 뺨을 만진 행동에 이어 철저히 에스코트 받는 기분이 묘했다. 도윤은 조금 전과 달리 어깨를 감싼 손을 털어낼 수 있었다.

 가게 안은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도착한다는 연락을 받은 것처럼 바로 차려지기 시작한 음식들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왔다. 조용한 개인실에 마주 앉은 둘에게 좋은 시간 보내라며 와인을 건네고 나간 직원까지. 이 공간은 명백히 '둘'만을 위한 곳이었다.

 "일단은 고기 위주의 코스메뉴인데, 혹시 못 먹겠으면 말해."

 "나를 무슨 유리로 여기고 있는 거 아니야? 형보다 잘 먹을 수 있어."

 작은 그릇에 담긴 수프를 대충 마신 도윤의 말에 규혁이 방긋 웃어 보였다. 그러면 걱정 없이. 

 그 후는 평탄한 식사가 이어졌다. 줄줄이 나오는 음식을 입에 넣자 도윤은 절로 침이 나왔다. 인간은 참 본능적인 생물이었다. 의식하는 상대가 앞에 있는데 맛있는 음식을 입에 넣자마자 걸신들린 것 마냥 음식을 탐하게 된다. 

 열심히 고기를 썰어 입에 넣던 도윤과 달리 규혁은 음식을 얼마 먹지 않고 포크를 내려놓았다. 하나같이 양이 적은 음식들뿐이었지만 그는 더 먹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더 안 먹어?"

 "네가 먹는 것만……."

 "아. 네네. 규혁이 형 말은 안 들어도 이제 다 알겠네."

 "하하. 그리고 할 말이 있어."

 희미한 웃음 속에 담긴 본론. 도윤은 목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어떤 말을 할지, 무작정 겁이 났다. 혹시 홀로 품은 이 감정을 알아채고 거절하려는 속셈은 아닐까. 애초에 고백할 생각조차 없다는 게 사실이지만, 감정을 부정당한다는 생각만으로 속이 울렁거렸다.

 어떻게 마지막 고기 조각을 삼켰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도윤은 그저 잔에 찰랑이는 와인을 물처럼 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했다. 들켰으면 안 돼. 이 마음은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아. 그게, 사실 오늘."

 도윤은 규혁을 좋아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마음은 멋대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벗어나려고 할수록 더욱 자신을 옭아매는 감정은 애정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어렴풋이 예상한 맞사랑에 감정을 숨기려고 한 이유가 있다면.

 "도윤이 네 생일이더라고."

 "……나, 난 형을 좋아하지 않아!"

 "뭐?"

 동시에 내뱉어진 말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멋대로 앞서나간 도윤의 말이 허망하게 주위를 맴돌았다. 생일? 좋아해가 아니라? 

 테이블을 내려치며 말한 도윤과 달리 규혁은 바른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한 그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듯 일그러진 채였다. 생일 축하한다는 말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렇게 무너질 수 있을까. 도윤은 말을 잃고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그. 그게."

 "그래. 너는 내 맘을 알고 있었구나."

 규혁의 말은 안타까움을 담고 있었다. 축 처진 눈썹이나, 일렁이는 남자의 눈빛은 도윤의 마음을 옥죄었다. 무엇보다 그가 답한 말에 심장이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너는 내 맘을 알고 있다니. 마치 이규혁이 한도윤을 좋아하고 있다는 뜻처럼 들릴 뿐이었다. 

 나도 사실 형을 좋아해. 전해지지 않을 말을 수없이 되뇌던 도윤은 그대로 고개를 떨궜다. 섣불리 앞서나가지 않았다면 서로가 숨기고 있었을 마음이 이 자리를 망쳤다. 생일 축하를 위해 좋은 식당을 빌리고, 돈을 쓴 진짜 사랑 앞에서 도윤은 죄인이 되어버렸다. 

 "괜찮아. 싫어해도 괜찮으니까, 그냥 곁에 있게 해줘 도윤아."

 "나는……."

 도윤이 같은 사랑을 속삭일 수 없는 이유는 간단했다. 

 당신이 살인자이기에. 살인자를 사랑하는 배신자라니, 우습지 않은가. 안개가 낀 것처럼 복잡한 머리는 규혁을 범인이라 확정 짓지 못했다. 그래도 의심한다. 그를 범인이라 의심해버린 이상, 사랑은 사치스러운 단어였다. 

 "생일 축하해. 한도윤. 도윤아. 그리고 너를 좋아해."

 당신이 왜 다른 이들을 죽였는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눈앞에서 쓸쓸하게 웃는 얼굴이 거짓이 아니란 건 알 수 있었다. 축하와 함께 전해진 고백이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좋아하지 마. 사랑하지 마. 한도윤의 생일은 최악이었다. 




1. Love birthday end 

사랑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사랑하고 말았다. 

진상을 밝힐 수 없다면, 차라리 아예 모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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