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끊어진 다리', '방백', '대관람차', '음산한 똑딱거림', '세찬 비' 모두 사용.






돌아가는 대관람차. 장난감처럼 알록달록한 관람차에서 차례로 내리는 관객들. 작은 극장. 어느새 만석이다.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모습을 감추는 대관람차. 시곗바늘 돌아가는 소리와 맞물린다. 삐걱. 째깍. 삐걱. 째깍. 삐걱. 째깍. 

뚜우-

뱃고동처럼 울리는 버저. 강물을 타고 쌩 하고 스쳐지나가는 난파선. 관객들이 웅성거린다. 잠시 소란. 이후 막이 걷힌다. 페이드 인.





A S i D E

방   백


w. Serin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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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어, 생각보다 많이들 모였네. 이 별 거 아닌 인생에 퍽 관심이 많은 모양이야.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는데 큰일이군.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게 익숙하지가 않아서 말이지.

응? 이봐, 질문은 하나씩 하라고. 그래, 거기 앞줄 여자. 어떻게 죽었냐고? 허, 참. 처음부터 질문 한번 살벌하다. 그래, 그래. 결국 궁금한 건 그거겠지. 어떻게 죽었냐, 인가. 뭐 결정적인 사인은 목의 자상이었지. 기억은 안 나지만 어떤 미친 새끼가 목에 칼질이라도 했나봐...엉? 아니, 그걸 그렇게 받아들이면 안 되지. 묻지마 살인이라니 모양 빠지게. 살아있을 때는 나름 유명한 사람이었다던데.

...사람? 아, 그래. 뭐 대충 사람이라 치고. 아무튼 강하다고 소문난 패거리 중 하나라고...아니 젠장 이렇게 말하니까 진짜 없어보이네. 너, 거기 뒤에서 둘째 줄. 할말 있으면 크게 해라. 기분 나쁘게 옆 사람이랑 소곤거리지 말고.

다른 질문 있는 사람? 음, 그래. 시력은 꽤 좋은 편이었을걸....젠장, 또 그거냐. 아무튼 태어났을 때부터 애꾸였던 건 아니야. 아까 말한 미친놈 있지? 그놈이 빼갔던 것 같아. 아팠냐고? 말이야 빙구야, 그럼 눈깔 파가는데 안 아팠겠냐? 너도 파내줘? 손가락으로 우드득? .....아, 미안. 약간 흥분했다.

다시 질문. 그래, 앞에서 세 번째, 분홍머리 여자애. 원래 성격이 그렇냐고? 어....이건 또 뭐라고 답해야 하나. 아까 좀 본성격 나오긴 했는데. 그래, 옛날엔 좀더 성격이 더러웠을걸. 망나니 소리도 듣고 그랬었으니까. 어쩌다 바뀌었냐고? 그건 묻지 마.....기억은 흐릿한데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다. 느낌이 쎄한 게, 영 별로야.

다음, 거기 까만 머리 꼬맹이들. 쌍둥이냐? 아, 그냥 닮았을 뿐인가. 흠....뭐야. 너네 어딘가 낯이 익은데....기억은 안 나지만. 아, 진짜. 사후에 기억을 엉망으로 만든다는 게 누구 아이디어인지는 몰라도 만나면 죽빵이라도 먹여주고 싶네. 지울 거면 좀 깨끗이 지우든가. 찜찜하게 이게 뭐야? 그래서 질문이 뭐라고? 직업? 직업이라...어이, 거기 맨 뒤에 신호등 머리. 잡아다 족치기 전에 입 조심해라. 백수처럼 생긴 건 또 뭔데. 잘은 모르지만 아무튼 백수는 아니야. 좀 한가하긴 했지만, 매일 무슨 일을 했다는 자각 정도는 있거든. 순찰? 잘은 모르겠군. 죽을 때 소지품 보니까 검이 있던데.

맨 끝에 연구복 입은 여자, 손 든 거야, 안 든 거야? 아. 군인이었던 거 아니냐고? 좀 그럴싸한데. 근데 딱히 윗사람들 명령을 들을 성격이 아니라서....기사? 요즘 시대에도 그런 게 있냐? 뭐...있을 수도 있겠지. 그래, 그런 기억은 좀 있네. 누구를 지키려고 했던 것 같아. 한 명...혹은 그 이상. 뭐, 잘 기억 안 나는 건 냅두고.

다음 질문? 그래, 거기 하얀 머리카락. 어디 아프냐? 그보다 너도 어디서 좀 본 것 같네. 질문은, 왜 여자 질문만 많이 받냐고? 남자 새끼들이랑 말 섞어봤자 뭐가 좋다고. 그래도 나름 성비 맞추고 있잖아. 전혀 모르겠다고? 내 알 바냐? 거기 야유하는 놈들, 미간에 단검 박히기 싫으면 얌전히 짜져라. 젠장, 진짜 이 질의응답에 뭔 의미가 있는 거야? 죽으면 그냥 다 하게 되는 시스템이라고? 염병할. 

너, 거기 손 든 거야? 그래. 뻗친 머리 고딩. 어디서 본 교복이네. 아니, 넌 생판 초면이고. 아무튼. 뭐? 연애? 이 새끼가 뭐 그런 걸 물어봐. 인기는 있었던 것 같은데 연애를 한 기억은 없다. 어? 잘생겼는데 모솔이냐고? 칭찬이랑 욕을 잘도 섞어서 하는군. 오냐, 잘생긴 모솔이다. 꽤 오래 살았는데 여자랑 연애 한번 못해보고 죽은 슬픈 인생......방금 총각귀신이라고 중얼거린 놈 3초 줄 테니까 머리 박아라. 옳지.

다음은 거기, 두건 쓴 까만 머리. 너도 환자냐? 아까 그 하얀 녀석도 그렇고 아픈 놈 천지군. 아아. 그래서 죽은 거라고...뭔가 미안. 질문이, 뭐? 썩을. 미안하단 건 취소다. 좋아하는 사람? 이놈들 왜 이렇게 남의 애정사에 관심이 많아. 좋아하는 사람...이....있던가? 잠깐만, 뭐가 생각날 것도 같은데. 뭐지, 뭐였지? 좋아하는 사람?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거참 기분 진짜 이상하네. 내 기억인데 왜 내가 기억을 못 해. 이 시스템 만든 놈 잡히면 죽빵에 아구창 추가다.

다음, 금발에 흉터. 너도 어딘가 낯이 익다? 아무튼 인생 꽤 험하게 살았나보네. 얼굴에 그거 말야. 어떤 놈이 한 건지는 몰라도 잘도 그어놨군. 칼질 좀 하는 놈이었나봐. 그래, 질문은? 검 잘 쓰냐고? 글쎄, 비교 기준이 있어야지. 그래도 못 다루지는 않는 것 같더라. 꽤 손에 익어.....보여달라고? 아니, 그건 좀. 구경거리 되는 건 질색이라...음. 사실 이게 더 문제이긴 한데. 내가 원래 좀 망나니 같은 놈이랬잖아? 왠지 검 들면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죽이려 들 것 같아서. 그냥 기분이긴 하지만. 굳이 모험을 할 필요가 있나 싶다.

아무튼 다음. 이제 없냐? 오, 마지막 한 명이군. 가운데 분홍머리 여자. 음....너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왜 이렇게 기시감이 심해? 알고보니 생전에 다 아는 사이였다거나 그러면 웃기겠다. 웃긴 게 아니라 슬픈 건가. 에이, 설마 그러겠냐. 질문 내용은, 어? 파란색 좋아하냐고? 뭐야. 뜬금없이. 좋아하긴 해. 정확히는 남색. 좀 어두운 남색이 좋더라. 자주색? 그...렇지. 그것도 좋아. 말로 설명하긴 좀 애매한데 그런 색깔 있잖냐. 철쭉이랑 비슷한데. 아무튼 좋아할걸. 이유? 색깔 좋아하는 데에 이유도 있냐? 글쎄.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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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 모든 배우는 대사와 행동을 멈추고 움직이지 않는다. 객석과 무대 분리. 그대로 천천히 페이드 아웃. 막이 닫힌다. 대관람차 삐걱이는 소리. 무대 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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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다니는 사람 하나 없이 텅 빈 놀이공원. 들통으로 물을 들이붓는 것만 같이 세찬 비. 남자는 벤치에서 혼자 비를 맞고 있다. 저 멀리서 보이는 대관람차. 불이 꺼진 대관람차의 그림자는 흉물스럽기까지 하다. 무대 밖에서 효과음. 전화벨 울리는 소리와 교차되는 배경음악. 음악은 동초제 수궁가, 별주부 모친이 못 가게 말릇하는 대목. 진양조.


여봐라 주부야 여봐라 주부야 니가 세상을 간다러니 무엇허러 가랴느냐 삼대독자 니 아니냐 장탄식병이 든들 뉘 알뜰히 구환허며 네 몸이 죽어져서 오연烏鳶으 밥이 된들 뉘랴 손뼉을 뚜다리며 휘여쳐 날려줄 이가 뉘 있드란 말이냐

가지마라 주부야 가지를 말라면 가지마라 세상이라 허는디는 수중 인갑鱗甲이 얼른 허면 잡기로만 위주를 헌다.


남자는 움직이지 않는다. 남자의 그림자가 꾸물텅거리더니 돌연 벨소리가 멎는다. 무대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insert>

H: 랑아, 비도 오는데 슬슬 들어와.

M: ........

H: 감기 걸리겠어.

M: ........

H: 해 지기 전에는 들어오기로 했잖아.

M: .......


남자,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비틀거린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눈에는 초점이 없다. 비틀거리며 걸어간다. 대관람차 삐걱이는 소리. 발걸음 소리. 삐걱. 터벅. 삐걱. 터벅. 삐걱. 터벅. 점차로 엇박. 그대로 멈춰서는 남자. 


옛날에 너의 부친도 세상구경을 가시더니 십리사장 모래속에 속절없이 죽었단다 못가느니라 못가느니라 나를 죽여 이 자리에다 묻고가면 니가 세상을 가지마는 살려두고는 못가느니라 주부야

위방불입危邦不入이니 가지를 마라


"나도 가지 말라고 말이라도 해볼 걸 그랬는데."


고장난 인형처럼 다시 걸어가는 남자. 세찬 비가 시야를 가린다. 비는 잔인하도록 쏟아진다. 비가 우박으로 바뀌자 주위를 돌아보다가 행인A에게서 우산을 받는다. 우산은 구름이 그려진 하늘색이다. 행인B가 중절모를 건넨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서 있는 남자. 이것은 신무영이 아니다. 행인C가 액자를 들고 지나쳐간다. 그림자가 남자를 뒤덮는다. 이후 사라진다. 빈 자리에는 우산이 바닥에 떨어져 있다. 펼쳐진 우산 아래에는 뒤집어진 중절모. 중절모 안에는 하얀 국화꽃이 가득하게 꽂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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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산한 똑딱거림이 강물처럼 흐른다. 방은 거대한 국화꽃 때문에 숨이 막힌다. 커다란 안방 하나를 가득 채우고 든 꽃. 향기에 질식할 것 같다. 다리가 부서진 의자가 쓰러져 있다. 방 바깥쪽, 강 건너편에서 은율은 정사각형의 새하얀 방을 노려본다. 그가 있는 쪽에서는 방의 내부가 보이지 않는다. 빈칸처럼 텅 빈 하얀색 벽이 그를 마주 노려볼 뿐. 강물 위에는 끊어진 다리가 있다.


공무도하公無渡河     공경도하公竟渡河

타하이사墮河而死      당내공하當奈公何


무영은 멍하니 방 안을 가득히 채운 국화를 바라본다. 환각일 것이 뻔하다. 그래도 손을 뻗어서 하느작거리는 꽃잎을 매만져본다. 향기가 묻어난 손을 쥐고 그가 어렴풋이 웃는다. 가지 말라고 말해볼 걸 그랬지, 응. 아님 좋아한다고 고백이라도 해볼 걸 그랬지. 고양이를 어르듯 꽃에게 속삭인다. 그에 화답하듯 꽃잎을 흔드는 국화.


"안에서 뭐라는 거야? 어이, 검은 것. 안에 있냐?"


바깥의 소리가 안에서는 들리지 않는다. 강물 하나로 엇갈린 경계. 다른 시간선을 타고 흐르는 생사의 길. 백수광부 대신 흰 머리의 망나니가 강 저편에서 바라본다. 내가 건너고 싶어서 건넜나. 지독한 불합리- 그래 그는 죽을 이유가 없었다고 누군가에게라도 따지고 싶다.


"좋아한다고는 말해보고 죽었으면 나았으려나."


근데 그랬으면 네가 더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끊어진 다리를 비추는 달빛. 거대한 스포트라이트처럼 비추어진다. 야, 달 떴다. 팔만 성했으면 검이라도 휘두르는 건데. 이봐. 검은 친구. 너 내가 검무 추는 거 본 적 없지? 짜식, 그걸 봤어야 했는데. 아깝네. 젠장! 아까워. 그건 보여주고 죽어야 했는데. 아니 그냥 안 죽는 게 최고였고! 끝나고 칼국수 먹으러 간다며. 내 치킨이랑 맥주는. 저녁에 축구 결승 있었는데 결과도 못 봤네. 그래서 FC서울 이겼냐? 후반전에 먹으려고 꼬깔콘도 사놨는데.

아무튼 좀 나와보지? 언제까지 방에 있을 건데? 야! 달도 밝은데 밤산책 안 하냐? 그렇게 집에만 있다가는 몸 다 굳는다. 독백처럼 뱉어내다가 결국 은율이 답답하다는 듯이 인상을 와락 찌푸린다. 여전히 환한 달빛. 세찬 비, 처럼, 쏟아지는, 달빛.


"야, 신무영. 쪼잔하게 굴지 말고."


공후의 현에 스미는 소리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에 올올이 스미는 달빛. 무영은 문득 은율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지만 하얀 벽에 막힌다. 안과 바깥을 가르는 네모반듯한 방의 벽. 강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강물, 끊어진 다리, 바닥에서 똑딱이며 바늘을 돌리는 시계. 음산한 똑딱거림이 강물소리와 함께 흐른다. 허상처럼 노랫소리가 구른다. 임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위방불입이니 가지를 마오. 시계판 위를 구르는 하얀 머리통. 은율은 잠시 눈을 깜박인다. 이상한 걸 본 것 같은데. 그러나 다시 보면 아무것도 없다. 빗방울보다 거세게 쏟아지는 달빛. 은율이 탄식하듯 다시 입을 연다. 신무영.


"....얼굴 좀 보여줘."


방백. 지금 생각해보면 어쩌다가 그렇게 좋아하게 됐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그런 밥버러지를. 미운정도 정이라던데 그게 다 허투루 들을 소리가 아니야. 첫인상은 딱 최악이었는데 지내다보면 썩 괜찮아져서. 그게 시작이었나? 사실 언제부터라고 딱 특정짓지는 못하겠어.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더니. 가랑비가 아니라 장마였는데 그냥 내가 몰랐던 건지도 몰라. 같이 지낸 시간이 몇 달이라고 가랑비야. 가랑비로 이렇게까지 젖어들기도 힘들겠다.

아무튼, 여름 장마 같은 놈인가봐. 갑자기 왔다가 갑자기 가버리고.....망할 밥버러지. 백정. 나 그 녀석 이름도 모르네. 말이 되냐? 안 알려주니까 어쩔 수 없었지만...물어볼 걸 그랬나. 아니, 설마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냐고. 진짜, 몰랐어. 그 녀석은 괜찮을 줄 알았어. 절대로 괜찮을 줄 알았어. 이제 보름달만 뜨면 계속 그 녀석이 생각나서 미치겠어. 잊는다고 잊을 수 있을까? 아. 역시 가지 말라고 말할 걸 그랬어. 말이라도 해볼 걸 그랬어. 정말로, 그냥. 말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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