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몇 시지?

어디보자, 퇴근까지 얼마나 남았….

에라이 아직도 3시 반 밖에 안 됐나.

오늘 일만 끝나면 모처럼 연휴인데, 시간 더럽게 안 간다.


일단 토요일 일요일 이후에 고작 하루 더 쉬는 걸로도 연휴라고 기뻐하고 있는 이 땅의 불행한 현대인들을 위해 잠시 묵념.

다음날 월차낸다면 5일 연속으로 쉴 수도 있겠지만 일개 직장인이 눈치 안 보고 그렇게 할 수 있는 회사가 있다 하더라도 그게 우리 회사는 아니다.

흠, 다음 주 것까지 그럭저럭 다 정리 해 뒀고, 연휴니까 이제 일 더 들어 오는거 없겠지.

적당히 시간 죽이다가 6시 땡하면 마감쳐야겠다.

칼퇴… 할 수 있겠지, 오늘 같은 날은.

그 동안 연휴 계획이나 좀 세워둬야겠다, 실행이야 다 못 할 망정.


최근 몇 주 동안은 주말에 집에만 박혀있었다.

연락할 사람이나 나갈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진짜 누워서 멍때리는 것 말곤 아무것도 하기 싫을 정도로 너무 피곤했으니까 정말로.

이번 주말은 하루 더 여유가 있으니까 좀 문명인답게 지내봐야겠다.

볼 만한 영화 요즘 하는 거 있으려나.

뭐 찾아보면 내 취향이 하나쯤은 있겠지.

그리고 그 소설 다음 권 나온 것 같던데 서점에도 들러야겠다.

아 그러고보니 바에 마지막으로 들른지도 한참 됐지.

거기 바텐더 아가씨가 내 얼굴 다 까먹었겠네.

나보고 처음 오셨냐고 묻기 전에 이번 주말 중엔 눈도장 한 번 찍으러 가야겠다.

이번엔 번호 따야지 진짜.


아 퇴근도 멀었는데 벌써 피곤하다.

영화고 술이고 일단 오늘은 얌전히 쉬고나서 내일이나 모레 해야겠다.

갈때 맥주나 좀 사서 들어가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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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잠 자니까 좋다.

이대로 더 이상 누워있기 싫어질 때까지 뒹굴거리다가 일어나서 씻고, 옷은 음, 이따 바텐더도 꼬셔야되니까 좀 잘 챙겨입고 나가야겠지.

멋 부려보는것도 간만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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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서점부터 들를까.

내가 찾는 책이… 아, 저깄다.

뭐야 그 새 신간이 두 권이나 나와있었나?

와, 나 얼마나 오랫동안 정신없이 바빴던 거지.

한 길면 2개월이나 된 건 줄 알았더니 거의 반 년 동안이나 못 온 거였다.

망했네.

바텐더가 나 못 알아보겠어.

하긴 나부터 그 아가씨 이름 까먹었고.

영화 상영 때까지는 시간 좀 남았으니 앞부분 조금만 읽다 가야겠다.

한 30분쯤은 읽을 여유가 있을 것 같다.


읽고 있다 보니 내가 서 있는 진열대 앞으로 웬 젊은, 아니 어린?

여튼 잘해봐야 대학생으로 보이는 친구가 섰다.

이 책이 저런 어린 친구한테도 먹히나?

아무래도 아닐 것 같은데.

내 돈 주고 사 읽는 책이긴 하지만 좀 형이상학적이랄까, 어렵고 솔직히 난해한 구석이 있다.

요즘 애들은 직관적이고 웃기고, 시원시원하게 빵빵 터지는 그런 거 좋아하지 않나.

높은 확률로 저 친구 취향이 특이한 걸 거다.

근데 아무리 봐도 좀 아리송한데, 남자야 여자야?

헤어스타일이나 옷차림이나, 가슴… 이 좀 납작한거나, 여튼 행색만 보면 남자앤데 얼굴을 보면 좀 헷갈린다.

단순히 여성스럽게 예쁜 얼굴이 아니라 꽤 이국적인 느낌도 있고, 피부 색까지 고려해보면 중앙 아시아 쪽 사람같기도….

이런, 내가 너무 노골적으로 쳐다 봤나.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갑자기 고개를 들어 내쪽을 본 그 어린 친구와 눈이 마주쳐버렸고 나는 프로 사회인답게 반사적으로 싱긋 웃었다.

다행히 그 친구는 목례를 한건지, 한번은 봐주겠단 뜻인지, 고개만 한 번 끄덕이고는 다시 책에 집중했다.


더 이상 쳐다볼 수는 없었으므로 나도 그냥 책에 집중했는데 또 읽다보니 빠져들어서 문득 시계를 보았을 땐 예매해 둔 영화 상영 때까지 시간이 꽤 빠듯해져 있었다.

같이 책 읽던 그 어린 친구는 어느 새 먼저 자리를 뜬 듯 하고, 나도 빨리 책 계산하고 영화관으로 이동해야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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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 예정 시간보다 도착은 조금 늦었지만 요즘 영화는 사전 광고가 상당히 길어서 영화 앞 부분을 놓친 건 아니었다.

예매할 때 지정했던 1인석의 내 자리를 찾아가 앉은 뒤 주위를 좀 둘러보니 통로를 사이에 두고 바로 옆 자리에 아까 서점에서 본 그 어린 친구가 앉아있다.

이 친구 취향 나이답지 않게 진짜 올드하네.

요즘 인기 많고 흥행한다는 상업영화도 많은데 굳이 참.

지금 보려는 건 독립영화까지는 아니지만 삶과 죽음이 어쩌고 하는, 좀 무거운 주제의 영화라 좌석도 빈자리가 상당히 많았다.

나도 딱히 이런 게 골라서 취향까지는 아니지만 싫은 것도 아니었고, 또 마침 그 비슷한 느낌의 책도 샀고 해서 혼자 보기 좋은 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혼자서나 와야지 볼 수 있는 것으로 선택한 것이다.

저 친구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서 지금 여기 앉아있는 건진 몰라도 역시… 그래도 좀 재밌는 거 찾아다닐 나이지 않나.

신기한 아이다.

아차, 내가 또 너무 오래 쳐다보고 있었나보다.

그 애가 고개를 내 쪽으로 돌리는 바람에 이번에도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나는 다시 한 번 사회인의 영업용 미소를 내세웠고 그 친구는 아까보다는 나를 훨씬 더 오래 응시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오랜 눈싸움 후의 끄덕임이 역시 목례인지 두번째까진 어떻게든 봐주겠단 뜻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그 애와 나는 영화가 다 끝날 때까지 적어도 다섯 번은 눈이 마주쳤다.

내가 그 애를 스무 번 넘게 쳐다본 결과다.

근데 진짜 아직도 잘 모르겠다고.

예쁘장한 남자앤지, 잘 생긴 여자앤지.


영화가 끝나고 조명이 켜지며 스크린에서는 스텝롤이 올라가던 때에도 우린 마지막으로 눈이 마주쳤는데 그 때도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건 확실히 목례였을 것이다.

참 인사성도 밝은 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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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 몇 시부터 열었더라, 드나든지 너무 오래되어 그런 것도 기억이 잘 안 난다.

지금 일곱시 쯤인데 열었을지 애매하다.

뭐 기다리는 겸 오늘 한끼도 안 먹었으니 어디 들어가서 간단히 뭐라도 먹어야겠다.

혼자 온 손님을 위한 좌석이 마련되어있다고 써 붙여둔 라멘 가게가 보여 들어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그 어린 친구가 안 보이는 게 당연했는데도 왠지 좀 서운했다.

오늘 우리 취향도 동선도 비슷한데 막연히 또 마주치지 않을까 생각했던 거지.

그 아이 라멘은 취향이 아닌가.

이런 가게 말고 좀 더 고즈넉한 가게를 갔어야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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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오셨네요?"

"예, 좀 바빠서. 저 없이 어떻게 장사는 잘 되셨습니까."

"여기야 늘 비슷하죠, 뭐. 손님 한 명 빠졌다고 해서 뭐."


마스터의 농담에 씨익 웃은 후 예전에 자주 다닐 무렵 매번 앉던 테이블로 습관적으로 가려고 했는데 내가 안 온 사이 다른 사람의 고정석 혹은 공용석이 되었는지 처음 보는 다른 손님이 앉아있었다.

하긴 오늘 목표는 바텐더 양 전화번호니까 테이블 말고 바에 앉는 게 낫겠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그 아가씨가 안 보이네.


"저기 마스터. 그 아가씨는 안 보이네요? 그만 뒀습니까?"

"아아, 하나 양이요. 그 친구는 새벽타임으로 옮겼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랬지, 이름이 하나였어, 듣고 보니 생각나네.

그나저나 이런… 미리 좀 알아보고 올 걸 그랬다.

아무래도 자정까지 기다리긴 좀 그렇지.

뭐, 오늘은 텄으니 마스터랑 수다나 조금 떨다 일찍 가야겠다.

휴일이라고 나를 이렇게 기어이 쉬게 만드는군.


"그럼 하나 양 출근하기 전까진 마스터 혼자 가게 보는 겁니까? 제가 안 오니까 사람 줄여야 할 정도로 형편이 나빠졌나봐요?"

"유감스럽게도 멀쩡합니다. 새로 저녁타임 하는 친구 있거든요. 지금 창고에 보내서 바에 저만 나와있는겁니다, 손님."


그래, 뭐 그런가보다.

술이나 하나 시켜야겠네.

뭘 마실까 메뉴를 읽던 중 바 너머 창고로 연결된 문이 열리더니 새로 쓴다던 바텐더가 상자를 여러 개 쌓은채로 들고 바 안으로 들어왔다.

상당히 마른 체구였는데도 제 머리 높이까지 상자를 쌓고 온 걸 보면 다행히 내용물이 무겁지는 않은가보다.

근데 저러고 앞이나 보이려나.

왠지 조마조마해서 무사히 바닥에 상자를 내려놓을 때까지 주시했다.

그리고 바텐더가 허리를 펴고 가게 내부 쪽으로 돌아보았을 때 난 턱을 괴고 거의 엎드릴 기세였던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를 향해 손가락질까지 하면서.

그 친구도 날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이 상당히 놀란 눈치다.

놀란 와중에도 고개를 한 번 끄덕, 익숙한 목례도 해준다.

갑자기 이 공간이 무척 재밌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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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가 혼자 손님 좀 보고 있어요. 나 이 친구랑 좀 놀아야 되니까."

"손님 우리 새 바텐더랑 아는 사이에요?"

"네, 조금."


진짜 조금, 그리고 오늘부터 알았지만.

그런 건 상관없고 이제부터 잘 알아가면 될 일이다.

심심할 뻔 했는데 이렇게 반가운 사람이 있을 줄이야.


"여기서 언제부터 일했어요?"

"한달쯤 되었습니다만."


계속 아리송했던 게 당장 한가지 풀렸다.

남자였다, 그것도 굉장히 낮고 근사한 목소리.

사실 남자였어도 여자였어도 이상할 건 없는 얼굴이었는데, 반대로 그 어느쪽이었어도 좀 충격이었을 것 같달까.

그리고 난 은연중에 여자이길 바랐던 것도 같고.

하지만 너무 어려보인다.

최소 띠동갑인것 같은데 내가 정신차려야지.

아 근데 뭐, 이젠 다 상관없네, 남자애인게 확실해졌으니.


"나이는 어떻게 되요?"

"…너무 개인적인 질문은 받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손님."

"아, 미안 미안."


철벽이 꽤 칼같이 들어와서 대화 흐름이 너무 금방 끊기고 말았다.

왠지 겸연쩍어 입맛만 다시고 있으려니 마스터가 끼어들어 우리를 갈라놓는다.


"둘이 별로 안 친했나 봅니다? 그럼 우리 바텐더 다시 일 시켜도 되죠?"

"좀 쉬엄쉬엄 하게 해줘요."

"우리 가게 형편 안 좋은 거 아시잖아요."


말이나 못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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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바에 앉아 이따금씩 술잔을 기울이며 그 아이를 관찰했다.

바텐더 유니폼이란게 절제된 것 같이 보여도 사실은 꽤 야하다.

특히 허리에 묶는 긴 검은색 앞치마.

노출이야 없지만 실루엣이 허리를 너무 강조하는 차림이잖아.

그리고 이 친구의 허리는 웬만한 여자 저리가라였다.

낮에 캐주얼한 차림으로 봤을때도 호리호리하다고는 생각했는데 저 유니폼 입은 것을 보니 허리가 곧 부러질 것 처럼 너무 가늘다.

얼굴도 그렇고, 좀 보호본능을 자극하는걸.


"꽤 오래 계시네요. 하나 양 올 때까지 기다리시는 건가요 손님?"


별로 그런 건 아니었는데 마스터가 뜬금없이 묻길래 무슨 영문인가 했더니 벌써 지금 11시 반을 넘기고 있었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 흘렀지?


"아뇨, 그냥 오랜만에 와봐서 좀 있어본 겁니다."

"자주 오셔서 매상 좀 올려주세요."

"…그래야 겠네요."


마스터가 다른 손님 쪽으로 사라진 틈을 타 그 애에게 턱짓을 하며 물어봤다.


"일 언제 끝나요?"

"…12시 반입니다."

"끝나고 시간 괜찮죠? 내가 살게요. 술도 괜찮고 밥도 괜찮고."

"아, 저…."

"거절하지마요. 오늘 너무 신기해서 그래."

"……."

"천천히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신경쓰지말고 일해요."


정말 신기해서 그런다.

거기다 음, 애가 예쁘게 생기기도 했고, 너무 말라서 뭣 좀 먹이고 싶어지기도 하고, 게다가 둘 다 남자니 지저분한 오해받을 일도 없고.

뭐 그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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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됐어요? 그럼 나가죠."


계산은 진작에 마쳐뒀고 나는 가게 밖으로 먼저 나왔다.

늦은 밤이 되니 제법 쌀쌀하다.

아까 내부에서 기다리는 동안 새벽타임을 위해 출근한 하나 양과도 마주쳤는데 용케 날 기억은 하더라.

전화번호 묻는 건 다음으로 미루고 오늘은 그냥 가볍게 인사만 해 두었다.

밖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려니 그 애가 나와서 내 옆에 섰다.


"어디로 갈까요. 배 안 고파요?"

"괜찮습니다."

"그럼 술? 술은 잘 해요? 아, 바텐더한테 내가 너무 바보같은 질문을 했나."


바보같긴 했는지 그 애가 처음으로 내 앞에서 웃었다.

확실히 예쁘네.


"저, 술 안 마셔도 될까요. 일 하면서 손님들이 권해 주시는 것만 받아 마셔도 제법 많아서…."

"어… 그럼 우리 맨 정신으로 얘기하자고? 나야 좋지?"


내가 또 이번엔 너무 천연덕스럽게 말했는지 '풉' 소리를 내며 웃는다.

웃으니까 보기 좋네.

가게에서는 하도 안 웃어줘서 나 싫어하는 줄 알았잖아.

다른 손님들한텐 웃어주면서 나한테만 안 웃어줬지, 확실히.


"그럼 어디로 갈까요. 술 안 마셔도 난 상관 없어요. 일단 택시부터 잡을까요."

"음… 그냥 좀 걷는 건 어떠신가요?"

"그것도 좋아요. 춥진 않죠?"


달밤에 오늘 처음 본 남자애랑 산책 데이트라.

계획에는 없었지만 이거 괜찮은 휴일 일정인데.


"근데 몇 살이에요? 이번에도 안 알려주는 건 아니겠지."

"…스무살입니다."

"하… 예상은 했지만 정말 어리다…."

"……."

"대학생이에요? 바텐더는 알바?"

"네."

"아 그리고 또 묻고 싶은거 있는데 혹시 외국인인가요?"

"네. 그걸 꽤 늦게 물어 보시네요."

"혹시 실례일까 싶어서… 말도 너무 잘하고. 그럼 유학 온 건가요? 교환 학생으로 온 건가? 국적은요?"

"네, 교환 학생. 네팔에서 왔습니다.

"아, 네팔~."


히말라야 말곤 모르겠다.

말을 돌리자.


"바에 내일도 출근하나요?"

"아뇨, 일요일은 저도 쉽니다."

"월요일은요?"

"출근하죠."

"그렇구나. 그럼 연휴도 아니겠네."

"월요일엔 듣는 강의가 없어서 저녁까진 쉴 수 있지만요."

"아, 대학생이지 참."

"이름은."

"응?"

"안 물어보시네요."

"아 그렇지! 가장 기본을 묻는 걸 깜박했네요. 아아 이해 좀 해줘요, 내가 지금 데이트가 워낙 오랜만이라."

"데… 이트요?"

"어라, 나만 데이트라고 생각했나."

"…젠야타입니다. 데카르타 젠야타."

"시마다 겐지예요, 겐지가 이름. 제니라고 불러도 돼요?"

"네? 아… 가족들이 보통 그렇게 부르지만… 그러세요…. 좋으실대로…."

"오, 좋아요, 제니."

"……."


귀엽네.

이게 무슨 별 얘기라고 잔뜩 긴장하고 부끄러워 하고.

좋을 때다.


"아까 라멘 가게는 왜 안 왔어요? 나 한참 기다렸잖아."

"네? 무슨…?"

"아니, 농담."


---


슬슬 춥거나 피곤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조금 아쉽지만 돌려 보낼까.

어차피 그 바에 앞으로 다시 꾸준히 다니면 얼굴 계속 볼테고.


"피곤할텐데 들어가요. 택시 잡아 줄게요. 어디 살아요?"

"아니, 괜찮습니다. 제가 알아서,"

"아니 내가 맛있는 거 사준다고 꾀어놓고선 굶기고 계속 걷게만 했잖아. 아, 지금보니 뜨거운 커피라도 손에 한 잔 들려줄 걸! 추웠을텐데. 오랜만의 데이트라 긴장해서 깜박했네요, 이런 바보."

"아뇨 괜찮습니다, 신경쓰지 마세요. 제가 걷자고 한 거였고…."

"하다못해 택시비쯤은 내야 어른이 되서 체면이 서지. 그래서 사는 동네가 어디에요? 아, 교환 학생이면 대학 기숙사에 사나?"

"아뇨, 저는 자취를…."

"어휴 , 타국에서 혼자 힘들겠네. 그래서 어디?"

"…○○구 입니다."

"어? 정말? 나도 거기 사는데? 우리 진짜 굉장하다. ○○구 어디요?"

"음.. ◇◇◇ 건물 아시나요, 그 근처입니다."

"와, 이젠 놀랍지도 않네. 하긴 그 근처가 오피스텔이랑 원룸촌이지. 우리 택시비 한 사람분 굳었어요. 같이 택시 타고 같이 내리면 되겠네요."

"네…."


이 아이는 왜 계속 뭘 이렇게 수줍어 하는지.

괜히 나까지 긴장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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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안에서는 왠지 뭔가 어색해서 둘이 거의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택시 기사가 신경쓰이는 건가.

마치 이 친구가 아까 가게 안에선 내게 한번도 웃어주지 않았던 것과 비슷한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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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에서 내린 직후 집이 어느 방향이냐고 물었더니 그것마저 우리집 가는 방향과 동일하길래 2~3분 가량이나마 우린 잠시 더 같이 걸었다.

택시에 멋대로 동승했던 어색함이 우리 내릴 때 같이 따라 내렸나 보다.

그냥 이대로 건물 들어가기 직전 작별인사나 하고 헤어지게 될 줄 알았는데 그 애가 멈춰서서 예의 그 목례를 하고 제가 사는 건물로 들어가려는걸 보고 내가 급하게 손목을 붙잡아버렸다.

손목도 너무 가늘어서 놀랐다.

한손에 잡히고도 내 손가락이 너무 남는데.

아 역시 뭐 좀 먹여야겠어.

아 참, 일단 왜 붙잡았는지 말해야 되는구나, 엄청 놀란 얼굴이네.

토끼같다.


"고시원 살아요?"

"네… 왜요?"

"그러니까 이렇게 말랐지. 우리 집에 같이 가요. 어디 황금같은 휴일을 그런 곳에서 지내려고."

"아뇨, 전 괜찮습니다…!"

"이번 연휴 만이라도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내요. 내일 쉰다면서요."

"제가 내일 쉬는 거랑 시마다 씨 집에서 지내는 거랑 무슨 상관이…!"

"아… 그러고보니 별로 상관이 없긴 하네요."

"네….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저, 손목 좀 놔주시면…."


그 애가 잠깐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인 모습을 보고나니 왠지 짖궂은 마음이 들어 놔주기 싫었다.


"안 잡아 먹어요. 그냥 어린 친구가 외국에서 혼자 고생하는거 보니 안쓰러워서 그래. 쉬는 날은 좀 편한 곳에 있어야지. 코 앞이니까 같이 가요. 가까우니 여차하면 여기로 도망칠 수도 있겠네."


그렇게 구슬려 본 뒤 한 번 힘으로 손목을 조금 잡아 끌어 봤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 수준으로 처음만 살짝 저항하는 듯 했고 사실은 이미 체념해버렸는지 뭐 그냥 딸려 온다.

첫 단계는 가볍게 성공, 그럼 이제 남은 휴일 동안 뭐 좀 먹여야겠어.


"있어봐서 마음에 들면 주말마다 우리집 와 있어도 되요. 평일이야 낮에는 학교다니고 밤에는 알바하는 생활이니까 고시원은 잠만 자는 공간으로 치더라도 쉬는 날은 그런데 있으면 안 되지."

"저, 그렇게까지 폐를 끼칠 수는…."

"있어보고 마음에 들면요."


씨익 웃어주었다.

근데 방금 나 얘보고 주말마다 와도 괜찮다고 말했나?

나 이거 연애 포기한 거 맞지?

아 모르겠다, 당분간은 쉬는 날에 취미로 애나 키우지 뭐.

말을 붙여보자면 휴일 메이트랄까.

그러고 보니 이미 우리 오늘 반나절은 같이 휴일 보냈네?

Holiday mate라.

딱이군.


내 미소가 불길했는지 그 아이 표정 좀 미묘했지만 난 그냥 그 애를 보며 또 씨익 웃었을 뿐이다.

내가 보고 싶어서 걍 내가 쓰고 있습니다. 일단 내 취향이지만 당신 취향이기도 하다면 좋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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