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카와 씨, 9시예요!”

“오케이~ 알려줘서 고마워요!”

 


배구에만 전념하던 예전과는 달리, 오이카와는 여러 방송을 누비고 있었다. 연예인 못지않은 수려한 외모에, 어딘가 익숙해 보이는 팬 관리와 시원한 말발까지. 배구 선수로만 썩히기에는 여러 재능이―이 부분에서 살짝 열 받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조금 아쉽지 않냐는 기자의 말과 소속사에서 내건 달콤한 조건 때문에 방송 전선에 뛰어든 것도 벌써 3년 전이다.

 


배구 선수일 때는 시합이 없는 날이면 마음대로 쉬어도 되었지만, 방송을 하기 시작하면서 쉴 수 있는 시간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물론 이전의 쉬는 날에는 연습을 하느라 쉬지 못할 때도 많았으나, 자의로 쉬지 않는 것과 타의로 쉬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은 천지차이였다. 오이카와에게 허용되는 쉬는 시간 중 하나는, 소속사에서 겨우 얻어낸 광고와 맞바꾼, 가장 좋아하는 라디오 방송을 듣는 시간이었다.

 


- 안녕하세요. ‘사랑하는 이에게’ 방송의 읽어주는 남자입니다. 오늘도 많은 편지들이 도착했네요. 언제나 많은 관심 감사합니다. 그럼 첫 번째 사연은….

 


군더더기 없는 인사말을 시작으로, 이름 그대로 사연을 읽어주는 방송이었다. 타 방송들과 별다를 것 없는 방송임에도, 편지를 읽어주는 그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사람들은 좋아했다. 


네이밍 센스 없는 제목과 이름에서 보이는 것처럼 처음에는 사람들의 사랑 고백을 읽어주는 방송이었지만, 차분한 목소리와 애정 어린 조언에 다른 종류의 사연도 들어오곤 했다. 점점 방송 제목인 ‘사랑하는 이에게’ 라는 것과는 거리가 조금 멀어졌음에도, 제목을 바꾸지 않고 방송을 계속했다. 


보내온 익명의 편지 중에서 적당한 것을 골라 고백을 전해주거나, 고민 상담에 응해주곤 했었다. 이미지를 생각하지도 않는지 의견에 대해 쓴 비난도 서슴없는 남자의 모습에, 솔직하다는 이유로 청취자들이 조금씩 늘기도 했다.

 

원래 있었던 방송의 하차로, 그 사이에 붕 뜨는 시간이 생겨 갑작스레 끼어든 방송인지라 ‘읽어주는 남자’에 대해선 아무것도 알지 못했지만, 청취자들은 그의 방송을 좋아했다. 얼굴을 알 수 없으니 온갖 상상을 할 수 있다는 점도 통했다. 


오이카와도 그의 방송을 애청하는 청취자 중 하나였다.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모든 방송을 놓칠 수 없다 생각해 사장님에게 사정하여 받아낸 시간이었다.

 


- 네, 이제 마지막 사연이네요. 아마 아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안타깝게도 오늘이 저의 마지막 방송입니다. 아, 아쉬워해주셔서 감사하고 죄송해요. 마지막 방송의, 마지막 사연이니만큼 많은 분들이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이라니. 어떻게 찾아냈는데. 모든 인맥을 동원한다면 그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었지만 먼저 찾아오기만을 기다렸건만. 오이카와는 방송 멘트를 듣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방송이니까 방송하는 곳으로만 찾아간다면…!

 

- 너를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고 말하긴 했지만, 모두 잃어서 더 포기할 것이 없는 지금, 더 잃어야 한다는 말은 너를 포기하라는 뜻이겠지. 더 잃을 것도 없을 줄 알았지만 그것도 아니었더라. 단 하나 남아있던 너를, 끝까지 놓지 못했던 너를, 오늘에서야 비로소 놓으려고 해. 좋은 모습 잘 보고 있으니까, 아무 걱정 하지 말고 앞으로도 계속 빛나라고 말해주고 싶다. 건강해.

 

‘읽어주는 남자’의 마지막 방송은 남자를 찾아가려던 오이카와의 발걸음을 잡았다. 대상이 정해져있는 편지라 해도 ‘그’에게 도착하는 것이었기에 전해주는 형식의 존댓말이었던 평소의 것과는 조금 다른 형식에, 오이카와와 함께 듣고 있던 스탭들 모두 의아해했다. 


또한 평소라면 뒤이어 남자의 생각이나 응원의 말이 들려와야 했지만, 남자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조금 뜸을 들이고 나서야 ‘이것으로 오늘의 방송 모두 마치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라는 클로징 멘트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정말 끝이야? 뭐야? 평소와는 다른 방식에 청취자들 대부분이 당황했다. sns에 수많은 의견들이 쏟아졌지만 오이카와는 집중할 수 없었다.

 

 



‘너를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

 

언젠가 옛 연인 마츠카와가 오이카와에게 한 말이었다. 그 한마디를 끝으로, 마츠카와는 국가대표 선발전을 앞두고 있던 오이카와의 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첫날은 일이 생겼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다음날은 돌아오겠거니 생각했고, 조금 지났을 때는 불안했지만 믿고 있었고, 더 지나서는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하지만 마츠카와를 포기할 수는 없어서 어떻게든 찾아보고자 힘쓰고 있을 때였다.

 

우연히 들어온 방송 제의에 흔쾌히 수락한 것도, 마츠카와의 영향이 컸다. 방송을 하면 더 쉽게 찾아오지 않을까? 고민할 것도 없었다. 물론 ‘역시 뛰어난 오이카와 씨☆’라는 말과 함께 방송을 선언하자, 이와이즈미의 주먹이 돌아오긴 했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선택한 일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너 아직도 못 잊었냐?’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아는 초신뢰관계는 이럴 때 힘들다니까~.’

 


그 이유를 눈치챘다는 듯 물어보는 이와이즈미의 말에, 오이카와는 별다른 부정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이와쨩이 오이카와 씨를 말려도, 내가 원하는 답이 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



 

그렇게 기다린 것이 자그마치 3년이었다.

 


 

언젠가 우연히 라디오에서 한 방송을 들었고, 그 목소리가 마츠카와의 것임을 오이카와는 단번에 눈치챘다. 이렇게 마주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지만, 좋은 기회를 맥없이 놓칠 수만은 없어 악착같이 받아낸 휴식을 그 라디오에 다 쏟아 부은 이유도 역시 마츠카와 때문이다. 


왜 이제야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수면에 올라왔다는 것은 저를 만나러 오라는 신호임이 분명했다. 도망간 건 자긴데 왜 직접 오지 않는 건데? 먼저 연락할 수는 있었지만 괘씸한 마음에, 그리고 정확히 알 수 없는 마츠카와의 마음에, 조금 망설였었지만, 마지막 방송이라는 말은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뜻이다.

 


“저 먼저 가볼게요!”

 


저를 급하게 부르는 스탭들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오이카와는 그를 놓을 수 없었다. 오늘에서야 저를 포기한다는 소리는, 아직도 저를 생각하고 있다는 말과 동일했다. 방송의 의미가 무엇인지, 왜 저를 버리고 갔는지, 아니 다 떠나서 저를 싫어한 것은 아니었는지 물어볼 것이 너무 많았다.

 


아무 소식 없이 헤어진 이후, 걸어보지 못했던 번호로 문자 하나를 남기곤 그가 기다릴 곳으로 향했다.

 

 


* * *

 

 


“마츠카와 씨~ 오늘이 마지막이라면서요? 아쉽다.”

“하하, 그러게요. 어차피 잠깐 일할 생각이었고, 이제 고향에 내려가야 해서요.”

“고향 미야기랬죠? 멀지도 않은데 조금만 더 있다가지.”

 


아니에요. 좋아해 주시고, 잘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쉬운 인사를 끝으로 마츠카와는 방송실을 나왔다. 비록 함께 한 시간이 길지는 않았음에도, 정든 장소에서 발을 떼는 것은 마냥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로지 오이카와 하나만을 생각하고 올라와 우연히 하게 된 방송이지만, 저도 모르게 정이 들어버렸다. 정해져있는 기간만큼 최선을 다했으니, 아쉽기는 했어도 이제는 미야기에 내려가야 했다. 


오이카와의 국가대표 선발을 앞두고 무엇을 선물해야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오이카와는 예민해져 있었고 옆에서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던 마츠카와는 무력함을 느끼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전부터 옆에 있으면 오이카와에게 방해만 된다는 오이카와의 감독님의 말이 떠오르면서는, 종종 제 존재의 무가치함을 느끼곤 했다.


어렸을 때부터 제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했던 탓에, 화를 내는 방법도, 욕망을 분출하는 방법도 알지 못했다. 왜 저를 그렇게밖에 보지 못하느냐고 감독님에게 화를 내지도 못했고, 오이카와에게 저를 봐달라는 욕망을 분출하지도 못했다. 


혼자 속으로만 삭이고 있던 때, 오이카와의 옆에서 잠시 멀어지는 것이 그를 도와주는 일이라는 바보 같은 생각이 들어, 발 빠른 움직임으로 오이카와의 앞에서 사라졌었다. 오이카와를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었으니, 제가 힘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이카와에게는 저보다 국가대표가 더 중요할 거라고 생각했던 탓도 있었고.

 

처음에는 오이카와의 선발 소식에 기뻐했고, 그의 앞에 나타나야지 했던 생각은 곧 저를 기다리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감으로 되찾아왔다. 오이카와가 다른 사람을 보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지만, 당시 무가치함에 빠져있던 과거의 마츠카와에게는 불확실한 것을 믿는 것만큼 힘든 일은 없었다.

 


‘자신감 넘치던 맛층은 어디로 갔대?’

 


고민에 빠져있는 저를 보면 꼭 해주던 오이카와의 말에도 용기를 내지 못했던 것도 잠시, 오이카와가 TV에 자주 보이기 시작했다. 너 때문이야. 밑도 끝도 없이 도착한 이와이즈미의 문자에, 그제야 오이카와가 저를 위해서 방송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직도 자신을 생각한다는 사실에 기분은 좋았지만, 그에게 다가갈 수는 없었다. 이와이즈미의 문자가 저를 비난하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원망하고 있지는 않을까 괜히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없이 도망간 주제에 무슨. 


멀리서나마 오이카와의 활동에 응원만 하자 생각했다. 답답하다는 친구들의 말에도 꿋꿋하게 제 입장을 고수했지만, 비게 된 시간을 잠시 채워 달라는 아는 사람의 부탁에, 어쩔 수 없이 방송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렇게라도 오이카와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 만족하다 생각했다. 오이카와가 이 방송을 듣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이라도 그에게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먼저 도망간 만큼, 오이카와에게 짐이 되고 싶지는 않았기에 염치 없이 먼저 다가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오이카와는 결국 마지막 방송까지 찾아오지 않았지만, 마지막에는 적어도 간접적으로나마 제 마음을 전할 수 있었으니 그걸로 되었다. 미련 없이 떠나자고 방송국을 나가려던 참에 울리는 벨소리에, 마츠카와는 발걸음을 멈췄다. 도망간 후로 울리지 않았던, 오이카와에게만 저장해두었던 벨소리였다.

 


[또 도망가기만 해 봐. 딱 거기에 있어.]

 


바꾸지 못한 번호에도 오지 않는 연락에, 오이카와가 제 번호를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혼자 지레 겁먹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오이카와도 저를 지우지 않고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다. 마지막까지 놓지 못했던 미련을, 더 이상 잃어버릴 것도 없던 저에게 마지막 남아있던 너를, 나는 다시 한 번 붙잡아도 되는 걸까. 용기 내어 보내온 오이카와의 문자에 마츠카와는 핸드폰을 꽉 쥐었다.

 

[그곳에서 기다릴게.]

 

기약없는 헤어짐도, 너를 포기하는 일도, 다시는 없게끔 할 수 있도록. 단 하나 남아있던 것만은 잃고 싶지 않았기에, 용기 내어 도착한 오이카와의 문자에 미안한 마음을 담아 답해주곤 둘만이 기억하고 있는 장소로 향했다.

 

 

 

-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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