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무선이 없었던 때, 혹은 돌아온 이후의 다른 사람들 이야기.

강징 시점과 금릉 시점 위주.
원작 소설 기반 모든 미디어 설정이 섞여 있습니다.











선문세가의 종주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청담회를 제외하고 이 많은 인원들이 모일 일이 언제 또 따로 있을까 싶었지만, 이곳이 금린대라는 것과, 그들이 바로 며칠 전 이곳에서 누군가를 마주하고 겪었던 일은 여타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이 모든 것을 납득시키고 있었다. 


요 종주는 풍채가 좋고 목소리가 낮으며 말 한마디의 발음이 좋아 조금 크게 목소리를 내는 것만으로도 모든 이의 시선을 주목시키는 사람이었다. 이번에도 웅성임 속에서 나선 그가 한 번의 헛기침을 울리자 떠들어대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침묵 속에서 모인 이들 모두가 자신을 향한 것을 잠시간 가늠해본 그는 이윽고 가슴을 펼치고 팔을 벌리며 기세 좋게 말했다. 


“세가 자제들이 나흘 사이 몇 무리씩 사라져 백 명 남짓이라고 합니다!”


요 종주의 말은 그들이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이유이기도 했다. 모든 시선을 주목시키고 발언한 것이라 치기엔 어찌 보면 당연한 사유를 사사로이 말한 것일 뿐임에도 뒤이어 다른 목소리들이 더해졌다. 


“그전에 난장 강의 석수가 이틀 동안 모조리 부서졌다지요.”

“120개입니다! 자그마치 120개요! 십삼 년 전 세가가 재산을 붓고 힘을 모아 어렵게 눌러둔 석수입니다! 누가 그런 짓을 한답니까!”

“몰라서 묻소? 그런 짓을 할만한 자가 또 누가 있다고.”


잊어버릴 리 없을 기시감이었다. 그 무리 중 하나인 강만음은 낮게 실소를 머금으며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모인 사람들 중 대부분은 각자의 가문을 이끈 지 오래인 데다가 자제를 여럿 둔 수사들이었으므로 많은 이들이 강만음 보다 나이와 경험이 많은 자들이었다. 그 예전이었으면 이렇게 삐딱한 자세로 서있는 자신을 나무라며 한 소리 했을 인물들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 어느 누구도 운몽 강 씨의 종주를 보며 예의를 운운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때와 같았지만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면 운몽 강 씨, 연화오는 십 년이 넘는 동안 세력이 확장되고 그만큼 영향력도 만만하지 않기에 어려웠던 시절 홀로 분투한 젊은 종주에 대한 칭찬이 선망으로 남은 단단한 가문이었다.


“이릉노조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제 손으로 목숨을 앗아갔던 자요. 생전에 못다 한 악행이 있으니 이제와 되풀이되는 게 당연하겠지.”

“주시로 만들어 수하로 부리기 위해 목숨을 앗아갔다지 않소? 어서 빨리 손을 써야 합니다!”


확실히 노인들과 아이들을 데리고 가긴 했지. 주시도 있긴 했지. 그중에서도 말 잘 듣는 개 마냥 늘 옆에 끼고 다니던 게. 노인들이 뭘 했더라. 제대로 자라지도 않을 땅에 무와 감자를 심고 있었던가? 


“이릉노조가 난장강으로 향했소!”

“난장강을 토벌합시다!”


요 종주가 아닌 다른 목소리가 크게 외쳐졌다. 그간 듣지도 못하고 기억에도 없던 목소리였으나 마치 영웅이 개선하는 듯한 기세였다.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차리기 전에 또 다른 외침이 무리 속에서 튀어나왔다. 


“앞으로의 세가를 위해서도 이릉노조라는 불길한 씨를 말려야 합니다! 어린 수사들이 잡혀갔으니 빨리 움직여야 해요!” 

“십삼 년 전에도 이릉노조를 이승에서 몰아낼 수 있었소. 이 많은 가문들이 다시 모였으니 다시 한번 움직여야 할 때입니다!”


아니지. 죽였던 건 사실이지만 아무도 그 녀석을 죽이지 못했던 것 아닌가. 그 누가 이릉노조 위무선의 목을 손에 들었던가? 강만음의 입에 걸려있던 경련은 곧 찰나의 비웃음이 되었다. 

누가 위무선을 죽였는가? 


“강 종주, 결정을 내리시오. 우리는 움직일 준비가 되어있소.”


별안간 자신을 부르며 대답을 요구한 사람은 말릉 소 씨의 종주 소섭이었다. 요 종주와 소 종주를 중심으로 모여있던 시선이 이번엔 강만음에게로 향했다. 강만음은 여전히 팔짱을 끼고 인상을 굳힌 채였으나 그들은 강만음의 입술만을 바라볼 뿐 그의 삐딱한 자세를 보지 않고 있었다. 이 기시감은 그때와 같았다. 거부할 수 없는 이야기에 동의할 것을 뜻하는, 강요와 같은 것. 


“사안은 이미 결정된 것 아닙니까? 대의가 있으니 우리 운몽 강 씨가 입을 닫고 있을 수는 없겠지요.”


뼈를 빼어 칼처럼 휘두르듯 뱉은 말이었으나 날이 향한 자들은 아픔을 모르는 듯했다.








 


 


오래도록 발걸음들이 다지며 오간 흙길이 선명했다. 길가에 돋아난 짙푸른 들풀들 또한 햇빛 아래 뚜렷한 색의 경계를 드러내고 있다. 비 온 뒤의 다음날이기에 풀내음 마저 기분 좋은 그 날, 나귀에 젖은 장작들을 한 더미 싣고 홀로 걷던 나무꾼 아무개의 머리 위에 그늘이 졌다. 

산보를 즐기기에 더 없을 맑고 쾌청한 하늘 아래 갑자기 그 그림자들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사, 사람!’ 나무꾼이 올려다본 것은 구름이 아닌 긴 장포 자락들이 햇빛을 가린 바람에 생긴 그림자였다. 한 자리에 뛰어내려 모이기 시작한 이들은 하나같이 정갈하면서도 다양한 색채의 의복을 갖추고 있었고, 옷들의 옷감이며 바느질의 마무리는 까막눈이 보기에도 깔끔하고 고급스러웠다. 쉽게 말해 저잣거리를 아무렇게나 활보하고 다니지는 않을 신분임이 분명한데, 그렇게 다양하면서도 한결같은 값 진 차림새의 인물들이 대번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광경들은 충분히 놀랄 만도 했다. 제가 본 게 무엇인지 한참 만에야 파악한 나무꾼은 어이고! 하고 단말마 비명을 내지르다 제 풀에 발이 꼬여 흙길 위로 나동그라졌다. 덩달아 놀란 나귀가 등을 쳐들고 발길질을 해대며 울어대는 바람에 그 위에 실려있던 장작더미마저 길바닥에 나뒹구는 동안에도 검에서 뛰어내려 바닥을 내려 밟고 있는 인물들은 끝이 없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그 작은 소란에 눈길을 주는 법이 없었다.


길에 하나둘 씩 내려앉는 인파의 표정들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가만 보면 승전보를 위한 결의라도 하나씩 품은 것 마냥 모든 이들의 표정은 진중하면서도 말이 없었다. 이윽고 검에서 뛰어내리던 사람들 중 마지막 한 사람이 땅바닥에 내려앉았다. 건장하고 잘 생겼으며 그중에서도 꽤나 젊어 보이는 인물이었다. 자색의 의복을 갖춰 입은 그의 표정은 개중에서도 가장 험악해 보였다. 이마에 들어앉은 내 천川은 그의 평소 표정이 늘 그래 왔음을 보여주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엎어진 나무꾼의 코앞을 스쳐 지나가 곧 무리의 가장 앞에 자리 잡고 있었다. 스치는 목화가 흙먼지를 일으키는 동안에도 은은한 연꽃 냄새가 났다. 세가 소식이라곤 길거리에서 떠돌아다니는 잡 소문만 알고 있는 나무꾼이라 하더라도 자색 비단옷에 연꽃을 말한다면 절로 입에 오를 인물은 한 명밖에 없었다. 재채기를 하면서도 나무꾼은 중얼거렸다. 운몽 강 씨, 연화오의 강종주?


모인 인파들은 곧이어 저들끼리 몇 마디를 주고받은 뒤 서둘러 일제히 발걸음을 옮겼다. 신선 수련한다는 선문 세가의 사람들이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기에 흙먼지가 가라앉는 한참 동안 멍하니 엎어져 있던 나무꾼이 그제야 몸을 털고 일어났다. 가는 길이 어느 쪽인지 좋든싫든 아주 잘 알고 있던 나무꾼은 부러 그들의 뒷모습을 끝까지 쫓아 보지는 않았다. 

난장강으로 향하는 백명의 수사들이라니,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아니지, 백이 아니라 천이던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일일이 헤아릴 수 없었던 나무꾼은 그저 대충 많은 숫자를 어림짐작하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죄다 신선 수련들 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무슨……. 비라도 오는 줄 알았네!” 


애꿎게도 날씨는 아주 맑았다.






그때보다는 수가 적었을지언정 여전히 무리는 많았다. 그들 중 어느 누구는 그때도 보았던 것 같고, 또 누군가는 전혀 모르는 얼굴이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긴장하고 있고 또 다른 이들은 흥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눈빛이 이글거리는 사람, 의기양양하게 목을 빼고 가슴을 펴며 당당하게 웃고 있는 사람, 무리에 섞여 감출 수는 있어도 결코 속아내지 못하며 떨고 있는 사람. 어검에서 내린 후 향한 그들의 앞은 걷는 동안 이어져 오던 신록의 빛을 다 잊을만치 시커먼 장막이 펼쳐진 것만 같았다. 이런 일만 아니라면 각자가 스스로 찾을 일도 없을 곳이다. 그래, 이런 일만 아니라면. 속으로 중얼거린 강만음도 그들과 같이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장강은 이렇다 할 출입구를 표현하기엔 발 길이 닿는 사람들이 없어 하나같이 애매할 뿐이었지만, 13년 전 석수들로 찍어 누른 뒤엔 가장 먼저 보이는 석수가 곧 입구이며 출구 정도의 취급을 받았다. 그리고 13년 후의 오늘, 입구 취급을 받아야 했을 석수 하나는 처참이 부서져 있었다. 이것도 원기를 누르는 법보라면 법보였기에 손쉽게 무너뜨릴 만한 것이 아니었다. 부서진 채 기능을 상실하고 뒹구는 석수를 바라보는 수사들의 표정은 어검하여 이곳까지 올 때의 표정보다도 한층 굳어 있었다. 

이릉노조 위무선이 원귀에 둘러싸여 악행을 저질렀다고 일컬어지는 난장강이다. 120개의 석수가 모두 부서진 곳에 그가 있을 것이다. 발을 들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하기엔 아득할 일이었지만 대부분은 13년 전과 같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난장강을 빠져나올 때, 그들이 얻는 것도 13년 전과 같을 것이다. 

무엇을 얻는가? 

강만음만이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13년 전에 얻었던 것이 있었던가?


“참 좋은 날씨입니다. 해도 맑고, 날이 돕는군요. 모처럼 이런 날엔 날이 맑아야지요!” 


요 종주가 나서서 기운차게 말했다. 사기를 돋울 생각이었는지 몇몇 수사들의 얼굴이 조금 풀어지는 것을 보아 효과는 있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본 강만음이 코웃음을 튕기며 말했다. 


“요 종주의 여유로움을 본 받고 싶군요. 토끼 사냥이라도 가시는 것 같습니다.” 


삽시간에 떨떠름한 표정이 된 요 종주가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에 한 번 더 조소하던 강만음은 곧이어 지나치게 맑은 하늘을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사냥이었나. 몰아넣고 손을 뻗었으니 다를 바가 없었기도 했겠지.

비가 오는 게 나았으려나, 그리 생각을 하면서도 그 마저 13년 전과는 같을 필요가 없단 생각에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이릉노조와 대면하게 되면 강 종주의 도움이 많이 필요할 것 같소.”

“무슨 도움말입니까?”

“13년 전 이릉노조를 퇴치한 것도 강 종주 아니십니까? 일이 이렇게 된데다가 그때와 똑같은 난장강 아니오. 강 종주야 말로 이릉노조 위무선을 가장 잘 알고 있으실테니, 그가 무슨 술수라도 부릴 때에 대처할 묘수를 부탁드리고 싶소.”


얼굴을 찡그리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사냥 처럼 말하더니 이제는 아예 사람이 아닌 악귀로 말하는가. 그렇게 소문이 났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예상하지 않았던 바이기에 더 그랬다. 강만음은 방금 막 말을 걸었던 나이 든 수사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나이 든 수사는 강만음의 표정 대신 매몰차게 등을 돌린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게 되었다. 무너진 석수 조각 하나를 지나쳐 아무도 보지 못할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강만음이 말했다.


“그때와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그때처럼,”


그때처럼 하시지요. 홀로 두고, 칼을 뻗어서. 강만음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어 섰다.


홀로 두어서, 맞이했던 많은 칼 끝의 중심에서 그가 그때 무어라 말했더라. 그날의 일을 잊을 수가 없었음에도 그가 말했던 한 마디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너무 시끄러워서 듣지 못했던가. 강만음의 얼굴은 그제야 찌푸려졌다. 아무도 듣지 못한 말을, 무어라 했었나.


지체되었던 발을 다시 옮겨 딛는 순간 물컹한 것이 밟혔다. 시일이 지나 부패한 지 오래된 시체에서 떨어져 나간 팔 하나였다. 난장강은 여전히 시체를 버리는 곳이었고, 연고 없는 망자를 길바닥에 버려둘 수 없어 옮겨오는 시체 또한 여전했다. 입구를 서성이다 그 안까지 들어가는 것이 두려웠던 어느 누군가가 그나마 난장강 문턱에 던져두고 갔을 시체일지도 모른다. 목화를 신은 발아래로 느껴진 시체의 조각은 그때와 다름없었다. 오래된 시체와 새로운 시체 위로 걸었던 그날. 시체가 언덕을 이룬 빗속에서 위무선이 했던 마지막 말 한마디. 빗속에서 하늘을 향한 채, 그 비가 마치 제게 꽂히는 칼인 마냥 팔을 들어 허공을 끌어안은 그가. 환영하듯 다시 팔을 벌려 중얼거렸던 말은…….

별안간 어깨에 내리 앉은 차가움이 있었다. 그날의 비처럼 가라앉은 것이 양 어깨를 적셨다. 강만음은 그 냉기에 굳은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난장강의 어둑한 한복판을 바라보았다.


기억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듣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13년의 오랜 세월 동안 그저 기억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일 뿐이다. 그랬기에 강만음은 누구보다도 난장강을 돌아보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120개의 석수로 눌러버린다고 했을 때에도, 그가 되돌아와 악행을 저지를 지 지레 두려워 혼백을 찾는다고 했을 때에도, 모두 난장강이었다. 그래서 더욱더 발길 들일 일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었던가. 되돌아왔더니 애꿎게도 맑은 날씨가 그날의 비를 모두 지워 물줄기 안에 묻혀 있던 목소리를 억지로 들려주는 듯 했다. 어둑한 하늘 아래, 빗줄기로도 숨기지 못한 피눈물을 떨구며 파리하게 질려있던 입술을. 그렇게 눈을 감으며 말하던 것을.


다들 이리와.

좀 춥거든.


그의 마지막 말은 죽는 순간까지도 장난스럽고 여상스러웠다.












훌쩍이는 소리가 이따금씩 동굴 어딘가에서 울렸다. 코를 들이켜고 숨과 함께 삼키는 소리까지 여과 없이 들려오는 통에 금릉은 곤선삭으로 묶인 몸을 짜증스럽게 뒤틀었다. 오래도록 한 자세로 앉아있어 여기저기 결리고 쑤시는 중에도 며칠간 아무것도 채우지 못한 배가 움직일 때마다 애처로운 소리를 냈다. 이놈의 소리, 꼭 이럴 때 크게 나지! 저 녀석은 왜 자꾸 우는 거야. 굶어 죽는 게 아니라 울다가 말라서 죽겠네.


대부분의 소년들이 지친 채로 쥐 죽은 듯 침묵을 지켰으나, 다발로 묶여 동굴 여기저기에 널려있는 소년들 중 몇몇은 저마다 몸을 옴싹달싹하며 묶인 몸을 편하게 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영력의 운용을 몸과 함께 묶어버리는 곤선삭이었으니 애초에 풀어내는 건 포기했다. 푸는 것을 포기해버렸으니 결국은 우두커니 앉아있을 뿐인데, 혼자도 아니고 여럿이서 등과 엉덩이를 맞대어하는 상황이 마음에 들 리도 없었다. 소년들의 눈을 가리고 묶어서 던져버린 납치범은 아마도 소년들을 사람이 아니라 방금 낚은 굴비 정도의 취급을 했음이 분명했다. 납치범이 인리를 따질 일도 없었지만 그 사실이 불쾌함을 또다시 더해버리고야 만다.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지치는 와중에 고파오는 배와 더불어 지치지도 않고 짜증이 몰려왔다. 입만 열면 거친 말이 튀어나갈 것 같아서 - 그리고 역시 그렇게 화를 내는 것도 지쳤기에 - 입을 다물고 있던 금릉을 결국 폭발하게 만든 이는 하필이면 그 굴비 다발 같은 무리 속에서 같이 묶여버린 소년 때문이었다. 청담회가 있었던 금린대의 화원에서 모현우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금릉과 치고받았던 금천이었다. 금릉보다 덩치가 큰 그는 비좁게 엮인 곤선삭의 틈바구니에서 저 혼자 편하겠다고 더러 묶인 다른 또래들의 등을 어깨로 밀치고 팔을 밀어 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누가 먼저 입을 열어 다투는 것은 아니었지만 금릉 또한 금천의 팔뚝과 어깨가 닿을 때마다 고집스레 밀어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큰 소리가 나는 것은 아니었어도 그 사이에 끼인 다른 소년들이 느끼기엔 그저 말도 주먹도 없이 오가는 지겨운 공방전이었다. 밤낮없이 침묵으로 싸우는 중에 두 소년이 용케도 입을 다물고 있었던 건 기적이었다. 입을 열었으면 분명 곤선삭에 묶인 채로 동굴 여기저기를 뒹굴거리며 얻을 것도 없을 싸움이 났을 게 분명했다. 둘 사이에 꼭 끼어있는 다른 두엇의 소년들은 금천과 금릉의 시비에 치여 똑같이 피곤해지고 있었다. 아니지, 어쩌면 구르고 싸우다가 곤선삭이 풀릴지 어떻게 알아.


지친 중에 말도 안 될 소리가 나올 정도로, 피곤했다. 그래, 차라리 싸워라.

그리고 드디어 말싸움이 터졌다. 금천이 먼저 입을 열어 시비를 건 것이다. 엉뚱하게도 그 대상은 금릉이 아니었다.


“이릉노조, 그 악귀가 우리를 굶겨서 죽일 작정이야! 사람까지 써? 여기가 난장강인 것도 모자라서 시체 속에서 굶어 죽게 할 셈이냐고! 그 자는 역시 악귀야. 진작 죽였어야 했어! 빌어먹을 위 씨 그 작자, 근본도 없으니 그 따위로-”

“시끄러워.”

“뭐? 너 지금 나한테 닥치라고 했어?”

“배 고파서 귀까지 멀었냐? 시끄럽다고 했지 누가 닥치래? 조용히 하라고!”


금천과 금릉의 목소리는 둘의 누가 뭐라 할 수 없을 지경으로 왕왕대며 동굴을 울리고 있었다. 주변에서 듣는 소년들은 물론이고 둘 사이에 끼어서 묶여있는 다른 소년들은 더 괴로울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눈이 뒤집힌 금천은 이릉노조 위무선에게 쏟아냈던 화풀이를 금릉에게로 내뱉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예정된 순서였다. 


“그러고 보니 너, 위무선 그 작자를 검으로 찔렀다며? 그럴 거면 뭐하러 찔렀어? 아예 목을 쳤어야지! 배를 찔러도 두 번은 더 욱여넣고 피라도 몽땅 뽑아냈어야 했을 거 아냐!” 

“야, 금릉! 그 녀석 목에 머리라도 받아라. 시끄러워!” 


별안간 멀찍이서 꽥 소리를 지르며 신경질을 낸 사람은 남경의였다. 그 옆의 남사추도 미간을 찌푸린 채 이쪽을 보고 있었지만 금릉의 눈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금천이 다음으로 지껄인 말 때문이었다.


“시끄럽긴 뭐가 시끄러워? 내가 못할 말 했어? 악귀 죽이고 없애자는 일이 시끄러울 일이야? 이번엔 죽여도 혼백마저 찢어놔야 해. 그래야 이런 꼴을 안 당하지! 빌어먹을 위 씨, 애초에 그가 사람이야? 인간성이니 인정이니 손톱만큼이라도 남아있겠어?” 

“입 닥치라고 했잖아. 네가 입으로 떠든다고 해서 지금 이게 풀려 나?” 


큰 소리 내지 마, 주시들이 많아! 여긴 난장강이야, 제발 진정해! 그나마 점잖게 억누른 남사추의 목소리가 간간이 들어왔지만 금천과 금릉, 둘의 귀에 들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왜 입을 다물어? 내가 널 욕했어? 위무선 그 작자를 욕했잖아! 그가 가족이라도 되는 것처럼 네가 화낼 일이 뭔데?” 

“입 다물라고 했지!” 

“안 다물 거다. 너는 욕하고 난 하면 안 돼? 염방존이 널 챙겨준다고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너는 그냥…….” 

“이……!”


이 개만도 못한 자식아! 한 번도 입에 붙여본 적 없는 진정한 욕을 입에 올리며 금릉이 머리를 들이받았다.


금릉의 뒤통수에 턱이 받친 금천이 억 하고 혀를 깨물다가 눈을 부라리고 곧바로 발길질을 시작했다. 두 소년이 묶인 채로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하자 금천의 친구로 보이는 다른 소년들이 마찬가지로 거의 구르듯 무릎걸음을 해 금천에게로 붙으려 했다. 효율이라곤 별로 없을 그 무릎걸음은 자연스레 주변에 묶여있던 다른 소년들마저 함께 굴려버렸다. 가장 먼저 휘말려 제 의지와 상관없이 이리저리 동굴 바닥에 굴려진 사람은 남사추와 남경의였다. 입을 꾹 다물기 위해 노력했던 남사추와 달리 남경의의 입은 거침없이 열렸다. 


“어어? 이거 봐라? 야 이……!” 


남사추는 그 큰 목소리를 굳이 귀에 담아두지 않기 위해 애써 심호흡을 했다. 남경의의 입이 열리자마자 튀어나온 것은 금릉과 마찬가지로 개 어쩌고가 들어간 욕설이었다.


남경의의 욕이 세 마디 더 이어지고 곧이어 발길질까지 더해지려고 할 때 남사추도 참지 못했다.


“그만들 하라니까! 지금이 싸울 때야? 욕도 그만해, 우리 제발 진정하고 점잖게, 경의야……!”

“아 뭐, 왜! 야, 너 방금 뭐라 했냐? 어? 뭐라고 그랬냐고!” 


한쪽 구석에선 금릉이 금천의 턱을 다시 들이받으며 바락바락 외치고 있었다. 


“네가 뭘 알아!” 


방향 가늠도 못하고 치댄 몸싸움에 입 안쪽이 터지기라도 했을까, 외침 속에서 부딪히는 여린 살이 쓰라릴 법했지만 금릉은 아랑곳하지 않고 외쳤다. 금천 또한 계속해서 금릉을 욕했다. 금릉과 위무선을 욕하기 시작했다. 


“모를게 뭐가 있는데? 위무선 그자가 들어가 앉은 몸을 봐! 영혼도 껍데기도 재수 없다고! 하필이면 왜 모현우였겠어? 구역질 나! 마침 제 그릇 찾는다고 딱 알맞았던 게 모현우였는가 보지!”

“닥쳐!”


씩씩 거리며 외치는 중에 계속해서 들이받은 정수리가 아팠다. 금릉은 계속해서 악을 썼다. 


“네가 뭘 알아? 뭘 아냐고!”


그가 널 때려서 기절시키기라도 했어? 그가 네게 일부러 망령을 보여주기라도 했어? 그가 네게 먹지도 못할 매운 죽이라도 먹였어? 손가락 하나로 널 엎어서 던지기라도 했어?


그가 짜증나게 머리를 쓰다듬기라도 했어?

그가 쓸데없이 도와주기라도 했어?

그가 네게 웃기라도 했어? 


금천의 턱은 지나치게 딱딱했다. 코 끝이 찡해지는 건 아마도 그 턱을 계속해서 들이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말들을 삼키며 금릉은 그저 한마디만을 외쳤다.


“뭘 알아! 네가 뭘 아느냐고!”






씩씩거리며 이어지던 싸움이 그칠 줄을 몰랐다. 방금까지 배고픔에 지쳐서 시들해져 있던 움직임도, 훌쩍거림도 없이 싸우는 소리와 싸움을 말리는 소리가 동굴 안에 가득 퍼졌다. 바깥에 주시들이 소리를 듣고 몰려올지도 모른다며 끊임없이 주의를 주던 남사추 조차 여기저기서 치고받는 움직임을 제 어깨로 밀치고 무릎으로 반격하기까지 했다. 죽을 때까지 내몰렸다고 생각했던 두려움이 이제는 저걸 한 대 치고 죽고 말지, 하는 오기로 바뀌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소년들이 그랬을 것이다. 소란이 컸기에 묶인 채로 서로를 잘근잘근 패대기 치고 있던 소년들은 동굴 안으로 들어오는 세 명의 발소리를 듣지 못했다. 


“나 참, 기운들도 넘치네. 다들 조용히! 주목!”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명랑한 목소리가 그 소란 속에서도 맑게 울렸다. “네 머리는 가규석에 돌진해도 안 부서질 돌 대가리일 거다!” 하고 소리 지르던 남경의 와 “경의야!” 하고 그나마 한끝 남은 고소 남 씨의 아정함으로 그를 말리는 남사추의 목소리와 “으아아악!” 하고 방금 금릉에게 물린 팔뚝을 빼내려고 애쓰던 금천의 외침이 모두 한 순간에 멈추었다. 

소년들의 눈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하다가 곧바로 그 뒤에 서있던 하얗고 단정한 사내에게로 꽂혔다. 


“함광군!” 

“함광구우우우운!”


반갑게 외치는 남사추와 거의 울부짖듯이 길게 목소리를 빼는 남경의의 뒤로, 금릉은 금천의 팔을 물고 있던 턱을 벌린 채 두 소년과는 달리 그 앞의 왜소한 청년을 보았다. 


“위무선…….” 


중얼거린 목소리를 들었을까, 빙글빙글 웃으며 소년들을 둘러보던 위무선의 시선이 금릉에게로 향했다. 금릉은 그와 눈이 마주치기 직전 얼른 고개를 돌려 동굴 한쪽 벽만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라도 할까 싶어 귀마저도 막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묶여있는 몸이 여의치 못했다. 

다행히도 위무선이 제게 할 말은 아무것도 없을 터였다. 당연한 사실에 갑자기 속이 아팠다. 배라도 다시 고파 오는 건가? 


“온녕.” 


귀장군을 부르며 검집에서 검이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소년들이 숨을 삼키고 몸을 굳혔다. 조금 끄는 듯한 발소리가 점점이 가까워 오는 동안 몇몇이 경악하는 소리도 들렸다. 


“귀귀귀귀, 귀장군이다! 

“이이이이, 이릉노조가, 귀귀귀귀장군을 데리고 왔어! 우릴 다 죽일 거라고!”


두려움에 질려 말 더듬는 것도 모른 채 빽 지르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금릉은 그들과 달리 다가오는 흉시의 발걸음 소리가 무섭지 않았다. 증오해야 할 게 분명한 발걸음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치 갑자기 안심이 되었다. 그것조차 인정하기 싫은 마음에 눈을 질끈 감았다. 삭, 하고 가볍게 무언가를 베어내는 소리와 함께 곤선삭이 잘리고 몸이 편안해졌다. 


“위 선배, 위 선배……! 저희를 구하려고 와 주신 거죠? 위 선배가, 저희를 잡아 가둔 게 아니지요?” 


몸이 풀리자마자 벌떡 일어나서는 누가 뭐라고 할 것 없이 위무선의 앞에 달려가서 묻는 남사추의 목소리엔 기쁨이 가득 묻어있었다. 나 말이야? 깜짝 놀라 반문하는 위무선의 목소리 끝이 살짝 떨리며 튀었다. 별안간 선물을 받았을 때처럼, 저런 목소리는 또 처음 듣는 것 같아서 곧바로 고개를 돌리려다가도 꾹 참았다. 


“……너희들 곤선삭이 얼마나 비싼 줄 알아? 내가 그럴 돈이 어디 있어?” 

“알지요, 선배가 얼마나 가난한 지는 제가 잘 알아요!” 

“그으……래, 사추. 똑똑하고 착하기도 하지.” 


위무선이 떨떠름하게 칭찬하듯 말하는 것과 동시에 옆에서 참지 않고 낄낄거리는 남경의의 웃음이 들렸다. 아직까지도 긴장감이 섧게 굳은 얼음마냥 덕지덕지 채워진 동굴안에서 위무선을 사이에 둔 두 소년의 분위기만 달랐다. 남사추와 남경의의 소맷자락 사이, 금릉의 눈은 그 좁은 틈 사이로 위무선의 옷자락만이 보였을 뿐이다. 이리저리 방정맞게 흔들리는 남경의의 소매가 스칠 때마다 옷으로 감싸인 그의 허리가 보였다. 번져있는 핏물도 없이 멀끔한 허리춤만을 바라보던 금릉이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콧대 높은 줄 모를 난릉 금 씨 집안이 신분의 귀천을 지루하리 만치 따진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것이 수많은 염문을 뿌린 당 대 종주가 벌여두고도 수습하지 않은 많은 형제들 사이에서도 떠도는 일임을 알았기에, 타고난 핏줄이 있다 한들 허를 실로 만들어 눈물지게 하는 일들이 많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기에, 기억도 못할 부모를 잃은 가장 어린 핏줄이 안타깝고 가여워서였을 동정심이었을지도 몰랐다. 제 눈에 비치지도 않는 허공을 깜빡거리기만 할 포대기 안의 작은 아기를 돌보게 된 유모는 아직 이르다 싶을 나이에 지병으로 몸을 운신하기 힘들어져 금린대를 떠나기 직전까지 어린 금릉을 매우 극진히 살폈다. 

금릉이 이릉노조라는 호號를 알게 되고 물었을 때, 그녀가 말했던 것이 있었다. 


귀신을 부리고 시체를 움직이며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악귀. 


그가 부모님을 돌아가시게 했느냐 물었을 때, 옛이야기를 들려주듯 소곤거리는 유모의 눈썹은 아래로 쳐진 채 무척이나 서글퍼 보였다. 


귀신을 부리고 시체를 움직이는 마귀입니다. 소종주님, 그 자를 보면 눈도 마주치지 말고, 뒤도 보지 말고, 도망치셔야 합니다. 이릉노조는 어린아이를 잡아가요. 소종주님은 아직 어리시니, 결코 마주치셔서는 안됩니다. 


금릉은 그때도 세화를 쥐고 있었다. 어린아이에게 너무나도 크고 무거운 검은 마치 제 몸집과 비슷한 대나무 인형이라도 된 것 마냥 몸에 실린 모든 무게가 버거웠다. 한 손에 쥘 수 없었기에 온 몸으로 끌어안은 세화를 내보이며 금릉은 아버지의 검이 있으니 아무것도 무섭지 않다고 했다. 그날의 유모는 말없이 웃어 보일 뿐이었다. 잘 시간이 되었으니 이제 주무셔야 한다는 말 뿐이었다.


아직은 제가 외숙부의 다리에 매달렸을 적, 그리고 그런 그를 들어 안아 팔뚝 위에 얹어주던 강만음의 눈높이에 똑바로 눈을 맞출 수 있었을 때, 금릉은 자신의 유모에게 물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강만음에게 물었다. 강만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연꽃이 가득 메워진 연화오의 호수만을 바라보았다. 묻는 말에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그는 꼭 입 안에 오래 씹은 가죽을 뱉어내듯 중얼거렸었다. 위무선, 하고. 악귀에게도 사람의 이름이 있었다.






이릉노조가 네 부모님을 죽였어! 너도 언젠간 데려갈 걸? 


종종 놀림을 받는 경우가 있었다. 미운 사람들도 참 많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였다. 집안의 비슷한 또래들이 종종 예법도 모르고 떠드는 말들 중엔 고약한 것들이 많았다. 금릉이 악을 쓰고 주먹질을 하는 건 그때부터 든 버릇이었다. 외치는 말도 꼬박꼬박 잊지 않았다. 


이릉노조가 뭔데? 아버지의 검으로 찌를 거야! 


품에 가득 들어왔던 세화의 무게가 점점 손에 꼭 맞아 들기 시작하던 때였다. 아버지가 남겨주신 검이 있다. 무서울 게 없었다. 


소란을 들었던 숙부가 검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검을 쥐는 법은 숙부인 금광요가 알려줬다. 그것 만큼 비슷한 많은 것들을 강만음이 알려주었기에 금릉의 검술 스승은 둘이었다. 

활시위를 당기는 법, 화살을 거는 법은 모두 외숙부가 알려줬다. 운몽 강 씨의 활쏘기였다. 외숙부의 활쏘기를 따라갈 수 없어 툴툴거리면서도 그의 활쏘기가 제일이라며 어린아이다운 솔직한 말을 뱉은 적이 있다. 기분이 좋아져야 할 말에 강만음의 표정이 구겨졌다. 방금까지 과녁으로 썼던 연들이 아직 하늘에 올라있어, 금릉은 그저 그가 태양 아래에 걸린 연 하나를 바라봤기에 찡그렸다고 생각했다. 


야렵을 나가기 시작했다. 외숙부 강만음은 야렵을 나갈 때마다 늘 혼을 냈다. 주시 하나를 붙잡았을 때 제대로 베어내지 못했다고 혼이 났고, 원귀 하나를 붙잡았을 땐 도망가기 직전까지 내몰렸다고 혼났다. 금릉은 검을 빼내는 것보단 활을 쏘는 게 더 익숙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어느 날의 숙부는 그가 세화를 빼고 수련하는 것을 보곤 실력이 출중하다며 칭찬했다. 주시고 원귀고, 다 벨 수 있어. 검을 빼는 것보단 활시위를 당기는 것이 익숙한 바람에, 손에 익은 것을 따르느라 매번 놓치는 기회였음에도 금릉은 늘 다짐했다. 귀신이든 악귀든 언제든지 벨 수 있어.






검을 들고 칭찬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검을 들어 무언가를 찌른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칭찬을 하는 사람이 여럿이었다. 얼굴도 알 수 없는 이들 또한 있었다.

어린 날 숱하게 외쳤던 것처럼 바라던 바를 이루고 칭찬들을 받았다. 이릉노조를 찌른 검, 악귀를 찌른 검. 칭찬 속에 다시 주워 든 검이 너무나 무거웠다.


많은 이들이 악귀라고 했던 것은 사람처럼 피를 토한다. 피를 흘리고 그 피를 토하는 사람이었다. 차가울 리가 없었다. 따뜻하고 아플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손안에 다시 들어 보인 세화는 어린 날 한 품 안에 가득 안고 있었을 때와 같이 발치에 끌리도록 무거웠다. 따뜻함엔 무게가 있다. 그 따뜻함이 검에 묻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가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무척이나 차갑고 이 또한 무거웠지만, 모두 씻어낼 수 있다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너, 또 찌르려고!” 

“경의야……!” 


새하얀 벽이 눈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뒤돌아서 소리치는 남경의가 첫 번째였고 그런 그의 팔을 붙잡아 말리는 남사추가 두 번째였다. 그러나 옷자락을 펄럭이며 움직이는 두 벽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금릉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새하얀 목화와 마찬가지로 하얀 옷자락, 바닥에 닿는 것마저 올곧게 고운 선을 그리고 있는 고소 남 씨의 의복이 다른 것보다도 더 차게 느껴진다. 더러워질 일 없이 깨끗한 그 흰 빛이 붉게 물들었던 지난 기억 탓에 힘주어 꽉 쥔 두 손마저 차게 식었다. 저 옷을 붉게 물들일 수밖에 없었던 사유도 결국 오롯이 자신에게 있었다. 


남망기 또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제 팔로 허리를 감아 뒤로 숨긴 사람을 해로운 것에게서 떼어 놓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그 뜻을 부정하기엔 기정사실인 것 같아 금릉은 결국 한 사람을 겹겹이 감추어둔 하얀 벽들을 마주하고 움직이지 못했다. “난, 나는…….” 무어라 할 말도 못 찾았으면서,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어 열어 본 입술 사이의 발음이 형편없었다. 들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언제나 들려주고 싶었던 이들은 이렇게나 멀었다. 체념하듯 넘겨왔던 기억이 도리어 겨우 열어 본 입술마저 닫게 했다. 


“너네들 내 앞에 사람 담벼락이라도 만들 생각이야?” 


하얀 손이 쑥 뻗어 나와 남망기의 소매자락을 붙잡았다. 


“소용없어, 담 잘 넘는 게 내 특기거든?”


어깨너머로 고개만을 쏙 빼던 위무선과 눈이 마주친 남망기가 못 말린다는 듯이 그에게 한숨 지어 보인다. 남망기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가지런한 눈썹을 살짝 꿈질 거리는 정도의 표시만 보이곤 앞으로 나서는 위무선에게 길을 터주었다. 위무선은 곧이어 남사추와 남경의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뒤로 당기듯이 장난을 걸었다. 악, 뭐예요! 남경의가 신경질을 냈지만 곧 맑게 웃는 웃음이 대답을 대신했다. 


“됐어, 됐어. 진정되었으면 이제 얼른 나가봐.” 


남사추와 남경의의 어깨를 다독이며 등을 떠미는 손짓까지도, 그때까지 금릉이 볼 수 있었던 건 그저 평소보다 낮은 시야 아래로 어른거리는 그의 손짓과 검은 옷의 흔들림 뿐이었다. 그리고 살짝 돌아서는 발까지, 코앞까지 다가왔으나 다시 멀어질 발걸음을 마주하고 금릉은 결국 숙인 고개 아래에서 눈을 감았다. 닿지도 않고, 닿을 수도 없다면 멀어지는 것이라도 보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익숙하니까, 보다 덜 아쉬운 방법을 찾는 것 정도로는 익숙한 일이었다. 


“뭐 해?” 


그러나 떠나지 않는 목소리가 있다. 금릉은 고개를 숙였던 것 그대로 눈만을 번쩍 뜬 채 여전히 아래로 향한 시선을 조금 들어 보였다. 까만 옷자락이 그 끝에 머물러있다. 발걸음은 더 멀리할 것도 없이 연신 가만있지를 못하며 딱 반보 앞과 반보 뒤를 몇 번이나 갈팡질팡하다가 잠시 얌전해졌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윽고 한참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대화 없이 냉랭하고 어둑한 동굴 바닥만을 사이에 둔 침묵 속에서 결국 목화의 앞 코가 슬며시 뒤로 물러났다. 저도 모르게 그 발 그림자를 따라 움직일 뻔한 것을 동굴 바닥에 뿌리라도 내린 것처럼 붙잡힌 발길이 도와주지 않았다. 꽉 쥔 두 손은 다시 펼쳐 멀어지는 것을 붙잡지도 못한다. 미련한 일이었다. 


이렇게 물러나면, 그가 등을 돌리고 멀어진다면, 그 어느 많은 날의 연꽃 호수 위에서와 같이, 계절에도 아랑곳 않고 스쳐 지났던 그 바람만이 불게 될까.

며칠간 갇혔던 동굴 안은 무척이나 습하고 서늘했다. 익숙해지기엔 스산한 이 냉기가 조금이나마 추위를 가시게 해 주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차가워진 손등과는 달리 땀이 가득 담긴 주먹을 도로 펴지도 못하고 옴짝달싹 할 때였다. 


“……괜찮아.” 


겨우 금릉에게나 닿을까 말까 싶은 작은 목소리였다. 아주 작지만 분명하게 들려온, 지극히 짧은 한마디. 그 목소리가 방금 누구에게 향한 것인가 싶어 급히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이의 살랑대는 붉은 머리끈만이 보일 뿐이었다.












마귀가 바닥에서 잠자는 곳, 이라고 말하며 피리 끝으로 제 어깨를 톡톡 두들기던 모습이 기가 차서 말도 못 하던 때, 궂은 미소와 함께 말했던 그 동굴의 이름은 복마동이었다. 기실 그렇게 붙인 이름에는 바로 눈앞에 선 채 두 귀로 들었던 사람에게도 어이없을 만치의 힘이 담겨버린 탓에, 어지간한 자들은 지레 겁을 먹고 접근하지 않았던 곳이었다.


하늘이 먹구름으로 뒤덮여 태양이 보이지 않던 날. 숲도, 바위도, 질퍽하게 젖어든 흙도 모두 검게 물들었던 때, 그때 그렇게 몰려갔던 많은 인파들도 결국 마귀가 잠들었다던 복마동엔 발을 들이지 않았다. 웃으면서 농담이라도 따먹듯이 가볍게 말한 이가 이러한 것까지 생각하며 지어두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저 한 사람이 몸을 뉘이며 잠들었을 뿐인 초라한 침소, 그곳이 마침내 외부인의 흙발로 뒤덮였던 적은 그 공간의 주인이 이 세상의 모든 미련도 없을 것처럼 산산이 흩어진 뒤였을 것이다. 주인이 없는 자리에 그 성격대로 늘어서 있던, 주인이 없어진 물건도 그렇게 흩어졌다. 세상 사람들이 그에게 바란 것은 죽음 말고도 사소한 것이 많았다. 욕심을 조금 내었다 한들 대업에 가려져 부끄러움 정도는 미약하게 숨길 수 있었을 것이다.


온갖 원귀라도 다 채워놨을까 발발 떨어대며 결국 하던 일이 무엇이었나. 훗날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 무렵 이릉 난장강의 곳곳에 숨어있던 온씨 잔당들을 모두 참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체더미들 속에서도 기어코는 어찌 다 찾아냈는지, 혹자는 찾아둘 것도 없이 이미 죽어 없어진 이릉노조를 추종하느라 떠나지도 않았다고 했던가. 남김없이 속아냈다는 말이, 꼭 있어야 할 일이 이루어졌다는 양 거리낌도 없이 쉽게 퍼졌다. 어려울 일도 없이 그 해 난장강을 들어섰을 때 맴돌았던 허울뿐인 명예와 긴장감도 없었다. 그저 유희처럼 흘러온 소문 속에서 그 많았을 시체들에 대한 행방은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 위에서 부리던 이와 같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처럼, 강만음도 그 일에 관하여는 묻지 않았다. 


그런 줄 알았더랬다. 가는 길 역겨우리만치 더러울 것임이 분명한데, 구천을 떠돌든 연옥을 맴돌든 그렇게 따라간 이들이 있었을까. 한 순간 담았던 염려를 욕지기로 바꾸며 또다시 증오로 토했던 날들 중에도, 그는 정녕 가는 길 마저 혼자였는지.

평생 함께 할 것 마냥 그토록 사람을 홀리길 잘하는 자였기에, 어쩌면 그 거짓말에 속아 마귀라 불리는 혼백을 따라간 자들도 있었겠다, 하고.


그러나 그는 뭐든 버려두기도 잘 버리는 사람이었다. 책임질 일도 없이, 내키는 대로, 자기가 한 말도 잊은 채 모두 없었던 것처럼 버리는 자였다. 끝내는 그렇게 가버린 모양새조차 그러하지 않았나. 한때는 꽃에 비유되던 것이, 그 향은 제祭의 냄새보다도 못하게 되었다.

그 사실이 지난 세월 강만음이 가진 불씨를 꺼뜨리지 않았다. 그저 이제는 존재하지 못할 그리움의 그림자인 줄도 모르고, 증오로 남은 불씨들이 모든 의구심과 부정마저 태워버렸다. 그러는 것이 당연했지, 하고, 이따금 기억의 미련을 몰아세우며 부정하고 다그쳤다. 


마귀가 누워서 잠자는 곳. 그곳에 정말로 정情도 없고 원願도 없었는지. 그저 돌아오는 밤마다 홀로 몸을 뉘이며 편히 쉬고 싶었을 소망을 담아, 그가 짧은 평생 그래 왔던 것처럼 그저 장난처럼 던져둔 이름 아니었나, 하고. 마귀가 누워서 잠을 자는 곳, 혹여 그 웃지도 못할 이름에 누군가 찾아오지는 않을까 하는 장난질과도 같이, 그는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날도 가장 먼저 네 앞에 가까이 있었던 이가 나였음을. 의미를 남겨둘 필요가 없던 사실을 떠올리며 자전을 잡은 손끝을 움켜쥐었다. 곧이어 위무선의 등 뒤로 어린 수사들이 몰려나왔다. 제 뒤를 지나쳐 남김없이 마귀의 굴을 도망치는 이들에게 조금씩 치이는 중에도 그 표정이 어쩐지 멍해 보이기도 했다. 


천여 명의 사람들이 그 앞에 모여있다. 위무선은 그때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가 나서기도 전에 마귀의 굴에서 몸을 드러냈다. 그날과는 다른 것들이 참 많았다. 검은 흙 위로 양껏 비추는 태양, 맑은 하늘, 맺힌 비도 없이 드러난 하얀 얼굴이 그날과 다르다. 

그날의 네 표정도 그랬을까. 우르르 일어난 작은 소란이 바람을 일으켰다. 위무선의 머리칼이 그 바람에 흔들렸다. 도망쳐 나오는 어린 소년들을 붙들어 잡지도 않고, 위무선은 그저 제 눈앞에 선 수많은 옛 기억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말하려던 입술이 곧 굳게 닫혔다. 밀려온 바람이 어깨를 스쳤다. 새하얀 얼굴은 언뜻 보면 그저 파랗게 질려있는 것 같기도 하다. 영기라곤 갖추지도 못했다는 그 낯선 몸이 그저 추운 것일 수도 있었다. 


강만음이 한 걸음 앞을 옮기려 할 때, 시커멓게 입을 벌린 어두운 동굴 속에서 새하얀 인영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등 뒤로 불어 든 바람을 막아주기라도 하듯, 위무선의 뒤편에 서있던 남망기가 곧 그의 어깨 옆에 나란히 섰다. 어디든 늘 버리라며 떠나버렸던 사람의 옆에, 언제고 있어 줄 것처럼 표정 없이 자리한 그는 곧 눈앞의 사람들에게서 고개를 돌려 위무선만을 바라보았다. 닫혔던 입을 달싹이던 위무선이 남망기를 올려다본다. 굳어있던 입매도, 표정도 달라진 건 없었지만 잠시간 위무선의 눈에 물빛이 스쳤다.


“망기야.”


나직이 조카를 부르는 남계인의 목소리에 도리어 놀라서 돌아본 건 위무선이었다. 어딘지 덤덤했던 눈 또한 한순간 흔들린다. 그러나 남망기는 자신을 부르는 숙부의 목소리에도 그 옆에 자리한 발걸음이 결코 움직일 리 없다는 듯 흔들림 없이 위무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잠…….”


찰나의 불안과 염려가 담긴 작은 목소리만이 들리는 것처럼, 남망기는 위무선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나는 여기에 있다고, 대답은 없었으나 끄덕이는 고갯짓은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강만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생전에도 온갖 욕이 따라오던 사람이었다. 이름이 불리워 지면 자연스럽게 붙던가, 아니면 욕 뒤에 이름이 붙는다던가, 순서를 따질 것도 없이 그랬다. 날씨가 궂으면 이릉의 원기 탓, 한 겨울 길바닥에서 노인이 쓰러지면 이릉노조 탓, 어린아이가 간 밤에 열이 끓는다고 해도 이릉노조 탓, 잘 가던 말이 갑자기 날 뛰며어도 이릉노조 위무선 탓……. 없던 원망도 그 이름만 들으면 꿈자리에 나타나서 알려주기라도 했었는지, 하룻밤이 지나기 전에 새로이 떠도는 소문은 다음 날 아침 욕이 되고 그날 밤에 다시 악명이 되었다. 갈가리 찢긴 육체를 두고도 그 마저 걸맞은 최후였다고 흉을 보며 말하기까지, 그렇게 만들어진 원망들은 그가 죽고 난 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결코 지워지지 않았다. 


모여있는 이들이 외치는 것은 모두 그 세월 켜켜이 쌓인 말들의 흔적일 뿐이다. 형체 없는 말들의 덩어리들이 십 수년간 두들긴 몸뚱이였다. 말과 칼이 향한 한 점의 자리에 선 위무선은 제 앞에 되돌아온 흉 진 과거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들의 공백, 멈추었던 칼 시위의 세월 속에서 그는 조금 무뎌진 듯도 했다. 혹은, 여전히 시선을 거두고 그때와 같이 하늘을 향할까 싶던 팔목 위에 슬며시 손을 내밀어 붙잡아주고 있는 누군가 덕에 버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사실이 강만음의 속을 끓게 했다.


많은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놓게 한 주제에, 그 오랜 세월을 지나 그를 붙잡고 있는 이가 남망기라는 것이. 혹은 제가 안도하고도 영문을 모르는 양 아직도 불어오는 칼들의 바람들을 쳐내지도 않는 그 미련한 모습이, 마주 보는 눈빛 하나에 볕이 든 꽃처럼 고개를 드는 것이. 고작 말없이 끄덕이는 남자의 고갯짓에 안도하는 낯선 모습이 기가 찬 탓이었다. 


감히 네가, 연화오를 불타게 하고 부모님의 육신도 찾지 못한 채, 누이의 행복과 목숨마저 태우고 어린 핏줄만 남겨둔 네가. 


운몽 강 씨의 대사형이었던, 네가.


한 사람의 호기로 시작되었던 모든 한과 원망 속엔 바람에 밀려온 구름 자락처럼 그가 있다. 이름에 빛을 품었다한들 강만음의 눈엔 그 또한 증오와 원망에 빚을 진 그을음이다. 얼룩과 그림자였다. 감히 네가, 너희들이! 턱이 뻐근했다. 다문 잇새로 싸한 통증이 일었다. 저도 모르게 힘주어 깨문 어금니가 갈린 탓이라, 강만음은 곧바로 고개를 털었다. 익숙한 통증이었다. 오래도록 멈춘 채 늦봄에서부터 시작된, 떠나갔던 이가 남긴 모든 말들의 칼을 삼켜왔던 아픔과 같았다. 그날의 계절은 늦은 봄에 머물러 여름을 몰랐다. 빛나야 했을 신록의 한 복판은 언제나 불과 재가 뒤섞인 늦봄의 바람만이 불었다. 강만음은 눈이 아릿하도록 그 바람을 맞이했다. 아주 오래도록, 어쩌면 그 바람이 실렸을지도 모를 지난 향내를 쫓아보듯, 나비와 벌이 되어 그 곁에 있던 것이 당연하던 때를 쫓았다. 부동의 청년을 두고 애만 태우는 계절의 손짓을 내버려 둔 채, 그저 피고 지는 연꽃으로 세월을 가늠했다. 추억은 깨지 못할 숙취로 남아 어른거리는 아지랑이처럼 망막에 맺혔다. 늦은 밤, 소년과 소년이 장난을 치며 혼이 났던 그 자리 그곳에서, 강만음은 비를 맞으며 시체의 길을 걸었다. 네가 간 길이 그러했을 뿐이라고, 되뇌면서도 강만음에게 남겨진 것 또한 같았다. 아무것도 없이 시체처럼 쌓여간 시간들. 남겨진 것이 없는 지난봄.


남겨질 것이 없었다면 원망 또한 마지막 모습처럼 갈갈이 찢어졌어야지!

더 이상 떠오를 일이 없도록, 몇 번이고 떠올리다 기어코는 무뎌진 어느 세월에 혹여 이것을, 그리움이라 말하지 않게.

그리하면 그저 봄을 봄인 줄로만, 지나간 시간인 줄로만, 남은 것에 미련 없이 지났을 것을. 꺾일 수도 있는 꽃이었다는 것도 잊을 수 있었을 텐데.


원망만이 가득한 시간에 채워지는 것이 있을까. 


비와 바람과 불꽃만이 휘몰아치던 강만음의 눈에 활짝 핀 모란이 스쳤다.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았던가? 


“금릉!” 


강만음의 외침에 금릉이 고개를 들었다.

많은 인파와 위무선의 사이, 강만음과 위무선과 남망기가 움직이지 못한 자리, 아직 그 누구도 넘어가지 못한 세월의 공백 안에서 한 소년이 굳은 듯이 서 있었다.






소란 속에도 정적은 분명 있었다. 강만음이 부르는 소리, 돌아보는 모든 고갯짓들과 시선 속에 고요한 시간이 흘렀다. 


“어서 이리로 오너라.” 


금릉이 움직이지 못하자, 드물게 부드러웠던 강만음의 목소리는 익숙한 다그침이 되었다. 


“다리라도 부러지고 싶은 게냐!” 


말 뿐인 협박이 안도가 되어 그제야 금릉의 발이 움직였다. 시야 옆으로 위무선의 얼굴이 스쳤다. 이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위해 온 것인지 분명 빤히 알고 있음에도, 잠시 마주친 시선은 금릉을 바라보는 채로 아주 잠시간 한숨 쉬었음을 알았다. 이제 정말로 괜찮다는 듯이, 안심이 된다는 듯이. 그 뜻 모를 염려를 고스란히 받아들이기엔 제 옆구리가 찔린 것 마냥 쿡쿡 아려왔다. 이제부터 있을 일에는 가슴이 답답했다. 겪지 않았음에도 어린 시절부터 오래도록 들어온 이야기의 장이 이어져 올 것이 뻔했다. 선배들의 이야기, 험했던 시절의 활약들을 들으며 부풀렸던 동경을 담아 제 자신도 그것과 비슷한 것을 쫓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었다. 흉악한 원귀, 사람을 해치는 흉시, 흉흉한 괴담이 돌고 있다는 민가들……. 그러한 것들을 쫓았던 이유 또한 단 하나였다. 언젠가는 마주하게 될 위업 같은 것, 나 또한 반드시 대업으로 만들어 제 숙부와 외숙부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 이야기에 함께 이름을 올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 시작이 원치 않는 이야기의 서두가 될까 두려웠다. 


외숙부의 등 뒤에 선 채 위무선을 바라본 금릉은 또다시 뒤돌아 서며 들었던 그의 작은 중얼거림을 떠올렸다. 괜찮다고, 말했었다. 뭐가 괜찮길래. 내지른 칼 끝에 피를 떨구고, 결국 그 피를 쫓아 몰려온 사람들인데.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괜찮을 리 없었다. 그러다 결국은 알아차리고 말았다. 괜찮다는 말 한마디는 결국 스스로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애정과 염려를 담아 어루만지는, 걱정과 위로였다. 


“내 뒤에 서거라, 금릉. 앞으로 나서기라도 했다간 정말로 다리를 분질러 버릴 테니.” 


강만음의 목소리가 나직이 떨어졌다. 딱딱한 목소리에도 염려와 안도가 묻어있었다.






모든 이들이 한 자리에 멈추어 선 채 누구라도 먼저 나서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듯 했다. 어쩌면 대부분이 자신들의 행동거지 각각의 이유를 그때와 같이 한 사람에게로 쏟아붓고 싶어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이곳까지 오는 일에도 다들 지체 없이 어떤 반론의 여부를 떠올리지도 않고 몰려오지 않았던가. 천하를 뒤흔들고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이릉노조인데, 그들이 며칠 전 보았던 것은 고작 칼에 맞아 정신을 잃은 채 도망가는 유약한 모습뿐이었다. 누구라도 손을 뻗으면 목을 쥘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기에 자의든 타의든 몰려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막상 이렇게 대면하고도 수세의 유리함까지 잠시 물리며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정작 술수를 부리거나 움직일 생각이 없는 이릉노조 위무선의 옆에 고요히 선 채 미동 없는 자세로 지키고 있는 사람때문이었다. 

남망기. 강만음의 시선이 뚫어져라 그에게 닿았지만 위무선의 옆을 지키고 선 그는 결코 이쪽으로 돌아설 생각이 없어 보인다. 당연한 일이었다. 캐묻고 따진 적은 없어도, 그는 그러할 것이란 걸 강만음은 알고 있었다. 


“함광군, 어찌 이릉노조와 이곳에 계십니까! 그 자가 어떤 자인지 모르십니까!” 


남망기에게 던져지는 말은 원망이 아니었다. 억울함마저 담긴 외침은 일종의 애원이면서도 얄팍한 자기 위로였다. 지금 여기 모인 이들에게 또 다른 이유를 달라하는, 그 과거에도 그랬듯 이제부터 해야 할 일에 어떤 부정도 없다는 걸 증명해 달라는 듯이. 다수가 곧 대의인 것처럼 행했던 그날과는 달랐다. 단순히 그때 없던 한 사람이 지금의 이 자리에 있다는, 존재의 유무만으로도 갈라질 일이었다면 이토록 허무하게 느낄 일도 없었을 것이다.


남망기의 한 손이 조용히 허리춤의 피진 위에 올라갔다. 검을 뽑진 않았으나 흐트러짐 없는 곧은 자세로 위무선의 조금 앞을 비껴 선 채 바라보는 그의 눈이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좋든 싫든 고소 남 씨의 아정한 사내였기에, 말이 없이 눈으로만 비추는 의지는 그가 입은 의복의 빛깔처럼 환하게 제 뜻을 밝히고 있다. 올바르지 않은 것은 바르게 인도한다. 사특한 것은 정화해야 한다. 평생을 읽고 보며 몸에 익힌 도리를 그 안에 담은 채, 헤아리기 아득한 수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말하지 않은 제 고집의 이유는 슬며시 팔을 잡아 자신의 등 뒤로 물리는 남자 하나에게 둔 채였다.

모든 말들의 칼, 서리처럼 상처 내는 날카로운 것들을, 사람에게서 시작되어 그저 사람에게 꽂혔던 과거의 일을 절대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듯이. 그를 다치게 하는 모든 것들이, 그것이 바른 일이며 정도正道라 할지라도 그를 해하려 한다면 자신을 지나가란 뜻이었다.


“흉시들입니다! 몰려오고 있어요!” 


긴장감을 감추지 못한 인파 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제야 돌아보는 검게 물든 숲 여기저기에서 불온한 소리가 났다. 이곳, 난장강에 모인 사람들 중 절반 정도는 어쩌면 소름 끼치도록 익숙한 광경이었을 것이다. 일제히 검과 법보를 쥔 채 태세를 갖추는 중에도 일부의 힐난이 위무선에게 꽂혔다. 


“이릉노조! 정녕 그때처럼 죽고 싶은 게냐!” 


누군가의 칼이 위무선을 향해 날아들자 남망기의 피진이 가볍게 쳐냈다. 뽑힌 검을 다시 집어넣기도 전 동시에 옆으로 달려든 흉시를 날려버린 그가 위무선의 팔을 붙잡아 제 옆으로 바짝 몸을 붙이게 했다. 흉시들을 향해 작게 휘파람을 불어본 위무선은 퍼뜩 남망기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난 아니야. 답하는 대답은 없었지만 남망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흔들리던 숲 안쪽에서 흉시들이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반사적으로 세화를 잡으려던 금릉의 팔을 강만음이 붙잡았다. 


“나서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뿌리치지 못하는 손아귀와 마찬가지로 꼼짝없이 붙들어 둘 작정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외숙부……! 금릉이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강만음이 손에 감긴 자전을 휘둘렀다. 보랏빛의 전류가 흐르는 법보는 흉시들이 다가올 기세라도 보이면 반으로 갈라버리거나 저 멀리 쳐내고 있었다. 금릉이 무얼 어떻게 해야겠단 생각을 할 겨를 따위는 없었다. 강만음과 금릉의 중심으로 바닥에 부채꼴처럼 주시들이 쓰러져갔다. 끊임 없이 몰려오는 주시들이었지만 그만큼 강만음의 지치지 않는 채찍질은 끄떡없을 것 같았다. 호기롭게 몸을 움직이려 한들 영 기회가 없던 금릉은, 그래도 흉흉하게 제 기운을 펼치는 강만음의 뒤에서 안도의 한숨이 내쉬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굉장한 기세였다. 


그때, 강만음이 등을 들썩이며 기침을 했다. 놀라서 고개를 들어본 금릉이 얼른 강만음의 몸을 살폈지만 다친 곳은 없었다. 한 번 터진 기침 속에 피가 섞여있었다. 별안간 터진 기침이라고 해도 조금 이상했다. 


“외숙부!” 

“강징!” 


앞으로 수그러드는 강만음의 몸을 얼른 받치며 부축한 금릉이 저와 동시에 소리 지른 위무선을 바라보았다. 피를 토하며 몸을 숙인 강만음이 목이 끓는 듯한 쥐어짜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영력, 이…….” 


위무선 또한 강만음의 목소리를 들은 것이 분명했다. 소리치며 강만음을 바라보던 그의 얼굴이 일순 새파랗게 굳었다. 













고통스러웠던 기억은 무수히도 많지만 그 시작은 언제나 다르지 않았다. 위무선은 늘 찬물과 더운물을 번갈아 채우며 장난치는 사람이었다. 뜨거운 줄 알았던 것이 찬 것인 때도 있고, 그 반대인 경우도 충분히 많았을 자신의 찻잔 안에 강만음을 밀어 넣었다. 찻잔 속의 찻잎처럼 빙글빙글 돌며 그가 휘젓는 물안을 함께 헤집었던 때였다. 강만음이 기억하는 모든 좋은 시절의 시작에 그가 있었고, 그것이 한순간 무너진 때에도 그가 있었으며, 그 순간이 곧 모든 좋지 않던 때의 시작이었다. 좋았던 것의 시작과 끝은 영원히 번복되지 않았다. 어리게 영근 오만함은 새순으로 엮은 연결고리를 쉽게 끊어냈다. 참 단순하게도 생각했던 일상의 반복 속에 무력함과 절망이란 것을 알았다. 그 시작에도 위무선이 함께 있었다. 그 끝에도 함께했다면, 무언가 달랐을까. 그와 마지막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때는 이제 언제라고 해야 할까. 정작 위무선은 가장 나쁜 것 만을 남겨두고 사라진 사람이었다. 모든 상실의 순간에 도리어 버리고 싶은 것을 욱여넣어버렸다. 그러니 남은 것은 잃은 것밖에 없다. 실상 위무선은 매 순간의 시작마다 강만음에게 있던 것을 하나씩 잃게 했다. 


처음 연화오에 왔을 땐 기르던 개를 떠나보내게 했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선 아버지의 품도 빼앗았다. 오롯이 제 것일 수도 있었던 누이의 정도 반을 쪼개 앗아갔다. 없었으면 있지도 않았을 입소문으로 부모님의 사이를 소원하게 만들었다. 

뺏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한 발 앞서 채운 것이 있다면, 아들의 성장에 근심이 더해질 것을 염려한 어머니의 걱정을 하루에 한 번씩 돌아오는 호통으로 대신해서 돌려줬다. 돌아온 것이 무엇이든 간에, 반씩 비어버린 공허를 그가 채웠다. 빼앗고도 채워갔다.


개를 떠나게 한 날에 형제처럼 지낼 사형이 생겼다. 아버지의 품을 잃은 날엔 어머니의 다독임이 찾아왔다. 누이가 손수 끓인 탕을 나눠 먹어야 했던 날, 몰래 품어온 찬합을 열었을 때 웃음소리가 늘었다.

그 모든 순간에 결국 그가 있었다. 잃었던 것을 다른 것으로 채울 때마다 함께 했다. 잃은 것을 다시 찾아온 사람처럼 당연하게 자리를 지켰다. 그것을 함께하지 못했던 시작이 어느 때였을까. 


아픔이 사라진 지 오래인 복부의 흉은 도리어 기억하고 싶지 않았기에 빠르게 잊힌 기억이었다. 무력함과 절망이 연달아 찾아오던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위로 솟은 것은 그저 멍하니 침상의 천장을 바라보던 시선만 존재했을 적, 강만음의 두 번째 상실은 강제로 부서진 금단과 함께 찾아왔다. 그때도 강만음이 자신의 것을 잃어야 했던 이유는 위무선이었다. 그리고 위무선은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잃었던 것을 되찾아왔다. 분명 되찾아 채워진 그 자리엔 그도 함께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때 그 자리에 없었다. 3개월, 강만음이 그를 찾아 헤매는 시간이었다. 돌아온 그를 맞이했을 때, 여느 모든 순간이 그랬던 것처럼 비었던 공백에 기어코 제 자리를 만들어 찾아왔구나 생각했다. 그저 그것이 조금 늦어졌을 뿐이라고. 그러나 빠르게 찾아왔던 상실과 대체의 시간은 그 공백을 좀처럼 거두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도 자리잡지 못한 누군가의 공백은 그저 시커먼 늪과도 같다. 한없이 가라앉게 만드는 늪이었다.








 


 


“영력을 잃은 건 일시적인 현상입니다. 시간은 좀 걸리지만 회복될 수 있어요.” 


의술을 익힌 수사가 피를 토한 몇몇을 진맥 한 뒤 내린 진단이었다. 안도하며 말하는 그 또한 턱 끝에 핏줄기를 매달고 있었다. 긴장한 채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어 보였던 수사들의 얼굴이 그나마 조금 풀어지는 순간이었다. 강만음 또한 남몰래 큰 한숨을 삼켰다. 내색하지 않았으나 오래 묵은 상처가 쑤시는 통에 단전이 쓰린 착각이 인 탓이었다. 일시적이라는 말에 그 쓰라림은 곧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으나 배 언저리를 매만지는 손은 쉽사리 거두어지지 못했다. 차게 식었던 피가 이제야 다시 도는 듯 했다. 천천히 심호흡하며 남몰래 제 복부를 문지르는 동안, 그가 내뱉었던 것과 비슷한 작은 한숨이 어디선가 들렸다. “일시적……이라고.” 허탈하리만치 힘이 빠진 그 목소리는 불안감이 가셨을 때 안도하는 목소리와 같았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냐에 따라 순간의 기분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왜 네가 그런 표정을 짓지? 


피를 토하며 주저앉은 강만음을 보자마자 마치 옛 시절처럼 이름을 부르고는 덩달아 놀란 얼굴로 굳어 있던 위무선이었다. 그는 의원의 진단을 멀찍이서 곁 들은 후 파랗게 질려있던 표정을 풀고 묵은 숨을 뱉고 있었다. 이제 와서 네 녀석이? 그가 왜 그런 표정과 목소리를 읊조리며 한숨을 쉬는지 알고 있음에도, 캐캐 묵은 감정의 늪은 그 한숨이 그저 온전히 마음에 남은 걱정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피를 토하며 영기가 막힌 사람들은 방금 복마동 앞에 도달한 수사들 전부였다는 것과, 오래도록 동굴 안에 갇혀 있던 소년 수사들이 무사한 점을 들먹거린 위무선이 입을 열어 떠들기 시작했다. 말장난처럼 툭툭 무언가를 ‘묻기’ 시작한 위무선에게 대꾸하는 유일무이한 사람은 남망기였다. 응, 과 아니, 긍정과 부정의 짧은 대답이 오가는 문답 속에서 모현우의 얼굴을 한 위무선의 말투와 행동은 지나간 시간을 되돌리는 것 같았다. 줄곧 조용했던 것이 무색하게, 그는 마치 지난 생 남의 이목을 끌었던 방식대로 거리낄 것 없이 말을 이었다. 누구든 이릉노조 위무선의 행동을 염려하며 비난을 목적 삼아 나설 수 있었으나, 실상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소 남 씨에서도 누구보다 사특한 것을 경멸하며 언급조차 불허했던 남계인이 묵인했기 때문이었다. 성급함을 숨기지 못하고 그 옆에서 거드는 남경의의 추임새도 말리지 않았다. 틈이 날 때마다 위무선의 말꼬리를 붙들며 해코지를 하던 말릉 소 씨의 종주, 소섭의 입에 금언술을 걸어버린 남망기까지 있었으니 더 이상 나설 이가 없었다. 


여러 무리의 앞을 왔다 갔다 하며 이어가는 위무선의 말과 몸짓은 마치 물고기를 잡겠다며 물보라를 치대던 손짓 발짓을 떠올리게 했다. 그저 떠오르는 대로 줄줄 나불거리던 말과 내던지는 시선은 여러 얼굴을 돌면서도 단 한 명을 향했다. 단 한 사람을 향해 다발을 풀고 그물을 던지고 있다. 거의 다 걸렸다 싶었을 때 물고기는 솜씨 좋게 그물망을 빠져나갔다. 소섭은 억지로 금언술을 풀고 찢어진 입가의 피를 동굴 안 방진에 흩뿌리며 전송부 한 장으로 그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다음은 그저 아수라장이었다.








 


 


저마다 가풍에 맞추곤 하는 질 좋은 옷감들과 정갈한 의관들은 이제 집안의 구분을 가릴 것도 없이 모두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옷에 들러붙은 핏자국에 덩달아 머리카락마저 엉켜 있었으나 누구도 의관을 손보지 못한 채 쇠 냄새나는 숨만 훅훅 내뱉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가 뭘 하러 왔더라, 그래, 이릉노조를 손 보러 왔지.’ 분명 사특한 것 하나 잡자고 대거 이동했음은 분명한데, 사특한 것을 떼거지로 맞닥뜨리긴 했으나 정작 베어낸 것은 당초 생각했던 한 사람이 아니었다. 금광요가 술수를 쓰고 그 수족으로 움직인 소섭이 도망쳤으며, 영맥이 막힌 노련한 수사들은 제 몸 하나 지키는 것도 버거운 까닭에 어린 소년 수사들의 도움을 받았다. 여기까지는 그나마 조금 부끄러운 수준에 머무를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저들만큼이나 피를 흠뻑 뒤집어쓴 채 서있는 위무선, 이릉노조가 제가 부려야 할 흉시들을 함께 쳐냈다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그의 옆에서 물러서지 않고 함께한 사람이 고소 남 씨의 함광군, 남망기라는 것엔 무어라 할 수 없을 혼란마저 느끼는 중에, 특히나 소년 수사들 중 그 둘을 따르는 자기 자식을 보는 자들은 그저 이 모든 것이 환장스러울 뿐이었다. 이릉노조와 함광군의 주변에 몰려들어 지친 중에도 와중에 저마다 칭찬을 바라기라도 하듯 웃고 있는 모습에, 화를 내고 싶어도 영 기운이 없어 주저앉은 몸을 일으킬 수 없다는 게 복장을 두드린다. 구양 종주는 이미 아들이 뛰어나갔을 때부터 붙잡는 것을 포기한 사람이었다. 지금은 이릉노조의 옆에서 그의 얼굴을 살피며 눈썹마저 팔八자로 휘어 보인 채 걱정이나 하고 있었다.


“모……위 선배, 괜찮으세요? 다치셨어요? 피가 이렇게…….” 

“다치긴 뭘 다쳐. 함광군이 옆에 있잖아. 이거 다 내 피도 아니야. 너도 똑같으면서 뭘 그래?” 


위무선이 환히 웃으며 구양자진의 머리를 툭툭 털듯 쓰다듬었다. 그가 모현우인줄만 알고 있었을 적부터 그가 부리는 재치와 솜씨에 감탄하던 소년은, 이제는 위무선이라 밝혀진 이가 사람을 죽이고 원귀를 부리는 사술을 익힌 이릉노조였다고 한들 아무런 상관이 없는 눈치였다. 말 한마디 건네진 것에 표정이 환해지는 구양자진 말고도 그 주변에 몰려든 다른 소년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남사추, 남경의, 나머지 대부분의 소년들은 의성에서 우르르 몰려다니던 일행이었다. 그들 모두 의성에서 집으로 귀가한 뒤 제 부모들에게 한 소리 크게 들으며 혼났었지만 그 호된 기억은 이미 잊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자식을 둔 수사들의 한숨이 지쳐버린 어깨와 함께 땅바닥으로 푹 꺼지길 여러 번이었다.

금릉은 그 모습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금릉. 다치진 않았느냐?” 

“괜찮아요.” 

“괜찮다고?” 


모여있는 무리들이 익숙하면서도 곧바로 다가가지 못한 금릉은 그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곧이어 눈 앞에 불꽃이 튀었다. 빡! 하고, 주머니에 넣어둔 돌과 돌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금릉은 정수리를 감싸 쥐고 주저앉았다. 다리가 풀릴만치로 세게 얻어맞은 꿀밤이었다. 


“하루라도 말을 들어먹질 않는구나!” 

“아, 왜 때려요!” 

“또 맞고 싶은 게냐!” 


잠시간 쓸쓸할 법도 했을 마음을 곱씹을 틈도 없이 이어진 강만음의 일갈에 금릉은 어깨를 움츠렸다.


자신의 외숙이 정말로 한 번 더 때릴 것이라 생각한 채 재빨리 머리 위를 가렸지만 또다시 꽂히는 주먹은 없었다. 슬그머니 올려다본 강만음은 여전히 지친 얼굴로 들었던 손을 금릉의 정수리에 박아두는 대신 피가 튀어 얼룩덜룩해진 제 얼굴을 쓸고 있었다. 어찌 일이……이렇게 되는지. 피곤함에 찌든 목소리였다. 


“잠깐만, 조용히.” 


연거푸 미간을 문지르던 강만음의 눈썹이 순식간에 찌푸려졌다. 대부분이 지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주저앉은 채 안도하고 있는 중이었다. 분명 재미없는 헛소리나 하려는 것이겠지, 하는 옛 기억에 의지한 본능이었을 뿐 얼굴을 찌푸리는 것엔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그것을 인지한 순간 강만음은 부러 더 힘껏 눈에 힘을 주어 이번엔 정말로 위무선을 노려보았다. 


“위, 위 공자, 흉시들이에요. 아까보다 더 많은 수가……더 많은 흉시들이 몰려오고 있어요!” 


귀장군 온녕이 다급하게 외쳤다. 위험을 알리는 이가 누군지 알면서도 그저 지쳤기에 무어라 불만을 외칠 사람들은 없었다. 앉아 쉬던 모든 이들이 숨을 멈췄다. 이번에는 그 어느 누구도 흉시를 부리는 이릉노조 위무선을 지목하며 범인으로 몰아가지 않았다. 그는 방금까지 어린 소년들과 흉시들을 처치한 자였다. 시체를 부려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어린애들을 도와서 흉시들을 쳐내버렸으니, 대의를 생각하고 있음에도 그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위, 위 공자, 이대로 가다간, 여기서는 다들 위험해요…….” 

“알고 있어, 온녕. 바깥에서 저것들 좀 잠시 막아줘.” 


제 패검을 뽑아 온녕에게 던져준 위무선이 이번엔 웃통을 벗기 시작했다. 단정함이나 예의라곤 하등 신경도 안 쓰며 보이는 돌발 행동에 몇몇 수사들의 눈이 찌푸려졌다. 핏물에 물들어 거의 절반 이상이 붉은 것이나 다름없을 내의 차림으로 잠시간 어깨를 부르르 떨어 보이던 위무선이 남망기에게 말했다. 


“남잠, 나 하고 싶은 게 있는데 좀 도와줄래?”


강만음은 이와 똑같이 어둡고 축축하며 매우 서늘했던 어느 동굴을 떠올렸다. 가볍게 말하는 목소리에 기시감이 들었다. 호기롭게 말하는 목소리, 지나치게 넘치다 못해 낭랑했던 자신감, 그렇게 말하며 움직이는 그는 늘 어딘가를 앞장서고 있었다. 겁도 없이, 무모하게, 누가 말려도 들을 생각도 없이. 그 모든 행동들이 무엇을 위하였는지 알았음에도 늘 그의 뒤에서 어깨를 잡아 말리려고 한 것은 자신이었다. 누군가가 위험에 빠지는 꼴을 두고보지 못하는 것을 알아서, 그것이 한 사람이든 여럿이든 상관하지 않는 성격임을 알았기에. 뭐하려는 거야? 위험하게! 라고 외치며, 그래도 그때는 그것을 걱정이라 불렀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다.


남망기는 이번에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무얼 하려는 지, 어떤 위험한 일을 할지, 혹시 상황에 맞지 않는 장난이나 칠는지 무엇이 되었든 의심할 일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저 잠시 눈살을 찌푸린 채 위무선을 살폈던 이유는 별안간 위무선이 제 손가락 하나에 피를 내고 혈흔으로 엉망진창이 된 내의 위에 문자를 적어 내려 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문자를 그리는 일보다는 피를 낸 손가락이 옷감 위로 움직이는 그 짧은 찰나 동안 위무선의 눈 밑이 어두워져 갔기에 그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는 것에 가까웠다.

위무선의 손은 거침이 없었다. 그는 글을 쓸 때 말고도 그림을 그릴 때조차 자유분방하게 붓을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새로운 것을 적어내는 게 과연 소용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본래는 흰색이었을 내의 위에 피로 적어가는 문자 또한 거침이 없었다.


위무선이 일필휘지로 그려내는 문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죽고 난 뒤에 이릉노조의 손에서 탄생된 물건들 중 그나마 본래의 형태와 가깝게 모방하여 베껴 쓸 수 있는 것들은 아낌없이 활용하던 그들이었다. 개중에는 제작자인 이릉노조가 만들었던 것보다 더 뛰어난 효력을 보이겠다며 갖은 연구를 했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원조를 뛰어넘지는 못했다. 이렇게 빠르지도 못했다. 단숨에 문자를 그려낸 위무선이 약한 숨을 뱉었을 때 지켜보던 수사들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소음기. 원기가 가득한 이릉노조의 몸에 이릉노조의 피로 그린 소음기였다. 수행을 거듭하며 법보 또한 접하는 일이 많은 수사들이 그 위력을 알아보지 못할 리는 없었다. 이릉노조가 사람을 해치기 위해 만들었던 것을 올바르게 사용하면 될 일이라며 덮어두던 그들이었다. 염치를 모르쇠 하며 죽은 자가 남긴 것을 그렇게 썼지 않던가. 그러나 그들이 다룬 것은 결국 사마외도의 한 조각이었다. 그것도 티끌이나마 흉내 낸 모조품이었다. 가짜가 진짜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경악과 놀라움의 침묵 속에 그들은 그 사특한 것들을 하나 둘 써왔던 지난 십몇 년을 생각했다. 사특한 것이어도 올바르게 쓰지 않았던가? 이릉노조와는 다르지 않았던가? 그저 힘없는 자들을 돕기 위해 쓰지 않았는가? 돌아다니는 원귀들을 해결한다는 이유 아니었던가? 그리고 다시금 위무선을 본다. 제 몸에 소음기를 그려 넣은 그가 무슨 일을 생각했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무언가 말하려던 위무선이 눈을 깜빡이다 조금 비틀거렸다. 남망기가 곧바로 그의 어깨를 붙잡았지만 그는 곧 괜찮다는 듯 똑바로 몸을 세우며 말했다.


“과녁이 되도록 할 게. 흉시들은 이 몸만 쫓아올 거야. 그것들만 모두 베어내면 돼.”


도와줄 거지, 남잠? 파리한 인상으로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말에 어디선가 미친 짓이라 작게 소근 거리는 소릴 들었다. 강만음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미친놈! 또 그렇게 제 몸이 부러지지 않는 물이라도 되는 줄 알고!

누구에게 하는 걱정이었을까. 그것이 과거였는지, 혹은 현재인지 가늠할 새도 없이 그저 몸을 내밀어 뛰어나가는 위무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뒤늦게 뒤쫓아간 그곳의 바람엔 피 냄새가 섞였다. 내달린 잠시간의 시간 동안 마주친 시체보다도 더 많은 시체들을 벴기 때문이었다. 산 사람의 피보다는 이미 죽어 썩어간 지 오래인 피 냄새였다. 형체를 알 수 없는 오십 구의 시체, 피에 흠뻑 젖어 온통 붉었기에 혈시라 부를 것들이었다. 뒤늦게 같이 따라온 소년 수사 중 하나가 뒤로 엎어진 채 벌벌 떨리는 손가락질을 하며 조상님을 찾았다. 멍청해 보이는 몸짓이었지만 이해할 수밖에 없다. 난생처음 보는 흉시와 혈시의 난투장이었다. 

오십 정도는 되어 보이는 수의 머리들이 피였는지 무엇이었는지 분간하는 게 소용없어 보이는 시뻘건 물속에서 하나둘 씩 기어 나와 저들과 똑같은 흉시들을 찢어발겼다. 귀신의 비명과 동물의 숨을 섞은 듯한 목 울음소리를 내며, 위무선을 덮치려던 흉시 하나를 양쪽으로 잡아 찢은 그들은 곧이어 다른 소년들에게 몰려들었던 흉시들도 마찬가지로 내던지거나 조각을 내버렸다. 매우 빠르고 민첩한 움직임이었기에 누구 하나 산 사람들은 그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없앤 흉시는 시체 산을 오르고 머무르면서 수사들이 베어낸 수보다 훨씬 많았다.

마지막의 하나, 바닥을 기던 허리 없는 흉시의 머리를 부순 뒤에야 이 모든 소동이 끝났다. 남는 것은 피가 섞인 바람과 인간이 아닌 것들이 내는 거친 소리였다. 그저 생전에 당연히도 사람이었겠구나 싶을 정도를 짐작할 형체들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들은 온전치 못한 자세로도 어기적어기적 몸을 돌리고 나란히 한 곳을 보기 시작했다. 시체와 시체들이 뒹굴었던 난투 끝에 그 흉측한 몰골들이 또다시 이쪽을 향해 뛰어들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 생기는 것도 당연했다. 만약, 그들에게 의지가 있는 것이라면. 금릉은 피가 잔뜩 물들어 끈적해진 손으로 세화를 움켜잡았다. 뒤따라온 다른 수사들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은 영력도 싣지 못한 힘없는 동작이었다. 무작정 뛰어들기엔 겁이 날수밖에 없었다. 몇몇은 등만 내보인 위무선에게 위협을 가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 시국에도 끝까지 그에게 책임을 돌리려는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그러나 갑자기 위무선이 돌아보지 않은 채로 팔을 뒤로 늘어뜨리며 저지했다.


“잠시……잠시만.”


오십의 움직이는 시체들이 일제히 위무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 양 껏 흉시를 만들고 부리는 이릉노조였으니 그들이 그를 따르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금릉의 눈엔 잠시만 기다려 달라며 뒤로 늘어뜨린 위무선의 손이 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피 냄새 섞인 약한 바람에 밀려 쓰러지지나 않을까 싶은 위태로운 떨림이었다. 그는 평소 수를 쓰던 방식대로 피리를 입에 대지도 않았으며 휘파람도 불지 않았다. 

혈시들은 너덜거리는 무릎을 움직여 위무선의 앞으로 모여들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던 귀장군 온녕의 눈과 입이 올라갔다가 내려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웃으려다 울어 보이는 그 어느 것도 표현하지 못한 굳은 얼굴로 더듬거리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는 아무런 말이 없는 위무선을 대신해 마치 그와 비슷한 것을 알아차린 것처럼 더듬거리며 외쳤다. 


“여기……, 여기에, 있었어요? 계, 계속 기다렸어요?” 


끼긱거리며 뼈가 긁히는 소리였다. 흉시를 찢어발길 때엔 그리 날쌔던 몸짓들이 얼굴을 움직일 땐 형편없었다. 혀가 있고 입술이 있었다면 무언가 소리가 되었을지도 모를 움직임은 그저 턱뼈가 맞부딪히며 그나마 어설프게 걸려 있던 살 조각 들을 떨구고 있다. 금릉이 볼 수 있는 것은 그런 그들을 마주한 위무선의 등과 그를 향해 삐걱거리며 입을 뻐끔거리는 혈시들이었다. 그러나 위무선은 그들이 마치 무언가를 말했다는 것을, 남들이 알아들을 수 없을 기분 나쁜 시체들의 뼈가 서로 부딪히며 나는 소리가 무엇인지 모두 알겠다는 듯이, 한참이나 혈시들의 움직임을 마주하다가 조금 고개를 숙였다. 내려둔 손끝의 떨림은 멈추었지만 그의 숨은 불규칙적이었다. 숨이 막힌 것은 아니지만 그저 어떻게 해야 본디대로 내쉴 수 있을지 안간힘을 다하는 것도 같았다. 모든 혈시들이 한 번씩 턱을 벌려 제각기 다른 불협화음을 내보냈다. 마치, 말을 하는 것 같다. 알아들을 수 없음에도 금릉은 그렇게 생각했다. 잊힌 지 오래된 영혼들의 한마디였다.


“……모두 감사합니다.”


위무선이 몸을 깊이 숙여 인사했다. 그대로 고꾸라질 것 같은 몸짓에 남망기가 얼른 그의 팔을 붙잡아 부축했다. 혈시들은 일제히 턱을 다물고 구부정하게 뒤틀린 몸을 함께 숙였다. 하나같이 온전하지 않은 팔을 들어 정중히 가슴께에 내밀고 맞붙잡아 공수했다. 바람이 불자 맨 앞의 흉시부터 차례로 손끝이 무너져갔다. 피에 젖어 있던 살점과 뼈들이 처음부터 메말랐던 것과 같이, 붉게 바스라지는 그 끝은 멀리가지 못하고 그자리에 쌓여가기 시작했다. 세월 속에 켜켜이 쌓여간 붉은 빛이었다. 어떠한 공정도, 제령도 없이 그저 기다리기만 했던 오십의 한恨이 십삼 년 전 이자리에 함께 했던 이의 인사와 함께 바람에 실렸다. 가볍게 쓸리는 소리는 낙엽과도 같았다. 지난 세월을 머금은 채 비로소 땅으로 돌아가는 소리다. 부서지고 밟히는 소리들엔 어떠한 귀곡도 피냄새도 묻어있지 않았다. 고요하면서도 서글픈 도화였다. 








 


 


난장강을 내려오는 길은 올라오는 길 보다 배로 시간이 걸렸다. 수사들의 대부분은 영력의 3할도 회복되지 않았으며, 그나마 멀쩡했던 소년 수사들 또한 한참 동안 치러진 난장판에 걷는 걸음마다 지친 기색이 확연했다. 심지어 너나 할 것 없이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 머리 또한 젖어있어 온 몸이 무거웠다. 행색에 불평을 하기엔 챙겨야 할 몸이 석자인 판이라 대부분은 입을 다물고 묵묵히 시체의 산을 내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자식을 챙기러 쫓아온 부모는 도리어 자식의 부축을 받아 운신 못하는 노인처럼 지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금릉 또한 강만음을 부축하려고 했으나 매몰차게 내쳐진 뒤 그 뒤편으로 조금 떨어진 채 걸어갈 뿐이었다. 외숙부의 자존심이 어떠한 형태인 지 조금은 알고 있었기에 금릉은 그저 입을 내밀어 마음에 들지 않는 척 흉내만 냈을 뿐 별다른 아쉬움을 가지지는 않았다. 다만 걷는 위치가 애매해서 신경이 쓰일 뿐이었다. 강만음과 금릉은 일행의 거의 마지막을 따라 걷고 있었고, 제일 마지막은 남사추와 남경의, 그리고 남망기와 위무선이었다.

이제 그만 난장강을 빠져나갈 것을 제안한 사람은 상황이 마무리된 뒤에도 겁에 질린 채 벌벌 떨며 눈치를 보던 섭회상이었다. 선문세가에 모르쇠 양반으로 유명한 섭 씨 종주는 말을 꺼낼 때마다 여러 세가들에게 비웃음을 사곤 했지만, 그래도 그 상황에선 더없이 시기적절한 제안일 수 있었다. 영력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검을 할 수도 없으며 그 상태로 각자의 집안에 돌아가기엔 결단코 무리였다. 엉망인 의복과 지친 체력을 달래기 위해 잠시간 거쳐갈 지점으로 운몽 연화오가 거론되었다. 아무리 우스운 결말을 내어버린 행군이었다 한들 어쨌든 큰 일을 치르고 난 뒤에 마무리할 것들이 많았다. 강만음은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모든 일행이 연화오에 올 것을 허락했고 그중엔 놀랍게도 남망기와 위무선이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강만음이 먼저 불러들인 것은 아니었으나, 연화오에 자신 또한 들러보아도 되겠냐는 위무선의 말을 거부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돌아오겠다고? 라고 말하며 비웃음을 섞었지만 당장 이 자리에서 꺼지라는 말과는 달랐다. 그 뒤로 위무선은 말없이 일행의 가장 마지막 자리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강만음의 말은 언뜻 들으면 결코 연화오에 발을 들이지 말란 식의 거부로 들려왔으나 그는 마치 그 말을 익숙한 긍정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위 선배, 괜찮으세요?”


남사추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굳이 고개를 돌려 확인하진 않았지만 금릉은 벌써 몇 번이나 남사추가 위무선에게 말 거는 것을 듣고 있었다. 대부분은 저런 식의 걱정이었다. 

가장 맨 뒤에서 걷고 있는 그들은 딱히 뒤처지고 있지 않았어도 그렇다고 해서 성급하게 발을 놀리는 것은 아니었다. 남사추가 위무선에게 말을 걸 때마다 고소 남 씨 셋과 위무선은 중간중간 멈추기를 반복했고, 그때마다 불만 어린 위무선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뿐이다. 


“남잠, 얘는 왜 이렇게 걱정이 많아? 난 오늘 한 일도 별로 없고 오히려 네가 더 많이 움직였는데. 사추, 너희 고소 남 씨 함광군을 걱정해야지 이 이릉노조를 걱정해야 되겠어?” 

“한 일이 없기는 뭐가 없어요! 소음기 달고 달린 게 예삿일이에요?” 


그러고 나면 꼭 남경의의 타박이 이어졌다. 


“달긴 누가 달아? 그렸지. 아이고 남잠, 얘들 시끄러워. 먼저 내려가라고 해.” 

“위 선배, 같이 가요. 힘드시면 업어드릴까요?” 

“누가 누굴 업어? 아하하하하하, 남잠! 사추가 나를 업고 간다는데 발이 끌리지 않겠-억!?”


진지한 남사추의 말에 대소하는 위무선을 두고 갑자기 남망기가 거의 반 정도는 지탱한 채 몸을 일으켰다. “함광군, 피곤하실 테니 제가……!” 라고 말하던 남사추는 묵묵부답일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 남망기를 보더니 뭔가 깨달은 듯 더 말하지 않았다. 맨 뒤에서 이어지는 행렬은 계속해서 이런 식이었다. 남사추의 걱정과 함께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남망기에게 거의 기대다시피 한 위무선이 농담을 치는 것에 남경의가 어이없다는 듯 대꾸하고, 그리고 다시 남망기가 위무선을 부축해 이동하는 식이었다. 앞서가는 일행에서 그다지 멀어지지 않았던 까닭은 그렇게 짧게나마 숨 돌릴 틈을 가지고 나서도 남망기가 위무선을 결코 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발은 움직이고 있어도 저 정도면 안고 가는 수준이 아닐까. 남사추와 남경의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동할 때가 되면 알아서 앞만 보고 척척 걸어 나가고 있으니 체력은 문제없어 보였다. 그러나 남망기의 몸에 거의 매달려 가는 위무선은 어떠한가. 그들이 중간중간 일부러 말을 걸며 발을 멈추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틈만 나면 물에 던져도 둥둥 뜰 입을 나불거리며 농담을 던지고 있었지만 이미 한참 전부터 안색이 좋지 않았다. 이즈음 되면 몸에 튄 피들이 혹시 그의 것은 아니었는가 의심할 지경으로 창백한 안색이었다. 위무선의 한 팔을 제 목에 걸치게 하고, 다른 팔로는 그의 허리를 붙잡아 단단히 붙든 채 지탱한 남망기는 여차하면 그를 안아 들 기세로 보였다. 

그리고, 본의 아니게 그런 그들을 신경 쓰며 보폭을 맞추는 금릉은 자연스레 멀어지려야 멀어질 수가 없었다.


“위 선배, 그……귀장군은 어디로 간 건가요?” 


또다시 발걸음을 움직인 뒤 한참이었다. 이번에도 잠깐의 휴식을 꿰어낼 참으로 말을 건 사람은 남사추였다. 그러나 그 질문 내용이 퍽 적절하지 못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금릉뿐이었다. 


“아……온녕? 여기 그대로 같이 따라오기엔 뭐하잖아. 좀 거칠지만 여기보다 빠른 길을 알고 있으니까, 일단 난장강을 벗어나서 기다리라고 했어. 왜?” 

“아뇨, 그냥. 혹시 다시 만나 뵐 수는 있을 까요?” 

“온녕을? 뭐 문제는 없지만, 일단 말은 해 둘게. 아하하하하, 남 선생님이 아시면 피를 세 번은 토하시겠는데…….” 


위영, 그만 말해. 위무선의 말꼬리가 늘어지는 것을 본 함광군의 제지와 함께 다시 이동이 시작됐다. 이번에야말로 위무선은 정말로 지친 듯 입을 다물고 고스란히 함광군에게 매달려 발을 옮겼다. 난장강을 벗어나 강가의 선박으로 이동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기에, 도착했을 무렵엔 맞닥뜨린 허름한 배의 몰골에 불평을 해본들 그래도 난장강을 벗어난 것에 안도한 사람들이 많았다.






피비린내도 모자라서 생선 비린내라니, 이게 무슨 꼴이람. 정박한 어선들을 보고 툴툴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타박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작정 부정할 수도 없는 사실이었다. 꾀죄죄하게 찌들어 있는 배들을 두고 불평을 하기엔 모인 이들의 몰골도 그다지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소년들의 불평을 못 들은 체하며 이미 앞서 배를 잡은 세가의 수사들은 개중에도 악착같이 제 자식의 목덜미를 잡아 질질 끌고 들어가서는 눈에 난 행동을 할까 부라리며 감시하고 있었다. 남은 소년들은 그런 부모의 눈총을 모른 척 몸 사리며 무시하거나, 아예 상관도 하지 않는 일행들이었다. 금릉은 그런 부류에서도 전자였다. 고개만 돌리면 자신의 외숙부가 희번뜩 눈을 밝히며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일부러 모른 척하며 배에 오르는 발걸음을 미적미적 돌리고 있었다. 일행은 아주 많았고, 여기저기 흩어진 사람들이 각자의 준비를 마치고 합류하기엔 꽤 시간이 걸릴 일이었기에 그나마 붙잡히지는 않았다.


금릉은 정박된 어선들 중에서도 가장 끄트머리에 붙어있는 낡은 배를 힐끗거렸다. 남망기와 위무선이 잡은 배였다. 난장강에서 빠져나온 직후의 위무선은 그제야 온전히 서서 제 발로 걷고 있었으나 그런 그를 남망기가 놓지 않았다.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는 위무선의 말엔 대꾸도 없이 부리나케 선실로 들어간 둘은 배가 출발할 때까지 나올 기미가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들어오는 이를 마다할 것 같지는 않아도 선뜻 움직일 수는 없었다. 아니지, 굳이 내가 왜 들어가 봐야 하는데? 지레 짜증을 내며 금릉은 바라보던 곳으로부터 홱 하니 고개를 돌렸다. 돌아본 곳엔 강바닥에 고개를 처박을 듯이 뱃전을 붙들고 구역질을 하는 남사추가 있었다. 남경의는 옆에서 덩달아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그의 등을 문지르고 있었다. 남에 대한 걱정을 물리지 못하는 구양자진도 그 옆에서 무어라 이야기하고 있다. 어울리지 않게 뱃멀미야? 평소라면 툭하니 던졌을 말이었지만 금릉은 그저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그들에게 다가가기엔 손도 발도 꼼짝없이 그 자리에 묶인 것만 같았다. 들려오는 말에 귀를 막는 것도 우스워서 결국은 고스란히 들을 수밖에 없었다.


“위 선배는?” 

“함광군과 함께 선실 안으로 들어가셨어.” 

“안색이 안 좋으시던데 괜찮은 걸까?” 

“글쎄? 그래도 위 선배니까 괜찮지 않을까……아니, 사추 너 또 토해? 뱃멀미 있다는 소리 안했잖으아아아아악, 귀장군!” 


아, 왜 거기서 올라오고 난리야! 배 아래에 잠겨있던 시퍼런 머리가 불쑥 물 위로 올라오는 걸 보고 놀라 자빠졌으면서도 남경의는 경계보단 짜증스러운 불만을 토해내기 바빴다. 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미역줄기처럼 붙어있는 귀장군 온녕은 배 위로 올라와 정신 사나운 머리칼을 정리할 새 없이 송구스러운 듯 고개를 숙이면서도 토악질을 하다 멈춘 남사추를 살폈다. 누구도 그가 귀장군이라는 것과, 이릉노조가 부린다는 최고의 수족이란 소문은 상관하지 않고 있었다. 금릉은 그 자연스러운 모습을 바라보며 화가 나는 것과 동시에 화내지 않는 소년들을 탓할 수 없다는 두 가지 생각이 뒤엉켰다. 그리고, 귀장군 온녕이 사추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을 때 금릉은 자신도 모르게 검을 반 정도 뽑고 있었다. 

사특한 것, 베어야 할 것, 아버지의 원수, 그리고 어머니의……. 별안간 숱하게 들어왔던 못된 또래들의 놀림과 그와 함께 있었던 주먹다짐들이 생각났다. 검신의 반 정도는 뽑고 차마 다 뽑지 못한 이유는 몰랐다. 검을 다 뽑지 못했어도 몸은 이미 나가 있었다.


“금 공자……!” 

“금릉! 너 뭐 하는 거야!” 


화들짝 놀란 남경의의 외침과 함께 뱃전을 붙들고 있던 남사추가 몸을 일으켰다. 남사추는 금릉의 검이 반 정도 뽑혀있는 것을 보고는 황급히 온녕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그런 남사추를 도로 뒤로 물리고 앞으로 다시 나선 것은 온녕이었다. 이미 죽은 지 오래라 표정을 표현할 수 없는 굳은 근육이 억지로 일그러지며 금릉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가가 씰룩이고 콧등이 움찔이며 미간이 좁혀졌다가 펴지기를 반복하는 얼굴이었지만 어쩐지 그가 무슨 표정을 지으려 했을지 알아차린 것만 같아 기분이 나빴다. 알고 싶지 않았기에 더 불쾌했다. 오랜 미움의 대상이 그런 표정을 지어서는 안 되었다. 표정이라고 말하기엔 어설플 정도로 일그러진 얼굴을 보면서도 금릉은 이를 악물었다. 


“금, 금 공자, 화가 난 것이라면 제게 풀어주세요. 남 공자는…….”


귀장군 온녕은 이릉노조가 만든 흉시였다. 이미 죽은 자를 움직이는 시체로 만들었으나 감정을 되찾게 하고 이성을 돌린 유일무이한 존재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사실이 그를 다시 버젓한 사람으로 되돌렸다는 것은 아니었다. 금릉은 외숙부의 자전이 베어낸 자신의 팔을 아무렇지 않게 주워다 맞추던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치려거든 저를 치라고, 고통이 없는 자가 나서서 하는 말은 가증스러웠고 그랬기에 한없이 더 미웠다. 이 검에 베이더라도 아무렇지 않다는 소리를, 몇 번을 베고 몇 번을 가로막아 상처 입어도 아무렇지 않단 소리를 더듬는 그의 행동이, 그저 자신을 치려는 사람을 향한 기만이 아닌 누군가를 위한 것이란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네 주제에. 이제 와서 누가 누굴 지키는 흉내를 낸다고?


아버지 금자헌은 온녕에 의해 세상을 달리했다고 했다.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어떻게 돌아가셨는가, 그 까지는 알고 싶지 않았다. 설움도 있었지만 무서움이 더 많았던 때였다. 귀에 들어오는 내용이 무엇인지 모두 알아차릴 무렵 보지 않았어도 그려지는 참상에 따끔거리는 눈을 수없이 깜빡였던 날이 있다. 이릉노조가 흉시를 부려 아버지를 죽였다, 혹은 귀장군이 손을 뻗어 아버지의 목숨을 앗아갔다더라, 이름의 앞뒤를 바뀌어본들 달라지지는 않는 이야기다. 

그런다고 해서 이미 알아버린 부친의 부재에 관해, 과연 아버지가 그리 세상을 떠나야 했을까 싶었던 궁금함을 부정할 수 없었다. 


아버지 금자헌의 뒤편에 귀장군이 있었다고 했다. 어린 금릉 앞에서 저들끼리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던 어른들의 말은 항상 거기까지 이어지다 비로소 닫히곤 했다. 귀장군이 손을 뻗어 금자헌의……. 그들은 참으로 뒤늦게야 자신들의 무심함을 알아차린 체를 했다. 소매며 합죽선을 펼쳐 입가를 덮고 헛기침 몇 번으로 자신들의 실수를 가리곤 했다. 그저 전해져 오는 형태만을 뭉뚱그려 말하는 말들이 사라지진 않는다. 귀장군 온녕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상관 없이 손을 뻗어 죽였다고 했다. 보지도 않은 자들이 발린 잎으로 떠든 소문 중엔 어린아이 머리맡에서나 읊어줄 법한 괴담 같은 부푼 이야기도 있었으나 금릉에게는 그 모든 말들이 진실이었다. 아버지 금자헌은 귀장군 온녕의 손에 죽었다. 귀장군이 손을 뻗었다고 했다. 그 말들은 그저 옛 이야기를 적어내리는 차가운 붓 끝과 같았다. 얼굴 두어 번 본 것도 많은 것으로 쳐야 할 관련도 없을 그들의 이야기는 결국 무시하고 싶어도 살이 에이도록 와 닿는 외로움이었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몰랐을 게다. 아무것도 모른 채 그렇게 세상을 떠났으리라. 열 살도 채 되지 않았을 때의 어린아이의 상상은 제가 모르는 것 그대로 어른들도 그러하리라 믿었다. 모든 좋은 사람과 따뜻했어야 할 사람들이 그렇듯이, 금릉 또한 그들이 제 앞에서 손 한번 뻗어보지 못할 아득한 옛날에 그리 가야 했을 이유를 몰랐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고 했다. 해야 할 말을 들려줄 이가 없음에도 대신해서 말을 전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차갑고 아픈 것들만 던진다. 금릉은 제게도 혀를 굴려 무언가를 말해주고 주고받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멀리에만 있었다. 가까이 있어도 말하지 못한다면 멀리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짧은 세월 동안 가장 오래도록 옆에 있던 어른들은 금릉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을 본디대로 전해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숙부인 금광요는 따뜻한 미소로 저를 대해줬어도 어린아이가 알아내기엔 복잡한 과거의 사정들에 관해선 칭찬 한마디를 얹어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외숙부 강징은 바로 옆에 있음에도 눈을 돌려 다른 곳을 향한 채 보이지 않는 먼 곳을 애써 곱아 보기라도 하듯 인상을 찌푸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말하고 싶은 것을 알아차릴 때엔 눈치도 좋게 저 멀리 걸어가곤 했다. 그들이 어른이고 자신이 어린애일 뿐이기에, 어른의 말꼬리를 잡아챌 정도의 기지가 턱없이 모자란 탓에 번번이 이어지는 일들이었다. 말할 기회가 있어도 입이 열리지 않던 적이 부지기수였다. 금릉이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였다. 철이 일찍 들고 어른과 비슷한 행세를 하고 싶어도 결국 할 수 있는 것은 제 목소리를 들어달라 외치며 악을 쓰는 것밖에 없었다. 돌아오는 것은 또 모이는 이 없이 휑한 바람만 부는 시간이다. 다들 제 할 말만 했던 주제에. 금릉은 늘 외쳤다.


“닥쳐!”


모두가 그만 말했으면 했다. 그러면 누군가는 정말로 궁금한 것을 들어주지는 않았을지 생각한다.


“금 공자, 할 말이 있다거나, 화를 내실 일이 있다면, 제, 제게 말해주세요. 남……공자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요.” 


그러나 말을 들어주겠다는 이가 왜 하필 천지를 갈라 뒤집어도 죗값을 비울 수 없을 말더듬이 흉시 하나일까. 금릉은 울컥 닥치라며 말을 뱉는 대신 세화를 쥔 손을 더 힘 있게 겨누었다. 검 끝은 귀장군 온녕의 가슴께를 가리키고 있었다. 조금만 뻗으면 닿을 그 자리에 귀장군은 두 손을 공손히 말아 쥔 채 물끄러미 금릉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엔 어떠한 망설임과 두려움도 없었다. 흉시이니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다가올 검도 피하지 않고 되려 덤비지도 않으며 주눅 든 말을 더듬거리는 것은, 무엇이라고 이해를 해야 할까. 


“금 공자! 잠시만요, 진정하고 검은 일단 거두어주세요! 일단 대화라도……!”


남사추가 황급히 온녕의 등 뒤에서 튀어나왔다. 눈앞에 검이 닿아 있음에도 몸을 내밀며 금릉을 마주하는 말은 결국 귀장군 온녕과 다르지 않았다. 그도 귀장군이 어떤 자인지 충분히 알고도 남았을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가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가에 관해서, 나이의 많고 적음을 따질 것 없이 모두가 알고 있다는 것도, 그중엔 눈앞의 제 또래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걸 알면서도 귀장군의 앞을 가로막은 남사추는 그와 마찬가지로 망설임도 지체도 없었다. 금릉이 애써 표현한 적은 없었지만, 남사추라는 제 또래가 누구보다도 성실하며, 실상 다정한 소년이란 걸 알고 있다. 그가 고소 남 씨의 아정함을 올곧게 따르는 세가의 소년이어서가 아니라 그저 말 한마디마다 담긴 진심에 구태여 차가운 것이나 거짓을 찾아내지 않아도 된다는 게 그랬다. 금릉은 친구로 두고 싶은 사람도 없으며, 친구가 어떤 것인지는 여태 알지 못했지만, 어쩌면 친구와 비슷하게 지낼 수 있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사추는 그렇게 생각한 사람 중 하나였다.


“저리 꺼져!” 


바보 같은 일이었다. 하나같이 겁도 없고 멍청한 짓거리일 뿐이다. 위험한 걸 알면서도 몸을 내미는 꼴이, 모든 좋은 사람들은 다 하나같이 이런 식인지.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향하게 되는 것이 말이 아니라 왜 검인지.

차마 내버려 두지 못하는 검 대신 손이 뻗어 나갔다. 미움 대신 설움 담긴 손이 모든 것을 쏟아내기라도 한 듯했다.


“사추!” 

“남 공자, 괜, 괜찮아요?” 


정신을 차리니 남사추가 나동그라진 채였다. 재빨리 뒤를 붙잡은 남경의와 온녕 덕에 다치지는 않았지만 갑작스레 몸이 밀린 탓에 당황한 얼굴이었다. 제 손으로 밀어놓고 아주 뒤늦게야 상황을 파악한 금릉이 밀어낸 손을 거두지도 못하고 굳어버렸다. 자신을 돌아보며 무어라 화를 내는 남경의와, 살풋 인상을 찡그렸지만 괜찮다며 이내 미소 짓는 남사추와, 그런 남사추를 보고 걱정하는 온녕이 보였다. 그는 양 손으로 남사추의 어깨와 팔을 짚어보며 잘 지어 보일 수 없을 표정 대신 온몸으로 남사추를 걱정하고 있었다. 

저 모습에 과연 감정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체온이라곤 없을 창백한 얼굴에 실은 누구보다 따뜻하고 싶었을 정과 애착이 과연 없었을까. 그도 태어나 사람으로 지내며 그리워하는 이가 없었을까. 지키고 싶었던 사람이 없었을까. 그 애착이 죽은 자가 되어서도 남아있어 이렇게 제 앞을 가로막는 것이라면, 정말로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 그저 이렇게 서 있는 것이라면. 그 또한 그저 살았을 사람일 뿐인데 영문도 모른 채 죽었을 뿐이라면. 귀에 담아 곱씹었던 많은 이야기들 속엔 그저 미움으로만 기억되어 죽이 되듯 끓어오른 감정만이 있는 줄 알았다. 뚜껑을 덮어두면 가라앉을까. 인정하지 않아도 될 것 정도야 가리어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미워해야 할 사람들 또한 다 왜 이런 것인지.


“야, 금릉! 넌 진짜 왜 이 모양이야! 됐으니 그 검이나 좀 내려놔!”


누군가 등 뒤에서 소리쳤다. 그제야 금릉은 제 손에 쥐어진 세화를 늘어뜨렸다. 별안간 무거웠으나 손에서 놓지는 않았다. 어릴 때를 빼고 무거웠던 적이 또 있을까? 그것이 바로 얼마 전의 일임을 깨닫는다. 세화를 손에 쥐었을 때부터 마음에 그리던 일을 해냈을 때였다. 그러나 못내 그러고 싶지도 않았음을 알고 있다. 원수를 죽이고 싶었지만 그를 찌르고 싶지는 않았다. 


두 번째였다. 이번에는 정말 괜찮을 줄 알았다.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일은 결국 해내지 못했다. 사람도 아닌 흉시였으니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럼에도 검은 무거웠다. 잘 못한 일을 말리기라도 하는 양 점점 더 무거워졌다. 그래도 놓을 수는 없었다. 손에 들고 있는 것도 버거운 느낌이다. 금릉은 어린 날처럼 세화를 끌어안았다. 정교하게 조각된 검집이 손마디에 걸렸다. 잘못한 일은 없었다. 잘 알고 있는 일이다. 그래도 그러면 안 되었다는 걸 알았다. 여러 목소리가 자신을 탓한다는 걸 알았다. 잘못한 것은 없지만 혹시라도 참았다면, 이야기를 했었더라면 달라질 수도 있었을까 싶었던 일들이 있기에 그들의 비난을 모두 물릴 수 없단 것도 알았다. 뒤늦게야 그때 다 떨구지 못했던 것을 생각했다. 숨길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한 비를 떠올렸다. 그때는 추워서 어깨마저 떨어야 했던 굵은 빗줄기가 내려왔다. 그때도 금릉은 세화를 껴안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발길을 돌려 아무도 없었을 금린대의 계단 아래에서, 결국 지금과 같이 검을 부둥켜안고 주저앉아 울었다. 


“싫어, 못 놔……. 내가 왜 내려놔. 이건 아버지의 검이야.” 


아버지의 검이야, 이 검만 있으면, 나는, 나는……. 젖어든 채 숨에 먹힌 말들이 아롱지며 흩어졌다. 멈추어버린 소년들의 아우성 뒤로 뒤늦게 많은 발소리들이 다가온다는 걸 알았다. 비도 내리지 않는데 얼굴이 축축했다. 천둥번개라도 치는 것 마냥 귓가가 시끄러웠다. 그것이 제 울음임을 알면서도 금릉은 그치지 못했다. 비 처럼 하염없이 흘러내려 바닥을 적신다는 걸 알면서도 금릉은 비로소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선실 안에 히끅거리는 소리만 간간히 튀어 올랐다. 코를 훌쩍이고 눈가를 문지르는 소년의 옆모습을 강만음은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 참았나 싶었던 울음은 단 둘이 배 위로 올라오자마자 밑이 깨져 질금질금 흐르는 수통처럼 줄줄이 흐르고 있다. 아까처럼 우렁찬 통곡은 아니었지만 굵게 멍울져 제 옷자락을 흠뻑 적시는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검은 또 왜 그리 죽부인 마냥 끌어안고 있는지. 허, 하고 짧게 내뱉은 숨을 혹여 혀를 차는 소리로라도 들었는지 금릉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러나 이내 들려오는 호통이 없어 잠깐 동안 눈만 깜빡인다. 한두 번 닫혔던 눈꺼풀이 열릴 때마다 무릎 위로 톡톡 떨어지는 것들이 왜 그리 크게 번지는 지 모를 일이었다.


강만음은 우는 아이를 달래는 것이 영 어색한 사람이었다. 다 큰 어른이었다면 타박을 해서라도 무안을 주어 그치게 했을 것을, 소란을 듣고 달려 나오게 한 우렁찬 울음소리가 제 조카란 것에 주변에 엄한 눈치를 주며 추궁으로 다독임을 대신해 잠깐이나마 그치게 했을 뿐이다. 잠깐 뱉은 탄식은 그저 방법을 모르고 지켜보던 일이 또 있었던 것에 대한 회상으로 저도 모르게 나온 헛웃음이었다.


사람이 이리도 울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아주 옛적 제 가족을 통해 본 적이 있다. 누이인 강염리는 원체가 늘 온화하고 자상하게 웃어 보이는 상이 었으나 크게 상심하면 이유도 말하지 않고 거의 통곡 지경으로 주저앉아 울었었다. 강만음이 열몇의 초입, 제 누이도 마찬가지로 어렸을 적의 일이다. 그리고 그 옆엔 그도 있었지. 훌쩍이며 어깨를 들썩이는 금릉의 맞은편에 마치 어린날의 소년이 함께 하는 것 같았다.


금릉의 울음소리를 듣고 쫓아 나왔을 때 마찬가지로 놀라서 뛰쳐나온 위무선을 보았다. 그는 당황한 채로 저도 모르게 금릉을 향해 손을 뻗으며 어쩔 줄 모르고 말을 걸고 있었다. 금릉, 왜 울어, 무슨 일이야. 어울리지 않게 모든 말을 망설임으로 시작하는 그 행색이 그때와 같았다.


사저, 저기, 왜 울어요, 네? 사저……. 세상이 떠나가라 서럽게 우는 사람을 두고 두 소년이 손을 허우적거리며 난리 치던 그때의 기억이었다. 

강염리가 울었던 이유는 그저 품 안에 곱게 꺾어 품고 온 모란 다발 때문이었다. 강만음과 위무선이 장난을 친답시고 문간을 넘어오던 강염리를 놀라게 했을 때, 소중하게 품어 온 다발을 놓치고 엉덩방아를 찧으며 꽃대가 뭉그러지고 꺾였을 적. 모란꽃 줄기 몇 가닥에 무엇이 그렇게 서러웠는지는 강만음도 위무선도 알 수 없었다. 두 소년은 주저앉아 통곡하는 누이를 두고 손짓 발짓을 해가며 덩달아 울상이 된 채 울지 말아 달라 빌었다. 


시간이 흘러 그저 세월을 기억으로 간직한 강만음은 여전히 우는 사람을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몰랐다. 그러나 그쳐 달라고 빌어본들 흐르던 것이 멈추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았다.


“……닮은 것은 하나도 없는 줄 알았더니 그렇게 품고 있었느냐.” 


영문도 모른 채 고개를 들어 보이는 금릉은 아직까지도 울고 있었다. 강만음은 자신이 찡그리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분간 못할 표정으로 선실의 창 밖을 바라보았다. 바깥에서 이제 그만 출발하겠다는 사공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든 눈물이 그랬겠지. 그랬기에 강만음은 울고 있는 금릉을 내버려 두기로 했다. 아낌없이 울고 나면 다 괜찮아질 것이므로. 정작 제 자신은 겪어보지도 않은 일이었지만 조카의 울음은 그리 되기를 바랐다.


그때의 강염리도 결국 한참이 지나서야 울음을 그쳤다. 괜찮다고 말하는 누이의 양손을 나누어 붙잡고 모란을 꺾으러 가자고 했다. 사저가 가져온 것보다 더 예쁘게 피는 곳을 안다며 위무선이 허풍을 떨었다. 강염리는 결국 아직 마르지도 않은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두 소년도 그 얼굴을 마주보며 웃었다. 따뜻한 봄날의 일이었다.


잡식성 독거 오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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