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아니 되십니다.”

 

황후의 앞을 상궁들이 막았어. 동시에 인비도 길이 막혔음. 아인궁으로 가는 길이었지.

 

“감히 누구 앞이라고 막아서는 게야?”

“태후마마의 명이십니다. 절대 아인궁으로 가지 못하게 하시라고…”

“내명부의 주인은 황후마마시다. 태후마마가 아니라…”

“언니. 그만 하세요.”

 

한의가 말리자 인비가 성을 냈어. 그러고는 안으로 들어갔지. 한의는 길을 막은 상궁 둘을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올려서 뺨을 차례로 때렸어. 놀란 상궁들이 무릎을 꿇었음.

 

“주인에게 말대꾸하지 마라.”

 

건방지게. 말을 던지고는 안으로 들어왔어. 그냥 화풀이한 셈이었음. 뭐, 이런 대단한 몸이 됐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 황제만 아니라면 죄다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었음. 거기다 제가 품은 아이는 황제가 될 텐데, 앞으로 그 누가 자신에게 함부로 대하겠어. 하찮은 노비의 딸로 살던 때는 이제 지난 지 오래였지.

 

“왜 못 가게 하시는 것이냐. 태후마마께서 너에게만 해준 말씀이 있는 거야?”

“별말 아니었어요.”

“그래도 그렇지, 나한테는 이야기를 해야 해결을 하잖아. 너는 나 없으면…”

“…내가 언니라고 다 이야기할 필요는 없잖아.”

“…뭐?”

“내가 계속 말 높이는 것도 그래. 아무리 언니라도… 말 높이기 싫어, 이제.”

“…….”

“난 황후라고. 언니도 나한테 예를 갖춰줘.”

 

한의가 말하자, 인비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했어. 탁자 아래로 들어간 손에 힘이 들어가겠지. 감히 천한 핏줄 주제에. 첩도 되지 못한 어미를 가진 것이 감히 까불어. 손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우선은 참아야 했어. 지금은 저만 손해니까.

 

“남들이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나는 황후인데 존대를 하고, 언니는 비인데…”

“…….”

“둘만 있을 때면 괜찮지만, 밖에서까지 나한테 함부로 대하지 말아줘.”

“……알겠어.”

 

내 생각이 짧았다. 밖에서는 깍듯하게 할게. 인비가 가까스로 웃으며 말했어. 한의가 그제야 자리에 앉았음. 내가 다 말하면 죽는다는 말을 간신히 삼킨 채였어. 그 말을 하면 자신도 죽을 수밖에 없으니 말하지 못하는 것이거든. 어차피 같은 가문이고 자매인 이상, 한 몸이었지. 인비는 마음속 깊숙하게 불만을 숨기며 헛기침했어. 추후의 일은 추후에 도모하면 되니까.

 

“대책이 필요해. 폐하께서 언제까지 아인궁에 계실 수는 없으니까.”

“…….”

“언니도 도와줘. 부탁이야. 난 황후인데… 이렇게 무시당하면 우리 가문은 어떻게 해?”

“저리 계시는데 방법이 어디 있어. 폐하께서 고집이 얼마나 강하신데.”

“방법이 없을까? 계속 저렇게 계시면…”

“그러니까 폐하의 마음을 잡았어야지!”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 폐하께서는… 폐하께서는 침궁에 고작 두 번밖에 안 오셨어. 내가 무얼 할 시간도 없었다고.”

 

한의가 불만스럽게 말했어. 후궁으로 들어간 날 그리고 열흘 후. 그게 끝이었어. 황제는 한의를 쳐다보지도 않았음. 촛불 하나 켜지도 못했지. 그렇다고 제 체면에 황제를 붙잡을 수도 없었어. 황제는 합궁이 끝나는 즉시 나가버렸고, 그 어떤 말도 안 했지. 한 마디만 빼고 말이야.

 

“더구나 두 번 다 술에 잔뜩 취하셨어. 제대로 걷지도 못하셨다고. 말이나 하신 줄 알아?”

“원래 그러신 분이야. 술은 몰라도, 처음부터 우리에게 말씀은 잘 하지도 않으셨어.”

“하지만 합궁이잖아. 어떻게…”

“이제 너도 알 텐데. 그냥 필요해서 하시는 것이지 다른 감정은 하나도 없으셔.”

“…….”

“우리 후궁들은 쭉 이렇게 살았어. 애정은 원래부터 그 애한테 밖에 없으셨다고. 다정한 말도 눈빛도 행동도 전부.”

“그건 귀인이라 그런 거잖아. 이제는 내가 귀인인데…”

“너랑 같아? 그 애는 강보에 싸였을 때부터 보셨는데.”

 

한의가 잠시 입을 다물었어. 아무런 애정도 없는 거친 합궁은 기대한 적이 없어. 자신은 운명의 귀인으로 입궁했으니까. 설마 인사불성이 되어서 혼방에 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거든. 정말로 귀인인 저에게 그럴 줄은 몰랐어. 마치 본가에서 천시받을 때처럼. 아니, 더 천시받는 기분이었지. 신분이 천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 존재 자체로 황제가 무시하는 느낌. 입술을 깨문 한의가 인비를 바라봤어.

 

“그래도… 잘해주실 거야. 아이만 낳으면.”

“글쎄다. 지금 같아서야…”

“차라리 귀비를 설득해서 우리 편으로 만들걸.”

“그게 말이 되니?”

“폐하께서 유일하게 다정하게 대해주셨다며. 그럼 좋게 말해달라고는 할 수 있잖아. 어쨌든 우리한테는 필요했어.”

“…그 애가 그렇게 될 줄 알았겠냐고. 나도 그렇게 죽을 줄 몰랐어.”


인비가 입술을 뜯었어. 지민도 그렇지만, 황제가 저런 꼴이 될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음. 한의도, 자신도 마찬가지였어. 한의는 한숨을 쉬며 배를 쓰다듬었어. 인비는 조용히 그 배를 노려봤음. 웃기지. 진짜 귀인도 아닌 주제에. 비웃음을 간신히 삼켜냈음.

 

“아이가 아바마마 목소리 한번을 못 들었어.”

“어차피 아바마마도 아니잖아.”

“언니!”

“이럴 거면 내 사주나 조작할 걸 그랬어. 나는 그나마 계속 폐하를 모신 후궁이었지, 너는 딱 두 번 모시고 끝이잖아. 그럼 어떻게 진짜 아이를 가져?”

“저주가 안 풀리면 어차피 그 누구도 황손은 못 가져.”


그냥 이 아이가 끝이라고. 한의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어. 인비는 한숨을 쉬며 차를 마셨음.

 

“그 애가 죽었는데 저주를 어떻게 풀어? 원래대로라면, 박지민이 황손을 가져서 저주가 풀렸어야 했어.”


그랬다면 우리 다 진짜 황손을 가질 수 있었겠지. 그 애는 내치고 말이야. 인비가 배를 보며 말하자, 한의가 주먹을 쥐었어. 왜, 그래도 네 아이라고 화가 나니? 인비가 물었어. 정말 이럴 거면, 태생부터 조작이라도 할걸. 가문이 멍청해서 이 지경까지 온 게 너무 답답했음.

 

“그 애는 죽었잖아. 그럼 내 아이만 황손인 거야.”

“간도 크다. 너랑 놀아난 그 사내만 아니었으면…”

“언니. 설마 같이 죽고 싶은 건 아니지?”

“누가 죽고 싶대? 어쨌든 애가 생겨서 급하게 일을 꾸민 건데.”


계획이 틀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원래대로라면, 지민이 늦게라도 아이를 가졌어야 했음. 그러면 저주가 풀릴 거고 다른 후궁들도 황손을 가질 수 있었겠지. 그럼 한의의 첫째가 아닌 둘째를 황위로 세울 거였어. 진짜 황제의 아이를 말이야. 그게 가문과 제 계획이었는데, 이제 지민이 죽어버렸으니 저주가 풀릴 길이 아예 사라진 거였음.

 

“그래도 계속 저렇게 계실 분은 아니야. 이때라도 네가 위로를 해드리면 좋기야 하겠지만…”

“눈앞에 나타나면 가만두지 않으실 거라고 했어. 정 내관이 근처에도 오지 말라고 했다고. 태후마마께서도 화만 내시고…”

“…그럼 일단 아이 낳을 때까지는 가만히 있어. 어차피 그 애는 이제 황손이야. 아이가 태어나면, 폐하께서도 정신을 차리실 테지.”

“아이가 태어나도 그대로시면? 그리고 이 애가 황자가 아니면?”

“어차피 진짜 황손도 아닌데, 사내 애로 바꾸는 게 힘들어? 아버지에게 말씀드리면, 갓난 사내 애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어.”


잘 들어, 한의야. 우리는 이제 방법이 없어. 그 애는 무조건 황자여야만 하고, 무조건 건강하게 자라서 황위를 이어받아야 해. 아니라면 우리 전부 몰살이야. 그러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 인비가 한의의 팔을 세게 붙잡으며 말했어. 그래봤자 서녀야. 첩도 아닌 노비의 딸. 자신은 적녀에 언니이니 통제할 수 있었음. 그렇게 눈을 똑바로 보니까 한의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어.

 

그래. 아이만 태어나면, 황제도 예뻐해 주겠지. 유일한 황손인데 어떻게 미워하겠어? 그래서 일단은 기다리기로 했어. 아니라면 태후의 입김이라도 있을 테니 괜찮을 거야. 한의는 불안한 얼굴을 하며 배를 매만졌음.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 애써 무시한 채였지. 물론, 술에 잔뜩 취한 황제가 저와 합궁하며 유일하게 남겼던 말이 ‘지민’이라는 것도 무시한 채였어.

 

인비는 그런 동생을 보다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어. 내 방으로 갈게. 말하고는 밖으로 나왔음. 밖에서 기다리던 상궁이 인비를 따라 인비의 방으로 들어오겠지.

 

“건방지고 멍청한 것.”

 

인비가 중얼대며 겉옷을 벗어 던졌어. 상궁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며 인비를 바라봤음. 또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물으니, 인비는 미간을 좁혔어.

 

“우습지 않으냐.”

“예? 황후마마께서요?”

“황후는 무슨…”

 

말이 흐려져. 말을 중간에 끊은 인비가 상궁을 가만히 쳐다봤어. 입궁한 지 얼마나 되었더라. 10년은 족히 되었으니 상궁이 자신을 모신지도 그쯤 되었지. 그러니 믿을 수 있었어. 한창 박지민과 사이가 좋지 않을 때도 제 편을 들어줬고, 제가 지민을 욕보이는 말도 퍼지지 않았으니. 꽤 믿음직했지.

 

“너라면 괜찮겠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이온지…”

“어차피 황후는 내가 될 것이다.”

“…예?”

“내가 황후가 될 것이라고. 황손만 있으면 어미가 누구든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천한 계집보다야 명문가의 적녀인 내가 황후가 되는 것이 맞지. 태후마마께서도 반대 안 하실 거다. 저 애만 죽으면.”

 

원래 계획은 그랬어. 한의의 둘째 아이를 다음 황제로 세울 것. 하지만 인비는 이미 제 부모와 따로 이야기를 했음. 한 마디로 원래 계획이란 한의를 안심시키기 위한 계획이었지. 부모와 말한 진짜 계획은 한의가 아이를 낳으면 제가 그 아이를 갖는 거였음. 그 사이에 지민이 저주를 풀든 할 테니 친 아이가 생기면 좋은 것이고, 아니라도 한의의 아이가 있으니 제가 황후가 될 수 있었지. 황손을 낳은 황후가 죽으면 가장 높은 후궁이 황후가 될 텐데 자신은 가문도 제일 좋았고 귀인의 언니이기도 하니까.

 

그렇게 지민과 한의 둘 다 밀어내고 황후가 되려고 했단 말이야. 하지만 지민이 죽었으니 저주가 풀릴 가능성은 사라졌고, 한의는 눈길조차 못 받고 있었음. 뭐 아이만 있으면 되기야 하겠지만. 인비는 무거운 머리 장식을 떼어내며 짧은 숨을 뱉었어.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해야지. 어쨌든 박지민은 눈엣가시였어.”

 

상궁의 놀란 얼굴을 보던 인비가 말을 이었어. 정 아이가 필요하면 자신도 한의처럼 다른 사내의 아이라도 가지면 그만이지. 어쨌든 목표는 더 가까워진 것도 같았어. 한의가 이대로 황제의 미움을 사면 자신이 더욱 지지를 받을지도 모르고.

 

“놀랐느냐.”

“아, 아니옵니다, 마마.”

“너는 내 사람이니까. 이 정도 말은 편하게 해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마마.”

“아, 그럼 하나 더 알려줄까.”

“무엇을…”

“가까이 오거라.”

 

인비가 손가락을 까딱거렸어. 상궁이 더 가까이 오겠지. 인비가 그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어. 상궁이 놀라서 입을 벌렸음.

 

“알겠느냐. 어차피 그 계집은 이미 다른 사내 맛을 봤어.”

“그런데 어찌…”

“계획이 조금 틀어졌지. 그래도 황손은 있다.”

 

‘내’ 황손이 될 아이. 인비가 예쁘게 웃었어. 10년이야. 10년을 이 후궁에서 버텼어. 그래도 그나마 괜찮은 후궁이니 비의 자리까지 온 거였지. 인비는 그런 자부심이 있었음. 후궁들 생활이야 다들 비슷하고 또 황제는 지민에게만 다정했지만, 그중에서는 자신이 가장 낫다고 생각했지. 지민이 사라진 지금은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고. 그러니 결국 황후 자리는 자신의 것이 될 거였어.

 

“조금만 기다려라. 내, 황후 자리에 앉으면 널 지금보다도 더 호강하게 해주마.”

“영광이옵니다, 마마.”

 

상궁이 고개를 조아리며 인비를 따라 웃었어. 비밀이 뭐든 어때. 부귀영화만 누리면 그만이지. 어차피 황제는 저주받았고, 타버린 시체 앞에서 한 달 내내 저러고 있는 것을.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어.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

 

 

***

 


“아…”

“왜, 배가 아파?”

“조금 당겨서…”

 

괜찮아. 지민이 웃으면서 그늘에 앉았어. 잠깐만 쉬었다가 가자. 말하겠지. 유모가 주먹밥을 꺼내서 지민에게 먹여줬어. 지민은 배를 쓰다듬으면서 천천히 밥을 받아먹었음.

 

“유모가 나 때문에 고생이 많네.”

“그런 말 안 하기로 했잖아.”

“응. 그래도 엄마 같아서 좋다.”


웃는데, 너무 앳된 얼굴이야. 유모는 그냥 아이 뺨만 쓰다듬었어. 그러다 물통도 꺼내서 물도 먹였어. 세상에서 제일 귀한 아이인데,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매일매일 생각해도 억울해. 원실은 퉁퉁 부은 발을 주물러주면서 눈물을 꾹 참았어.

 

“다음 주막까지는 길이 머니까, 힘을 내야 해. 산에서 잘 수는 없으니까.”

“응. 나 괜찮아.”


더 걸을 수 있어. 산 내려가면 쉬고 그때 나귀 타고 가자. 지민도 유모를 다독였어. 걱정스러운 원실의 표정이 보였지만, 그래도 안심시키고 싶었음.

 

“유모.”

“응?”

“호랑이는 산에 살지?”

“응. 그렇지.”

“그럼… 이 산에… 호랑이는 없겠지?”

 

어흥! 나타나면 어떻게 해? 지민이 장난스레 웃으며 호랑이 흉내를 냈어. 원실이 그제야 웃었음.

 

“또 장난치는구나.”

 

어릴 적부터 하던 장난이야. 어쩜 이렇게 변한 것이 없는지. 아직도 어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혼인을 하면 이런 장난은 안 할 줄 알았는데. 저 안심시켜주겠다고 이러는 아이가 너무 귀엽고 애틋했어.

 

“그럼 내가 막아줘야지.”

“아니야. 나무 위로 올라가자.”

“호랑이는 나무도 잘 탈 거야.”

“정말? 그럼 도망가야겠다.”

 

지민이 말하면서 주먹밥을 먹었어. 잠시 그러고 있었지. 그러다가 지민의 표정이 또 어두워져. 생각이 많아서 그래. 많고 많은데, 그중 대부분은 황제의 생각이니 표정이 나빠지는 거야. 원실은 말없이 지민을 눕혔어. 원실의 다리를 베고 누운 지민이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다시 말을 꺼냈어.

 

“유모.”

“응.”

“이런 말 안 하고 싶은데…”

“괜찮아. 말해봐.”

“…왜 내 장례를 치르시지 않았을까?”


내가 그런 말을 해서, 너무 미워서 그냥 그리 두시는 걸까? 그치만 폐위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지민이 말끝을 흐렸어. 유모가 지민의 머리를 쓰다듬었어.

 

“너무 슬퍼서 그러실 수도 있지.”

“…내가 미운 말만 했는데?”

“그러니 더 슬프실 수도 있고.”

“……계속 마음에 걸려서, 미칠 것 같아.”


확실히 들키지는 않았어. 군사들은 도성으로나 갔지 누군가를 찾기 위해 제국에 퍼지지는 않았으니까. 그래서 다행이기는 했는데, 아직도 장례를 치르지 않은 건 자꾸 마음에 걸렸어. 도대체 왜. 왜 장례조차 치르지 않을까.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음.

 

“정말 더 슬퍼하시는 걸까?”

“지민아. 폐하의 마음이 아주 거짓은 아닐 거야. 너도 진심이었잖아.”

“…하지만……”

“걱정이 되는 거지?”

 

유모가 물었어. 지민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어. 무슨 일이 있는지는 자세히 몰라. 하지만 죽은 사람 장례를 미루는 건 태형에게 문제가 있다는 거니까. 저를 미워해서 그러는 것이든, 아니라면 정말 슬퍼해서 그러는 것이든. 둘 다 너무 걱정됐어.

 

“폐하를 연모하잖아. 아니야?”

“……맞아.”

“연모하는 분이니 걱정이 되는 것이 당연하지. 그런 마음마저 없앨 필요는 없단다.”

 

사람 마음은 그렇게 쉽게 도려낼 수 없어. 유모가 딱 잘라 말했어. 아픈 것도, 걱정하는 것도 당연한 거라는 말이지. 지민은 그 감정을 떨쳐내려고 했는데, 그러지 말라는 거야. 당연한 일이니까. 어쩔 수 없으니까. 잠시 생각하던 지민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어. 유모 말이 다 맞아. 이 감정을 없앨 수는 없어. 그저 품고 살아야지. 이렇게. 지민은 볼록 나온 배를 쓰다듬으며 다시 마음을 다잡았어.

 

“그래도 마음먹었으니까, 걱정이 된다고 해서 다시 돌아가진 않을 거야. 유모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으니까… 네 말대로 해야지.”


유모가 장난스레 말했어. 지민이 고개를 끄덕였어. 자신을 미워하는지, 슬퍼하는지는 알 수 없어. 그러니 더 모진 말을 해야 했을까. 나쁜 생각이 들어.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미워하지 말고 슬퍼했으면 좋겠는 거 있지. 자기 자신조차 헷갈리는 마음이었지만, 둘 다 황제를 연모해서 그러는 것인걸. 지민은 조용히 배를 매만지면서 심호흡했어. 아무래도 이 이야기는 그만해야 할 듯싶었음. 그래서 다른 이야기를 꺼내기로 했지.

 

“부모님이 살아계셨으면 좋겠다.”

“원래는 귀양을 보냈는데, 어째서 죽었다고 소문이 돈 건지는 알아봐야겠다.”

“국경 사람들은 노역을 힘들게 한다던데…”


형제들은 살아있는 게 확실했어. 태형이 직접 목을 베겠다고 했었으니까. 하지만 부모는 죽었다는 말이 떠돌았어. 원래는 죽이지 않고 보냈는데, 거기서 죽었다고 다들 그랬었거든. 그래서 제발 그게 아니기를 바랐어. 적어도 평생을 친부모 얼굴도 모른 채로 살기 싫었고 또 미안하다고, 황제가 그리한 것도 몰랐다고 말해주고 싶었어.

 

지민은 잠시 하늘을 바라봤어. 커다란 하늘에 구름이 떠다녀. 물론 황제의 얼굴도 같이 떠다니겠지. 두고 온 나머지 유모들의 얼굴도 있고 또 얼굴도 모르는 가족의 형상도 있어. 지민은 보고 싶은 모든 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코를 찡긋거렸어.

 

“유모.”

“응?”

“…보고 싶은 사람이 너무 많다.“

 

언제까지 나는 그리워만 할까. 눈에 눈물이 고였어.

 

 

***

 

 

‘폐하.’

‘업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아…’

‘폐하…!’

‘연모하는 사람의 아이를 가지고 싶어요.’

‘폐하!’

‘살갗을 도려내고…’

 

지민아! 태형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어. 정 내관이 후다닥 달려오겠지. 태형은 제가 있는 곳이 아인궁의 침상 위임을 확인하고 고개를 돌렸어. 지민의 관이 여전히 그곳에 있었음.

 

“폐하, 뭐라도 드셔야 합니다. 소신이 이렇게 빌겠습니다. 제발…”

“날 아인궁에 눕힌 건 잘했다. 또 이런 일이 있어도, 내 허락 없이 영화궁으로 가지 말아라. 무조건 이곳에서 날 모셔.”

“예, 폐하. 그러니 수라를 받아주십시오.”


음식을 가져오겠습니다. 제발 잡수세요. 제발… 정 내관이 애원했어. 태형은 머리를 짚으며 일어났음. 그리고 다시 지민의 관 위를 살폈어. 조금 묻은 티끌을 또 털어내겠지. 정 내관은 강박적인 태형의 행동을 보다가 한숨을 뱉었어.

 

“폐하. 종친들이 왔었습니다.”

“아인궁에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였잖아.”

“예, 그리하여 돌려보냈사온데… 아무래도 다들 걱정을…”

“황위를 탐내는 거겠지.”

“폐하께서 직접 보셔야 할 상소가 너무나도 많이 쌓였습니다.”

“지민이보다 더 중요한 건 없어.”

“폐하… 마마께서는 하늘로 돌아가셨어요…”


태형이 헛웃음을 지었어. 내가 그걸 몰라서 이러는 것 같아? 되묻겠지. 이렇게까지 총기가 흐려진 건 난생처음 보는 일이었어. 정 내관은 제 주인의 비어버린 눈동자를 보며 눈물만 흘려냈음.

 

“그럼 어쩌실 작정입니까. 장례를 치르지 않으십니까?”

“…장례 얘기는 더 듣고 싶지 않아. 그만해.”

“폐하. 이건 마마에 대한 예가 아닙니다. 마마께서는…”

“알아! 지민이는 죽었어!”

 

나도 안다고. 태형이 버럭 화를 냈어. 정 내관은 움찔거렸지만, 그래도 몸을 피하지는 않았음. 언제까지 이럴 수는 없잖아. 벌써 한 달도 더 지났는데. 장례라도 치러야 황제가 미련을 놓을 것 같았음.

 

“아시면서 왜 장례를…”

“말하지 않았느냐? 지민이를 살릴 수 있어.”

“…폐하.”

“내가 알아보라고 한 건? 그건 다 찾았어?”

“…….”

“찾았냐고!”


전국의 신녀를 모으라고 했잖아. 태형이 말했어. 눈이 돌아 있었어. 정상이 아니야. 제정신이 아니야. 죽은 사람을 어떻게 살릴 수 있다는 것인지. 정 내관이 고개를 푹 숙였어.

 

내 저주도 풀 방법이 있었잖아. 그러니 죽은 사람 살리는 일이 어렵겠느냐? 하다못해 환생이라도 하겠지. 뭐라도 되겠지. 안 그래? 혼만 불러낼 수 있으면 살릴 수 있을 거라고. 태형이 정 내관을 붙들면서 말했어. 정 내관이 눈을 질끈 감았음.

 

“폐하… 제발 그만….”

“다시 안 물어. 대답해. 그들에게 물어봤어?”

“…아무도 방법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자세히 물어봤어? 그들은 영험하잖아. 분명 방법을 알 거야.”

“제국에 사찰이 많습니다. 전부 묻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소신이 물어본 고승들은 전부 모르겠다는 서신을 보냈습니다.”

“…유명한 고승들이 더 있을 거잖아. 그리고 전국의 신녀를 다 모은 것도 아닐 테지. 내가 직접 신녀들에게도 물어야겠다.”

“차라리 대무녀를 새로 정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정 내관이 묘수를 냈어. 뭐라도 정무를 보게 해야만 했으니까, 대무녀 핑계를 댔지. 태형이 죽여버렸으니 새로 정해야 했는데 아직도 못하고 있었거든. 조정의 일도 제대로 안 보는데 대무녀라고 새로 정했겠어? 그러니 그런 일이라도 하게 하려고 했어. 그렇게 정무를 보게끔 하면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릴까 싶었지. 하지만 예상과는 다른 대답이 떨어졌어.

 

네가 정해. 태형이 대충 말했어. 놀란 숨소리가 울렸어.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거든. 네가 정하라고 할 수가 없잖아. 어떻게 황실의 일을 내관이 정하겠음. 정 내관이 기겁하며 엎드리겠지.

 

“폐하, 어찌 저에게 이러십니까. 후한의 십상시를 모르신단 말입니까? 이러시면 제가 죽습니다.”

 

이건 망국이야. 망국의 황제나 하는 일이야. 더 두고 볼 수가 없었어. 아무래도 태후에게 아뢰어야 할 것 같았음. 이 일이 알려지면 더는 종친들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황제가 사술이라도 써서 죽은 사람을 살리려고 하는데, 누가 좋게 봐주겠음.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가능해도 정해진 운명을 어기는 건 제국이 멸할 일이었지. 그래서 그냥 고개만 조아리며 흐느꼈어.

 

“제발 마마를 보내주십시오.”

“내가 그 애한테 해준 게 없잖아.”

“폐하…”

“아무것도 못 해줬어. 그냥… 황손이나 낳으라고 했잖아.”

“…….”

“지민이는 나를 연모한다고 했는데…”


나는 그 말을 한 번도 못 해줬어. 아니지. 그 말을 해주겠다고 생각은 했을까? 그저 그 애를 취하고 안기만 했어. 지민이가 바란 건 그런 게 아니었는데, 그냥 그거로 되리라 생각했잖아. 내가 그렇게 멍청했어. 그래서 지민이가 죽은 거야. 너도 알고 있잖아. 태형이 관 앞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어. 그러고는 관을 받치고 있는 단상에 머리를 쿵쿵 박았어. 정 내관이 급하게 말렸는데도 이미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음.

 

“지민아…”

“폐하, 제가 신녀들을 부르겠습니다. 직접 하문하시지요.”


분명 마마께서는 좋은 세계로 떠나셨을 겁니다. 그것을 확인하세요. 그곳에서 행복하실 거예요. 정 내관이 간신히 말을 돌렸어. 태형의 눈이 흔들렸음.

 

죽은 사람은 다시 살릴 수 없어. 태형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그걸 인정하는 건 너무 힘들었음. 태형은 다시 관 앞에서 무너졌어. 흐느끼는 소리가 울렸어. 정 내관은 그런 태형을 두고 조심스레 밖으로 나갔어. 뭐라도 해야 해. 아니라면 평생 저럴지도 모르지. 그간 스러진 망국의 황제들이 떠오르자, 정 내관은 주먹을 쥐었어. 반란은 절대적으로 막아야 하니까 황제를 정신 차리게 해야만 했음.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정 내관이 급하게 태후궁으로 달려갔어.

 

그래도 황제보다는 태후가 제정신이었지. 지민의 죽음은 태후에게도 똑같이 충격이었기에 황제처럼 미음만 먹고 살기는 했지만, 적어도 황제가 이럴 것을 알고 미리 말을 하라고 했으니까.

 

결국, 정 내관은 그 길로 태후궁으로 가서 즉시 황제의 일을 알렸어. 말을 들은 태후가 머리를 짚었음. 머리가 다시 깨질 듯이 아파졌어. 지독하게도 말이야.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어. 아들이 그때보다도 더 정상이 아니었고, 정신을 놓았다는 생각은 했지. 다른 생각이 있다는 것도 물론 알았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미쳤을 줄이야. 태후가 연신 한숨을 내뱉었어.

 

“죽은 사람을 살리는 법을 알아보라고 했다는 말이냐.”

“예, 태후마마… 더는 제 판단으로 안 될 것 같아…”

 

죽은 사람을 살리는 법. 환생을 시키는 법. 태형은 끊임없이 지민과 다시 만날 방법을 찾고 있었던 거야. 죽은 것을 알면서도.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태후의 입술이 덜덜 떨렸어. 이윽고 손까지 떨렸음. 그때, 말이 죽었을 때. 그때는 그냥 그대로 말을 묻어줬어. 슬프게 울었지만 받아들였지. 하지만 이번엔 사람이고 또 반려였으니 그게 되지 않는 것 같았음. 죽은 사람을 어찌 살리겠느냐. 태후가 흐느끼듯 말했어. 정 내관 또한 연신 괴로운 얼굴을 했어.

 

“일단 황후에게는 말하지 말아라.”

“황후마마께는 어떤 일도 아뢰지 않았습니다. 그건 폐하께 황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신녀들을 우선 내 궁으로 불러. 밤에 몰래.”

“예, 태후마마.”

“장례는 치러야지. 언제까지 저리 둘 수는 없어. 일단 그것부터 해결하자.”

 

신녀들이 몇 명이지? 태후가 물었어. 우선 스무 명 정도 됩니다. 정 내관이 대답했어. 스무 상자의 재물을 준비해. 당장. 그 말을 들은 태후가 명령하자, 상궁들이 바쁘게 움직였어.

 

“어찌하실 생각이신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지민이가 잘 쉬고 있다고 하면… 태형이도 기운을 차릴 것이야.”

“그럼…”

“어쩔 수 없구나. 태형이가 알면 화를 내겠지만, 어미로서는 이대로 둘 수가 없어.”

“…….”

“알려주어서 고맙다. 이제부터는 내가 해결하마.”

 

그러니 황상이 절대 모르게 내 궁으로 데려오거라. 태후가 말했어. 아주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방법은 이제 별로 남아있지 않았음.





28.

 


 

신녀들은 재물을 한 상자씩 받아 챙겼어. 태후의 명과 그에 알맞은 보상까지. 말을 따르지 않을 이유는 없었지. 윗전의 명령이기도 하고, 본인에게도 이득이었으니까.

 

“빈틈없이 해야 할 것이야.”

“내리신 명령대로 따를 것이기는 하나… 폐하께서는 평소에도 쉽게 속지 않는 분이시라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총기가 남다르신 분이라고 들었는데, 저희 말을 믿으실지요. 더구나 대무녀까지 참하셨는데…”


그래도 겁을 먹기는 했어. 다들 걱정을 하고 있었음. 그 말을 듣던 태후가 아픈 머리를 꾹꾹 눌렀어. 지금 제 아들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말을 어떻게 하겠어. 말을 고르고 골라야만 했음.

 

“평소라면 믿지 않았을 테지. 하지만 지금은 믿을 거다.”

“…….”

“지금은 지민이 생각밖에 안 해. 마음도 너무 많이 상했지. 그러니까 믿을 것이다.”


너희들이 잘 해주어야 해. 저리 장례도 치르지 않고 계속 있을 수는 없구나. 더 있다가는 사달이 날 거야. 태후가 간곡하게 부탁했어. 그러자 신녀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갔어. 지켜보던 상궁이 걱정이라는 듯이 다가왔음.

 

“마마, 혹여 폐하께서 아시면…”

“그럼 이번에는 나를 죽일지도 모르지.”

“걱정입니다. 폐하께서는 지금 너무나도 약해지셔서, 마마께 해라도 끼치신다면 어찌합니까?”

“그래도 아들이 저러는데 내가 다른 방법이 있겠느냐? 어차피 지민이는 죽었고, 아들이 그 뒤를 따라가게 생겼는데…”


할 방법이 이것 밖에는 없잖아. 태후가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어. 지민에 이어서 아들까지 잃을 수는 없었음. 더구나 아들이 그냥 아들도 아니고 황제인데. 이 제국의 주인인데. 이건 온 백성이 달린 문제이기도 했어.

 

“한의는 어쩌고 있다더냐.”

“인비 마마의 궁에서 그저 가만히 계십니다.”

“…한의가 잘못하기는 했지. 어찌 그 일을 알리지 말라 하여서……”

“하지만 황후십니다. 계속 저리 계시면 품위도 손상되지 않겠습니까.”

“아인궁을 다시 돌려줄 수는 없다. 새 궁으로 옮기게 해야지. 아인궁은… 이제 아무도 다시 들어가지 못할 거야.”


그러니 한의에게 아인궁에 대한 미련을 버리라고 해. 태후가 말하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차를 마셨어. 태형이 알면 정말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들었어. 이렇듯 아들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거, 두 번째로 있는 일이야. 그날 이후로는 처음이었지. 그나마 그때는 황제가 아닌 아이였지만 지금은 아니야. 그래서 더 두려웠어. 직접 낳아 애지중지 기른 아이인데도 말이야. 그만큼 태형은 제정신이 아니었거든. 확실히, 정신을 거의 놓아버렸지.

 

“어차피 지민이가 죽은 이상, 우리 모자 관계도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

“마마…”

“내가 죽더라도, 태형이는 돌려놔야지.”


어쩔 수 없어. 해야 하는 일이야. 그렇게 생각했어. 옳지 않은 일이라도, 이건 해야 하는 일이라고. 계속, 계속 중얼거리겠지.

 

 

***

 

 

신녀들이 한데 모였어. 제국의 내로라하는 신녀들이야. 태형은 제 앞에 있는 신녀들을 보며 걸음을 옮겼어. 아인궁에는 들어가지 못해서 다들 궁 대문 앞에 있었음. 태형은 그들을 보며 입을 열었어. 방울 소리가 여기저기서 요란하게 들렸지. 또 주문을 외는 소리도 들렸음. 황제의 명령 때문에 혼백을 찾아야만 했거든.

 

“지민이의 혼백은 여기에 있느냐?”


황제의 눈이 번뜩였어. 꼭 맹수 같았어. 굶주린 맹수. 신녀 하나가 마른 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어. 황제 앞에서 거짓이라니. 손발이 덜덜 떨릴 정도였음. 더구나 제정신이 아닌 것은 누가 봐도 보였거든. 까딱 잘못했다가는 목이 날아가는 상황이었어. 그러니 진실과 거짓을 섞어야만 했지. 태후의 명령과 황제의 명령, 둘 다 만족하기 위해서.

 

“마마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럼 어디에 있지? 여기에 몸이 있는데, 어찌 이곳에 없단 말이냐.”


당장 말해. 어떻게 된 것이지? 볼 수는 있느냐? 나를 원망하고 있지? 내가 싫다고, 내가… 내가 밉다고 그러지? 태형이 신녀를 붙잡고 애원하듯 말했어. 이렇게 쉽게 믿을 줄이야. 태후의 말이 맞았구나. 다들 생각했어. 태형은 잔뜩 마른 얼굴로 간절한 표정을 했어. 태형이 붙잡은 신녀가 비장한 얼굴을 했음. 태후가 왜 그런 부탁을 했는지, 알 것 같았거든.

 

“내가… 밉다지?”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다. 내가 미울 거야. 내가… 내가 원망스러울 거야.”

“그렇지 않습니다, 폐하. 단지…”

“단지? 빨리 말하거라. 빨리!”

“하늘로 올라가셔야 평온을 찾으실 겁니다. 그걸 원하십니다.”

“…….”

“폐하께… 그만 놓아달라고 하셨어요.”

“…….”

“맞습니다. 폐하를 더 미워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신녀들이 말을 거들었어. 태후가 그 모습을 보며 안도했음. 생각보다 더 일이 잘 흘러가는 것 같았지. 태형은 고개를 내저으면서 한참 또 무언가를 생각했어.

 

“살릴 수 있겠느냐? 하늘로 보내는 것 말고, 저 몸에 다시 넣을 수 있느냐고.”

“폐하. 이미 다 타버린 몸입니다. 어찌…”

“저런 몸이라도 괜찮아. 다시 만날 수만 있으면 된단 말이다.”

“폐하. 이미 명을 다한 몸에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럼 다른 사람 몸에라도 들어가게 하면 되잖아!”

“폐, 폐하. 그것은 불가합니다. 그런 일을 벌이면 혼백이 조각납니다.”

“예, 폐하. 마마의 혼백이 온전할 수 없습니다.”

 

신녀들이 죄다 안 된다고 했어. 혼백이 부서져 버린다고 막아. 태형이 손을 덜덜 떨었어. 혼백이 사라진다니, 그건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음. 그러면 지민을 다시 살릴 수 없으니까. 불가능하니까. 어지러운 머리가 점멸했어.

 

“…그럼 다시 살릴 수 없다는 것이냐?”

“예. 마마께서는 놓아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만 떠나고 싶다고 하셨어요.”

“…….”

“폐하, 계속 장례를 치르지 않으시면 마마께서는 영원히 구천을 맴돌게 되십니다.”


신녀들이 무릎을 꿇었어. 그렇게 되면 악귀가 되십니다. 그런 일은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하자마자 태형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어냈어. 그 말이 정말이더냐? 나약해진 마음이 흔들렸어. 안 믿을 수가 없었지. 저주도 전부 사실이었는걸.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신녀들이 그렇다는데. 다들 그렇다는데. 태형은 지민이 지금 이 상황에도 힘들어한다는 사실을 견디기 어려웠어. 그렇게 힘들게 했는데 지금 이 순간조차 자신이 힘들게 하는 거잖아. 가지도 못 하게 막는 거잖아. 혼란스러운 마음이 이리저리 움직였어.

 

“그래도…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환생을 시키는 건? 다, 다시 태어나면?”

“……폐하. 무엇으로 환생하실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방법을 찾으라고 부른 거잖아!”

 

황제가 버럭 화를 냈어. 신녀들이 움찔거렸어. 태후가 그 모습을 안타깝게 보고 있었음. 하지만 본인이 깨닫지 않으면 안 돼. 지민은 죽었고 다시 살아올 수 없다는 걸 깨달아야만 장례를 치를 수 있으니까. 지금은 끼어들 수가 없었어.

 

“찾아! 찾으란 말이다. 아니라면 너희들을 전부 죽여버리겠다.”

 

태형이 이를 갈았어. 신녀들이 태후를 몰래 바라봤어. 태후가 고개를 내저었음. 시키는 대로 하라는 거야. 겁을 먹어도. 그러니 다들 어쩔 수가 없었어.

 

“폐하. 환, 환생은 장례를 치러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찾을 수는 있다는 것이냐?”

“아직은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만, 만약 생긴다면 노력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장례가 치러지지 않으면 불가합니다.”

“…….”

“우선 마마를 하늘로 올려보내 드려야만 합니다. 악귀가 되시기 전에요.”

 

그렇게 되면 영영 돌이킬 수 없습니다. 신녀 하나가 은근히 겁을 줬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 환생조차 찾을 수 없다. 태형의 눈이 공포로 물들었어.

 

“맞습니다, 폐하. 그렇게 되시면 영원히 극락정토로 가실 수 없습니다.”

“…….”

“49일이 지나기 전에 장례를 치르셔야 합니다. 아니면 늦습니다.”

“그럼… 그럼, 지민이에게 말을 전해줄 수 있겠느냐?”

“…예. 폐하. 조금이라면……”

“내, 내가 잘못했다고… 내가 너무…”


태형이 휘청거렸어. 정 내관이 태형을 부축했어. 한 달이 넘게 수라도 제대로 들지 않았으니 당연했음. 태형의 눈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어. 내가 너무 잘못했다고, 다 내 탓이라고. 말하던 말이 끊겼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어. 아무리 좋은 말을 한다 해도,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 다 우스운 일이었어. 태형은 신녀를 붙잡고 말하다가, 그 앞에 무릎을 꿇었어.

 

폐하를 당장 일어나시게 해! 태후가 외쳤어. 신녀 앞에서 무릎을 꿇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어. 소문이라도 퍼지면 위엄이 손상될 테지. 정 내관이 급하게 태형을 일으키려고 했어. 하지만 태형이 그 팔을 뿌리쳤어. 그리고 다시 신녀에게 매달렸어. 신녀의 다리를 잡고 매달렸음. 다들 당황해서 움직이지도 못했어.

 

“나를…”

“…….”

“나를 데려가라고 해.”

“태형아!”

“내가 같이 죽겠다고…”


황제가 말하자, 다들 경악했어. 태후가 앞으로 나섰어. 그리고 신녀들에게 눈짓했어. 태형은 넋이 나가버린 얼굴로 그 말만 말했어. 같이 죽겠다는 말만 반복했지. 그런 황제를 보던 신녀가 가까스로 다시 입을 열었어.

 

“폐하. 그런 것은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혼자 떠나고 싶어 하세요.”

“…그럼 나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냐. 내가 보기도 싫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저 폐하는, 폐하의… 폐하의 백성들을 보살피셔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민아…”


태형이 바닥에 엎어졌어. 폐하. 보내주시지요. 마마를 보내드려야 합니다. 신녀가 힘주어 말했어. 태형은 바닥을 치며 숨을 참았어. 내리치는 주먹은 이제 겨우 천을 풀었는데, 다시 생채기가 나기 시작했어. 피가 맺히고 돌에 피가 묻어나겠지. 하지만 이제 더 우기지는 않았어. 죽은 이를 다시 살리라는 말도, 환생에 관한 말도. 그런 태형을 보던 태후가 눈물을 겨우 닦아냈어.

 

이제 되었다. 태후가 신녀들을 물렸어. 그러고는 직접 태형을 일으켰어.

 

“태형아.”

“…….”

“이만 장례 치르자. 그래야 지민이가 평안해질 거야.”


이 어미를 봐서라도, 제발… 응? 태후가 애원했어. 태형은 대답하지 못했어. 그대로 쓰러졌거든. 하지만 장례를 거부하지는 않을 거였어. 태후는 쓰러진 태형을 정 내관의 등에 업히게 하고, 아인궁에 눕히라고 했어. 그러고는 지민의 장례를 준비하라고 했음. 애도 기간을 길게 잡을 거니까, 석 달은 장례를 계속하겠다고 하겠지. 아마 황릉에 묻힐 테니까 준비도 해야 했고.

 

“정말 괜찮으실까요?”

“…어서 눕혀드려라.”

“예, 태후마마.”

 

정 내관이 아인궁 안으로 들어갔어. 태후는 바닥에 남은 핏자국을 바라보다가 긴 숨을 토해냈어. 이걸로 살육이 멈출까. 죽은 사람은 아직 한 명밖에 없지만, 장례를 치르고도 그럴까 봐 무서웠어. 태형의 정신이 무너져버린 것이 빤히 보였으니까. 이대로라면 제대로 통치를 할 수 없을지도 몰랐음.

 

“마마, 저들의 입을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막아야겠지.”

“제가 하겠습니다.”

“그래. 너에게 맡기마.”

 

태후가 아픈 머리를 짚으며 상궁에게 명령을 내렸어. 그러자 남은 궁인들도 재빠르게 움직였어. 아인궁으로 들어가려던 태후는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그 앞에 섰어. 할 말이 없었거든. 면목도 없었음. 정말 지민의 혼이 있다면, 자신을 증오할 것만 같았어. 그러니 차마 들어갈 수가 없었음. 너무나도 죄스러워서.

 

“지민아.”

 

나는 끝까지 널 이용만 하는구나. 그러니 나를 용서하지 말아라. 네 원망은 내가 다 받을 테니까. 태후가 말하며 아인궁의 담벼락을 쓸었어. 이제 그나마 끝이 보이는 것 같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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