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불행은 몹시 단순하다. 사랑을 일찍 깨우친 일, 너무도 일찍이 깨우친 일.


계단을 밟을 때마다 나무가 몸을 비틀며 엄살을 피웠다. 오이카와는 소리를 따라 시선을 내렸다. 흰 여름 양말이 의붓 형제의 발을 곱게 감싸고 있었다.


소년의 발은 얇고 길쭉했으나 엄지발가락부터 새끼발가락까지의 윤곽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오이카와로 하여금 그의 얼굴을 볼 때와 비슷한 감상을 느끼게 했다.


눈에 띄는 선들은 날카로우나 가까이서 보면 뺨이, 입술이, 콧망울이, 선명한 눈동자가 동그랗다.


애달프게, 사랑스럽다.


“오이카와.”

오이카와는 간발의 차로 튀어오를 뻔한 어깨를 붙잡는다. 음심 같은 것은 뱃속에 떼어두고 태어난 양 말간 얼굴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선량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왜, 할 말이라도 있어?”

“아니……, 그냥, 잘 자라고.”


카게야마가 머슥한 듯 고개를 돌렸다. 그의 손이 문고리 위에 놓이는 것을 보며 오이카와는 생각한다.


제게 저 손을 제지할 명분이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응. 잘 자.”


닫히는 문 사이로 그가 고개를 까딱였다. 푸른 눈이, 그의 실루엣이 문 뒤로 완전히 사라진다. 오이카와는 미간을 짚으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보고 싶었다.




* * *




부친의 절친 되는 이의 외동아들. 카게야마 토비오는 오이카와의 모친의 손에 이끌려 이 집 문턱을 넘었다.


조실부모한 소년에게선 옅은 향냄새가 났다. 키는 오이카와보다 고작 한 뼘이 컸으며, 새까만 옷깃 아래 꼬물대는 손가락은 보드란 연분홍이었다. 앳된 얼굴은 침울하기보단 그저 유순해, 자신이 어떤 비극 한복판에 떨어졌는지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인사하렴, 토오루. 토비오란다.’


곧은 속눈썹은 물기 없이도 윤이 났다. 무구하고 아둔한 어여쁨. 소년은 제 깃이 젖은 줄도 모르는 폭우 속의 까마귀 같았다. 어린 오이카와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를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


‘토오루……?’


바닥만 더듬던 검푸른 눈동자가 그를 향해 반짝였을 때, 소년의 심장은 팔짝 튀어올랐다. 생각에 앞서 다리가 움직였다.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예쁜 미소를 지으며, 오이카와는 늘상 칭찬 받던 제 외모가 그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한 것이길 바랐다.


‘잘 왔어, 토비오 쨩.’


그 날 소년은 갖고 나서야 갖고 싶어지는 것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 * *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시골집은 부모님의 소유가 되었다. 어머니는 예전부터 한적한 전원 생활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며 웃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들릴 테니까.’


오이카와에게 그 말이 얼마나 기쁘고 또 당혹스러웠을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하리라.


둘은 식탁에 마주앉아 몇 가지 규칙을 정했다. 마치 신혼부부들이 그러하듯, 머리를 맞대고 서로의 습관을 되짚었다. 요리와 청소, 저녁 식단을 묻는 연락까지, 지나치게 간지러운 것들뿐이었다.


오이카와는 간간이 손바닥으로 입 언저리를 문질렀다. 자신을 숨기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었다.


그러나 서로의 아침을 열고 밤을 닫는 꿈 같은 행복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욕심이란 끝이 없어, 갈증은 수시로 뱃속에서 발을 구르고 그의 목을 졸라왔다.


널찍한 소파에 나란히 앉아 TV 채널을 돌리며, 오이카와는 농담처럼 물었다.


‘아, 아이 쨩이다. 토비오는 저런 타입 어때?’

‘어떠냐니?’

‘귀엽지 않아, 아이 쨩? 요즘 인기 많잖아. 예쁘고, 몸매도 좋고, 춤도 잘 추고.’

‘아, 나 연예인은 잘 몰라서.’

‘음…… 그럼 오른쪽 두 번째랑 가운데 애 중엔 누가 좋은데?’

‘어…….’

‘아, 위치 바뀌었다.’


난제를 마주한 듯 찌푸린 눈살을 보며 오이카와는 억지로 웃는 얼굴을 꾸몄다. 어떤 답을 들어도 기분이 나쁠 걸, 굳이 묻는 제 저의가 저열해 속이 메슥거렸다.


‘난 잘 모르겠어. 중요한 거야?’

‘……아니, 토비오. 하나도 안 중요해.’

‘뭐야.’

‘아아, 재미없다. 영화나 볼까?’


몸을 던지다시피 한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허벅지를 베고 눕는다. 뻔뻔한 행동과는 달리 리모콘을 눌러대는 손가락은 조급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낙원과 지옥을 오간다. 그는 마치 형편없는 일인극 배우 같다. 좋아하는 상대를 앞에 두고도 자신을 연기하는 데에만 급급한.


뺨 위로 느껴지는 시선은 모른 체, 오이카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고1. 내 또래의 아이들은 다 사랑을 한다던데. 달마다 고백도 받고, 나를 졸졸 쫓아다니는 팬클럽이란 애들도 있는데,


그런데도 나는…….




* * *




그 날 밤엔 유난히도 잠이 오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애써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어슴푸레한 윤곽들이 방 안 곳곳에서 떠오른다. 열린 창으로 여름 밤 냄새가 흘러들었다.


“후…….”


그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조용한 복도에 선다. 고작 여덟 걸음, 오이카와는 너무도 손쉽게 카게야마의 방 앞에 도착하고 만다. 닫힌 문을 응시하는 두 눈이 어둠 속에서 번들거렸다. 가리지 못한 갈망은 그토록 선명하고 추한 것이었다. 


토비오 쨩. 

토비오 쨩.

토비오.


그는 결코 오이카와의 형이 될 수 없다. 소년에게 그를 욕망하는 일은 언제나 그로부터 멀어지는 것이었다.


가끔씩, 나약한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차라리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일생을 끓지 못할 안전한 온도로 그와 결합된다면. 그러나 그는 금세 그 상상에 몸서리친다. 오이카와 토오루에게 그와 같은 타협은 그에게 거절당하는 것만큼이나 끔찍한 일이었다.


설사 그렇대도, 뭘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그는 어리고,

무력하며,

카게야마 토비오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일 년 뒤면 그는 어른이 되어버린다. 태생이 선한 의붓형은 가족된 도리는 다하겠지만 그의 소원을 이루어줄 수는 없을 것이다. 새로운 세계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 테고 그곳엔 그의 짝이 될 좋은 여자가 있으리라.


이겨낼 수 없는 거대한 해일이 그를 송두리째 집어삼킨다. 사지가 찢기는 듯한 이 감정에 첫사랑이란 표현이 가당키나 할까.


“……토비오.”


그 순간, 거짓말처럼 문이 열렸다. 오이카와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놀란 얼굴을 한 카게야마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높이가 엇비슷한 시선이 그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본다.


“너…….”


카게야마가 한 걸음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손바닥을 넓게 펴고 오이카와의 얼굴 앞에서 흔들어보였다. 어둔 중에도 선명한 손금에 어지럼증이 인다.


“오이카와?”

“…….”

“……그, 설마, 몽유, 병……? 그런 건가?”


난처한 듯 카게야마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순간 오이카와의 뇌리에 날카로운 전류가 스쳤다. 카게야마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을 때, 오이카와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 


오이카와는 지체 없이 카게야마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열린 입술 사이로 혀를 쑤셔넣으며, 일생동안 마른 사막을 헤매던 이가 오아시스에 뛰어들듯 필사적으로 빨고 핥고 삼키며 그를 탐했다. 아귀처럼 들끓던 욕망이 일제히 온몸을 불사지르며 환희에 겨운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저 아주 오래 전부터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이토록 얕고 사악한 유혹조차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차마 견딜 수 없어 오이카와는 두 눈을 굳게 닫았다. 자신을 밀어내려는 손을 우악스레 쥐며, 그의 안일한 다정함마저 아프게 사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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