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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히터여, 내가 무엇을 준비했는지 보거라."


하트히터는 악의 용이 시킨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오늘 아침 그의 스승은 기분이 좋지 않아서, 하트히터에게 쓸모없지만 귀찮은 용무를 맡겼다. 덕분에 온몸이 뻐근해질 때까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해가 지고 나서야 끝낼 수 있었지. 그래도 이쯤 되면 용도 심술이 풀렸을 테고, 그렇다면 평소랑 비교해보았을 때 그럭저럭 괜찮은 하루였을 것이다. 문을 열자마자 들려온 스승의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악의 용은 선물을 준비해놓았을 때면 저리 들떠서 그가 문간을 들어서자마자 급히 부르곤 했다. 물론 그 선물이란 건 인간의 기준과는 너무도 달라 기대할 것이 되지는 못했다. 가끔 그는 자신이 깔고 앉았던 보석이나 황금을 주기도 했으나, 하트히터가 별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후로는 매번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 했다. 그게 최근 들어 더 힘든 점이었다. 하트히터는 무거운 발을 끌며 악룡이 가리키는 곳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며 잠시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악룡의 미소는 자신만만했다. 이번에는 그가 성공했을 거라는, 그를 만족시켰을 거라는 믿음. 악룡의 옆,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서 있는 옆 바닥에는 절대 잊을 수 없는 얼굴들이 있었다.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리던 날이었던 것 같다. 더 어렸을 적에는 눈이 오는 것이 반가웠지만, 그 날 이후론 눈을 보는 시선이 조금 바뀌었을 것이다. 하트히터가 한눈을 판 사이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의 집과 존재 이유를 불길이 집어삼켰다. 그와 함께 자라고 바뀌어 영원하리라 믿었던 그의 유일한 안식처는 그렇게 사라졌다. 그리고 그 날 눈발이 짙게 내리던 그의 고향을 엉망진창으로 짓밟은 사람들 중 몇 명은 그의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있었다. 비록 정신 나간 채로 지나쳤던 바람에 정확히는 보지 못했지만, 그 눈빛이며 몸짓, 그리고 역겨운 목소리들은 잊을 수가 없었다. 바로 그놈들이  악룡의 옆에 난잡한 몰골을 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자세히 보지는 않았지만 다리라도 몇 개 부러뜨려놓은 것 같다. 스승님께 걸리고 저런 상태로 살아있다는 게 불쌍하군. 하트히터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불쌍하다는 감상 외에는 별 생각이 안 든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이런 반응은 분명 악룡이 원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저들을 그의 앞에 선물이랍시고 가져둔 스승의 생각이 훤히 보이는 듯했다. 동시에 악룡의 미소가 일그러졌다. 하지만 눈을 깜빡여 다시 본 스승은 아직 웃고 있었으니 그건 그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트히터가 그 자리에 선 채로 움직이지 않자 악룡은 보석 무더기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귀중한 전리품이라도 선보이는 듯 뒤로 한 발짝 물러나 정중한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놀이라도 하는 듯한 몸짓이었다.


"어떠냐. 표정을 보아하니 이번에는 조금 마음에 든 것 같은데."


그러더니 입을 찢으며 웃는다. 쉿. 성급히 입을 열지는 말거라, 네 생각은 읽지 않고 있으니. 수수께끼처럼 풀어내는 게 더 재밌거든. 악룡의 소리 없는 웃음이 널찍한 홀 안에 가득 찼다.


"인간들은 복수란 걸 하면 그렇게 속이 시원하다고 하던데. 나는 이해할 수 없지만, 흉내낼 수는 있지. 통쾌하지 않느냐. 그러니 이제 좀 웃어보거라. 저들을 끝낼 권리는 네게 주겠다."


하트히터는 가만히 있었다. 조금 지나치다고 생각될 만큼 오래 정적이 흐르고서, 그는 인형이 머리를 꺾어 움직이듯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고향이 멸망했을 당시 놈들을 봤다면 감사하게 생각했을테지만,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른 터였다. 저건 복수가 아닙니다, 스승님. 화풀이일 뿐이지요. 하트히터는 입술을 짓씹으며 천천히 말을 골랐다. 저들을 죽여봤자 잃어버린 제 고향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떠나버린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지도 않을 것이며, 그 날을 잊으려고 했던 제 노력만 무의미해질 뿐입니다.

악룡이 하트히터의 반응을 기다리다가 속마음을 읽은 듯 얼굴을 굳히는 것이 보였다. 항상 그런 식이었다. 재미있으려면 그의 속마음은 안 읽는 게 좋다고 하면서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읽어버리기 마련이지. 하트히터는 웃어보였다. 그건 그의 스승이 원하는 웃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하트히터는 그 이상의 노력을 쏟고 싶지 않았다.


"스승님. 죄송합니다만 그런 건 하나도 재미없다고 말씀드렸던 것 같습니다."


악룡보다도 주변에서 둘의 대화를 숨죽여 듣고 있던 다른 제자들이 격한 반응을 보였다. 개중에는 숨을 급히 들이마시는 바람에 사레가 들려 얼굴이 새빨개진 사람도 있었다. 하트히터는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오늘은 심부름을 하느라 피곤해서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라는 말만 짧게 남기고 등을 돌려 제 방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악룡의 선물에서 눈을 돌린 채였다.


"미쳤군. 죽고 싶어 환장했나."


누군가가 뱉은 말이 점점 웅성거림이 되어가며 홀 안은 소란스러워졌다. 악룡은 히터가 들어간 문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옆에서는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포로들이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전혀 이해를 못한 듯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들을 잡아온 존재의 불편한 기색을 눈치채고 죽기 싫어 발버둥 치는 것일 테지. 그 바람에 악룡의 보석 산 중 일부가 무너져내리며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그 순간 악룡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손을 포로 쪽으로 뻗었다. 공격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들은 검붉은 피를 토하며 인형의 태엽이 박살나듯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다른 제자들의 웅성거림도 한순간에 뚝 끊겼다. 폭풍이 일어나기 전의 고요 같은 정적이 기류를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악룡은 화를 내거나 길길이 날뛰지 않았다. 그는 그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더니,


"다른 걸 찾아와야겠네."


하며 그의 방 문을 열고 들어가버릴 뿐이었다.

문이 닫히자마자 홀 안에 덩그러니 남겨진 시체 조각과 그의 제자들에겐 숨막히는 고통이 찾아왔다. 악룡의 분노는 날카롭고 뜨거운 가시가 온 몸을 사정없이 찌르는 듯한 고통을 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누구도 원망할 수 없었다. 하트히터를 욕하는 말을 입 밖에 냈다간 저 시체 조각들보다 더 끔찍한 꼴을 당하리라는 것이 자명했으니까. 그건 그가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맥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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