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장님, 내선 2번으로 전화 연결하겠습니다.” 


 파티션 너머로 넘어오는 직원의 목소리를 들은 소하는 훑어보던 보고서에서 눈을 떼고 황급히 손가락으로 엑스자를 그려보였으나 어리둥절한 직원의 손가락이 버튼을 누르는 속도가 좀 더 빨랐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전화기의 램프에 불이 들어오고, 곧이어 벨이 울리기 시작하자 소하는 잠시 머리를 싸쥐고 어깨를 수그렸다. 다른 번호와 달리 내선 2번으로 걸려오는 전화일 경우에만 울리도록 설정된 벨소리가 쓸데없이 경쾌하고 발랄해서 소하는 더더욱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벨이 다섯 번 돌아갈 때까지, 차라리 저쪽에서 먼저 끊기를 기다리며 묵묵히 버텨보았지만 직원들이 하나 둘 소하 쪽을 심상찮게 흘끔거리도록 벨은 결코 끊어질 줄을 몰랐다. 소하는 결국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통화 버튼을 누르고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소하입니다.” 

 <뭐야?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아? 분명 자리에 있다고 해서 바꿔달라고 한 건데?> 

 “글쎄요, 벨이 늦게 울렸나보지요.”

 <기기 바꾼지 얼마 됐다고 벨이 늦게 울려, 늦게 울리길. 자네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확 내선 전용 휴대폰을 한 대 개통해주는 수가 있어.> 

 “... ...무슨 용건이십니까, 장무진 상무님. 저 바쁩니다.” 

 <흠, 흠... ... 아니 뭐 급한 용건은 아니고... ...> 

 “그럼 끊겠습니다.” 


 그리고 소하는 더는 1초도 기다려줄 수 없다는 듯이 전화기를 뚝 내려놓았다. 파티션을 넘어 흘러나오는 살벌한 기운 때문에 통화 내용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직원들은 저마다 허둥거리며 바쁘게 일을 하는 척 요란하게 키보드를 두드려댔다. 


 “앞으로 내선 2번으로 걸려오는 전화는 일단 무조건 기다리시라고 해. 받을지 말지 내가 결정할 테니까. 알겠나?” 

 “ㄴ, 네에... ... 알겠습니다, 차장님.” 


 내선 통화 전반을 담당하는 신규 직원이 잔뜩 주눅 든 목소리로 대꾸했다. 괜한 사람에게 화풀이를 했다 싶어 미안한 기분에 소하가 한숨을 쉰 찰나, 예의 내선 2번의 전화벨이 다시 한 번 요란하게 울려대기 시작했다. 희고 부드러운 이마께에 핏줄이 푸르게 곤두선다. 수화기를 들었다가 그대로 쾅 내려놓은 소하는 씨근덕거리며 사무실을 박차고 나갔다. 


 “아, 소하 차장님. 저기... ...” 

 “상무님 안에 계시죠? 저 들어갑니다.” 

 “네? 아니, 차장님!” 


 비서의 만류도 듣지 않은 채 소하는 굳게 닫힌 상무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때까지 책상 앞에 앉아 수화기를 들고 있던 장무진은 문을 열고 들어 온 소하를 보자마자 마침 잘됐다는 얼굴로 이를 드러내고는 조금 전 소하가 그랬듯 난폭하게 전화를 내려놓았다.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책상 위에 얹혀 있던 작은 다육식물 화분이 딸그닥거리며 흔들린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지? 이젠 상사 전화도 막 무시하네, 이게!” 

 “상사~? 상사는 개뿔, 얼어죽을 상사. 남 일도 못하게 시시때때로 쓸데없이 전화 걸어서 귀찮게 하는 게 상사가 할 짓입니까? 예? 누가 상무님처럼 한가한 줄 알아요? 오늘 처리해야 하는 일이 산더미라서 눈 돌아가게 바쁜데! 야근하면 뭐 한 달에 한 오천만 원씩 주나? 어? 그런 것도 아니면서 사람을 이렇게 괴롭히면 어쩌자는 거냐고!” 

 

 어지간히 화가 났는지 뒤로 갈수록 아예 반말지거리가 튀어나온다. 무진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입을 벌린 채 허, 허 하고 나오지도 않는 웃음을 흘리고 있다가 소하에게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 막 반말까지-” 그 순간, 숨을 들이켰던 소하가 주먹을 꽉 쥐면서 다시 외쳤다. 

 “내 말 아직 안 끝났어요. 그것 뿐이면 내가 말도 안 합니다. 전화선 확 뽑아버리면 그만이지요. 그럼 우리 상무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아, 모르시겠습니까? 그럼 제가 맞춰볼까요? 세상에, 바빠 죽겠는데 사무실까지 쳐들어와서 갖은 패악을 다 부리고 간답니다. 내가 지금 회사 생활을 하고 있는 거야, 아니면 미저리를 찍고 있는 거야? 위험탈출 넘버원에 제보라도 해야 될 지경이야. 회사에서 기가 넘어가게 생겨서! 상조 보험 들어주면 단 줄 알아요?!” 


 상무실 벽이 두꺼워서 다행이다. 바락바락 악을 쓰는 소하를 그야말로 질린 얼굴로 쳐다보며 무진은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당장 이 층의 모든 임원진이 다 뛰어와도 이상하지 않을 소란을 피우고, 소하는 숨이 차는지 헐떡거리면서 이마를 짚었다. 화산처럼 폭발했다가 갑자기 꺼지는구만. 무진은 여전히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치면서 팔짱을 척 꼈다. 


 “이제 다 했어? 내가 말 좀 해도 되겠나?” 

 “하지 마요. 들으나마나 사람 복장 뒤집는 소리만 할 거 다 아니까.” 

 “에이, 무슨 말을 또 그렇게 섭섭하게 하지? 내가 언제 자네 복장을 뒤집었다고 그래? 아, 내가 마음이 급해서 전화 좀 받으라고 재촉할 수도 있지. 안 그런가? 응? 그래서 말인데, 자네 올해 여름 휴가를 나흘 냈더라고. 내가 자네 귀찮게 하지 않으려고 인사과까지 내려가서 직접 알아봤어.” 


 그것은 하나도 칭찬받을 일이 아니며 오히려 소름 끼치니까 관두라는 말을 어떻게 돌려서 해야 할지, 그 순간에 왜 그런 쓸데없는 고민을 하느라 그의 말을 막지 못했는지 이후 소하는 뼈저리게 후회했다. 


 “내가 이틀 더 휴가 내는 걸로 수정해서 휴가계 제출했어. 괜찮지? 응? 자네 어차피 연차 엄청 쌓아놓고 쓰지도 않잖아. 사람이 그러면 안돼, 일할 때는 확실하게 하고, 놀 때는 확실하게 놀아야지! 그러니까 나흘은 휴양지에라도 가서 푹 쉬고, 이틀 동안은 집에서 푹 쉬고 하반기도 힘내보는 거야. 어떤가, 내 계획?” 

 “저에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상무님.” 

 

 심호흡을 한 소하가 등을 곧게 펴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무진은 벌써 영혼의 반절 정도를 휴양지로 가는 비행기에 태워보낸 사람처럼 넋이 나가 소하의 기색이 달라졌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 말해봐. 좋은 생각이 뭔가?” 

 “상무님이 말씀하신 대로 놀 때는 확실하게 놀고, 일할 때는 확실하게 해야겠죠. 그리고 전 지금까지 확실하게 일만 했습니다.” 

 “그럼, 그럼. 우리 소하 차장님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이 회사에서 모르는 사람이 어딨나? 내가 제일 잘 알지!” 

 “그래서 이젠 확실하게 놀아볼까 합니다.” 

 “그래, 그러니까 휴양지에-“ 

 “사표 쓰겠습니다.”  

 



 애초에 허락이 떨어질 것이라는 기대는 없었다. 자기 허락도 받지 않고, 허락은커녕 최소한의 동의조차 구하지 않고 멋대로 일을 저지른 무진 때문에 반쯤은 홧김에 내뱉은 말이었는데 길길이 날뛰는 것도 모자라 울고불고 징그럽게 매달리는 시늉까지 하는 무진을 떼어놓고 사무실로 돌아오기까지 소하는 그야말로 학을 떼었다. 그러나 그 난리를 치고서도 절대로 내뱉은 말을 물리겠다는 소리만큼은 하지 않는 그 주도면밀함 때문에 뒤늦게야 또 슬그머니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쓸데없는 일로 자리를 비운 사이 검토하고 결재해야 하는 서류가 더 쌓인 것을 본 소하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으로 책상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조금 전 무진의 상무실에서 했던 소리는 반만 진심이었지만, 이제는 진짜로 사표라도 내고 싶었다. 이렇게 살다가는 이삼 년 내로 심각한 탈모가 오든지 아니면 정말 기가 넘어 심장마비에라도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진을 처음 만났을 때, 그때도 정말 사람 어처구니 없게 만드는 덴 재주가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했지만 날이 갈수록 그 강도가 더 심해질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애초에 무진이 아니었다면 이 회사에 올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자신의 인생이 지금보다는 훨씬 속편하게 굴러갔을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소하는 문득 해묵은 분노가 뱃속에서부터 불쑥 치미는 것을 느꼈다. 


 ‘... ...사람은 좋아, 사람은. 그건 나도 안다고.’ 


 그러나 사람이 좋다는 것 하나만으로는 도무지 덮어줄 수 없는 치명적인 단점이 너무 많다. 소하는 냉정하게 무진의 됨됨이를 평가하면서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서류들을 건성으로 넘겼다. 인간적으로 용서가 안 될 단점이라면 차라리 속이 편하겠는데,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소하를 가끔 돌아버리게 만들었다. 가령 오늘처럼 당연하다는 듯이 소하의 스케줄을 자신의 취향에 맞게 멋대로 조절하고도 한 톨의 미안함조차 느끼지 않는 모습이라든지. 분명 어처구니 없고 열받는 일이긴 했지만 이게 또 인간으로써 심각한 결점이냐고 한다면 그렇지는 않다. 휴가를 죄다 빼고 나와야 하는 새로운 일을 주었더라면 또 모르겠지만. 


 “저, 차장님. 저 방금 밖에서... 그... ... 장무진 상무님 뵈었는데요, 저기... ... 차장님 계시면 잠깐 밖으로 나오시라고 하시는데... ...” 


 정보과에 다녀오던 직원이 쭈뼛거리며 말을 건다. 무진에 대한 감정 때문에 갈팡질팡 하며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소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또 신경질이 치미는 것을 느꼈으나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무실 분위기를 더 이상 썰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복도에 서 있는 무진은 풀이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소하의 예상과 다르게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새 편의점에라도 다녀온 것인지 한 손에 부스럭거리는 봉투를 들고 있다. 소하는 팔짱을 낀 채 보란듯이 한숨을 쉬고 싸늘한 눈으로 무진을 쳐다보았다. 


 “뭡니까, 또.” 

 “아직도 화났나? 속 좁기는. 자.” 

 “이건 또 무슨... ...” 


 얼결에 봉투를 받아들고 안을 들여다보았던 소하는 잠깐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입만 벌렸다. 팩에 든 홍삼젤리 두 개와 카스텔라 한 개.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조합인지, 무슨 속셈인지 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무진이 뒷목을 긁적이며 머쓱하게 말을 덧붙였다. 


 “자네 단 음료는 싫어하잖아. 커피도 잘 안 마시고. 주스는 좀 그렇고 그거라도 먹으라고. 그리고 카스텔라는 전에 내가 먹어봤더니 엄청 맛있길래 샀어. 편의점에서 파는 것치고는 진짜 맛있다니까, 진짜야. 아무도 주지 말고 혼자 먹어.” 

 “... ...사무실에 보는 눈이 몇인데 저 혼자 먹습니까. 혼자 일하시는 상무님이나 가져가서 드세요.” 

 “안 받아가면 여기서 확 뽀뽀해 버린다.” 

 “미친 거 아니에요?!” 

 

 너무 놀라서 꽥 소리를 질렀던 소하는 사무실 안에 있던 직원들이 일제히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감지하고 얼른 이를 꽉 깨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진은 소하를 당황시켰다는 사실만으로도 재미있어 죽겠다는듯 배를 잡는 시늉까지 하며 소리죽여 웃음을 터뜨렸다. 소하는 머리가 부글부글 끓는 심정으로 무진을 쏘아보다가 확 돌아섰다. 홍삼젤리와 카스텔라가 든 편의점 봉투가 소하의 손에서 부스럭거리며 흔들리는 것을 보던 무진이 말했다. 


 “나랑 같이 휴가 가는 거야, 알았지? 그리고 오늘 저녁은 내가 살게.” 

 “저 야근해야 합니다.” 

 “안 돼. 상무 명령이야. 오늘은 정시 퇴근해. 이제 두 시간 남았으니까 그때 나 다시 내려온다? 어? 알겠지?” 


 저 입만 어디다 파묻을 수 없을까. 책상 서랍 안에 봉투를 거칠게 패대기치면서 씩씩거리던 소하는 달력에 표시해둔 휴가 날짜를 물끄러미 보다가 지끈거리는 미간을 매만졌다. 그리고는 빨간색 펜으로 동그라미 두 개를 더 그려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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