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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 Aimer - Mine


* 엄청난 대지각.ㅜㅜㅜㅜ

* 꽤 긴 단편

* 아무리 해도 반복재생이 안되는건 왜일까요. jnj 글 읽다가 노래 끊기면 너무 슬프잖아요,,ㅜㅜ







W. 김삶




 나는 죽었으면 좋았겠다.


 새벽이 찾아왔지만 나는 한번도 그를 초대한 적이 없었다. 그는 문을 두드린 적도, 나에게 양해를 구한 적도 없었다. 그저 조용히 내 옆에 앉아 나를 구슬리고는 했다. 해는 언젠가 도망쳤다가 다시 돌아오지만, 달은 항상 널 지켜본단다, 아이야. 그를 조금만 사랑해주면 안되겠니. 그럼 나는 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그는 잘했다는 듯이 어깨를 토닥이고 달의 나라로 떠났다. 해가 온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결국 눈을 감았다. 가을은 제 날씨를 잃고는 춥게 울었다.








 어린 날의 나는 아침마다 타고 다녔던, 어딘가에 내가 떨어트린 레고조각이 있을 그 차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모습을 뉴스로 봤다. 그리고 그 날 경찰 아저씨들은 나를 데리러 어린이집으로 왔다. 그들이 나를 차가운 보육원의 바닥에 내려놓고 간 뒤에야 나는 완벽한 혼자가 되었다. 해가 뜨도록 내 옆에 있어줬던건 옆구리가 비쩍 마른 달이었다.



 그곳은 나에게 호의적인 곳은 아니었지만, 그게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나에게 잘 곳과 입을 옷, 그리고 먹을 것을 제공해 주었다. 비록 아침이 되면 몸이 얼음장이 되어서 눈을 뜬다거나 너무 많이 물려준 옷에 구멍이 나서 옆구리가 시렸다거나 잘 깨물어지지 않아 여러번 씹어야만 하는 빵을 먹는다거나 했지만, 나는 할 줄 아는게 없었기 때문에 손빨래나 청소 따위를 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들은 꽤 나에게 잘해 준 것이었다. 어느 날 내 옆자리에 있던 친구가 밤새 열에 헐떡거렸고 그날 밤이 지나고 나는 그 친구를 볼 수 없었다. 보육원 사람들은 친구가 좋은 부모를 찾아서 급하게 가버렸다고 했지만 우리는 그게 사실이 아닐거라고 했다. 왜냐면 그 친구는 작고 마르고 처진 눈꼬리에 항상 눈물을 달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어있던 내 옆자리는 곧 다른 아이의 자리가 되었다.



 조금 큰 후에는 하는 일이 많아졌지만 보육원 누구든지 모두 힘들었기 때문에 그건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단지 열일곱살이 된 후에 보육원 사람들은 나에게 눈치를 주었고 결국 몰래 모아두었던 비상금을 챙겨 나와야 했다. 내 사정을 알던 학교 옆 구멍가게 사장님은 작은 방 하나를 주었고 나는 가끔 개처럼 다리를 벌리고 소리가 나오지 않게 이를 악물어야 했다. 사장님은 내가 예쁘다고 했고 열여덟살이 되자 훌쩍 커버린 키와 골격이 잡힌 얼굴로 더이상 예쁘지 않게 되자 집을 나와야 했다. 나중에 듣게 된 얘기로는 사장님이 결국 감방에 가게 됐다고 했다. 다행히 틈틈히 했던 알바로 약간의 돈은 있었다. 젊고 힘좋은 돈이 필요한 미성년자는 꽤 쓸만했다. 돈을 많이 주지 않아도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꽤 예쁘게 보고 밥이라도 제때 끼니 챙겨 먹으라고 만원 이만원 꽂아주면 그날은 삼각김밥 두개나 사고 거기다 라면 다섯개들이 한봉지를 살 수 있었다. 남은 돈은 분홍색 돼지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면 더 배가 부른 것 같았다. 돼지 배가 꽉 차서 더이상 돈을 넣을 수 없을 정도가 되면 그걸 들고 은행으로 갔다. 공부는 꽤 열심히 해서 성적은 좋았지만 대학은 가지 않았다. 담임선생님은 상담실에 나를 앉혀놓고 무척 아쉬워하셨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집에 빨리 가고 싶었다. 수도관이 얼어 수리를 해야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돈은 착실히 모았고 나는 아주 가끔 카페에 들어가 아메리카노를 사마실 수 있었다. 나한테 아메리카노는 꽤 맛있는 음료였다. 우선 수돗물 특유의 비린내가 없었고 향도 좋았다. 내가 뜨거운걸 좋아한다는건 꽤 다행이었다. 한달에 한번 정도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마셨는데 그런 날은 평범한 어른이 된 것 같아 괜히 기분이 좋았다. 



 그날은 비가 왔고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들고 집으로 가던 길이었다. 집은 반지하에 항상 꿉꿉한 냄새가 났지만 다이소에서 큰맘 먹고 산 디퓨저를 놓으니 좀 괜찮아졌고 우선 나 혼자 살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우산을 털고 계단을 내려갔는데 문 앞에 어둠 속 인영이 앉아있었다. 나는 순간 겁이 났지만 용기를 내서 그에게 다가갔다. 인영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좀더 대담하게 쭈그려 앉아 인영을 보았다. 그것은 홈빡 젖은 남자였다. 초점이 없는 눈은 한참을 끔뻑거리더니 이내 나와 눈을 마주쳤다. "우리집인데 여기서 뭐하세요." 그러니까 남자는 한참을 말없이 바라만보다 이내 옷의 물기를 탁탁 털어내고 일어섰다. 앉아있을 때는 몰랐는데 키가 생각보다 컸다. "조금만 신세져도 될까요. 사례는 하겠습니다." 그는 낯설었지만 나는 그 낯섦이 어딘지 익숙하고 그리워 그를 내 공간으로 들여보냈다.



 J0527. 그의 이름이었다. 그는 자기가 달의 나라에서 왔으며 지구에 있는 사람의 감정을 배우러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고 했다. 그닥 신빙성 없는 말이지만 믿어야 할 것만 같았다. 그의 팔에는 이상한 글귀와 150이 초록색 디지털 숫자로 빛을 냈다. 그의 눈 또한 초록색으로 빛났는데 왜인지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본 적도 없는 그곳의 모습이 보인 것 같기도 했다. 그의 온몸이 푹 젖은게 눈에 들어오자 외계인도 씻어야겠지 싶어 내 옷을 쥐어주고는 화장실로 보냈다. 수도꼭지도 못 틀 줄 알았더니 이내 쏴아- 하고 씻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제서야 내가 윗옷도 안벗고 있었다는걸 깨달았다.



 씻고 나온 J0527의 얼굴이 뽀얬다. 얼떨결에 그를 들이고 씻기기까지 했지만 막막했다. 우선 나 혼자도 벅찬데 입이 늘었다. 가장 먼저 생각난건 그거였다. 냉장고를 뒤적거리면서 한숨이 나왔다. 생각만 했는데 한숨소리가 꽤 커서 눈치를 챈건지 J0527가 내게 다가왔다. "저기.." 이름이 뭐예요? 그러고 보니 이 낯선 남자와 통성명도 안했다. 목이 잠긴 것 같아 큼큼 거리고 옹성우입니다, 라고 말했다. 홍, 성우 아니고요. 뒷말은 그냥 했다. 하고 나니까 조금 머쓱했다. 반지하의 단점이었다. 목이 쉽게 잠기고 또 헛소리가 늘어간다. 


 "옹,성우,씨."


 남자는 한번도 이름이라는걸 불러보지 않은 것처럼 어색해했다. 그런데도 들리는건 우물거리는 발음을 감추려 힘을 주는 것과 눈이 쳐져 꽤 귀여운 인상인 것과는 다른 허스키한 목소리였다. 옹,성우씨. 내가 못 들었다 생각한건지 조금 더 또렷한 목소리로 다시 나를 부르자 그제야 정신이 돌아와서 예, 예 하고 두번이나 대답했다. 제가 신세를 지게 되었으니 옹성우씨에게 피해 가지 않도록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는 젖어있던 제 옷의 안주머니를 뒤지더니 봉투 하나를 건넸다. 지구에서는 이게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약간 긴장한 듯 말하는 J0527를 앞에 두고 나는 봉투를 열었다. 그 안에는 내가 근 3년간 모아도 안될 큰 돈이 들어있었다. 생각지도 못 한 상황에 당황해 J0527를 보니 혹시 더 필요하신가요? 하면서 급히 주머니를 다시 뒤지려 하길래 손사레를 치며 감사하다고 했다. 그제야 남자는 살짝 웃었다. 그 웃는 모습에 나는 따라 웃으려 했지만 아마 내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을테다.



 밤이 늦었지만 나는 그에 대해 꽤 많이 알 수 있었다. 그의 이름과 지구의 나이로 22살이라는 것. 그리고 달의 나라에 관한 것. 그곳은 차가워 보이지만 따뜻하고 달콤하다고. 그곳에도 공기가 있냐 물어보니 지구의 공기와 비슷한 것이 있다고 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나였지만 그래도 친구는 있었다. 고등학교 때 만나서 나를 여러방면으로 도와주려고 하던 다니엘이었다. 다니엘은 처음에 내 말을 믿지 않았다. 니 미칬나, 갸가 누군지 우예 알고 그렇게 아무나 들여보내냐, 아이고 문디야 내 속이야! 다니엘을 우리 집에 데려와서 J0527를 소개시켜도 반신반의 하더니 그의 팔을 보고는 이내 아직도 의심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J0527씨. 다니엘이 사온 떡볶이와 순대를 접시에 담는 동안 다니엘은 궁금함을 못 참고 J0527를 불렀다. J0527가 고개를 들어 다니엘을 쳐다봤다. 그는 웬만하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의사소통이 되는 기분이었다. J0527는 너무 이름으로 부르기 어려운거 아닌..가. 그래도 지구에 있을 동안은 지구 이름이 필요하지 않겠나. 다니엘이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나 또한 그를 J0527로 부르는게 어려워 몇번이고 망설였다. J0527는 눈을 깜빡이더니 나를 쳐다봤다. "옹성우씨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의 눈빛은 진중해서 나는 결국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솔직히, 조금은." 그러면은, 지어주세요. 제 이름. 초록눈의 남자는 초록빛을 뿜으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당황했다. 다니엘은 신나서 인터넷을 뒤적거렸다. 나는 한참을 생각하다 어느날 아팠던 그 아이의 이름을 생각해냈다.


 "김, 재환.."


 순간 나온 이름에 당황했지만 이내 허탈하게 웃어버렸다. J0527가 눈을 가득 접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김, 재환. 맘에 든다는 듯이 그 이름을 몇번이고 웅얼거렸다. 야아, 좋네 니 어떻게 생각해냈노. 내는 맨 브라운 뭐 이런거밖에 생각 안나더만. 다니엘이 김재화이- 하고 한 손을 뻗었다. 그러자 J0527, 아니 김재환이 얼떨결에 손을 올렸다. 하이파이브-! 다니엘이 킬킬 거렸다. 아 그리고 보니까 한살 어리니까 니도 우리한테 정없게 씨 붙이지 말고 형아 라고 해라. 옹성우씨 강다니엘씨 윽수로 정없구로. 재환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니엘 형아, 성우 형아. 다니엘이 알려준대로 형아- 그대로 부르니 다니엘 입이 아주 찢어졌다. 원체 귀여운거에 사족을 못 쓰는 애였다. 이름을 지어줘서, 감사합니다. 재환이 꾸벅 인사를 했다. 결국 우리는 밤새 팅팅 불은 떡볶이를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재환이는 아주 활짝 웃었던 그날 이후로 꽤 자주 웃었다. 그러면서 "지구에 와서 가장 먼저 배운 감정은 기쁨, 이네요" 라고 했다. 나는 재환이가 처음으로 느낀 감정이 기쁨이라는 것이 좋았다. 지구에는 굳이 없어도 되는 감정들이 아주아주 많은데, 그런것들보다 기쁨을 먼저 배워서 참 다행이었다. 그 후로 나는 재환이를 기쁘게 해주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재환이를 만난 날이 꽃내음 가득한 봄이 아닌 여름이라 참 아쉬웠지만 그는 여름의 싱그러움 뿐 아니라 더위까지도 기뻐했다. 우리 집은 반지하라 그래도 심하게 더운 편은 아니었지만 재환이가 땀을 많이 흘려 지칠때면 나는 재환이를 데리고 집 주변에 있는 큰 마트를 데려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카트를 끌고 돌아다니며 마음껏 에어컨 바람을 만끽했고 가끔 커다란 투게더 아이스크림을 사가서 집에서 열심히 퍼먹었다. 골이 띵하게 아팠지만 우리는 마치 누가 더 많이 먹나 대결이라도 하듯이 전투적으로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항상 먼저 항복하는 것은 나였다. 그러면 재환이는 의기양양하게 나를 보며 웃었다. 이빨을 덜덜거리면서도 한껏 승리에 도취된 듯이 웃는 그 모습에 나까지 웃어버리면 결국 그날은 다 먹은 아이스크림통을 치우고 이불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한참을 웃었다. 가끔은 카페에 데려가기도 했다. 재환이는 카페에서 나는 원두 냄새를 특히 좋아했는데, 웃기게도 커피는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재환이 덕분에 아메리카노가 아닌 다른 메뉴들도 많이 먹어볼 수 있었다.




 여름이 지나갔다. 나는 아직 돈을 벌었다. 가끔 공사현장의 철근 같은 것에 다쳐오면 재환이는 인상을 찌푸리며 약을 발라줬다. 그는 여름이 다 가도록 많은 감정들을 배웠는데, 그럴때면 "걱정"을 빙자한 잔소리를 하루종일 해댔다. 말수가 적은줄 알았는데 쫑알쫑알 시끄러운걸 보면 낯을 많이 가렸구나 싶기도 하고 이제 내가 많이 편해졌구나 싶어서 올라가는 입꼬리를 붙잡고 짹짹거리는 부리를 막으면 헙, 하고 숨을 들이키는게 재밌었다. 나는 장난칠 때 재환이의 반응을 좋아했는데 그게 어느 정도였냐면 유치함의 대명사 다니엘이, 성우 니는 유치원 아도 아니고 그라고 싶나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정도였다. 그러면 재환이는 입을 삐죽이며 다니엘 말에 동조했다. 맞아요, 성우 형. 저 놀리는게 그렇게 좋아요? 그러면 내가 또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재환이는 이제 형아 라고 부르지 않고 형이라 불렀다. 그리고 장난이 심한 날은 "삐쳐서" 몇시간 동안 나에게 말도 안걸었다.




 재환이에게 나쁜 감정은 알려주고 싶지 않았는데 애가 워낙에 빨리 배우는 건지 눈치가 빠른건지 내가 알려주지 않아도 곧잘 여러감정을 느껴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예를 들어 내가 일하러 갔을 때 저 혼자 장을 보러 가겠다고 호기롭게 돈을 챙겨 마트로 갔을 때 무슨 아줌마들이 저를 밀치고 심하게 새치기를 했다고 "짜증"을 내기도 했고, 몰래 집에 있던 젤리를 훔쳐먹은걸 (물론 나는 이 범인이 강다니엘인걸 알고 있었다) 가지고 놀릴 때 한껏 "억울해" 하기도 했다. 재환이가 많은 감정을 느끼는 것은 좋았지만 씁쓸하기도 했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자식을 보는 부모 마음일까, 싶다가도 어느새 내 옆에 붙어서 졸고 있는 재환이의 모습을 보는 내 얼굴이 그것과 다르지 않았나 싶어서 생각을 지웠다. 




 재환이는 다니엘과 웃음코드가 비슷했다. 말이 웃음코드지 그냥 둘다 웃음이 많았다. 이래도 컁컁 저래도 컁컁 웃는 모습을 보며 옹성우 개그 한번 해줄까 해서 보여주면 정색하며 성우형 노잼(노잼이라는 못된 말은 대체 어디에서 배운건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 옆에서 쪼개고 있는 강다니엘이 범인일 확률이 99.9퍼센트다. 왜냐면 내가 노잼일리가 없거든)이라 외치다 결국 못 참고 빵터져 큰 목소리로 웃고는 했다. 웃음이 많은 둘 때문에 가끔 소외될 때가 있는데, 그때는 친구를 뺏은 재환이가 아닌 다니엘에게 질투가 났다. 아마 재환이가 훨씬 더 예쁘게 웃고 있었기 때문일거다. 




 가을의 끝이 많이 찼다. 우리나라는 이제 사계절이 아니라 이계절이라고 해야한다. 나도 오랜만에 다니엘의 말에 동감. 우리는 옷을 꽁꽁 여몄다. 재환이는 집에서 자고 있었고 다니엘과 나는 아는 형의 일을 도와주고 오는 길이었다. 다니엘이 오랜만에 재화이 버리고 우리끼리 데이트나 하까 했고 난 당장에 중지손가락을 올렸다. 그러자 다니엘이 찡찡거렸다. 아- 커피 한잔 내랑 먹어도. 사실 재환이랑만 다니느라 다니엘과 둘만 있는건 오랜만인지라 결국 항상 가던 카페에 갔다. 카페 안은 따뜻했다. 우리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나는 카푸치노, 다니엘은 화이트 모카를 시켰다. 커피가 나오고 한 입 마시니 추웠던게 언제냐는 듯 따뜻함이 훅 하고 들어왔다. 니 이제 아메리카노 안먹네. 다니엘의 말에 나는 그냥 씩 웃었다. 그러게. 내가 언제부터 아메리카노가 아닌 다른 커피를 마셨을까. 나는 이제껏 아메리카노보다 더 맛있는게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딱히 선택지가 없기도 했고. 다니엘은 뜨거운지 후후 불다가 조심스럽게 화이트 모카를 한 입 마시고는 이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내랑 얘기 좀 하자. 무슨 얘기를 할건데 그렇게 진지한 표정을 지어, 무섭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약간 무서웠다. 다니엘의 그 표정이 마치 '재환이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니 알고 있었나. 뭐를. 재환이 팔에 있는 숫자. 그거 줄어들고 있던거. 나는 눈썹을 올렸다 내렸다. 니 알고 있었네. 다니엘의 표정이 구겨졌다. 워낙에 허허실실 웃고 다니는 애라 이런 표정을 지으면 무섭게 보였다. 


 "오늘 보니까 40이라 쓰여있더라. 이거 맞지."


 지구에 남은 날 수. 다니엘은 둔해보여도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아씨- 니 그거 알고도 모른 척 하고 있던거가. 다니엘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였다. 니는 김재환이 떠나도 아무렇지 않나, 니는 개-쉐끼다. 처음으로 김재화이- 말고 김재환 세글자 발음한 다니엘이 씩씩거렸다. 졸지에 개새끼가 된 나는 커피만 홀짝였다. 문디새끼, 말이라도 좀 해라. 글쎄. 나는 재환이가 지구를 떠나면 아무렇지도 않을까.




 우선은 모르는 척 하기로 했다. 다니엘은 걱정된다는 듯이 자꾸 뒤돌았지만 나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추우니까 빨리 집 가라. 오늘따라 발걸음이 느린 다니엘이 시선에서 사라지자 그제서야 나도 집으로 갈 수 있었다. 재환이는 저를 빼놓고 늦게 들어온게 서운했던지 입이 약간 튀어나와있었다. 그래도 그 모습이 귀여워 나는 씩 웃고는 재환이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러자 서운한 얼굴은 온데간데 없고 머리를 내 손에 맡기는 모습에 좀 더 힘을 주어 쓰다듬었다. 긴팔을 입은 재환이의 팔은 초록색 숫자가 보이지 않았다. 다니엘은 언제 숫자를 본거지. 쓰잘데기 없는거나 생각하니까 뭔가 속에서 꿈틀거리는게 느껴졌다. 그게 또 질투랑 모습이 비슷해서 자조적으로 웃었다. 재환이는 감정을 많이 알아갔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재환이의 옆에 있으면 가끔 누가 숨을 막는것처럼 숨이 찼다. 나는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기 때문에 감정을 알아가는 재환이의 기분을 알 수 있었다. 이건 지구 사람인 나도 모르는 감정이었기 때문에 정의할 수 없었다. 그저 아주 조금씩 재환이의 주변에서 천천히 숨을 고르면, 재환이가 살던 달의 나라를 닮은 냄새가 났다. 따뜻하고 달달한 향이었다. 




 겨울이 오자 우리는 옷을 몇겹이나 겹쳐 입었다. 재환이의 팔을 보려면 옷을 갈아입는 그 몇초를 노려야 했는데, 그럴 때마다 재환이는 "옹성우 변태"라며 놀려댔다. 나는 웃었지만 머릿속에는 온통 초록 숫자뿐이었다. 반짝이는 초록 숫자는 20을 나타내며 흐릿하게 빛을 냈다. 어느날 결국 참지 못한 나는 재환이를 불렀다. 재환이는 진지한 내 모습이 어색한 듯이 말이 없었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재환아.


 "이제 20일 남았니."


 재환이는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살짝 감았다 떴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그런데, 너는. 다니엘이 아무렇지도 않냐고 할 때는 정말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는데. 이번에도 숨이 턱 막히면서 속이 부글거렸다. 나는 이 감정을 알았다.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너는, 아무렇지도, 않아?"


 다니엘이 내게 물은 것을 똑같이 물었다. 



 지구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네, 흔적이, 남은, 사람들은


 나는.



 이건 분노였다. 동시에 슬픔이기도 했다. 재환이는 한번도 본적이 없는 감정이었다. 소리치고 싶은 말이 산더미인데 말이 나오지 않아서 눈물이 나왔다. 재환이는 아무말도 없었다. 어떻게 이럴수가 있니, 왜 말을 안했니, 나한테 미안하기는 하니, 너 그렇게 떠나는게 맞니. 하고 싶은 말이 머리속을 맴돌았다. 머리가 아팠다. 뉴스를 보던 어린이집에서도 나는 그렇게 머리가 아팠다. 웃음소리. 일이 많아서 늦을거라며 미안해하던 목소리. 형체를 알 수 없게 찌그러진 차. 어딘가에 떨어져있을 장난감 자동차. 엄마. 아빠. 나는. 




 ..변명이겠지만 말하려고 했어요. 재환이가 느릿느릿 말했다. 그런데 왜인지 형을 보면 입이 안떨어졌어요. 형이 알아채기 전에 먼저 말해야 했는데. 그런데 말을 하려고 하면 목 안이 매워서.. 그래서.. 재환이는 말을 끝내지 못했지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재환이에게 갔다. 재환이가 울고 있었다. 그때 내 옆자리 소년처럼 축 처진 눈꼬리에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트리면서. 미안해. 미안해, 형이. 울지 마라, 재환아. 형은 너한테 알려주고 싶지 않았어. 슬픔도 우는 법도 알려주고 싶지 않았어. 형이 잘못했어. 재환이는 제 눈에서 흐르는걸 닦아야 한다는 것도 몰랐다. 그저 내 품에 안겨있을 뿐이었다.




 그래, 나라고 괜찮을리 없었다. 나도 이런데 재환이라고 괜찮았을까. 우리가 아무렇지 않았을리가 없다. 나는 재환이를 내 품에 안고 한참이나 있었다. 재환이는 지도 눈물 콧물 범벅인 주제에 내 어깨를 도닥이며 나를 달랬다. 그 손이, 바알간 그 눈이 코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나는 또 울어버렸다. 아아, 나는 너에게 사랑을 배운다.




 우리는 평소와 같이 살기로 했다. 나중에 다니엘이 그 커다란 몸뚱아리에 있는 수분을 다 짜내겠다는듯이 울어서 재환이가 고생을 했다. 너무하다, 김재환. 재환이의 탓이 아닌걸 알면서도 눈을 흘기는 탓에 재환이만 죄지은 듯이 어색하게 웃었다. 미안해. 나는 재환이가 사과하는게 싫었다.




 앞의 숫자가 2에서 1이 되는건 생각보다 빨랐다. 우리는 이제 준비를 해야 했다. 나는 일도 그만두고 재환이를 데리고 돌아다녔다. 겨울은 춥고 바람은 매서웠지만 우리는 코랑 귀가 빨개지도록 여러곳을 다녔다. 나는 꽃이 가득한 예쁜 봄을 보여주지 못한게 너무 아쉽다고 했다. 재환이는 개구지게 웃으며 여기 이렇게 눈꽃이 많은걸, 그리고 내가 꽃인데? 했다. 그렇게 말하는 재환이는 웃기게도 꽃보다 예뻤다.




 숫자가 한자리가 바뀌자 우리는 오히려 집밖을 나가지 않았다. 킬킬거리며 매장을 뒤져 먹을 것들을 한가득 사오고는 집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우리 이러다 돼지 되는거 아니야? 괜찮아 형은 잘생겼잖아. 그렇긴 한데 좀 재수없어. 우리는 두번째 컵라면을 먹으며 킥킥댔다. 




 재환이가 떠나기 하루 전에는 다니엘이 왔다. 아무래도 마지막날은 옹성우 혼자만 있어야 할 것 같다고, 자기는 울 것 같다며 찾아온 다니엘을 보고 재환이는 섭섭한듯이 웃었다. 우리는 피곤한 것도 모르고 밤새 얘기했다. 마치 셋이 처음 본 그날같았다. 두명도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추억에 잠긴 얼굴을 했다. 다니엘과 내가 J0527이라며 그리운 이름을 놀리듯이 말하자 재환이가 장난스럽게 주먹을 들었다. 이제는 저도 재환이라는 이름이 익숙한 모양이었다. 




 다니엘을 보낸 아침은 신기하게도 먹구름이 가득했다. 우리가 처음 본 날처럼 곧 비가 올 모양이었다. 우리는 아무말이 없었다. 처음처럼 정적이 어색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재환이는 처음 제가 입고 있던, 푹 젖었던 옷을 다시 입었다. 그때의 모습이 되자 그제야 재환이가 떠난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떠나기 1시간 전인 11시였다.





 나는 고백을 하기로 했다. 비록 이루어지지 않는 소망이더라도 용기를 내기로 했다. 재환이를 잡은 손이 벌벌 떨려서 천하의 옹성우도 떨리는구나 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재환이의 초록색 눈을 마주보고 한글자 한글자 말했다. 





 재환아, 네가 모르는, 지구 사람들의 마지막 감정이 있어.

나는 이 감정을 알아버렸지만 너는 몰랐으면 했어.

네가 알아버리면, 정말 다시는 너를 잊지 못할 것 같아서.

그래도, 결국 이렇게 말해버릴걸. 내 욕심이라 미안.



 재환아, 내가 너를,




 내가, 너를,





 너를,








 재환이는 나를 기다려주었다. 시간이 30분 남았다. 이제 얘기해야 했다. 나는 숨을 골랐다. 역시나 재환이의 따뜻하고 달콤한 냄새가 나를 진정시켰다. 나는 이제 이 냄새가 재환이의 고향의 향인지, 재환이의 향인지 헷갈렸다.




 사랑해.




 세 글자는 지구의 중력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서 달의 나라에 사는 외계인에게는 그 무게가 많이 무거웠을텐데도 재환이는 웃었다. 웃어서 다행이다. 나는 안도했다. 재환이가 이해한 것 같았다. 이제 재환이는 지구에 있는 모든 감정을 알게됐다. 이제 떠나는 일만 남았다. 20분 뒤에 재환이는 떠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재환이가 입을 열었다.





 성우형.




 어어. 재환아. 이제 시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어. 재환이는 상관없다는 듯이 말을 이어갔다.




 나는요.




 초조하게 입술을 물었다. 남은 시간은 5분도 채 되지 않았다. 




 형이 알기 훠-월씬 전부터,




 나는 이상하게 숨이 가빴다. 숨을 어떻게 들이쉬고 내쉬는거더라. 호흡이 엉망진창이었다. 그건 재환이도 마찬가지였다.




 그 감정을 알고 있었어요.




 형을 만난 그날, 나는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배웠어요.









 재환이는 나보다 똑똑했다. 그래서 배우는것도 빨랐다. 나는 지구 사람이면서도 결국 마지막까지 재환이를 이기지 못했다. 재환이가 웃었다. 그래서 나도 웃었다. 재환이가 내 품에 안겼는데 재환이의 왼쪽 어깨가 젖어들어갔다. 상관은 없었다. 내 가슴팍도 젖어갔다.




 이제는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재환이를 눈에 담고 또 담았다. 재환이의 눈 안에 존재하는 달의 나라도 오래오래 담았다. 가끔 재환이를 찾아가려면 어떻게 생긴 곳인지 잘 알아야 할 것 같았다. 재환이도 나를 한참이나 바라봤다. 그러더니 입을 열었다.




 재환이는 처음 들어보는 언어로 노래를 했다. 재환이가 이렇게 노래를 잘하는줄 알았으면 노래방이라도 한번 갈껄 그랬다. 처음 듣는 노래라는게 너무 슬퍼서 울었다. 재환이는 울었지만 노래를 해야 했으므로 계속 침을 삼켰다. 재환이의 팔이 번쩍번쩍 빛나면서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10.

형, 나는요.





9.

가장 처음 만난 사람이 성우 형이라 행복했어요.





8.

형은 좋은 사람이고 형의 친구인 다니엘 형도 참 좋은 사람이에요.





7.

처음 만난 지구는 따뜻하고 달콤했어요.





6.

제 고향보다 훨씬 더요.





5.

형. 저는요 달의 나라에서 계에속 형을 바라볼거예요.





4. 

그니까 형도, 달을 보며 저를 생각해주세요.





3.

언제나 항상 형 곁에 있을테니까요.





2.

형.





1.

사랑해요.





0. 나도 사랑해 재환아. 사랑해, J0527.





땡. 










 마지막 말을 듣고 사라지는 재환이의 웃는 모습이 무척이나 익숙했다. 이제야 생각났다. 재환이는 달을 닮았다. 우는 법도 몰랐던 그날의 달을. 그랬구나. 재환이는 계속 나를 바라보고 있었구나. 그렇게 먼저 나를 사랑하고 있었구나. 나는 더이상 울지 않았다. 울지 않아서 웃었다. 다니엘은 웃는 내 모습을 보고 꺼이꺼이 울어버렸다.







 재환아. 마지막을 보는 내 모습은 어땠을까. 달을 닮은 사람아. 내 J0527. 나는 너에게 다정했던가. 다정하게 안녕을 고했던가. 네가 가져가는 기억 속의 내 모습은 나보다 훨씬 멋있고 다정하고 착했으면 좋겠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 안녕 하고 인사하지 않았지. 생각해보니까 이상했어. 나는 인사도 통성명도 없이 너를 내 집으로 데리고 왔고 우리는 그 후로도 한번도 인사하지 않았지.




마지막인 인사가 이별일줄은 몰랐지만 그것도 너와 처음 하는거라 생각하니까 많이 떨리고 그런다. 형이 생각보다 더 널 사랑하나봐.




이제는 보지 못하겠지만 우리는 알잖아. 넌 항상 내 옆에 있고 나는 항상 너를 본다. 앞으로도 그럴거고 너도 그럴걸 알고 있어. 그러니까 우리 이제는 인사를 해야 할 시간이야.







 우리는 아주 오래도록 안녕히, 안녕히 인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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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새벽에 도착해서 쓰기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새벽 5시가 될줄 누가 알았을까요....ㅎㅎㅎ.....

덕분에 분량 조절 대실패에(만이천자!!) 옹짼전력 대지각입니다.ㅜㅜㅜ 죄송해요ㅜㅜ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댓글 남겨주신것도 너무 감사해요!! 

항상 힘이 되고 너무 행복합니다.ㅜ♡ㅜ





그건 아마도 사랑이겠지 @saml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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